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아메리카/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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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 원인
1.1. 태동, 대스페인 크리오요 반란
1.2. 분열, 카우디요의 대두와 미국의 개입
2. 20세기 초(1901~1940) : 팍스 아메리카나
3. 20세기 중반(1941~1979) : 라틴민족주의의 대두
3.2. 칠레 혁명
3.3. 니카라과 혁명
4. 20세기 말(1980~2000)
4.1. 신자유주의의 대두
4.2.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5. 21세기 : 라틴아메리카 진보 돌풍
6. 비판
6.1. 좌파 세력에 대한 비판
6.2. 독립운동사에 대한 비판과 보수파 비판
6.3. 미국, 유럽 등 외국 개입에 대한 비판
6.4. 결론


라틴아메리카잉카마야, 아즈텍, 기타 중남미 원주민 세력들의 멸망 이후에는 스페인, 포르투갈을 대표로 하는 유럽 해양세력의 지배를 받았고, 먼로 독트린 이후 미국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온갖 기형적인 형태의 정치 체제가 성립되어 있으며 이를 개혁하고자 많은 주목할 만한 민중 혁명이 있어왔다.


1. 독립 원인[편집]


독립의 원인이면 4가지를 요약할 수 있는데


1.1. 태동, 대스페인 크리오요 반란[편집]




호세 데 산 마르틴, 라틴아메리카의 영웅이며 아르헨티나 5페소 지폐의 얼굴 마담이다. 하지만 볼리비아의 아이마라 역사학자 로베르토는 'Un hacendado mas (대지주 한 놈 더)' 라 가볍게 정리했다.

스페인포르투갈이 라틴아메리카 땅따먹기의 승자가 되었지만, 식민지는 우리 좋으라고 있는 거야 라는 합리적(?)인 운영에, 추가로 1776년 미국의 독립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우리도 독립해야 하는 거 아냐?"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식민지 귀족들은 본국 정부에서 자기들이 식민지를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 그렇잖아도 매우 불만이었다. 이를테면 쓸데없이(?) 원주민 보호 조치 따위를 만들어 이것저것 걸리적거리게 한다던지 말이다.

거기다 순순히 복종할 듯한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노예 세력도 점차 일어나 크리오요의 특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투팍 아마루 반란에, 아이티 혁명에, 이달고 신부가 일으켰던 원주민 세력이 크리오요를 다 죽여 버리겠다는 식으로 쓸어 버리려 했던 것까지, 똥줄이 타는 상황이 지나갔다. 부르봉 왕가카를로스 3세 시대부터 시작된 개혁을 통해 식민지 출신 스페인인들의 세력을 확 줄여 고위공직자로 가는 길을 막기 시작하고 있었다. 페닌술라레스(스페인 출신 스페인인)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1800년 초반, 나폴레옹이 스페인에 침입하여 스페인 왕을 갈아치우자 식민지 스페인인들(크리오요)들은 왕이 없으면 민중이 권력을 돌려받는 것이라면서 자치회를 결성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 민중이란 크리오요 귀족집단을 일컫는 것이지 원주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원주민은 안중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걸림돌로 여겼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원주민이 유럽인도 아니다. 이 땅의 합법적인 소유자와 스페인 침략자 사이 중간 쯤에 위치한 메스티소다. 태생으로는 아메리카인이며, 법적으로는 유럽인이다. 우리는 원주민과 소유권을 놓고 다퉈야 하는 반면, 침략자에 맞서 이 땅에서 우리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갈등 상태에 놓여 있다."


여하튼 그런 흐름에 힘입어 남쪽의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산 마르틴이, 북쪽의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시몬 볼리바르가 등장한다. 산 마르틴,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같은 이들이 만든 프리메이슨 조직 '로히아 라우타로'도 무시할 수 없다.

