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문도 오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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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문도 오르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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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브론즈슈.png

1934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이탈리아 /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idata.over-blog.com/Raimundo-Orsi--3-.jpg

이름
라이문도 오르시
Raimundo Orsi
본명
라이문도 비비아니 오르시
Raimundo Bibiani Orsi
출생
1901년 12월 2일
아베야네다[1]
사망
1986년 4월 6일 (향년 84세)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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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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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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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아웃사이드 레프트 - 스트라이커
신체
168cm | 체중 68kg
소속팀[2]
CA 인데펜디엔테 (1919~1928)
유벤투스 FC (1928~1935)

CA 인데펜디엔테 (1935)
CA 보카 주니어스 (1936)
CA 플라텐세 (1937)
클루브 알마그로 (1937)
CA 페냐롤 (1938)
CR 플라멩구 (1939)
국가대표
12경기 3골 (아르헨티나 / 1924~1928)
35경기 13골 (이탈리아 / 1929~1935)
1경기 0골 (아르헨티나 /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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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1]


1. 개략
2. 생애[3]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4.2.1. 아르헨티나
4.2.2. 이탈리아
4.3. 개인
4.3.1. 클럽
4.3.2. 국가대표



1. 개략[편집]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기적의 주인공으로 별명은 무모.[5]


2. 생애[6][편집]



2.1. 클럽[편집]



2.1.1. CA 인데펜디엔테[편집]


오르시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출신이다.

오르시의 첫 클럽은 아르헨티나의 CA 인데펜디엔테였다. 오르시는 1919년 11월 30일에 에스투디안테스를 상대로 데뷔하였고, 1928년까지 인데펜디엔테에서 활약했다. 인디펜디엔테에서의 오르시의 활약 자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인디펜디엔테는 마누엘 세오아네를 앞세워 리그 우승을 2회 차지하는 강팀의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오르시 역시 알비셀레스테[7]의 일원이 되면서 그의 기술적이고 빠른 면모를 발휘했다.

1927년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출전해 조국에 우승을 안긴 그는 뒤이어 열린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도 출전했지만 여기서는 우루과이에게 밀려 준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올림픽에서 오르시의 활약에 꽂힌 클럽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유벤투스 FC. 유벤투스는 1926년 이탈리아의 왕좌를 차지한 이후 소위 이탈리아에서 잘 나간다는 선수들을 쓸어 모으고 있었는데 당시 피아트의 오너이자 유벤투스의 회장이었던 조반니 아녤리는 오르시의 활약을 보며 어머 저 선수는 사야해를 외쳤다. 결국 오르시를 유벤투스에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오르시를 포함하여 같은 해에 움베르토 칼리가리스도 데려옴으로써 전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한다.

상술했듯 오르시는 아르헨티나 출신이었지만 아르헨티나에 흔한 오리운디[8]였고 이탈리아에서 뛰는데 큰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국가대표. 당시에는 상업 항공편이 없었던 관계로 유럽에 가는 데에만 2주 이상의 시간이 걸렸는데 그로 인해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자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2.1.2. 유벤투스 FC[편집]


연 8,000리라와 함께 피아트 509까지 받으면서 이탈리아에 입성한 오르시. 하지만 이탈리아에 도착한 시즌에 이탈리아 리그 측에서 오리운디를 포함한 외국인 선수가 뛰는 것을 금지시켜버렸고, 결국 그는 1년의 시간을 날려먹었다. 다음해인 1929년 시즌에서야 제대로 이탈리아 무대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지만 그의 기량은 어디가지 않았다. 곧 이탈리아 대표팀에도 선발되었고, 자신의 제대로 된 첫 시즌에서 큰 활약을 펼쳐 소속팀을 3위에 올려놓았다.

유벤투스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아르헨티나의 도살자 루이스 몬티까지 데려왔고 막 창설된 세리에 A에서 5연패라는 성적을 거두어 맹주로 군림하게 된다.

