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슬로 쿠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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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슬로 쿠발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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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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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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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클럽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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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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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뇰
32대




라슬로 쿠발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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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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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축구 감독


파일:라슬로 쿠발라.jpg

이름
쿠벌러 슈테츠 라슬로[1][2]
Kubala Stecz László
출생
1927년 6월 10일 /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
사망
2002년 5월 17일(향년 74세) /
스페인 바르셀로나
국적
[[헝가리|

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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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스페인|

스페인
display: none; display: 스페인"
행정구
]]
| [[체코|

체코
display: none; display: 체코"
행정구
]]

신체
176cm
직업
축구선수(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간츠 TE (1939~1943 / 유스)
간츠 TE (1944)
페렌츠바로시 TC (1945~1946)
ŠK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1946~1948)
버셔시 SC (1948~1949)
프로 파트리아 (1949~1950)
헝가리아 (1950)
FC 바르셀로나 (1951~1961)
토론토 시티 (1963)
RCD 에스파뇰 (1963~1965)
FC 취리히 (1966~1967)
토론토 팔콘스 (1967)
감독
FC 바르셀로나 (1961~1963)
RCD 에스파뇰 (1963~1966)
FC 취리히 (1966~1967)
토론토 팔콘스 (1968)
코르도바 CF (1968~1969)
스페인 대표팀 (1969~1980)
FC 바르셀로나 (1980)
알 힐랄 SFC (1982~1986)
레알 무르시아 (1986)
CD 말라가 (1987~1988)
엘체 CF (1988~1989)
스페인 올림픽 대표팀 (1992)
파라과이 대표팀 (1995)
국가대표
파일:체코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6경기 4골 (체코슬로바키아 / 1946~1947)
파일: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3경기 (헝가리 / 1948)
파일: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9경기 11골 (스페인 / 1953~1961)
파일:external/2.bp.blogspot.com/CATALONIA_LOGO.png 4경기 4골 (카탈루냐 / 1954~1963)

가족관계
처남 페르디난드 다우치크

1. 개요
2. 선수 시절
2.1. 바르사 이전
2.2. 블라우그라나 군단의 일원으로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시절~말년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헝가리의 前 축구선수로 1950년대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FC 바르셀로나를 이끌었고, 유러피언컵 5연패를 달성한 저승사자 군단 레알 마드리드가 있었던 라리가에서 무려 4차례의 우승을 주도했다. [3] 클럽 창단 100주년인 1999년에는 바르셀로나 팬들이 선정한 클럽 역대 최고의 선수에 요한 크루이프를 제치고 뽑힌 바 있다.


2. 선수 시절[편집]



2.1. 바르사 이전[편집]


쿠발라는 1927년 6월 10일에 헝가리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구김살 없이 자랐다. 당시 페렌츠바로시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했던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에 정착한 슬라브 출신 이민자였으며 일용직 미장이로 일했고, 어머니인 안네도 마분지 공장에서 일을 하며 공장에서 쓰다 남은 마분지와 넝마, 종이 등을 이용해 아기인 쿠발라에게 공을 안겨주었다. 그는 키가 아직 두 뼘도 안될 적에 이미 공을 차는 데에 익숙해졌다. 이후 라슬로는 자라면서 부모보다 공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온종일 종이 공을 차는 라슬로는 어느새 거리의 명물이 되었다. '공 차는 소년'이란 별명이 붙은 쿠발라는 항상 공으로 곡예를 펼치며 거리를 누볐고, 1939년에는 11살의 어린 나이로 헝가리의 하부 리그 팀인 간츠 TE에 입단하면서 15살 이하 선수들에게 둘러싸이면서 본격적인 축구 선수로써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체구가 작았지만 실력은 오히려 월등했다.