크리오요인 시몬 볼리바르는 1807년, 미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라틴아메리카 합중국[1]의 원대한 야망을 품고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821년, 멕시코의 독립을 마지막으로 크리오요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페닌술라레스 세력을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스페인 왕이 법으로나마 지켜줘 온 원주민 땅 약탈을 시작한다. 토지에서 자유롭게 해 주겠다면서 말이다. 참으로 영국적이었다. 스페인 왕과 협약을 맺고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스페인 지배권 밖의 원주민(이를 테면 마푸체 민족)들 역시 새로운 침략 세력에 시달리게 된다. 길고 긴 크리오요 식민주의 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리고 원주민의 삶은 스페인 왕이 지배하던 시대보다 더 힘들어지게 된다. 멕시코 작가 리우스는 2010년에 낸 독립도 아니고 혁명도 아냐(Ni Independencia Ni Revolucion)이란 책에서 이러한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원주민은 오늘날도 금발벽안들을 '정복자'로 보며 믿지 않는다고 한다.

스페인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인터뷰를 보라. #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라틴아메리카 백인 입장에서 본다면 '독립혁명'이지만 원주민 입장에서 본다면 백인 귀족계급 내전에 지나지 않았다.


1.2. 분열, 카우디요의 대두와 미국의 개입[편집]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는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서로 회담을 갖지만, 합중국을 주장하는 볼리바르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산 마르틴의 의견 차이로 회담은 실패한다. 콜롬비아에서 볼리바르의 암살 시도가 있었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란 콜롬비아는 현재의 라틴아메리카 지도대로 사분오열되고 만다.

이후 영국빠이자 비교적 반 가톨릭 교회 성향을 나타낸 자유주의 노선과 남미 군벌세력인 카우디요의 보수주의 세력은 서로 내전 상태로 치닫게 된다. 자유주의 세력이 그란 콜롬비아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면, 자유주의자들이 원주민 공동체를 해체하는 정책을 펴는 것을 혐오한 원주민 세력과, 자유주의자들이 가톨릭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여 신교를 허용하려 하는 것을 혐오한 가톨릭 교회 세력을 등에 업은 카우디요가 쿠데타를 일으켜 전소시키는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이를테면 중앙아메리카에선 모라산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력이 원주민의 공동체 토지를 '자유화'해서 자기들이 빼앗을 수 있게 하고 유럽 이주민을 끌어들여 나라를 '하얗게 하얗게'하려 했으나 거기 반발한 원주민들의 힘을 등에 업은 카우디요에 의해 실패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럽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신이 쏙 나가 있는 상황이라 바다 건너 라틴아메리카까지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런 사분오열이 용납이 됐지만... 진짜 적은 따로 있었다.

19세기 초 신생독립국에 불과했던 미국은 미리 유럽의 간섭을 배제하고 라틴아메리카를 장차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둘 사전 포석으로 침 발라놓기 먼로 독트린을 발표한다. 유라시아 대륙에 미국은 관심없다. 그러니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도 관심 꺼라. 욕심내봐야 소용없는 것을 공개포기하고 먹고 싶은 것을 마치 원래 자기것이었던 것 마냥 뻔뻔하게 주장 아메리카 대륙에 러시아는 관심없다. 그러니 아시아에 미국도 관심 꺼라

유럽에 빈 체제하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피해를 추스리고 시민혁명 확산을 방지하느라 집안단속에 급급하여 라틴아메리카는 아웃 오브 안중. 그동안 미국은 힘을 키워 미래를 대비하는데...

멕시코 지배하의 텍사스내 미국 이주민의 분리독립 움직임과 캘리포니아 광 발견에 따른 골드러시는 본격적인 서부 개척(을 빙자한 진군)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로써 정해진 첫 표적이 멕시코. 1836년 알라모 전투를 시작으로 멕시코를 공격하기 시작한 미국은 1846년 오늘날의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네바다, 유타 주, 콜로라도 주 지역을 멕시코로부터 할양받는다. 영토의 절반 정도를 뜯기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멕시코는 이후 다시 미국에 대항하지 못했고, 현재도 미국의 충실한 앞마당 멀티로서 기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1860년대 이후 남북전쟁의 전후처리와 북미 본토개척 과정에서 주춤했던 미국의 대외 팽창은 19세기를 마감하기 직전 본격적으로 재개된다. 상대는 그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식민지를 간당간당하게 유지하던 스페인.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미국은 쿠바푸에르토 리코득템 획득한다.[2] 이걸로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짐싸들고 퇴갤 20세기 팍스 아메리카나를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먼로 독트린은 아직도 사실상 유효하다.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 미국은 유라시아 지역에도 간섭한다는 것


2. 20세기 초(1901~1940) : 팍스 아메리카나[편집]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지배력 강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해 1903년 콜롬비아에서 파나마 분리를 주도했고 1914년 운하가 완공하자 이권을 모두 독점한다.

