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 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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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미국의 정치인.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대통령 아래에서 8년간 국무 장관을 역임했다.
전임자인 딘 애치슨과 존 포스터 덜레스, 후임자인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 등과 함께, 냉전 시대 미국의 외교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조지아주 체로키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1925년 보이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애틀란타의 변호사 사무소에서 일하다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데이비드슨 대학교에 진학하여 1931년 정치학 전공으로 졸업하고,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옥스퍼드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로스쿨로 진학하여 1940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캘리포니아 주의 밀스 칼리지의 정치학 교수가 되었고 1938년 학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장교로 종군하였고, 1945년 8월 전략정책단 정책과 과장으로 있을 때, 일본군의 항복 조건들이 담긴 항복문서 '일반명령 제1호' 가운데 한반도와 극동 지역에 관계된 부분의 초안 작성 임무를 맡았다. 1946년 국무부에 들어가 마셜 플랜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설립 업무를 담당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차관보를 맡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극동국 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W. Bradley Connors)로부터 전쟁 발발 사실을 보고받고,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UP통신사의 서울주재 특파원 잭 제임스(Jack James)가 타전한 기사(전쟁 발발)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52년부터 1960년까지 록펠러 재단의 이사장을 지냈다.
(소련의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과 함께)
1961년 케네디 정권이 들어서자, 54대 국무 장관에 취임하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는 외교 수장임에도, 쿠바에 대한 공습 등의 군사적 조치의 우선 동원을 지지했다.[1] 후임인 린든 존슨 대통령의 취임 후에도 장관직을 유지했고, 1960년대 베트남 전쟁 정책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장관직을 떠난 후, 1970년 조지아 대학교의 국제법 교수가 되었다.
1994년 12월 20일 조지아 주의 아테네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한국과의 악연[편집]
한국 입장에서는 역사상으로 악연이 많은 인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당시 한반도를 분할하는 38선의 아이디어를 직접 제공한 장본인이었고,[2][3] 1950년대 초 국무부 차관보 시절에는 독도 문제에 있어서 일본측에 동조하며 러스크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1968년에는 한국이 요구하는 1.21 청와대 습격미수 보복은 무시한채,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피랍된 미군들의 석방을 위한 북한과의 협상에만 골몰하여 미국의 방위공약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단초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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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 [석사] [박사] [1] 아이러니하게도 국방부의 로버트 맥나마라 장관은 공습보다는 온건한, 봉쇄 우선론을 주장했고, 다행히도(!) 이 주장이 관철되었다. 어째 뒤바뀐 느낌[2] 당시 러스크와 함께 38선 설정의 아이디어를 냈던 인물 중에는 이후 1960년대에 주한미군 사령관이 된 찰스 본스틸도 있었다.[3] 미국의 당초 계획은 한반도 분할선이긴 한데 더 북쪽에 있는, 대략 통일신라-발해 경계와 비슷한 39선을 계획하고 있었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38선으로 내려왔다. 자세한 내용은 삼팔선 문서 참조. 39선으로 분할했더라면 황해도와 강원도 북부, 항구도시 진남포를 포함한 평안남도 남쪽 16%는 남한(대한민국)이 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