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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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파일:1204년의 강역.png

1204년 강역
1204~1261
성립 이전
환도 이후
동로마 제국
(앙겔로스 왕조)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위치
아나톨리아 서북부
수도
니케아(명목)
님페온(실질)[1]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주요 군주
테오도로스 1세
요안니스 3세
미하일 8세
언어
중세 그리스어
민족
로마인(그리스인)
종교
정교회
주요 사건
1204년 건국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언어별 명칭
중세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그리스어
Αυτοκρατορία της Νίκαιας
영어
Empire of Nicaea

1. 개요
2. 역사
2.1. 니케아 제국 성립의 배경
2.1.2. 앙겔로스 왕조와 제국의 멸망
2.1.3. 망명 정권의 성립
2.2. 니케아의 위기
2.3. 니케아 제국의 부흥
2.4.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과 환도



1. 개요[편집]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Αυτοκρατορία της Νίκαιας[2]

1204년 동로마 제국4차 십자군에게 일시적으로 멸망당한 후 비티니아니케아를 중심으로 하여 세워진 지방정권.[3] 정식 명칭은 콘스탄티노플 시절과 똑같은 로마 제국(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니카이아 제국이라고도 한다.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타 제국과 비슷한 시기에 존재했다. 후술하듯 이 나라가 결국 라틴 제국을 위시한 서방인의 지배[5]를 끝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여 환도에 성공하므로, 분립기의 지방정권들 중에서도 정통으로 평가받는다.[6] 비록 콘스탄티노플을 잃었으나 뛰어난 명군인 테오도로스 1세요안니스 3세가 등장해서 제국을 다시금 되살렸다.


2. 역사[편집]



2.1. 니케아 제국 성립의 배경[편집]



2.1.1. 콤니노스 왕조의 몰락[편집]


1180년 마누일 1세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알렉시오스 2세가 단독 황제가 되었으나, 황족들의 정쟁으로 정계가 혼란스러워지자 그의 당숙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7]가 알렉시오스 2세의 어머니인 태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 섭정단을 제거하고 선임 황제가 되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민심에 편승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제국을 통치했고, 황제의 무자비한 서방인 학살과, 적대적인 수도 관료 및 지방에 대한 숙청으로 인해 제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마누일 1세황금기를 기억하던 사람들은 안드로니코스가 알렉시오스 2세섭정 자격으로 보호할 줄 알았으나 그를 살해하자 반란을 일으켰고, 황제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자치능력을 가진 지방은 점차 변방의 군관구장과 유력자들의 주도로 제국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구기에르무 2세가 제국을 침공하자 안드로니코스의 무능함이 드러나게 되고,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마저 함락당하자 폭정에 질린 수도 시민들은 민란을 일으켜 안드로니코스 1세를 끌어내리고 이사키오스 2세를 즉위시켰다.


2.1.2. 앙겔로스 왕조와 제국의 멸망[편집]


이사키오스 2세는 재위 초 시칠리아를 격퇴하는데에는 성공하였고, 외교관계를 복구하려 노력하였으나 본디 황제감이 아니었으므로 거기까지였다. 우유부단한데다 게을렀던 이사키오스의 시대에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사회전반에 대한 통제가 약해져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무거운 세금을 물리는 세리가 판쳤으며 상인 계급이 급성장하여 제국은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무거운 세금에 괴로워하던 불가리아의 유력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불가리아 제국이 부활, 제국으로부터 독립해나갔다. 이사키오스 황제는 이를 진압하려하였으나 연전연패하여 지지를 잃어버렸고 결국 형인 알렉시오스 3세에게 찬탈당하게 된다.

그나마 알렉시오스 3세가 즉위하였고 그는 제국을 수습할 능력이 충분했으나 주변 상황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불가리아 제국과의 전쟁으로 군대가 약화된 상황에 지방이 이탈하여 세수가 줄고 재정이 악화되어 해군 역시 붕괴되었다. 관절병을 앓던 병약한 황제는 불가리아 제국을 인정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공물 협박까지 받아들이는 등 굴욕을 감내해가며 내부 상황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조카인 알렉시오스 4세를 풀어주는 실책을 저질러 4차 십자군이라는 기습을 당해 근 900년 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당하게 된다.