라틴아메리카의 군벌인 카우디요와 지속적인 로비를 펼쳐 광물의 거의 대부분을 독점했고 베네수엘라석유를 독점했으며 맘에 안 드는 정치인을 갈아 엎고 암살을 주도하는 등 사실상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의 패자로서 등장한다.

1940년 파나마의 아느롤포 아리아스 대통령이 미국에 대항하여 파나마 운하의 사용권을 다른 강대국에 넘기겠다고 강짜를 놓자, 2차 세계대전에 세계가 정신이 없는 사이 해병대를 투입해 무력 쿠데타로 파나마의 정부를 갈아 엎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어느 누구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의 지배는 확고했다.

니카라과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 독재정권에 맞선 산디노라는 인물이 있었다. 1929년부터 니카라과 전역에서 투쟁을 벌였지만 친미 군부세력인 소모사산디노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1936년부터 장기 독재 체제를 만들었다. 바야흐로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의 천하였다.사실 지금도 미국의 천하다. 그저 명분이 없어 지켜보고만 있는것이지.

20세기 중반이후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들에서 친미정권이 무너지고 반미 사회주의 정권이 세워졌으나 대부분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일부 국가는 섣부른 사회주의 퍼주기 정책으로 국가재정에 큰 문제를 겪고 있다.


2.1. 멕시코 혁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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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초 비야. 미국을 공격한 사람 중 승리한 전쟁을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시발점은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권력 분쟁이었지만, 미국과 서양 자본에 노출된 멕시코의 농지 개혁이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판초 비야를 중심으로 3차에 걸쳐 혁명이 벌어진다. 여러 모로 이하에 서술할 많은 혁명들의 어머니격인 혁명이었지만, 19세기 초 마르티와 볼리바르가 내세운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의 성격이 거의 없이 반 자본주의적 운동이었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판초 비야를 위시한 혁명 세력이 중국인 노동자를 대량 학살하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3. 20세기 중반(1941~1979) : 라틴민족주의의 대두[편집]



3.1. 쿠바 혁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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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피델 카스트로는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여 혁명의 시작을 알린다.

마르티의 정치색을 이어받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혁명. 사실상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 혁명의 시작이 된 혁명으로, 이 혁명 이후 미국은 대라틴아메리카 외교정책을 크게 수정한다. 쿠바는 이 혁명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반미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의 대장격 국가로 우뚝 선다.



3.2. 칠레 혁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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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구리 광산. 미국의 광물 독점으로 칠레는 오랜 기간 동안 구리 국유화에 실패했다.

1970년, 칠레는 격변했다. 민중연합이란 선거 연합의 후보인 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턱걸이로 당선되어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민중의 열망이 만들어 낸 승리라 하면 기분 좋겠지만 아옌데의 득표율은 사실 옛날보다 더 떨어진 상태였다. 중도파와 우파가 지난 대선처럼 힘을 합치지 않아 표가 갈려 얻은 승리란 게 더 정확하다.

취약점은 금새 노출됐다. 민중연합이란 선거연합은 대통령을 배출해 냈지만 의회에선 다수세력이 아니었다.

1964년 칠레에는 부르주아 개혁파인 프레이 정권이 들어서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프레이 정권은 사회/경제적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의 개혁은 실패했고, 치솟는 인플레와 파업 등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나빠졌다. 1968년, 칠레 노동조합연맹은 프레이의 파업금지령에 맞서 전국적인 파업을 단행하는 등 직접행동에 나섰다.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투쟁을 더욱 확산시켰다. 1969년에는 파업 1,939건에 참가자 23만 725명, 1970년에는 파업 5,295건에 참가자 31만 6,280명으로 늘어났다.