파일:external/www.tempofradi.hu/ftc-vasas-19451.jpg
페렌츠바로시 시절의 모습. 왼쪽 세번째 분이 쿠발라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공차기를 멈추지 않았던 쿠발라는 1944년에 간츠 TE의 1군 팀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여 18세가 된 1945년에는 아버지가 뛰었던 페렌츠바로시로 이적하여 49경기에 나서 27골을 기록하여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이미 무시무시한 포스를 보였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8689438eec3fcb635e99969a4ffb00d.jpg
ŠK 슬로반 브라티슬라바 시절의 모습

페렌츠바로시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쿠벌러는 1946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명문팀 슬로반 브라티슬라바로 이적하여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페르디난드 다우치크 감독이다. 다우치크 감독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며 활약을 이어간 그는 19살의 나이로 체코슬로바키아 국대에 선출되기도 했으며, 다우치크 감독의 여동생 안나 비올라 다우치코바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다우치크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 쿠발라는 1948년에 버셔시 SC로 이적하면서 고국인 헝가리로 돌아왔는데, 축구 스타가 된 그가 먼저 한 일은 바로 거리의 사람들에게 옷을 나누어주는 일이었다. 그런고로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만큼이나 그라운드 밖에서도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어주는 성자였다. 왜냐면 쿠벌러의 부모는 가난했지만 어린 나이에 프로 선수로 뛰면서 엄청난 거액을 번 쿠발라에게 돈보다 중요한 가치에 대해 철저히 교육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쿠벌러는 평생 자신이 번 돈으로 혼자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 부모와 친지들을 도와 준 것은 물론 훗날 바르사 활동 시에 바르셀로나로 온 헝가리 이민자들을 비롯해 자신보다 더 돈을 원하는 불쌍한 이웃들에게 돈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 치하의 헝가리는 쿠발라가 자유로이 축구를 즐길 환경으로써 충족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는 1949년에 4명의 동료 선수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떠나면서 쿠발라 자신은 인스브루크에 있는 프로 파트리아와 계약했으나 헝가리 축구 협회 측이 이적동의서를 내주지 않아 FIFA에서의 이적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인즉슨, 그가 헝가리 공산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국가를 떠났으며 병역 의무와 징집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고로 그는 결국 프로 파트리아에서 친선경기만 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떤 공식 경기도 뛰지 못한 쿠벌러는 당시 AS 로마의 감독으로 일하던 매형 다우치크와 다시 만나 1950년 1월에 헝가리에서 온 망명자들을 모아서 '헝가리아'를 만들었고, 쿠발라도 여기에 합세했다. 그리고 1950년 여름에 열린 스페인 마드리드 투어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게 되는데...


2.2. 블라우그라나 군단의 일원으로[편집]


파일:external/1.bp.blogspot.com/kubala%2Bkocsis%2Bczibor%2Bbarca%2Bfc%2Bbarcelona%2Bbar%25C3%25A7a%2Bmagyar%2Bcatalunya.jpg
같은 헝가리 망명자 출신 선수인 산도르 코츠시스, 졸탄 치보르와 함께.

당시 쿠발라가 뛰던 헝가리아는 마드리드 선발팀과 스페인 선발팀, 그리고 RCD 에스파뇰과 차례로 친선경기를 치렀다, 이때 쿠발라의 플레이가 압도적이었는데, 특히 6월 5일에 열린 에스파뇰과의 경기에서 혼자 4골을 몰아치며 선보인 경기력은 당시 경기를 지켜본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사 관계자들을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현장에 있었던 아구스티 몬탈 갈로바르트 회장과 스카우트 담당 이사인 주젭 사미티에르는 쿠발라를 영입하고자 적극 추진했고, 이 때 레알 마드리드가 쿠발라를 영입하고자 먼저 제시하여 합의 직전까지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와 쿠발라 사이에서 한 가지 조건이 어긋나면서 무산되었는데, 바로 쿠발라의 매형이자 은사인 다우치크 감독의 레알 마드리드 부임 요구 문제였다. 다소 월권에 가까운 이 조건을 레알 마드리드는 거절하였는데, 이 틈을 타서 사미르티에가 쿠발라를 끈질기게 설득하고, 다우치크의 바르샤 부임 조건까지 받아들임으로써 당월 15일에 쿠발라는 매형이자 은사인 다우치크 감독과 함께 바르사로 입단을 결정했다. 게다가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로도 활약했던 사미티에르는 두 팀 사이의 정치적 문제도 해결해냈다. 그러나 여전히 FIFA의 이적 승인이 없었다는 게 걸림돌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쿠발라는 바르사에서조차 1년동안 친선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이를 해결해내기 위해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단장이었던 라이문도 사포르타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 국적을 얻게 되었다.[4][5]

