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로이 호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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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로이 호킨스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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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 트윈스 등번호 32번
데이브 윈필드
(1993~1994)

라트로이 호킨스
(1995~2003)


테리 티피
(2004~2006)
시카고 컵스 등번호 32번
에릭 캐로스
(2003)

라트로이 호킨스
(2004~2005)


제롬 윌리엄스
(2005~2006)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등번호 32번
브라이언 달리모어
(2005)

라트로이 호킨스
(2005)


케빈 코레이아
(2006~2008)
볼티모어 오리올스 등번호 23번
알레한드로 프레이레
(2005)

라트로이 호킨스
(2006)


페르난도 타티스
(2006)
볼티모어 오리올스 등번호 32번
루이스 마토스
(2000~2006)

라트로이 호킨스
(2006)


제이미 워커
(2007~2009)
콜로라도 로키스 등번호 32번
제이슨 제닝스
(2002~2006)

라트로이 호킨스
(2007)


글렌던 러시
(2008~2009)
뉴욕 양키스 등번호 21번
폴 오닐
(1993~2001)

라트로이 호킨스
(2008)


모건 엔스버그
(2008)
뉴욕 양키스 등번호 22번
로저 클레멘스
(2007)

라트로이 호킨스
(2008)


제이비어 네이디
(2008~2009)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번호 22번
호세 크루스
(2008)

라트로이 호킨스
(2008~2009)


맷 린드스트롬
(2010)
밀워키 브루어스 등번호 30번
카를로스 코르포란
(2009)

라트로이 호킨스
(2010~2011)


톰 고젤라니
(2013~2014)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등번호 32번
맷 파머
(2009~2011)

라트로이 호킨스
(2012)


조시 해밀턴
(2013~2014)
뉴욕 메츠 등번호 32번
헨리 메히아
(2010~2012)

라트로이 호킨스
(2013)


존 래넌
(2014)
콜로라도 로키스 등번호 32번
타일러 챗우드
(2012~2013)

라트로이 호킨스
(2014~2015)


타일러 챗우드
(2016~2017)
토론토 블루제이스 등번호 32번
다니엘 노리스
(2014~2015)

라트로이 호킨스
(2015)


스캇 다이아몬드
(2016)



파일:LaTroy Hawkins.webp

미네소타 트윈스 구단 특별 보좌
라트로이 호킨스
LaTroy Hawkins

출생
1972년 12월 21일 (51세)
인디애나 주 게리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학력
웨스트사이드 고등학교
신체
196cm / 99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1년 드래프트 7라운드 (전체 180번, MIN)
소속팀
미네소타 트윈스 (1995~2003)
시카고 컵스 (2004~2005)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5)
볼티모어 오리올스 (2006)
콜로라도 로키스 (2007)
뉴욕 양키스 (2008)
휴스턴 애스트로스 (2008~2009)
밀워키 브루어스 (2010~2011)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2012)
뉴욕 메츠 (2013)
콜로라도 로키스 (2014~2015)
토론토 블루제이스 (2015)
스태프
미네소타 트윈스 구단 특별 보좌 (2016~)
1. 개요
2. 선수 경력
2.2. 저니맨 생활
2.3. 말년
3. 여담
4.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미국의 前 야구선수. 현역시절 포지션은 투수였다.

만 42세까지 롱런한 불펜 투수로, 총 11개 팀에서 커리어를 보낸 저니맨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편집]



2.1. 미네소타 트윈스[편집]


개리 태생으로 웨스트사이드 고등학교를 거쳐 1991년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 트윈스에 7라운드에 지명되며 프로 무대에 발을 내딛었다. 마이너 리그에서 순차적으로 성장하다가 1993 시즌에 싱글A에서 26경기 23선발 15승 5패 ERA 2.06이라는 맹활약을 보여주며 1994 시즌을 앞두고는 BA 선정 유망주 순위 92위에 랭크되어 처음 유망주 순위 Top 100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기대치를 입증하듯 1994 시즌에 하이싱글A, 더블A를 뚫고 단숨에 트리플A까지 승격되는 기염을 토햇고, 이러한 활약으로 1995 시즌을 앞두고는 유망주 순위에서 30위까지 수직 상승했다.