그런 것관 별개로 상당 부분 운이 좋아 집권한 아옌데 정권의 정책은 자신을 지지해준 여러 세력들(노동자/중간계급/자본가 일부)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합법적인 방법으로만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1971년 7월의 국유화조치(구리, , 질산염, 섬유산업 및 은행 등), 대대적인 사회개혁(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66% 인상, 400만 어린이에 대한 우유 무료급식, 실업자구제 등), 그리고 칠레 농민의 절대적 염원이었던 토지개혁(3,300건의 대규모 토지몰수) 등 일련의 공세가 정부에 대한 대중적 지지의 증가와 대규모 동원에도 불구하고, 지도부는 양대 보수정당인 기민당과 국민당의 합의와 합헌주의에 기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반동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1973년 3월 총선에서 민중연합이 44%의 득표로 다수의 위치를 점하게 된 상황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군부 세력의 무력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피격당했고, 미국은 곧바로 피노체트 정권을 지지했다. 오늘날 이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여러가지 증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옌데의 사회주의적인 노선에 미국이 제재를 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리 국유화는 무효화되지 않았으나[3] 토지개혁은 거의 다 무효로 돌아갔다.


3.3. 니카라과 혁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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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화염병을 소모사 정부군에게 던지는 산디니스타 반군 병사. 화염병이 펩시인 것이 여러 모로 시선을 끈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니카라과대서양태평양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니카라과의 주요 강들은 중부 산악지대에서 시작되는데 서쪽으로는 태평양이나 마나구아호수, 니카라과 호수로 흘러들며 동부의 강들은 카리브해로 연결된다. 따라서 마나구아와 니카라과의 두 호수로 인해 카리브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자연 지형은 니카라과를 지정학적 요충지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전략적 위치 때문에 영국과 미국의 팽창주의 전략에서 니카라과는 관심과 개입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해병대를 파병하여 1933년까지 주둔하면서 실질적으로 점령과 통치를 계속하였다. 친미 정권인 아돌포 디아스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으나, 아돌포 디아스 정권은 그리 뛰어난 정치력을 가진 정권이 아니었다.

좌익 혁명 세력인 산디니스타를 비롯해 자유주의 우파까지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봉기하였으며, 쿠바 혁명과 함께 성공한 유이한 무장혁명이다. 하지만 산디니스타 정권은 상당수 원주민의 주권을 무시하는 정책을 펴서 이들의 반발을 불렀고, 이들과 미국이 지원한 세력의 연합체인 콘트라와 오랜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현재 진행형인 혁명으로, 현재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쪽 정치인인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3.4. 68 혁명[편집]


1968년, 체 게바라호치민을 아이콘으로 필두에 내세운 채, 세계 전역에선 혁명의 기운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냉전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억압받기를 싫어했다.

한때 미국의 주류 세력이었던 히피를 비롯하여 많은 인권운동이 이 시절에 있었으며, 전세계적인 규모로 펼쳐진 혁명이었다. 처음엔 소련이 배후에서 암약하여 해당 국가의 공산세력을 지원했으나, 보수화된 소련의 공산당 배후 조종은 곧 유명무실해지고 순수 민중 혁명으로 발전했다. 혁명의 중심은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그리고 유럽이었다.

대한민국에선 이 시점부터 장발족이 생겨났고 미니스커트가 도입되었으며, 중국에선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이라는 흑역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일본에선 적군파의 반체제 무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세계적인 혁명이었다.



4. 20세기 말(1980~2000)[편집]


1980년대는 동구권이 몰락하고 공산주의 개념이 급격히 사그러들며, 이념의 대립이 사라진 시기였다. 미국의 핑퐁외교부터 소련의 개혁개방, 중국의 흑묘백묘론까지 모두 이념대립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존의 반 카우디요, 반 미국 정서에서 현실을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것은 미국발 신자유주의의 시험대로서 라틴아메리카가 올라왔다는 것이기도 했다.


4.1. 신자유주의의 대두[편집]


시작은 칠레였다. 사회주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린 친미 피노체트정권은 집권하자마자 칠레월드컵 경기장에서 학살을 저지르는등 가공할 만한 인권탄압을 자행한다.

이들은 채찍과 함께 던질 당근으로 경제를 선택했고,[4]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다. 칠레 내부에서 국한될 이 신자유주의 정책은 1982년 외환위기 이후에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금리가 저렴할 때 외채를 빌려 쓰다가 1980년 금리가 18%로 치솟게 되자 외채가 크게 불어나게 되며넛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외채를 갚지 못하게 된 것이다.(이것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가 얼마나 많은 외국자본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1982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중남미 각국으로 투자된 외국인 자금이 속속 이탈하기 시작하면서 열병처럼 번지기 시작했고, 이로인해서 중남미 각국에서는 속속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외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중남미 각국이 차관을 요청하자 미국과 국제금융기구(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 등)들은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강요해서, 모든 나라에서 긴축재정, 공기업 민영화,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가 강도 높게 추진되어 버린다. 나중에 있을 한국의 1997년 외환위기 / IMF의 경제개편 요구와 큰 차이가 없었다.