1951년 6월 1일에 쿠발라는 스페인 국적을 얻어 스페인 축구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었다. 공식 데뷔 전인 1951 코파 델 레이에서 아틀레틱 클루브와의 준결승에서 6골을 기록해 기대를 모은 그는 1951/52 시즌에 19경기를 뛰며 26골을 넣었다. 이 시즌 당시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쿠발라가 뛰지 못한 바르사는 1-5 참패를 당했는데, 그가 뛴 엘 클라시코에서는 4-2 승리로 멋지게 설욕했다. 특히 1952년 2월 10일 9-0으로 이긴 스포르팅 히혼전에서 쿠발라는 7골을 넣었는데, 이는 라리가 역사상 한 경기 최다골 기록으로 평가된다. 이 쿠발라의 활약으로 바르사는 리그 통산 5회 우승을 이루고 그해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도 발렌시아 CF를 맞아 득점에 성공해 우승컵을 가져갔다. 이후 우승 행진은 계속 이어져 1952년 라틴컵 우승과 코파 에바 두아르테 우승도 전부 바르사의 것이었다. 한 시즌에 총 5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그 순간은 바르사 역사상 최고의 해 중 하나로 현재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호사다마랄까, 쿠발라는 1952-53시즌에 폐결핵 진단을 받아 많은 경기를 결장하고 말았다. 현역 선수 생활은 이대로 끝나는가 싶더니만 그는 리그 막판에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라리가 11경기에서 7골을 기록해 팀의 연속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코파 델 레이에서까지 7경기에서 11골을 기록한 뒤 또 아틀레틱 클루브와 결승에 올라가 대회 3연속 우승에 기여했다. 단, 이 시즌에 엘 클라시코와도 인연이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는 그가 병석에 누워서 못 나왔고, 바르사 안방 리턴매치에선 레알 마드리드의 올리바와 다투는 바람에 강제 퇴장당한 것이다.

이후에도 쿠발라는 바르사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정작 엘 클라시코에선 그리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 하지만 라이벌 팀 에이스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라이벌을 이루며 엘 클라시코 흥행과 재미를 주도했다. 그는 1957-58시즌 같은 헝가리 망명자 출신 동료 산도르 코츠시스와 졸탄 치보르의 영입을 성사시키는 데 도와주었고, 게다가 갈라시아 출신의 어린 공격수 루이스 수아레스와 브라질 공격수 에바리스투와 막강 공격진을 이룬 쿠발라는 당시 유럽 무대를 씹어먹던 레알 마드리드에 대적할 만한 전력의 핵으로 작용했다. 1958-59시즌 라리가-코파 델 레이-인터-시티 페어스컵 획득을 도운 것도 쿠발라였다. 그러나 1959-60시즌에는 당시 감독인 엘레니오 에레라와의 갈등으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러피언 컵 준결승에서 처음으로 성사된 엘 클라시코 매치에서 1, 2차전 모두 팀이 3:1 패배하여 결승전 진출에 실패하는 걸 그대로 지켜보아야만 했으나, 1960-61시즌 유러피언 컵 16강에서 다시 펼쳐진 엘 클라시코 1차전에서는 2:2로 비겼으나, 2차전은 2:1로 이겼다. 그렇게 바르사는 승승장구하며 결승전에 올라갔으나 SL 벤피카에게 3:2로 지면서 결국 유로피언 컵 우승의 꿈을 뒤로 미루었고, 쿠발라는 이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6]

