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쿠고협회 분열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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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라쿠고 산유협회(落語三遊協会)의 설립
4. 불참자와 속사정
6. 소동의 수습과 후일담



1. 개요[편집]


1978년, 라쿠고협회의 회장 5대 야나기야 코산이 신우치 대량승급 정책을 펴자, 6대 산유테이 엔쇼가 반발, 협회를 탈퇴하여 '라쿠고 산유협회'를 설립한 사건. 엔라쿠일문회가 창설된 직접적인 원인이며, 라쿠고 타테카와류가 창설되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라쿠고가들의 이름은 대수+ 예명(정호+개인명) 형식이다. 아래에는 처음 언급될 때에만 대수와 예명을 온전히 쓰고, 이후로는 개인명에 해당하는 부분만으로 언급한다. 단, 예명이 같은 사람들이 언급되면 구분을 위해 예외적으로 몇 대인지 표기한다.

2. 배경[편집]


6대 산유테이 엔쇼는 신우치를 '라쿠고가로서 지향해야 할 최종목표'로 보았다. 장시간에 걸쳐 자신의 예(藝)를 갈고 닦아 예도의 극에 달한 자가 얻을 수 있는 지위로 본 것이다. 고로 신우치 승급심사는 엄격해야 하며, 이 때문에 평생 신우치가 되지 못하는 라쿠고가가 나올 수도 있다고 보았다.[1] 그러나 5대 야나기야 코산은 이런 생각에 반대하였다. 코산은 신우치를 '라쿠고가로서의 출발선', 즉 본인의 이름을 걸고 손님들께 라쿠고를 피로하는 기본자격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신우치가 되어서 인기를 얻고 못 얻고는 본인의 책임으로 보았다.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신우치관(觀)은 의외로 1960년대까지는 공존이 가능했다. 기본적으로는 신우치 승급을 엄정하게 심사하되, 오랫동안 승급하지 못한 라쿠고가에게는 '부모님을 잘 봉양하는 효자니까', '스승님을 정성껏 모시니까' 등 인정(人情)을 이유로 승진시키는 식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서 라쿠고계가 커지고 라쿠고가들 또한 많아지자 기존의 공존체제는 파탄을 맞았다. 라쿠고협회는 엔쇼의 주장대로 인정을 배제하여 '신우치가 되지 못하는 라쿠고가를 대량으로 양산해낼 것인가', 아니면 코산의 주장대로 '신우치를 대량으로 양산해낼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분기점에 섰다.

당시 라쿠고협회 회장인 코산은 1973년, 78년에 신우치 대량승급을 추진하였다. 그 무렵 엔쇼는 라쿠고협회의 고문이었는데, 73년에는 대량승급에 소극적으로 반대하는 정도였으나 78년에는 본격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함으로써 사건이 시작되었다.


3. 라쿠고 산유협회(落語三遊協会)의 설립[편집]


파일:external/www004.upp.so-net.ne.jp/rakugo01.jpg
1973년에 20명이 신우치로 대량승급한 이후, 78년까지 신우치로 승진한 라쿠고가가 6명밖에 없어 후타츠메 라쿠고가가 대량으로 쌓이며 인사적체가 되었다. 코산은 상임이사인 3대 산유테이 엔카ㆍ4대 산유테이 킨바ㆍ5대 슌푸테이 류초와 함께 78년 봄, 그해 가을에 라쿠고가 10명을 신우치로 승급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엔쇼가 73년과 마찬가지로 "안이하게 승급시키지 마라." 하며 반대의사를 표명했으나, 이사회에서 찬성 다수로 가결되었다. 엔쇼는 코산과 함께 대량승급을 추진한 상임이사 3명을 해임하고, 자기 말을 듣는 5대 산유테이 엔라쿠7대 타테카와 단시ㆍ3대 코콘테이 신초를 상임이사로 임명하라고 요구했다. 코산은 상임이사 해임안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등용안은 받아들여 상임이사를 6명으로 늘렸다.