그리고 1995 시즌,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본격적으로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되어 기회를 받기 시작한 호킨스는 개막 로스터에도 포함되며 드디어 빅리그 무대에서 활약할 기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4월 29일,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치룬 데뷔전에서 호킨스는 1⅔이닝 7피안타 7실점으로 처참하게 박살나면서 메이저 리그의 높은 벽을 실감했고, 첫 세 경기에서 10이닝 18피안타 3K 8BB 16실점(15자책점) 3패 ERA 13.50이라는 눈물겨운 성적만 남기고 트리플A로 강등당했다. 트리플A에서 3점대 ERA로 호투[1]한 호킨스는 어차피 시즌은 망했겠다 유망주들한테 기회나 주려는 팀의 방침 덕에 9월에 다시 콜업되었고, 9월 18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원정 더블헤더 2차전에서 선발로 나와 5⅔이닝 10피안타 4실점으로 아쉬운 피칭을 했지만 타선의 지원을 받고 데뷔 첫 승을 수확했다. 이어 9월 24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홈 경기에서는 9이닝 5피안타 4K 3실점 98구 완투승까지 기록했으나,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는 6실점으로 산화하고 시즌을 마쳤다. 1995 시즌 성적은 6경기 27이닝 2승 3패 ERA 8.67.

데뷔 시즌에 아쉬운 모습을 보인 탓에 호킨스의 유망주 랭킹은 70위까지 내려앉았지만, 그래도 미네소타가 충분히 기대할만한 유망주임에는 변함없었다. 그리고 이를 반영하듯 1996 시즌에도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었고, 4월 5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전에서는 비록 ND로 물러나긴 했지만 6이닝 3피안타 5K 1실점으로 호투했다. 그러나 이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원정에서 6이닝 10K 1실점 호투로 승리를 건진 것을 빼면 매 경기 부진을 겪었으며, 특히나 한 경기를 제외하면 3이닝을 넘기지도 못할 정도로 얻어맞았다. 결국 5월 10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원정 경기에서 불펜으로 나와 3이닝 5피안타 5실점을 기록한 것을 끝으로 마이너로 돌아갔으며, 시즌 내내 마이너에서만 머물렀다. 시즌 성적은 7경기(6선발) 26⅓이닝 1승 1패 ERA 8.20.

1997 시즌을 앞두고는 호킨스에 대한 기대치 자체가 많이 내려간 상황이었다. 아직 24살에 불과한 젊은 선수긴 하나 지난 2년간 심각한 수준으로 빅리그에서 얻어맞기만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 결국 트리플A에서 시즌을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트리플A에서도 5점대 ERA로 열심히 얻어맞아주셨다(...). PCL이 보통 타고투저가 아닌건 감안해야 하지만 지난 2년은 트리플A에서라도 잘 던졌으니 더더욱 아쉬울 따름. 이런 와중에도 동갑내기 유망주 브래드 래드키와 베테랑 밥 투크스버리를 제외하면 선발로 쓸 놈 하나 없던 미네소타의 처참한 마운드 상황 덕분에 6월 중순에 콜업되었고, 첫 두 경기에서 호투하면서 반전을 만들어내나 싶었으나 7월에 완전히 무너지면서 롤백당했다. 그나마 남은 기간동안 풀타임으로 로테이션을 돌면서 경험은 쌓고 시즌을 끝냈다. 성적은 20경기 103⅓이닝 6승 12패 ERA 5.84 ERA+ 79.