이후 후술할 바르사 감독직 이후 1963년에 지역 라이벌인 RCD 에스파뇰의 플레잉감독으로 복귀하여 선수 생활을 다시 시작하여 라리가에서 7골을 넣었으나 팀은 13위로 떨어져 상강 플레이오프를 치러서 승리한 뒤 간당간당하게 잔류했고, 이후 스위스와 캐나다를 거치며 선수생활을 이어나가다 1967년에 토론토 팰컨스를 끝으로 축구화를 완전히 벗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쿠발라는 아이돌이라는 별명에 맞게 사람들에 눈을 즐겁게하는 스타성이 있었다. 당시로써는 최고였던 발재간능력은 디 스테파노도 따라 올 수 없었다. 그리고 처진 공격수 자리에서 활약했던 선수답게 기회 창출능력 역시 좋았다. 창의적이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패스로 게임을 만들어갔다. 힐 패스나 드래그백 후 패스같은 고난도 기술도 서슴없이 구사했다. 골 결정력 역시 최고 수준이어서 득점기록 역시 좋았는데, 2경기에서 1골넣는 스코어링을 보여줬다. 골대 앞에서의 결정력 뿐만아니라 중거리슛에도 능했다. 특히 프리킥에서는 당시로서는 유일무이한 휘는 슈팅을 구사했다고 한다.


4. 지도자 시절~말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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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바르사에서 현역 생활을 끝낸 이후 동 팀에서 유스팀 감독으로 시작했고, 그해 11월에 루이스 미로 감독이 쫓겨나자 1군 감독으로 승격했다. 이후 1962/63 시즌에 풀시즌으로 뛰었으나 감독 생활은 그리 신통치 못했다. 결국 쿠발라는 그해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츠르베나 즈베즈다에게 져서 무관에 그치자 결국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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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프 누 앞에 선 쿠발라의 동상

이후 RCD 에스파뇰-FC취리히-토론토 팰컨스-코르도바를 거쳐 1969년부터 스페인 국대 감독으로 11년간 재직하며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유로 1980에 각각 본선 진출시켰고, 이후 1980년에 바르사에 돌아왔으나 한 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조기 경질되었다. 이후 알 힐랄, 레알 무르시아, CD 말라가 등을 거치다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스페인 올림픽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스페인에 금메달을 선사해 주었고, 1995년 파라과이 국대 감독직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 외에도 1990년부터 9년간 바르사 전직 선수조합 회장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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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쿠발라
쿠벌러는 2002년 5월 17일에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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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헝가리는 동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성이 앞에, 이름이 뒤에 온다. 또한 헝가리어에서 'a'는 '/ɒ/' 발음으로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ㅓ'로 표기한다.[2] 슬로바키아어 이름은 라디슬라프 쿠발라(Ladislav Kubala). 스페인어 이름은 라디슬라오 쿠발라(Ladislao Kubala).[3]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스페인 3개의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으나 보통 출생국인 헝가리 국적으로 분류한다. 언젠가 쿠발라가 어느나라 사람인지 질문을 받은적이 있는데 "나는 세계 시민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4] 이는 프랑코 정권의 스페인 이미지 세탁 작업의 일환 중 하나였다. 스페인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탈출한 난민이었던 쿠발라를 받아들이는 반공 국가라는 이미지를 대외에 알리기 위하여 프랑코 정권은 난민 신분이었던 프랑코에게 스페인 도착 1년 만에 스페인 국적을 주었다.[5] 디 스테파노푸스카스가 스페인 국적으로 귀화하는데 각각 4년, 3년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토록 빠른 귀화를 행한 동시대 선수 중에는 마찬가지로 1년 만에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레알 마드리드의 우루과이 선수 엑토르 리알이 있는데, 엑토르 리알의 경우는 부모의 국적이 스페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쿠발라는 확실히 프랑코 정권의 특별 대우를 받은 셈이다.[6] 골키퍼 안토니 라마예츠의 자책골이 아니었으면 경기 결과는 어찌될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