엔쇼는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협회를 보고 탈퇴를 결심했다. 본래 엔쇼는 자신만 탈퇴하여 프리랜서 활동을 할 생각이었으나, 총영제자인 엔라쿠가 엔쇼를 따라 탈퇴하고자 하였고, 자신의 뜻을 다른 엔쇼파 상임이사들에게 전하였다. 상임이사 중 단시에게는 이전부터 제3의 단체를 설립해서 세 단체가 한 달에 똑같이 열흘씩 요세의 정기공연을 맡도록 하자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엔라쿠도 이 생각에 찬성하였다. 두 사람은 엔쇼가 탈퇴하는 때가 새로운 단체를 설립할 호기라 생각하여 엔쇼를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결국 엔쇼가 동의하자 신단체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엔쇼는 1978년 5월 12일, 5대 엔라쿠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을 모아 탈퇴의 뜻을 밝혔지만, 여기에서는 새 단체를 설립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또한 제자들 중 신우치가 되지 못한 자들은 엔라쿠 문하로 이적하라고 전하였다. 제자들이 신단체 설립을 3일 후인 5월 15일에야 알았다. 한편, 엔라쿠와 단시는 참가자 모집에 착수하였다. 7대 타치바나야 엔조에게 참가 확약을 받아내고 라쿠고 예술협회카츠라 우타마루 등에게 참가 의사를 타진하였다. 또 이로모노(色物)[2]로 인기 있는 만자이사 카스가 산큐ㆍ카스가 테루요 콤비와 마술사 이토 이치요에게도 승낙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1978년 5월 24일, 엔쇼는 엔라쿠ㆍ신초ㆍ엔조ㆍ엔조의 제2제자인 5대 츠키노야 엔쿄[3]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라쿠고 산유협회'를 설립한다고 선언한다.


4. 불참자와 속사정[편집]


처음에는 새로운 단체를 설립하면 기존 협회에서 상당수가 이탈하여 제3 세력을 형성할 수 있을 듯이 보였으나, 실제 라쿠고가들의 반응은 상당히 미온적이었다. 참가가 유력시되었던 라쿠고가들 중 불참하고 협회에 잔류한 사람들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예능관이 엔쇼와 근본적으로 맞지 않아, 신협회에 참가해도 냉대받으리라 판단하여 불참.

코산이 만류하는 바를 받아들이고, 나이 등을 고려하여 불참.

새로운 단체를 설립한다는 생각을 하고 적극적으로 나서놓고는, 출범 직전에 뜻을 바꾸어 협회에 잔류했다. 이유는 차기회장 자리와 서열 문제이다. 협회 내에서도 후배인 신초에게 추월당해 악감이 있었는데, 신협회에서도 밀려 엔쇼 이후 차기 회장 자리와 서열에서 신초에게 밀리는 것이 싫어 불참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 산유테이 산쇼
엔쇼의 제2제자이다. 엔라쿠가 처음에는 스승 개인이 탈퇴한다고 하다가 일문 전원이 탈퇴하고 신단체를 설립한다고 말을 바꾸자, 이를 불신하여 불참하였다. '오로지 신작만 피로한다.' 하는 이유로 이전부터 스승과 관계가 소원하였다. 이후 코산의 문하로 이적하여 카와야나기 센류로 개명했다.

  • 산유테이 코쇼
엔쇼의 제3제자. 산쇼와 같은 이유로 불참, 협회에 잔류한다. '스승의 그림자'라고 불릴 정도로 기풍이 스승 엔쇼와 흡사하여 엔쇼에게 이전부터 냉대받았다. 아니 왜? 이후 8대 하야시야 쇼조[4] 문하로 이적. 예명은 5대 슌푸테이 류쇼로부터 슌푸테이 정호를 사용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아 슌푸테이 이치류로 개명했다.

그 외에 예술협회의 카츠라 우타마루 등도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전원이 참가를 거절, 예협 쪽 참가자는 한 명도 없었다.


5. 삼일천하[편집]


라쿠고 산유협회는 '신우치 승급 남발로 인한 라쿠고의 저질화'를 문제 삼았다. 그리하여 대중들에게 지지받고 협회와 회장 코산도 비판을 받았으나, 막상 라쿠고가들이 예상보다 덜 호응하여 산유협회는 불안하게 출발하였다. 그런 와중에 하루만에 산유협회의 명운을 결정 지은 대타격이 있었다. 석정[5]회의에서 산유협회의 요세 출연을 불인정하고 라쿠고협회로 복귀하라고 종용한 것이다.

라쿠고 산유협회의 결성에 4대 요세(신쥬쿠 스에히로테이ㆍ우에노 스즈모토 연예장ㆍ이케부쿠로 연예장ㆍ아사쿠사 연예홀)의 석정들이 신쥬쿠 스에히로테이에 모여 석정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스에히로테이의 석정인 키타무라 긴타로를 중심으로 스에히로테이ㆍ이케부쿠로ㆍ아사쿠사는 산유협회에 반대하고 스즈모토만 산유협회 편에 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키타무라 긴타로가 "일견 좋아 보이는 면면들이나 한줌의 인기 라쿠고가과 무명의 신진들밖에 없어서 층이 얇다. 만약 엔쇼 등 인기 라쿠고가가 지방흥행, TV출연 등의 일이 있으면 요세의 정기공연을 만족스럽게 운영할 수 없다." 하는 의견을 내자, 스즈모토 측도 반대로 돌아섰다. 이렇게 4대 요세 석정의 총의로 "신단체 라쿠고 산유협회의 요세 출연을 불인정한다. 석정회의는 엔쇼가 라쿠고협회에 복귀하는 것을 권유한다." 하는 성명을 낸 것이다.