알렉시오스 3세는 수도에서 군대와 자금을 가지고 도망쳐나와 반격을 준비하였으나, 수도를 잃은 황제로선 반독립상태이던 지방과 야심가들이 결합하자 그마저도 쉽지 않게 되었다. 한편 외세의 힘으로 제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4세에 실망한 수도시민들은 알렉시오스 5세를 옹립하여 십자군에 맞섰으나 알렉시오스 5세마저 십자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약탈당해 몰락하였다. 이후 도망친 두 알렉시오스 황제들이 차례로 십자군에게 붙잡히자 구심점이 사라진 제국은 멸망하였다.


2.1.3. 망명 정권의 성립[편집]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십자군은 자신들이 제위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로마니아 제국'(라틴 제국)을 세워 기존 동로마의 신하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지만, 씨도 먹힐 리가 없었다.

기존 동로마의 주류 세력이었던 그리스계 제국인들은 주로 큰 3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제위를 빼앗긴 콤니노스 가문이 쫓겨간 흑해 동남부 연안의 트라페준타 제국, 콤니노스와 두카스 가문의 피를 이었다고 주장하는[8] 앙겔로스 가문의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그리고 구 황실에 강력한 지지를 보냈던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흥기한 라스카리스 가문의 니케아 제국이었다.


2.2. 니케아의 위기[편집]


하지만 니케아 제국의 초기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테오도로스 1세니케아에서 제국을 재건할 당시 아나톨리아는 다수의 군벌이 할거해 있었는데, 테오도로스 1세는 1205년까지 군벌 세력을 어느 정도 규합하는데 성공했고, 1208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좌를 니케아로 이전했다.

그러나 라틴 제국의 앙리는 아직 취약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니케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앙리는 니케아를 멸망시키기 위해 소아시아를 침공해왔고, 테오도로스가 미리 동맹을 맺어놓은 불가리아의 차르 칼로얀의 개입이 아니였다면 니케아 제국은 멸망할뻔 했다.

또한 앙리의 소아시아 침공과 비슷한 시기에 룸 술탄국이 니케아 제국을 공격하여 프리기아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테오도로스 1세는 룸과의 국력 차이를 알고 있었기에 용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1211년 라틴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룸 술탄국은 니케아 제국을 분할 점령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고, 룸군이 재차 니케아 제국을 침략해왔다. 1211년 안티오키아[9] 전투에서 압도적인 우세의 룸군을 맞아 니케아는 패배할 위기에 몰렸으나 테오도로스는 술탄 케이휘스레브 1세와의 일기토에서 승리를 거둬 그를 죽이는 기지를 발휘해 룸 술탄국의 군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테오도로스는 겨우 겨우 아나톨리아 영토를 지켜냈다. 하지만 니케아 제국은 이 전투에서의 피해로 병력 부족에 시달렸다.

한편, 안티오키아 전투가 끝난지 얼마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불가리아 문제를 마무리한 앙리는 다시 소아시아로 진격해왔다. 테오도로스는 당시 니케아 제국이 동원 가능한 최대의 병력이였던 2000여명 가량의 병력을 동원하여 리칸도스 강에서 매복 작전을 펼쳤지만, 앙리 1세는 이를 간파했다. 곧이어 벌어진 리칸도스 강 전투에서 니케아군은 대패했고 앙리는 님페온까지 진격했다. 니케아 최대의 위기였다. 그러나 님페온까지 진격하는 동안 니케아군의 게릴라전으로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당한 앙리는 라틴 제국의 국력만으로는 니케아 제국을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1214년 테오도로스와 앙리는 님페온에서 비티니아와 미시아를 라틴 제국에게 넘겨주는 내용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2.3. 니케아 제국의 부흥[편집]


님페온 조약으로 라틴 제국과의 문제를 마무리 지으면서 니케아의 위기가 끝난 후 테오도로스 1세는 룸의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한 카이카우스 1세와 평화조약을 맺어 동쪽 국경을 안정화시켰다. 이윽고 테오도로스는 앙리가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정신없는 틈을 타 앙리의 소아시아 원정에 협조한 트라페준타 제국의 다비드 콤니노스가 점거한 파플라고니아로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와 동시에 테오도로스와 야합한 카이카우스 1세 역시 시노피를 노리고 트라페준타를 공격하였고, 트라페준타 제국은 테오도로스 및 그와 야합한 카이카우스의 공격에 시노피 서쪽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폰토스 지방의 소국으로 전락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경쟁에서 밀려났다. 이후 니케아 제국은 평화를 유지하였고, 이 기간 동안 테오도로스 1세는 간수한 소아시아를 재조직하는데 힘썼다.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상비군은 8000여명까지 늘어났다.