사실 이 정책은 1970년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시행되기 시작했는데 칠레에서는 그런대로의 성공을 거두나[5] 아르헨티나에서 처절하게 실패하게 되는데 중남미 각국에서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민주정부가 속속 들어서면서 이러한 외채위기가 덧이 되었고 독재정권 당시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외채가 지속적으로 불어나는 상황속에서는 무력할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쿠바를 빼면 죄다 굴복하는 처지[6]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사회복지예산은 줄어들게 되었던데다가 실업률과 빈곤율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았을때 소득수준이 20년간 정체되고, 소득분배는 오히려 후퇴하게 되었고 이는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환멸만을 키우는 작용을 하게 되었다.


4.2.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편집]


사파티스타는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장 언론 집단으로, 반정부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엄연한 테러단체이다. 1994년 발흥한 이 집단의 특이점은 지금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무장 봉기와는 여러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친미 카우디요 정권(칠레의 피노체트 등)과 반미 쿠데타 or 민중봉기 정권(쿠바의 카스트로 등)으로 크게 둘로 나뉘어 있던 라틴아메리카 정치사에서 벗어나 있던 단체라는 것이다. 이들은 친미도 반미도 아닌 반세계화와 반신자유주의를 들고 나왔으며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낙후된 사람들을 위한 인도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아나키즘을 표방했다.

둘째로, 이들은 평화혁명과 민주주의 선거 방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 페루의 아주 유명한 농민게릴라조직인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빛나는 길)라는 무장집단은 폭력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복 폭력을 자행하면서 원주민 농민들로부터 고립되어 쇠퇴하고 만다. 마약 게릴라, 납치 게릴라라고 불리는 콜롬비아혁명군(FARC)은 지도부가 사실상 궤멸상태로 치달았다. 민중은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며 무장쿠데타를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파티스타는 자신의 입장에 맞는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평화가두행진을 진행하고 인터넷과 PC통신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퍼트려 나갔다.

셋째로 이들은 정권을 노리지 않았다. 애초에 이들은 무장 봉기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1994년 1월 1일 봉기한 것도 이목끌기식 쇼일 뿐, 바로 정글과 산악지대로 후퇴한 후 눈에 띄는 게릴라 활동이라곤 하지도 않았다. 멕시코시티로 진군하겠다고 으름장을 논 1999년의 멕시코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소규모 원주민 자결주의를 원하며 2007년에 드디어 무장을 포기하고 민간단체로 회귀한다.

민주주의에 실망하여 우익 정권이 큰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던 남아메리카에 사파티스타와 같은 무장집단은 상당한 충격이었고, 곧이어 21세기 선거혁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념과 군국주의의 20세기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5. 21세기 : 라틴아메리카 진보 돌풍[편집]


21세기 들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된 정권의 90%이상은 전부 좌파 집단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첫째는, 신자유주의의 인기가 시들했기 때문이다. 절대빈곤은 심화되고 빈부격차는 답이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었으며 국내의 자본은 모조리 유럽과 미국으로 빠져나갔다.

각종 국유시설을 모조리 민영화하다보니 물값이 기름값보다 비싼 상황이 되었으며, 칠레와 베네수엘라는 생필품 등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받지 못해 1989년부터 2000년까지 헬게이트가 열렸다. 라틴아메리카는 이번엔 총보다 선거 용지로 자신들의 의지를 피력하였으며, 21세기 라틴아메리카는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진보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차베스를 계승한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은 실시간으로 헬게이트를 갱신하고 있으며 201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좌파의 인기가 식어가는 추세다. 그 유명한 반미국가 베네수엘라도 2019년부터 친서방과 반서방 성향의 인물들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파 정권들의 집권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진 못했는데 도널드 트럼프 정권 이후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대외정책이 대거 흔들리기 시작하고 생활 물가 인상으로 인해 오히려 기껏 들어선 아르헨티나의 우파 정권이 다시 좌파 연립정권에게 대선에서 패배했고 칠레에서는 대중교통 요금 상승 등의 경제 문제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볼리비아, 브라질의 경우에는 연이은 우파 대통령들이 지리멸렬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한심한 리더십을 보여주면서 역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19 대 유행 이후에는 더더욱 타격이 커서 볼리비아는 결국 다시 좌파가 정권을 탈환했고 브라질은 주정부들이 보우소나루 정권의 신뢰를 철회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며 다시 흔들리고 있다.

