등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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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明史) | |||||||||||||||||||||||||||||||||||||||||||||||||||||||||||||||||||||||||||||||||||||||||||||||||||||||||||||||||||||||||||||||||||||||||||||||||||||||||||||||||||||||||||||||||||||||||||||||||||||||||||||||||||||||||||||||||||||||||||||||||||||||||||||||||||||||||||||||||||||||||||||||||||||||||||||||||||||||||||||||||||||||||||||||||||||||||||||||||||||||||||||||||||||||||||||||||||||||||||||||||||||||||||||||||||||||||||||||||||||||||||||||||||||||||||||||||||||||||||||||||||||||||||||||||||||||||||||||||||||||||||||||||||||||||||||||||||||||||||||||||||||||||||||||||||||||||||||||||||||||||||||||||||||||||||||||||||||||||||||||||||||||||||||||||||||||||||||||||||||||||||||||||||||||||||||||||||||||||||||||||||||||||||||||||||||||||||||||||||||||||||||||||||||||||||||||||||||||||||||||||||||||||||||||||||||||||||||||||||||||||||||||||||||||||||||||||||||||||||||||||||||||||||||||||||||||||||||||||||||||||||||||||||||||||||||||||||||||||||||||||||||||||||||||||||||||||||||||||||||||
※ 25권 ~ 99권은 志에 해당. 100권 ~ 112권은 表에 해당. 명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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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자룡 鄧子龍 | |
이름 | 등자룡(鄧子龍) |
자 | 무교(武橋) |
호 | 대천(大千), 호관도인(虎冠道人) |
출생 | 1531년 |
대명 강서성 남창부 풍성현 | |
사망 | 1598년 12월 16일 (향년 67세) |
조선 경상도 남해현 노량해협 |
1. 개요[편집]
명나라 제13대 신종 만력제때의 무신으로 정유재란에 참전했다. 자는 무교(武橋), 호는 대천(大千), 별호는 호관도인(虎冠道人)이었다.
2. 생애[편집]
1531년 강서성 남창 풍성(豊城) 낙성교(落星橋) 무계(茂溪) 등촌(鄧村)[1]
현 중화인민공화국 장시성 이춘시(宜春市) 펑청시(豊城市) 두스진(杜市鎭) 덩지아촌(鄧家村).
본래 용모가 우람했으며, 몸이 날래고 민첩했다. 1558년(가정 37년) 무과에 급제했고, 이후 강서성 청강현(淸江縣)[2]
현 중화인민공화국 장시성 이춘시 장수시(樟樹市) 장수진(樟樹鎭).
1573년에는 장원훈(張元勛)의 휘하에서 뇌원작(賴元爵)을 토벌했다. 또한 장원훈의 휘하에서 진금앵(陳金鶯)과 나소청(羅紹淸)을 토벌하고, 도적의 우두머리인 황고휘(黃高暉)를 공격해 깊은 산 속에서 생포했으며, 동고석(銅鼓石) 지역에 보임되어 수비하다가 도지휘첨사, 절강도사가 되었다.
삭탈관직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지만 죄가 가볍다는 이유로 참정이 되어 마양의 묘족인 김도려를 토벌했으며, 1583년에 미얀마가 운남을 공격하자 영창에 파견되었고, 목방부 경마족의 한간 악봉이 미얀마의 망응리와 내통하여 노략질을 일삼자 이들을 격파했다. 그 과정에서 등병을 이끌던 유정과 사이가 나빠져 서로 싸웠지만 두 장수 모두 공이 있어 처벌받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공적을 인정받아 등자룡은 부총병이 되었다. 유정이 파면되어 유천봉으로 교체되자 자신이 이끄는 요병만 잘 대하고 등병을 학대하면서 토목공사를 시켰는데, 등병이 이를 견디지 못해 흩어졌고 요병은 점차 교만해져 약탈하자 죄를 문책받아 하리로 면직되었다.
1590년 맹양에서 사개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할 것을 요청했다. 명나라군이 도착하기 전에 오정이 목창조와 함께 사개를 물리쳤으며, 정개의 10개 군영에서 보응춘과 패생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하는 일에 참전했다. 1592년에는 맹양으로 진격해 만병의 장막을 공격하여 사기 등을 패배시켰다.
1598년에 조선으로 출병해 진린 휘하에서 수군으로 종군했다. 최후의 결전인 노량 해전에 참전했을 때 일본군이 판옥선에 올라타자 등자룡은 배의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런데 KBS 1TV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등자룡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장면이 안 나온다. 심지어 10년 후인 <징비록>에서도 안 나왔으며 <임진왜란 1592>이가 방영하고 나서야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는 장면이 나왔다.
당현종때 일어난 천보전쟁 시기 대패했던 당나라군의 참상[3]
간신 양국충이 보낸 이복 산하의 군대가 이복을 포함해 모두 몰살당하자, 남조국이 비록 적군이긴 하지만 이를 불쌍하게 여겨 당나라군의 시신들을 모아 만인총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목은 <제하관만인총>
3. 대중매체에서[편집]
- 1962년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김호연이 연기했다.
- 1971년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임해림이 연기했다.
- 1978년 영화 <난중일기>에서는 배우 장혁이 연기했다.
- 2005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함석훈이 연기했는데, 상술했듯이 죽어야 할 노량 해전에서 살아남았다.
3.1. <노량 죽음의 바다>[편집]
2023년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배우 허준호가 연기한다.
4. 기타[편집]
등자룡은 위진남북조시대의 인물인 등애의 후손이며,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등자룡의 후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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