그 중 1930-31 시즌에는 33경기에서 20골을 넣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유벤투스의 팀 내 득점왕이 되었다. 그렇게 유벤투스에서 활약한 6시즌(실제는 7시즌) 동안 오르시는 리그 177경기에 출전 77골을 넣었다.


2.1.3. 유벤투스 이후[편집]


1935년까지 유벤투스에서 활약한 오르시는 다시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다. 친정팀 인데펜디엔테, CA 보카 주니어스, 플라텐세, 알마그로 등 아르헨티나 클럽들을 돌아다니다 1938년에 우루과이CA 페냐롤에서 새로운 도전을 했다. 도전의 결과는 우승이었다. 그리고 1939년, 브라질의 CR 플라멩구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의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9]

오르시는 1986년 4월 6일. 칠레산티아고에서 숨을 거두었다.


2.2. 국가대표팀[편집]



2.2.1. 아르헨티나[편집]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오르시는 1924년 8월 10일 우루과이와의 친선경기에서 데뷔했다. 메이저 대회에는 192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1928년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192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는 홈 팀 페루를 상대로 마지막 경기에 출전하였다. 오르시는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아르헨티나는 5대1 대승을 거두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1928년 올림픽에서는 아르헨티나의 5경기에 모두 출전하였고, 3골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1936년, 우루과이와의 친선 경기에 참가한 기록이 남아있다. 오르시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총 13경기에 출전, 3골을 기록하였다.


2.2.2. 이탈리아 그리고 월드컵[편집]


1930년에는 이탈리아가 월드컵에 나가지 않았고, 이탈리아에 있던 그 역시 아르헨티나에까지 가서 월드컵에 참가할 형편이 아니었던지라 1930년 월드컵의 소식을 멀리서 듣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하지만 1934년 월드컵 때, 오르시는 당시 33세로 축구선수 치고는 고령이었다, 다음 월드컵이면 무려 37세가 되어 은퇴를 고심해야 할 나이였기에 이번 월드컵을 준비하는 오르시의 각오는 남달랐다. 1933년에 당한 다리의 골절로 인해 오르시는 월드컵 출전을 말아먹을 뻔했지만 다행히 재활에 성공하여 월드컵을 준비하였다.

오르시도 비토리오 포초 감독의 지도 아래 5경기에 모두 출전한 5명의 선수였지만 그의 가장 큰 활약은 단연 결승전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하면서 이탈리아는 팀의 핵심인 주세페 메아차가 부상을 입은데다가 푸치에게 후반 26분에 선제골을 얻어맞고 끌려가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물론이고, 흥분한 이탈리아 관중들은 선수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무솔리니에게서 무슨 일이 직접 일어나지는 않는다하더라도 흥분한 이탈리아 관중들에 의해 선수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오르시의 왼발이 이탈리아를 구했다.

구아이타의 크로스를 받은 오르시는 골대를 등진 채로 오른발로 공을 받았고 골대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바로 왼발로 터닝슈팅을 날렸다. 오르시의 발을 떠난 공은 절묘하게 왼쪽으로 휘어들어갔고 당대 최고의 골키퍼였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골키퍼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는 급히 왼쪽으로 몸을 날렸지만 공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면서 그대로 동점골이 되었다.[10][11]

이후 이탈리아는 메아차의 어시스트를 받은 스키아비오의 연장전 결승골로 체코슬로바키아를 2:1로 꺾고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33세의 노장[12]임에도 빼어난 활약으로 대표팀의 목숨을 건져올림과 동시에 활약을 인정받은 오르시는 대회 총 3골을 넣었고 당당히 대회 베스트 11에 헌액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13][편집]


당대에서 손꼽히는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중 한 사람. 몸싸움에서는 다소 약점을 보였지만 정제된 기술과 좋은 드리블링, 빠른 스피드를 모두 가지고 있어 페인팅에 능했다. 아웃사이드 레프트로서 크로스를 올리는 데에도 신경을 썼지만 자신의 왼발로 마무리 짓는 것도 좋아했다. 그래서 센터 포워드로서도 활약할 수 있었다. 또한 페널티 킥에도 정확한 능력을 발휘했다.