1998 시즌부터는 암울한 팀 상황 속에 풀타임 선발로 기회를 받게 되었으나, 호킨스가 할 수 있는건 없었고 그저 무너지는 팀에서 경험치는 먹었지만 실상 탱킹장군 노릇이나 했다. 1998 시즌에는 33경기 190⅓이닝 7승 14패 ERA 5.25 ERA+ 91을 기록했고, 1999 시즌에는 33경기 174⅓이닝 10승 14패 ERA 6.66 ERA+ 76을 기록하며 이닝도 얼마 못먹었다. 특히나 1999 시즌에는 129자책점으로 리그 1위를 달성하는 불명예까지 뒤집어썼다. 안그래도 1990년대 후반은 스테로이드 시대가 거의 절정에 달해 타고투저가 극심해지던 시기였는데, 이 시기에 데뷔해서 심하게 얻어맞으면서 성장하게 된 호킨스가 불쌍하기도 하지만, 동갑이던 래드키가 팀의 외로운 에이스로 활약한걸 생각하면 호킨스 본인이 빅리그 무대에서 통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결국 2000 시즌부터 호킨스는 쫓겨나듯이 불펜으로 전향했으나... 이게 웬걸? 선발이라는 중압감을 내려놓아서 그런건지 몰라도 성적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처음에는 패전조나 롱 릴리버 역할로 시작했으나 생각보다 잘 던지면서 점차 필승조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5월 말부터는 아예 마무리 투수 역할도 부여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밥 웰스, 에디 과르다도와 함께 번갈아가며 출전했으나 8월 이후부터는 호킨스가 완전히 미네소타의 마무리 투수로 자리잡은 상태로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성적은 66경기 87⅔이닝 2승 5패 14세이브 ERA 3.39로, 마무리 치고 평범해보이는 ERA지만 2000 시즌도 극악의 타고투저라 저정도면 충분히 준수했으며 실제로 ERA+는 153에 달했다. 무엇보다도 블론세이브가 없었다.

2001 시즌에는 직전 시즌에 다소 많이 던진 여파인지 팀이 오랜만에 5할 승률을 넘긴 것과는 정반대로 극심한 부진에 빠지면서 62경기 51⅓이닝 1승 5패 28세이브(9블론) ERA 5.96으로 부진하고 과르다도에게 마무리 자리를 내줬으나, 중간계투로 자리를 옮긴 2002 시즌에 각성, 65경기 80⅓이닝 6승 0패 13홀드 ERA 2.13으로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당시 론 가든하이어 감독이 새로 부임한 이후 미네소타는 다소 부족한 타선의 화력과 선발진의 무게감을 불펜진의 힘으로 커버하는 야구를 했는데, 그 중심에서 호킨스는 셋업맨 J.C. 로메로, 마무리 과르다도와 함께 철벽 불펜진을 구성하며 미네소타가 94승을 거두고 오랜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커리어 처음 진출한 포스트시즌. ALDS에서는 서부지구 우승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3경기에 등판해 2⅔이닝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도 3승 2패로 ALCS에 진출했으며, ALCS에서는 애너하임 에인절스를 만났다. 호킨스는 2경기에 등판해 1⅓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나 3차전과 4차전에서 로메로를 포함한 불펜진이 내리 붕괴하며 1승 3패로 핀치에 몰린 상황 속에 5차전에 돌입했다. 미네소타는 2:3으로 끌려갔으나 7회초에 브렌던 도넬리를 상대로 연속 3안타로 만든 1사 만루 기회에서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를 상대로 밀어내기-폭투-희생플라이가 터지며 안타 없이 순식간에 3득점, 5:3으로 승부를 뒤집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7회말, 6회 2사부터 마운드에 올라와 있던 요한 산타나[2]가 연속 안타를 맞은 후 애덤 케네디에게 역전 쓰리런을 맞았고, 결국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호킨스가 마운드를 넘겨받았다. 그러나 호킨스는 등판하자마자 3연타석 안타를 맞으며 순식간에 무사 만루를 허용한 뒤 강판되었고, 이어 올라온 로메로가 밀어내기, 폭투, 안타를 골고루 맞고 무너지면서 호킨스의 승계주자를 전부 불러들였다. 결국 7회 말에만 10실점을 해버린 미네소타는 5:13으로 패했고, ALCS에서 1승 4패로 탈락하면서 호킨스의 첫 포스트시즌도 악몽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나마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 에인절스가 우승하면서 조금은 짐이 줄어들었다는 것 정도.