1221년 테오도로스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사위인 바타치스 가문의 요안니스 3세가 즉위하였고, 수도를 님페온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니케아 제국의 부흥은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2.3.1. 라틴 제국의 쇠퇴[편집]


1216년 앙리가 사망하자 라틴 제국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라틴 제국이 쇠퇴하자 불가리아 제2제국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은 라틴 제국의 영토를 노리고 맹렬한 공세를 가했다.

1221년 테오도로스가 사망하고 사위인 요안니스가 황제로 즉위한 것에 대해 불만은 품은 테오도로스의 동생들인 이사키오스와 알렉시오스는 요안니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요안니스의 니케아군은 이사키오스와 알렉시오스의 반란군과, 이들을 지원해 니케아에 개입한 라틴 제국군과 1224년 피마니논(Ποιμάνινον)에서 격돌했다. 하지만 이때의 니케아군은 예전 안티오키아와 리칸도스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던 약체 니케아군이 아니었고 니케아는 대승을 거두었다. 곧바로 요안니스는 라틴 제국의 아시아 영토를 휩쓸었고 라틴 제국은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칼케돈 일대를 제외한 모든 아시아 영토를 상실했다. 이듬해해인 1225년에 니케아는 라틴인의 지배에 불만이 극에 달한 트라키아 일대의 도시들이 대거 니케아에 귀부해오면서 아드리아노플까지 점령하여 소아시아로 물러난지 20여 년 만에 다시 유럽 땅을 밟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니케아한테 대패를 당해 쇠퇴가 가속화된 라틴 제국은 서쪽에서 진격해오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테오도로스 두카스에게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겼고 1224년 테오도로스 두카스는 자신이 점령한 테살로니키에서 황제를 칭했다.[10] 이로써 동로마 제국이 있던 자리에는 니케아 제국을 비롯해 라틴 제국, 불가리아 제2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그리고 새로 황제를 칭한 테오도로스 두카스의 테살로니카 제국까지 5개의 제국이 들어섰다.

2.3.2. 제1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편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동쪽으로 진격해오는 테살로니카 제국과, 마찬가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과 제국 재건을 목표로 트라키아를 점거하던 니케아 제국의 충돌은 필연적이었고 이윽고 둘은 트라키아에서 충돌하였다. 비록 니케아가 정상궤도에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당시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테오도로스를 저지할 만 한 국력은 없었다. 테오도로스는 니케아가 차지한 아드리아노플을 다시 함락시켰고 트라키아 대부분을 점령하여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눈앞에 두었다.

하지만 테오도로스가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불가리아의 뒤통수를 친 것에 분노한 불가리아 제2제국이반 아센 2세가 테오도로스를 가로막았고, 두 세력은 1230년 불가리아의 클로코트니차 마을에서 충돌하였다.(클로코트니차 전투) 이 전투에서 테살로니카 제국군은 불가리아군에게 완패를 당했고 테오도로스 두카스 역시 포로가 되어 두 눈을 잃었다. 테오도로스가 야심차게 세운 테살로니카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허무하게 붕괴되었고, 불가리아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장악했다.

한편 트라키아를 상실한 니케아 제국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테살로니카 왕국, 불가리아 제2제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소아시아 문제에 집중하였다. 당시 많은 튀르크 부족들이 룸 술탄국의 통제를 벗어나 서쪽으로 이주하여 니케아 제국령인 메안드로스 강에 슬금슬금 알박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는 니케아 제국의 골칫거리였다. 요안니스 3세는 라오디키아까지 진격하여 튀르크 부족들을 쫓아냈고, 튀르크족의 서진을 막기 위해 메안드로스 강 상류 일대에 수많은 요새들을 설치하였다. 1229년 에게해 일대에서 라틴인들의 통치에 반대하는 그리스인들의 대봉기가 일어나자, 에게 해 일대는 큰 혼란에 빠졌고, 요안니스 3세는 이를 틈타 사모스로도스 등 동부 에게해 제도를 수복하였다.

1235년,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일대만 간수하며 산소호흡기 신세였던 라틴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였다. 불가리아와 니케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은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실패하였지만, 이 전쟁으로 니케아 제국은 남부 트라키아를 확보하여 잃어버린 유럽 땅에 다시 발을 들이는데 성공하였다.


