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몬 노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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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on Novarro

(1899~1968)

1. 개요
2. 위상
3. 생애
3.1. 성장기
3.2. 무성영화
3.3. 유성영화
3.4. 최후
4. 여담



1. 개요[편집]


멕시코 태생의 미국 배우.


2. 위상[편집]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적인 흥행배우 중 하나로 활약했으며, 선이 곱고 중성적인 외모가 특징인 미남이었다. 덕분에 당시 할리우드에서 유행하던 스타 시스템이었던, 이른바 "라틴 연인(Latin Lover)"이라 불리는 격정적인 인기 멜로 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이탈리아 출신인 루돌프 발렌티노가 대표적인 라틴 연인이었다.

당대에는 주로 1925년작 《벤허》에서 주인공 벤허를 연기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 초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로, 평생을 가톨릭 교도로 살았으나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으로 인해 고통 받았으며, 공산주의자였다는 의혹도 존재한다.


3. 생애[편집]



3.1. 성장기[편집]


본명은 호세 라몬 길 사마니에고(José Ramón Gil Samaniego).

1899년, 라몬 노바로는 멕시코의 두랑고에서 정치인과 의사들을 배출한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마리아노 사마니에고는 부유한 치과의사였고, 어머니인 레오노르 페레즈 가빌란도 유복한 지주의 딸이었다.

1913년,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자 라몬 노바로는 가족들과 함께 멕시코 시티로 이사했으나 경제적으로 궁핍해지자 다시 두랑고로 돌아갔고, 마지막에는 미국의 로스 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이렇게 라몬 노바로의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3.2. 무성영화[편집]


1917년 영화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나 단역에 그쳤기 때문에 식당에서 일하거나 카페에서 가수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나 MGM에서 루돌프 발렌티노의 대항마로 발렌티노와 흡사하게 선이 고운 외모를 지녔던 노바로를 택하며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때까지 노바로는 사마니에고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영화사 측의 권유를 받아 예명으로 노바로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노바로는 1923년에 《스카라무슈》에 출연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1925년에는 《벤허》에서 주연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때의 활약상으로 말미암아 노바로는 할리우드의 대스타로 거듭났다. 1926년에 발렌티노가 사망한 후에는 라틴계 배우들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할 정도였다.


3.3. 유성영화[편집]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접어들자 유성영화에도 출연하였는데, 특히 1931년에 그레타 가르보와 함께 출연한 《마타 하리》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노바로는 무성영화 시절만큼의 인기는 얻지 못했다.1935년에 MGM과의 계약이 만료되자 더 이상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리퍼블릭 픽쳐스의 영화들에 종종 출연했으며, 멕시코와 프랑스 영화에도 출연했다. 결국 1940년대 이후에는 점차 조연이나 단역배우로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유복한 편이었다. 전성기 시절인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편당 10만 달러 이상의 출연료를 받았는데, 이때 벌어들인 돈을 부동산에 투자해 제법 수익을 얻었다. 그 수익 덕분에 영화배우로서 거의 잊혀진 말년까지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3.4. 최후[편집]


최후는 참혹했다. 동성애 성향을 지녔던 노바로는 업자에게 의뢰하여 로스 엔젤레스의 로럴캐니언에 위치한 자택에 남창을 부르곤 했다. 형제지간인 22세의 폴 퍼거슨과 17세의 톰 퍼거슨은 이를 이용해서 그의 집에 침입해 강도질을 할 계획을 꾸몄다. 이들은 노바로의 자택에 큰 돈이 숨겨져 있다고 짐작하고, 이전에 노바로의 집에 찾아갔던 남창과 업자들을 통해 자택 전화번호를 알아낸 후 노바로에게 전화를 걸어 매춘을 제안했다.

노바로가 별다른 의심도 하지 않고 이들을 집에 들이자, 퍼거슨 형제는 작전대로 행동했다. 한 사람이 그를 상대하며 시간을 버는 동안 또 한 사람은 서랍을 뒤지며 돈을 찾았다. 그러나 끝내 돈을 찾지 못하자 퍼거슨 형제는 돌변하여 노바로를 발가벗긴 후 묶어 놓고 돈을 숨긴 곳을 불라며 고문했다. 그러나 노바로는 집에 돈을 두지 않았기에 이들의 강도질은 허사가 되었다. 분노한 퍼거슨 형제는 노바로를 심하게 구타한 후 노바로의 목욕 가운 주머니에서 찾아낸 20달러를 훔쳐 달아났다.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진 노바로는 자신의 피에 질식해서 사망하고 말았다. 노바로의 시신은 사망 다음날인 10월 31일에 발견되었다.

이후 퍼거슨 형제는 모두 체포되어 살인 혐의에 대한 유죄를 선고 받았다. 이 재판 과정에서 주변인들만이 알고 있었던 노바로의 성적 취향이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되는 바람에 노바로는 죽어서도 큰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들은 복역 중 1970년대 중후반 가석방 되었으나 이후 새로운 범죄를 저질러 다시 장기 복역을 했다. 동생인 톰은 2005년에 자살했고, 형인 폴은 노바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남긴 후 2012년에 자연사했다.

노바로의 시신은 가족과 친족들만이 참석한 장례식 이후 로스 엔젤레스의 캘버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으며, 영화 산업에 기여를 한 공로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6350번에 별을 남겼다.


4. 여담[편집]


  • 동성애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나, 생전에는 주변의 지인들만이 이를 알고 있었으며 대중은 알지 못했다. 라틴계로 가톨릭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에 평생 동안 정신적 고통을 받았고 말년에는 알코올에 의존했다. 노바로의 성향을 알고 있었던 영화 제작자들이 위장 결혼을 요구했으나, 노바로는 이를 거절했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남았다.

  • 공산주의자라는 의혹도 받았다. 몇몇 멕시코계 배우들과 함께 소련 영화계의 거장인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감독한 1932년작 《멕시코 만세》라는 영화의 상영회에 참석했다.[1] 일설에는 상영회가 끝난 후 캘리포니아에서 공산주의를 홍보했다고도 하지만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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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세르게이가 직접 멕시코에 와서 감독했으며, 제작비는 미국의 작가인 업튼 싱클레어가 여러 투자자들을 끌어 모아 조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