많은 리그를 돌아다녔지만 자신이 뛰어봤던 리그에서는 한 번씩은 우승에 성공했던 우승 복이 많은 선수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고향팀 CA 인데펜디엔테유벤투스에서는 레전드로 대접해주고 있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2회: 1922 AAmF[14], 1926 AAmF(CA 인디펜디엔테)
  • 세리에 A 우승 5회: 1930~31, 1931~32, 1932~33, 1933~34, 1934~35(유벤투스 FC)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1회: 1938(CA 페냐롤)
  • 히우지자네이루 주 리그 우승 1회: 1939(CR 플라멩구)
  • 코파 데 콤페텐시아(AAm) 우승 3회: 1924, 1925, 1926(CA 인디펜디엔테)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23 AAmF, 1935


4.2. 국가대표[편집]



4.2.1. 아르헨티나[편집]




4.2.2. 이탈리아[편집]


  • 월드컵 우승 1회: 1934
  • 중유럽 인터내셔날 컵 우승 2회: 1927-30, 1933-35


4.3. 개인[편집]



4.3.1. 클럽[편집]


  • 미트로파 컵 득점왕 1회: 1933(유벤투스 FC)


4.3.2. 국가대표[편집]


  •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34

[1] 부에노스 아이레스 인근의 항구도시.[2] 유벤투스 이후의 소속팀은 기록이 엇갈린다. 이 기록은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와 트랜스퍼마켓을 참조했다.[3] 출처: http://www.world-football-legends.co.uk/index.php/arg/23-orsi-raimundo, 위키백과[4] 출처: 위키백과[5] Mumo 또는 Mummo[6] 출처: http://www.world-football-legends.co.uk/index.php/arg/23-orsi-raimundo, 위키백과[7] 알비(흰색)+셀레스테(하늘색). 아르헨티나의 국기에서 나온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별명.[8] 이탈리아, 스페인 혈통의 이민자를 뜻하는 말. 같은 대표팀의 루이스 몬티, 우루과이의 에르네스토 마스체로니 등도 해당되고, 현시대에는 티아고 모타, 주세페 로시-미국 출신, 시모네 페로타-잉글랜드 출신 등이 이에 해당된다.[9] 이후에 칠레에서 더 활약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10] 오르시는 이후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때 터진 동점골을 재현하기 위해 20회 정도 재시도를 했지만 다시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래서 기적이 맞다.[11] 안타깝게도 그의 골이 제대로 찍힌 필름이나 영상 자료는 전해져 내려오지 않으며, 재구성 이미지로만 감상 가능하다, FIFA 공식 채널인 FIFA TV의 1934년 월드컵 결승전 영상에선 44초 무렵에 터닝슛을 날리는 오르시의 모습 자체는 담겨 있으나, 당시 찍힌 위치와 화질 등 여러 문제 때문에 공의 궤적을 확인하기엔 사실상 불가능하다.[12] 1901년생인 오르시는 당시 대표팀 내에서 루이스 몬티,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와 함께 최연장자 라인이었다, 또한 저 둘은 수비수였으므로 팀 내 포워드 중에서는 오르시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13] 출처: 위키백과[14] Asociación Amateurs de Football의 약자. 초기 아르헨티나 1부 리그는 아르헨티나 협회와 아마테우르스(영어로는 아마추어) 협회의 두 리그로 운영되었다. 루이스 몬티 등이 속해있던 우라칸은 아르헨티나 협회, 오르시가 속해있던 CA 인데펜디엔테와 CA 리버 플레이트 등은 아마테우르스 협회쪽이었다. 이 둘은 1931년에 통합된다. 이름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분명한 1부 리그이고, 2부 리그와 3부 리그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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