2.3.3. 마지막 경쟁자의 몰락[편집]


라틴 제국은 산소호흡기 신세로 몰락하고 트라페준타와 이피로스는 탈락하면서 이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경쟁자는 불가리아만이 남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대부분을 차지한 불가리아와 아나톨리아의 니케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 두고 대치를 이어가는 가운데 니케아에게 행운이 찾아오는데 불가리아를 지탱하던 명군 이반 아센 2세가 1241년 승하한데 이어 이듬해에는 유럽으로 원정온 바투몽골 제국군이 러시아와 폴란드, 헝가리를 초토화시킨 뒤 1242년 불가리아를 침공한 것이다. 불가리아는 가까스로 몽골군을 격퇴라 쓰고 몽골이 본국 사정으로 후퇴[11]했지만 국토 중심부인 다뉴브강 일대가 초토화되어 몽골의 조공국으로 들어가야 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라틴 제국 역시 불가리아와 도매금으로 묶여 몽골군에게 같이 깨졌다. 이듬해인 1243년에는 동쪽에서 니케아를 견제해야할 룸 술탄국 역시 몽골 제국에 의해 박살나는 행운까지 겹쳤다. 룸 술탄국이 몽골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전해받은 요안니스 3세는 몽골군이 니케아까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으나 기적적으로 몽골군은 룸 술탄국만 박살낸 채 니케아에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고 돌아갔으며 이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도전은 니케아 제국만 가능해졌다.

그러나 요안니스 3세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지 않고, 몽골군으로 인해 주변 경쟁자들이 몰락한 틈을 타 세력 확장에 들어갔다. 1242년 니케아는 불가리아령 마케도니아를 공격하기 시작해 1246년까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테살로니키까지 점령하였다. 니케아의 전성기를 연 요안니스 3세는 영토 확장 외에도 학문과 문예의 부흥에도 힘썼다.

한편, 이피로스의 미하일 2세는 니케아에 맞서 니케아령 마케도니아를 침공하였다. 이에 요안니스 3세는 1252년 이피로스 원정을 감행하여 이피로스군을 완전히 격퇴하였고 알바니아와 북부 그리스를 병합하였다. 이로서 제국 재건을 위한 경쟁자들이 모두 몰락한 가운데 요안니스 3세는 마지막 목표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 준비에 들어갔으나 라틴 제국에게는 다행히도 1254년 요안니스 3세가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2.3.4. 테오도로스 2세의 치세[편집]


1254년 요안니스 3세가 사망하고 즉위한 테오도로스 2세는 귀족들을 불신하고 배척하였고, 니케아 제국은 큰 정치적 불안정에 빠졌다. 그것과는 별개로 테오도로스 2세는 대 불가리아 전선에서 원정을 여러 번 성공시켜 트라키아를 완전히 니케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런데 1256년, 서쪽에서 큰 문제가 일어났다. 테오도로스 2세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미하일 2세와의 결혼 동맹 추진중에 영토를 지참금으로 달라고 했는데 이 행동이 이피로스, 세르비아, 알바니아인들의 큰 분노를 일으켰고 이들이 반 니케아 연합을 구성해버린 것이다. 반 니케아 연합군은 순식간에 니케아령 마케도니아를 병탄하기 시작했다.

이에 테오도로스 2세는 당시 관계가 매우 나빴던 제국군 총사령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호출했고, 500명의 군대를 주어 반 니케아 연합군을 막게했다. 당연히 꼴랑 500의 병력으로 마케도니아를 빠르게 병탄하며 기세를 탄 반 니케아 연합군을 격퇴하기는 불가능했고, 이피로스군이 테살로니카 앞까지 진격해오자 테오도로스 2세는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투옥시켰다(...). 이러한 불공정한 일은 주요 관리들과 귀족 가문들이 라스카리스 왕조의 편을 떠나게 했다.


2.3.5. 펠라고니아 전투[편집]


1258년 테오도로스 2세가 갑작스럽게 병사하자, 테오도로스 2세의 아들인 요안니스 4세가 8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이에 귀족들은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테오도로스 2세가 지명한 섭정단들을 살해했고,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석방시켰다. 귀족들은 물론 시민들과 군대, 교회도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적극 지지하였고,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곧 공동황제가 되어 미하일 8세로 즉위하였다.

이렇게 니케아가 내분에 빠져있던 동안 반 니케아 세력은 시칠리아 왕국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낙소스 공국 등 그리스 전체로 확산되었고, 결전은 불가피해졌다. 1259년 9월,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반 니케아 연합군 약 2만~4만 5천과 니케아군 약 1만은 결전을 벌였고, 반 니케아 연합군은 대패하였다. 이 전투로 니케아 제국은 중북부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였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아카이아 공국은 몰락하였다.