최소한 2020년대 이후의 시점에서 볼 때, 미국과 서방권의 설레발과 달리 라틴아메리카의 우파 정권은 왜 21세기 초에 좌파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는 지를 잘 보여주는 무능력함을 바로 보여주며 위기를 맞이하였고 여기에 우파 세력을 지원하던 미국이 트럼프 정권의 줏대없는 행보로 인해 스스로 영향력을 갉아먹으면서 코로나 19 판데믹 이후에는 오히려 라틴아메리카 우파 세력이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다.

5.1. 브라질, 룰라[편집]


다만 룰라는 아래에 나오는 인물들에 비하면 어느정도 중도좌파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후 브라질은 지우마와 미셰우를 거쳐 보우소나루라는 극우성향의 대통령이 들어서게 되면서 브라질의 좌파는 사실상 몰락하고 말았다. 다만 코로나 관련 행보에서 엄청난 실책을 보였기 때문에 다시 좌파가 힘을 얻을지도 모른다.


5.2.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편집]


한때는 반제국주의를 바라는 국민들의 민심과 석유를 이용한 복지를 제공해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석유말고 다른곳에 신경을 쓰지 못한탓에 경제를 몰락시키고 말았으며 헌재에도 후임 니콜라스 마두로가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으며 2019년에 들어서는 2019년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라는 혼란까지 들어서고 말았다 얼마나 막장이면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친서방 성향인 후안 과이도를 인정했을 정도다.


5.3.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편집]


모랄레스는 2000년대 중반 미국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민중들의 바람을 받아 당선되었으며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가까이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했으며 경제정책등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2019년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일어난 쿠테타로 모랄레스 정권이 축출되었으나 이후 들어선 우파 과도정부가 한심한 리더십과 원주민 차별 등의 막장행각만 벌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원주민계 정당에게 패배하였다.

6. 비판[편집]



6.1. 좌파 세력에 대한 비판[편집]


그렇다면, 라틴 아메리카는 진정으로 반미 좌파 정권이 해방했는가? 그 답은 '아니오'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일부 반미 좌파 정권들이 집권한 국가들은 그 이전의 친미 독재정권들과 다를게 없는 독재적 행위를 아직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나아진 게 있다면,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쿠바를 제외한 반미 좌파 정권은[7] 우고 차베스처럼 대중주의기반으로 전횡을 하는 정권[8]은 있을지언정 어쨌든 민주적인 선거로 집권한 민주주의 정권이라는 특징이 있다. 사실 그 유명한 베네수엘라도 차베스가 대놓고 소환투표를 당할 정도로 선거관리면에서 아예 떵떵거릴수 있을 정도라고 할수 있다.[9]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에 대한 비판도 비슷한데, 아옌데 정권은 현실적인 능력 부족으로 그들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낙관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실은 구리에 의존할 정도로 지나치게 자원에 의존하는 경제에다 미국의 구리 보유자본 감소로 인한 구리 가격 폭락 등으로 몰락했다. 이 상황에서 아옌데 정권은 무리한 사회복지, 실업자 구제, 국유화를 시도했다. 결과는 국유화는 구리 가격 폭락과 더불어 구리 광산이 관리 불가능하게 했다. 국유화 당시에는 능력에 맞는 전문가를 임명한게 아니라 오히여 낙하산이라고 부를 정도의 이념만 맞는 사람만을 임명하는 코드 인사가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특히 외교에서도 지나친 반미 노선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나중엔 미국한테서 경제제재를 받아 친미 성향인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설떄까지 칠레는 경제가 성장을 하지못했다. 이 때문에 피노체트의 막장성은 쿠데타, 군사독재, 인권유린 등에서 찾지, 적어도 경제에 관해서는 아옌데가 피노체트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다.[10] 그나마 칠레는 2000년대 좌파정권이 들어서고도 어느정도 친미적인 모습을 지금까지 계속 보이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 더시 우파정권이 들어섰다.