비록 아쉬운 포스트시즌이었지만 호킨스의 팀내 입지는 확고해졌고, 2003 시즌에는 한 단계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셋업맨 자리를 꿰찼다.[3] 이 해 호킨스는 74경기 77⅓이닝 9승 3패 2세이브 28홀드 ERA 1.86을 기록하며 커리어 처음으로 1점대 ERA에 진입했고 ,팀도 90승을 기록해 2년 연속으로 중부지구를 제패했다. 그러나 ALDS에서 미네소타는 양키스에게 1승 3패로 패퇴했으며, 호킨스도 1차전에는 구원승을 올렸으나 2차전에는 1:1 동점이던 7회말 1사 2루에 등판해 피안타 2개와 본인의 송구실책으로 게임을 말아먹으며 부진했다.

그렇게 2003 시즌을 끝으로 호킨스는 FA 자격을 획득해 시장에 나오게 되었다. 근 2년동안 탑급 셋업맨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적잖은 관심을 받았다.

2.2. 저니맨 생활[편집]


2003년 12월, 호킨스는 시카고 컵스와 3년 $11.2M에 계약하면서 이적하게 되었다. 2004 시즌에는 셋업맨으로 시작했으나 마무리 조 보로스키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6월부터 자리를 넘겨받았고 77경기 82이닝 5승 4패 25세이브 ERA 2.63을 기록했다. 그러나 마무리 전환 후 성적만 보면 48경기 51⅓이닝 4승 4패 22세이브 7블론 ERA 3.33으로 ERA도 늘어나고 블론이 다소 많았다. 이어 2005 시즌에는 마무리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4월 하순부터 3주만에 3블론(...)을 하면서 불안감을 노출했고, 결국 라이언 뎀스터에게 마무리 자리를 넘겨준 후 5월 말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 반대급부로 컵스로 이적한 선수는 데이비드 아즈마와 제롬 윌리엄스.

자이언츠 이적 후 4점대 ERA를 기록하며 성적이 더 나빠졌고, 2005 시즌을 66경기 56⅓이닝 2승 8패 6세이브 15홀드 ERA 3.83으로 마무리했다. 나름 고액연봉자인거 치고는 아쉬운 성적으로, 샌프란시스코도 클로저 I did my job아르만도 베니테즈의 삽질과 대체 마무리 타일러 워커의 애매한 성적으로 불펜진이 불안한 편이었는데도 호킨스가 마무리로 중용받지 못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결국 2005 시즌 후 스티브 클라인과의 맞트레이드로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했다.

볼티모어도 기존 마무리던 B.J. 라이언이 FA로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이적했기 때문에 경험자인 호킨스가 잘만하면 필승조를 꿰차볼 수도 있었으나 현실은 시궁창. 60경기 60⅓이닝 3승 2패 16홀드 ERA 4.40으로 반대급부로 이적한 클라인보다도 못한 성적을 냈으며, 마무리 자리는 영건 크리스 레이가 꿰찼다. 그리고 2006 시즌을 끝으로 3년 계약이 마무리되며 다시 FA로 풀렸다.

2006년 12월 5일, 콜로라도 로키스와 1년 $3.25M의 단년 계약을 맺었다. 당초 브라이언 푸엔테스 앞을 지켜줄 셋업맨으로 영입되었으나 4월 한달간 8점대 ERA로 부진했고, 4월 말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한 달간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4월의 부진이 이 부상 때문이었음을 입증하듯 5월 말에 돌아온 이후 로키스의 필승조로 활약했으며, 7월부터는 마누엘 코르파스가 클로저로 이동하고 부상에서 회복한 푸엔테스가 셋업맨 자리를 가져감에 따라 미들 릴리버로 자리를 옮긴 뒤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성적은 62경기 55⅓이닝 2승 5패 17홀드 ERA 3.42. 오랜만에 포스트시즌 무대도 밟았고 커리어 첫 월드 시리즈까지 경험하며 총 5이닝 1실점을 기록했으나, 아쉽게 월드시리즈에서 4전 전패로 물러나며 우승 반지는 손에 넣지 못했다.