2.4.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과 환도[편집]


미하일 8세는 1260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했지만, 이번에도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미하일 8세는 지금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에 주던 특혜를 모두 제노바 공화국에게 주어 베네치아의 에게 해 패권을 흔들려 시도하였다.

1261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수비병까지 싣고 떠난 사이 정찰병들이 57년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면서 니케아 제국의 역사는 끝이 났다.

미하일 8세는 결국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아 유폐시켜버렸고 라스카리스 왕조와 니케아 제국도 지방 정권으로 격하하였다.[12]

니케아 제국은 정통 로마제국으로 복귀하였고, 이후 미하일 8세의 혈통인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1453년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시기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에게 멸망할 때까지 왕조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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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터키 이즈미르 주의 케말파샤.[2] '니케아 제국'을 뜻하는 후자는 현대의 용어.[3] 니케아는 테오도로스 1세 시기에는 수도로서 기능했지만 콘스탄티노플과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요안니스 3세 시기에 오늘날 이즈미르 인근의 님페온으로 천도했다.[4] 엄밀히 말하면 기원전 146년에 공화국 시절 그리스가 점령되고 나서 제정 초기까지 한동안은 본국 이탈리아(인), 그중에서도 수도 로마(인)이 군림하고 있었으므로 그때도 라틴인의 지배가 맞긴 한데... 그게 동로마 제국으로 국체가 그대로 이어졌고, 이미 보편제국으로 발돋움해서 특정 민족이나 인적집단이 지배한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져서(영어 위키백과에는 동로마에 대해서 'Greeks ~(다른 내용)~ considered it no longer foreign'이라는 서술이 있다.) 동로마의 그리스인들은 이미 로마의 '속주민'이나 '신민' 이 아니라, 주체인 '로마인'으로 스스로를 본 지 오래 되었다.[5] 영어로 그리스어 단어를 그대로 차용한 'Frankokratia(프랑코크라티아)'(η φραγκοκρατία), 혹은 'Frankish(Latin) Rule'이라고 한다. 영어 위키백과 링크: Frankokratia 그리스어로는 위의 프랑코크라티아와, 라틴인의 지배기[4](η λατινοκρατία)라는 표현 두가지가 혼재하고 있다.[6] 그래서 넘버링도 이 니케아 시절의 요안니스 3세, 4세(동)로마의 황제 계보정식으로 포함시켰기에, 눈물의 오뚜기 복위황제 요안니스 5세5세인 것이다. 반면, 이쯤 되면 짐작하겠지만, 트라페준타(트레비존드)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등은, 수도를 수복했던 니케아와는 달리 내내 지방정권이었으므로, 무슨 임금 x세 이런 넘버링을 동로마 본국에서 아예 분리해서, 그리고 처음부터 따로 센다.[7] 마누일 1세의 부황 요안니스 2세의 동생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아들. 즉 마누일 1세의 사촌이다.[8] 계속되는 정략결혼으로 그리스계 군주국들의 지배자들은 모두 친척지간이었다.[9] 안티오크가 아닌, 메안드로스 강 유역에 위치한 도시이다.[10] 아이러니하게도 원래 테오도로스 두카스는 테오도로스 1세를 따라 니케아 제국 창건에 기여하고 라틴 제국과 룸 술탄국에 의해 니케아가 존망의 위기 몰렸을 때에도 함께한 니케아의 총신이었다. 그러나 하루빨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과 제국 재건을 희망하던 테오도로스의 기대와 달리 니케아 내부의 내치와 같은 동로마계 계승 국가인 트라페준타 제국과의 전쟁에 열중하는 황제의 모습에 실망하고 때마침 이피로스를 다스리던 이복형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암살당하면서 테오도로스에게 이피로스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자 니케아와 결별하고 이피로스로 떠난다.[11] 현재는 몽골군이 후퇴한 이유에 대해 이설이 많다.[12] 하지만 이것은 본인과 그 후계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찬탈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조치였을 뿐, 이것과는 상관없이, 위에서 나오듯 후대의 역사학계가 니케아를 이 분립기의 정통으로 본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으며 미하일 8세에게는 찬탈자이자 제국의 몰락의 문을 연 암군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현대에도 비판을 받고있다. 즉, 미하일 8세의 니케아 제국 격하 시도는 후대 기준으로는 완벽히 실패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