그리고 중남미 내의 잘못된 사회적-정치적 구조의 폐단을 외면한 체로, 무조건 미국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멕시코를 한번 보자. 멕시코는 NAFTA 이전까지 각종 농민단체의 암살, 정치적 불안전성으로 암살이나 납치가 횡행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무역조약이 체결되자 멕시코는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미국의 매판자본이 했더라도, 어차피 외국 자본은 국가 경제의 필수요소이며 지금 멕시코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마약 카르텔 관련 문제에서도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고있다 그것을 부정하고 무조건 미국서방은 나쁘다는 식의 인식은 단순히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고립만 심화할 뿐이다.[11]

무엇보다 베네수엘라우고 차베스 정권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12] 자칭 '미제에 맞서는 차베스'는 개헌을 동반한 독재, 전제정치로 변하여 독재와 인권탄압을 저질렀다. 그는 자기 권력을 위해 베네수엘라의 제 2의 국민돌격대를 만들었으며, 의회를 친 차베스파로 대체했다.[13] 베네수엘라에선 누군가가 장권을 비판만 하면 전부 다 미제의 꼭두각시로 일관한다. 차베스와 후임인 마두로는 권력욕만 넘치는 독재자이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실제로 차베스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 2 %였다.[14] 선심성 복지와 포퓰리즘의 결과다. 물론 우고 차베스 이전에도 석유 의존도가 엄청난 수준이었으며 빈부격차가 엄청났으며 1960년대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을정도로 경제가 막장인 상태였지만, 우고 차베스는 2000년대의 고유가로 활황을 맞이해 복지 정책을 이것저것 추진했음에도 빈부격차 해소와 나쁜 치안사정이 해결되지도 않았다.

2015년 들어 유가하락과 경제불황이 본격화되면서 석유를 비롯한 자원에만 지나치게 의존했던 남미 국가들은 하나같이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룰라의 정치적 후계자인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은 2016년 2월, 지지율 5%를 기록하다가 탄핵당하여 파면되었으며 이후 정치적 혼란을 거듭한 끝에 다시 우파 정당이 집권했다. 차베스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여당은 2015년 총선거에서 의석의 2/3를 야당에게 내주는 대패를 당했다. 그러나 2018년 현재까지 기어이 정권은 틀어쥐고 있는 중이다. 그냥 일개 정당의 선거 참패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2018년 현재의 베네수엘라는 단순히 '어려운 환경' 따위로 표현할 상황이 아니다. 국민은 난민이 되어 이웃나라로 달아나고, 돈은 짐바브웨 달러급으로 무가치해지는 지옥을 겪고 있는 중이다.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권의 경제정책 비판에 대해서는 포퓰리즘의 거짓 약속- 라틴아메리카, -희망에서 좌절의 대륙으로- 라는 제목의 책을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저자 세바스티안 에드워드는 칠레에서 태어나 칠레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Chicago Boys이며, 에드워드 가문은 19세기부터 칠레 은행가와 언론가를 주물러 온 칠레 최상류 계급의 대표다.[15]


6.2. 독립운동사에 대한 비판과 보수파 비판[편집]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운동은 미국과 유럽에서의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대다수는 본토인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국력과 위신이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개박살이 난 것을 계기로 본토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자기 나와바리를 마음껏 지배하겠다는 식민지 출신 지배층들의 욕망으로 인해 벌어진 독립이었기에 독립 이후 이들 대지주들이나 정치귀족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지고 이들끼리 서로 싸우거나 이합집산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쿠테타를 비롯한 혼돈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스페인이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해 세운 칙령을 무력화했는데 여기에는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칙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나마 멕시코와 같이 원주민들이 식민지 건설에 적극적인 도움을 준 경우 그나마 원주민들의 정치세력이나 문화가 남을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들은 제어해야 할 제국 본토세력이 소멸하면서 신생 국가들의 공격에 무방비 노출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결국 신생 독립국들에 의해 대부분이 말살, 추방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이 시절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학살은 미국과 비교해서도 잔인함이 떨어지기는 커녕 더 심한 경우도 있었으며 이들 독립세력은 혼혈 여부와는 별개로 스스로를 백인으로 생각하였기에 인종차별주의가 라틴 아메리카에 만연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16]