아무튼 나름 준수한 성적을 기록한 호킨스는 2007년 12월 9일에 뉴욕 양키스와 1년 $3.75M에 계약했다. 커리어 내내 달았던 32번이 양키스에서는 엘스턴 하워드영구 결번이라 21번으로 바꿔달았는데, 문제는 21번도 양키스에서는 폴 오닐이 달았던 번호라 상징성이 매우 높다는 것. 이로 인해 호킨스는 분명 자팀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마운드에 오를때마다 양키스 팬들의 야유와 오닐에 대한 콜을 들어야 했고, 4월 16일부터 등번호를 22번으로 교체했다.[4] 호킨스 본인의 성적도 별로 좋지 않아서 5점대 ERA를 기록했고 7월 26일에 DFA되었다.

결국 2008년 7월 30일에 마이너리거 맷 큐직과의 맞트레이드로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이적했는데, 큐직이 별로 기대 안되는 마이너리거였고 실제로 빅리그 데뷔도 실패했음을 감안하면 DFA된 선수의 트레이드답게 덤핑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휴스턴에서는 32번이 아예 짐 움브리히트의 영구결번이라 양키스에서 쓰던 22번을 계속 달았다. 이렇듯 기대 없이 하위권팀 휴스턴으로 이적했으나, 휴스턴에서의 호킨스는 완전히 다른사람이 되면서 21이닝 1자책점을 기록하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합산 성적은 57경기 62이닝 3승 1패 1세이브 12홀드 ERA 3.92.

이렇게 인상적인 후반기를 보내면서 호킨스는 1년 $3.5M의 계약을 맺고 2009 시즌도 휴스턴에서 활약하게 되었으며, 어깨부상으로 이탈한 조 네이선의 대체자로 2009 WBC 미국 대표팀에도 승선했다. 다만 4경기 3⅔이닝 3실점으로 성적은 그닥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정규시즌에 돌아서자 시즌 초반의 부침을 제외하면 호세 발베르데와의 더블 스토퍼 체제 속에서 연이틀 호투를 거듭하며 휴스턴의 필수불가결한 핵심 릴리버로 자리잡았고, 발베르데가 폼을 완전히 회복한 이후로는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호킨스는 이 시즌에 65경기 63⅓이닝 1승 4패 11세이브 19홀드 ERA 2.13을 기록했는데, ERA는 2003 시즌 이후 가장 좋았으며 bWAR도 2.0으로 좋았다. 더구나 이게 만 36세 시즌에 기록한 성적이라는 점도 놀라울 따름.

2009 시즌의 반등으로 2010 시즌을 앞두고 밀워키 브루어스와 2년 $7.5M의 계약을 맺었다. 늦은 나이에 불펜 투수가 다년 계약을 맺은것만으로도 호킨스 개인에게는 나름대로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듯. 2010년에는 부상과 그 여파로 16이닝만 소화하고 ERA 8.44를 기록해 먹튀짓을 했으나, 2011년에는 존 액스포드 바로 앞에서 셋업맨으로 뛰면서 52경기 48⅓이닝 3승 1패 20홀드 ERA 2.42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밀워키가 96승으로 중부지구 1위를 기록하면서 포스트시즌에도 진출했는데, 호킨스는 NLCS까지 4경기 4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NLCS 6차전에서 분식회계를 기록하며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고, 결국 2승 4패로 탈락했다.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이번에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월드 시리즈를 우승했다는거.

2012년 1월 6일,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 1년 $3M의 계약을 맺었다. 중간에 부상으로 한 달 가량 쉬긴 했어도 전혀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면서 7월까지 ERA 1.73으로 호투하고 있었으나, 8월 4일에 시카고 화이트삭스 원정에서 2실점하며 불을 지르더니 4일 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원정에서는 무려 5실점하며 붕괴, 이를 기점으로 급격히 페이스가 저하되면서 필승조에서 밀려났다. 8~9월 성적이 ERA 6.75로 그 전의 호킨스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모습. 이제 곧 40을 바라보는 선수다보니 시즌 후반으로 가면서 체력 저하로 인해 부침을 겪는 듯 하다. 시즌 성적은 48경기 42이닝 2승 3패 6홀드 ERA 3.64로 마감했다.