신초와 엔쿄는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엔쇼를 내방하여 '요세의 출연이 끊기면 제자를 만족스럽게 육성할 수 없으니 라쿠고협회에 복귀하자.'고 설득했지만, 엔쇼는 체면의 문제로 거절했다. 결국 엔조ㆍ엔쿄ㆍ신초 등이 라쿠고협회로 복귀하자 라쿠고 산유협회는 엔쇼 일문만 참가하는 마이너 단체가 되어버렸다. 엔쇼는 굴하지 않고 산유협회를 계속 이끌었지만 이듬해인 1979년에 급사하자 라쿠고 산유협회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6. 소동의 수습과 후일담[편집]


석정회의가 성명을 발표한 후 조기복귀한 엔조ㆍ신초 일문은 협회로부터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본래 코산 등 협회의 집행부는 이들을 처벌하고자 하였으나, 석정회의로부터 "금번 사태는 협회 집행부 측에도 책임이 있으니, 복귀자를 처벌할 거라면 집행부도 총사퇴하라." 하라는 말을 듣고 포기하였다. 79년에 엔쇼가 죽고 산유협회가 와해되자, 산유협회 측 라쿠고가 대부분은 80년에 엔쇼 부인과 유족이 중재한다는 형태를 통하여 라쿠고협회로 복귀하였다. 이때의 복귀자는 협회 내 서열이 한 단계 낮아진다든가 하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엔쇼의 직제자들 중 젠자ㆍ후타츠메 신분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서열도 낮아졌고, 엔쇼 일문의 사형들 밑으로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지받았다. 사실상 협회가 나서서 산유테이 일문을 해체한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이들 '복귀조'는 언제 복귀했든 라쿠고협회 내에서 영향력과 발언력을 크게 잃고 중심권력에서 밀려나 협회의 관직과는 영영 인연이 없어졌다.

한편 엔쇼 사후, 총영제자 엔라쿠만이 라쿠고협회 복귀에 반대하고 스승의 뜻을 이어가고자 자기 제자들을 모아 '대일본 라쿠고 제비꽃회(大日本落語すみれ会)'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85년에 '라쿠고 엔라쿠당(落語円楽党)', 90년에 '엔라쿠일문회(円楽一門会)'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또한 라쿠고협회 측도 이 소동에 대한 반성으로 신우치 대량승급 제도를 대체하여 신우치 승급시험 제도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1983년 승급시험에서 단시의 제자들이 모두 탈락하자 단시가 강력히 반발하여 제자들을 이끌고 라쿠고협회를 탈퇴, 자신을 이에모토(家元)로 하는 라쿠고 타테카와류를 결성하였다. 분열소동에선 갑자기 입장 바꾸더니... 단시에게 빠만큼 까도 많은 이유가 있다. 라쿠고 타테카와류는 엄격한 신우치 승급시험으로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 그런 곳에서 타테카와 키위를 승진시켰냐?

타테카와류가 독립한 후로도 라쿠고협회는 신우치 승급시험을 운용하였다. 그러나 87년에 하야시야 코부페이[6] 편파승진 논란에 석정들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강력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자 87년을 마지막으로 승급시험 제도를 폐지. 현재는 사실상 연공서열제로 신우치를 승진시키고 있다. 보통 입문하고 15년 정도 지나면 신우치로 승급한다. 현재까지 딱히 불만 없이 운용되고 있다. 예외적으로 공적을 인정받아 빠르게 신우치로 승급하는 경우가 몇 명 있는데, 워낙 입문을 일찍한 데다가 5대 야나기야 코산의 손자라는 후광을 입어 입문한 지 7년만에 22세 나이로 전후 최연소 신우치로 승급한 야나기야 카로쿠, 연예상에서 여러 상을 수상하여 12년만에 승급한 하야시야 타이헤이, 신작 라쿠고의 달인이자 후타츠메 시절부터 여러 상을 수상하여 11년만에 승급한 야나기야 쿄타로 등이 그 사례이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아직도 야나기야 일문과 엔라쿠 일문, 타테카와 일문의 사이는 험악하다. 현재도 엔라쿠일문회와 타테카와류 소속 라쿠고가들은 요세 공연이 금지되어 있어, 자신들끼리 모인 발표회 등에서만 라쿠고를 피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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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정작 엔쇼 본인은 19세에 신우치로 승급할 적에, 실력이 아니라 의부인 5대 산유테이 엔쇼의 후광 덕분에 승급했다고 말이 많았다.[2] 요세에서 라쿠고 이외의 여흥거리로 내놓는 모든 예능을 가리킴.[3] 훗날의 8대 타치바나야 엔조[4] 훗날의 하야시야 히코로쿠[5] 席亭. 요세의 경영주[6] 훗날의 9대 하야시야 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