2.3. 말년[편집]


2012 시즌 후반기의 부진과 고령으로 인해 2013 시즌을 앞두고는 메이저 계약을 제시받지 못했고, 결국 뉴욕 메츠와 스플릿 계약을 맺고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되었다. 당초 호킨스는 메이저 계약을 제시받지 못하자 은퇴를 고려했으나, 다시 생각해보자는 에이전트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 끝에 "내가 이 무대를 떠나게 된다면 내 의지로 떠날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빅리그 재도전에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호킨스는 기어코 메츠의 개막 로스터 한 자리를 꿰찼을뿐더러, 정규시즌에 들어서자 필승조로 활약하더니 기존 마무리 바비 파넬이 부상으로 시즌아웃되자 만 40세의 나이로 마무리 투수 자리까지 꿰찼다. 심지어 마무리 임명 후 성적이 더 좋아지는 노익장까지 과시했다. 시즌 성적은 72경기 70⅔이닝 3승 2패 13세이브(3블론) 13홀드 ERA 2.93을 기록했고, 마무리 전향 후 단 1블론만을 기록했다. 지난해 후반기에 급격히 무너지며 노쇠화에 대한 우려를 샀는데, 이를 실력으로 완벽하게 반박한 모습.

2014 시즌을 앞두고 호킨스는 콜로라도 로키스와 1년 $2.5M에 계약하며 7년만에 쿠어스 필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연봉은 $2.25M이며, 1년 $2.25M의 클럽 옵션이 있고 옵션이 실행되지 않으면 바이아웃 $250K를 지급하는 계약. 이와 함께 내셔널 리그 최고령 선수 겸 메이저 리그 최고령 투수 타이틀도 가져가게 되었다.[5] 호킨스는 팀의 마무리 투수로 낙점받아 4월 한 달에만 9세이브를 기록하면서 저력을 보여줬으며, 5월에는 다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6월부터는 안정감을 되찾으며 로키스의 든든한 수호신으로 활약했다. 성적은 57경기 54⅓이닝 4승 3패 23세이브(3블론) ERA 3.31로 마무리. 투구 경기나 이닝이 비교적 적은 편이긴 한데, 나이를 감안해 관리받은것도 없지는 않지만 중간에 3연투도 한걸 보면 호킨스의 체력이 문제된 것은 아닌 듯 하고, 그냥 로키스의 성적이 안좋아서(...) 세이브할 기회가 적었다고 보는게 맞을 듯 하다.[6] 로키스 구단도 이러한 활약을 인정해 옵션을 실행하며 2015 시즌에도 호킨스와 동행하게 되었다.

2015 시즌을 앞두고 호킨스는 다가올 시즌이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며 은퇴를 예고했다. 2년 전에 본인이 말한대로 프로 커리어를 끝낼 때 타의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끝내겠다는 말을 지킨 것. 이번 시즌에도 마무리 투수로 낙점되었으나 4월 한달간 ERA 13.50으로 극심한 부진을 겪었고, 오른팔 이두근 염증으로 부상자 명단에도 등재되면서 존 액스포드에게 클로저 자리를 넘겼다. 하지만 6월에 부상에서 복귀한 이후로는 1점대 ERA를 기록하며 반등했고, 7월에는 필승조 자리까지 되찾았다.

그러던 7월 28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2:4 트레이드에 포함되어 토론토로 건너가게 되었다. 당시 팬들 사이에서 꽤나 회자되었던 트로이 툴로위츠키 트레이드로, 호킨스와 툴로위츠키가 함께 토론토로 건너가고 반대급부로 호세 레예스, 미겔 카스트로, 제프 호프만, 헤수스 티노코가 로키스로 이적했다. 20년째 현역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호킨스 본인의 첫 트레이드 이적이며, 이로서 호킨스는 본인 커리어 11번째 팀에서 뛰게 되었다.

토론토 이적 후에도 2점대 ERA로 준수한 피칭을 보여줬고, 시즌 최종 성적 42경기 38⅔이닝 3승 1패 3세이브 7홀드 ERA 3.26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은퇴 시즌을 치르는 만 42세 선수라는걸 감안하면 놀라운 성적. 8월 5일에는 친정팀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세이브를 수확하며 MLB 전구단을 상대로 세이브를 기록한 역대 13번째 선수가 되었으며, 동시에 대런 올리버를 제치고 블루제이스 소속 최고령 세이브 투수가 되었다. 이어 8월 31일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홈 경기에서 2:4로 밀리던 9회초에 등판했는데, 이 등판으로 통산 1036번째 등판을 기록, 트레버 호프먼을 제치고 역대 최다 등판 10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9월 30일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원정 더블헤더 1차전에서 15:1로 크게 앞선 9회말에 등판, 1실점했지만 경기를 그대로 마감하며 토론토의 22년만의 지구 우승을 확정짓는 헹가래 투수가 되는 영광도 안게 되었다.#

그러나 포스트시즌에서는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ALDS 2차전에서 연장 14회에 등판해 3피안타 2실점으로 불을 지르며 패전투수가 되었고,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ALCS에서는 패전조로만 나와 1차전 2실점, 4차전 3실점으로 도합 1이닝 5실점이라는 최악투를 선보였다. 결국 토론토도 2승 4패로 탈락.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어차피 ALCS에서의 부진은 패전조로 나와 불을 지른거라 승패에 큰 영향은 없었고, 이번에도 캔자스시티 로열스월드 시리즈를 우승했다는 점.

그렇게 호킨스는 예고했던대로 2015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 21시즌의 커리어를 마치고 프로 무대를 떠났다. 통산 성적은 1,042경기(역대 10위) 1,467⅓이닝 75승 94패 127세이브 185홀드 ERA 4.31 983K 456BB bWAR 17.8. 선발로서는 실패한 유망주였으나, 불펜 전환 후 늦은 나이까지 949이닝 ERA 3.32를 기록하며 인상을 남기고 은퇴하게 되었다.

3. 여담[편집]


  • 은퇴 후 2016년 11월부터 친정팀 미네소타 트윈스의 구단 특별 보좌(Special Assistant, Baseball Operations)로 활동하고 있다.
  • 본문을 쭉 읽었다면 알겠지만, 호킨스가 출전한 포스트시즌에서 호킨스의 팀을 꺾은 상대팀은 항상 월드 시리즈를 우승했다. 그 탓에 긴 커리어와 나름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호킨스는 우승 반지를 얻지 못했는데, 사실 통산 포스트시즌 진출 횟수가 4회에 불과할 정도로 컨텐더 팀에서는 얼마 잘 뛰지 못한 점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 특별 보좌로 활동하던 2019년에 발생한 MLB 사인 훔치기 스캔들과 관련해서 폭로자인 마이크 파이어스를 오히려 비판하는 발언을 해서 구설수에 올랐다.

4.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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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네소타 팀내 최고 수준의 투수 유망주였던 호킨스에게 3점대 ERA는 사실 기대치에 못미쳐보이기도 하나, 미네소타의 트리플A 구단이던 솔트레이크 비즈(現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산하 트리플A)는 극악의 타고투저로 악명높은 PCL 소속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준수했다.[2] 나중에는 미네소타의 부동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되는 산타나지만, 2003년까지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뛰었다. 2002 시즌에도 선발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시즌 후반 들어서는 불펜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3] 기존 셋업맨이던 J.C. 로메로는 2002 시즌의 혹사와 포스트시즌 부진의 여파로 5점대 ERA를 기록하며 부진했다.[4] 호킨스가 등번호를 바꾼 후 모건 엔스버그가 21번을 넘겨받았으나 별 활약 없이 6월 1일에 DFA되었고, 이후 21번은 쭉 비어있다가 2022년에 공식적으로 영구 결번이 되었다.[5] 당시 스프링 트레이닝에 호킨스보다 한 살 많은 호세 콘트레라스도 있었으나, 콘트레라스는 메이저 리그 로스터 진입에 실패하면서 호킨스가 최고령 투수 타이틀을 가져갔다. 참고로 최고령 선수는 1971년 1월생의 제이슨 지암비.[6] 실제로 이 해 로키스는 66승을 기록해 서부지구 4위에 그쳤으며, 세이브가 나올 상황 자체는 더 적어서 시즌 내내 단 24세이브로 NL 최하위를 기록했다. 그중에서 23세이브를 호킨스가 단 3블론으로 책임진 것. 참고로 다른 1세이브를 기록한 선수는 애덤 오타비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