소위 신자유주의 같은 미국식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세력도 비판을 피하기 힘든데 모든 산업이 발전한 미국과 달리 라틴아메리카는 1차 산업만이 발달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미국식 경제정책을 도입한 결과 하층민과 최상류층의 양극화 현상이 발생했고 너무 많은 공공부분을 민영화하면서 물가 안정과 복지 부분이 허약해져 중하층 이하의 국민들에게 큰 피해가 생겼다. 이 과정에서 이권을 많이 벌어먹은 게 그들과 커넥션이 있던 미국, 유럽의 기업들이었던 건 덤. 당장 우파 쪽에서 비판하는 국유화 문제는 당시 1차 산업 위주 국가였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입장에서 봤을 때 1차 산업에 종사하는 국민들의 수부터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데 임금부터가 적게 나오고 수익 상당수도 회사가 먹어치우는 구조[17]라 재정 확보를 위해서는 국유화 시도라도 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었던 측면이 있다. 사실 라틴 아메리카의 국유화/민영화 문제는 좌파건 우파건 장기적인 비전과 운영 계획 없이 국유화/민영화를 해 버린 것이 공통적인 문제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볼리비아의 수도 민영화 사건으로 에보 모랄레스 등장 이전 볼리비아 집권세력이 원주민들의 인권에 관심이 없는 것 까지 겹쳐 수도 요금이 폭증하는 것을 방관하면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미국식 자유주의를 가장 잘 받아들였다는 칠레도 2010년대 후반에는 요금 인상 등의 물가 문제로 인해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카를로스 메넴 정권이 무리한 개혁을 하다 오히려 디폴트로 인해 국가 경제가 붕괴되는 처지가 되었다.[18] 멕시코의 경우에는 NAFTA로 인해 공동농장이었던 에히도가 폐지되면서 미국의 멕시코 농지 점유가 쉬워지고 멕시코의 농민 계층이 더욱 빈곤해지는 결과를 초래했고[19] 이는 멕시코 육로로 올라오는 마약 카르텔들에 들어가면서 카르텔들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 꼴이 된다. 결과적으로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비난했던 '농민 반군과 좌파 게릴라들이 날뛰는' 멕시코는 '전 세계로 마약을 흩뿌리는 마약 카르텔'이 대체하게 된 것.

이렇듯 본인들에게도 일정 책임이 있으면서도 우파 세력은 포퓰리즘, 좌파의 실책만을 문제삼아 비난해댔으며 자신들의 잘못은 침소봉대하다 본인들이 정권을 잡자마자 대안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한심한 리더십을 보여주기만 했다.


6.3. 미국, 유럽 등 외국 개입에 대한 비판[편집]


물론 미국이나 유럽 열강들도 현재의 라틴 아메리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영전쟁 이래 외침이 덜 했던 미국과 달리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해방 이후에도 이 지역을 탐낸 영국,[20] 프랑스,[21] 스페인,[22] 독일[23] 등 내로라 하는 유럽 열강들은 독립전쟁 시절에도, 독립 전쟁 이후에도 내전에 개입하거나 이권과 영토를 요구하며 침공해 오는 등 라틴아메리카 권역 국가들을 계속 공격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먼로 선언을 이리저리 개조해 가며 라틴 아메리카 권역을 자신들의 베타적 이익지대라고 주장하엿고 국력이 신장되고 태평양으로 영토를 넓혀가면서 멕시코, 카리브 해와 중앙아메리카 권역 국가들을 필리버스터[24]과일 회사 등을 동원하여 군사적, 경제적으로 공격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굴복한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도 원주민의 인권 문제나 보호에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당장 미국부터가 자국의 원주민들을 보호구역으로 추방해가며 성장한 국가였고 유색인종이나 원주민 거주 지역이 미개발지가 많았던 데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는 암묵적으로 백인우월주의가 대세였기 때문에 유색인이나 원주민을 탄압하는 정권들을 지지했다. 이 떄문에 원주민, 유색인종, 혼혈 인구가 많은 국가일수록 일반 국민들의 반미정서가 매우 강하다. 특히 미국은 현재까지도 사관학교 유학생 출신 장교진들과 CIA, 식량기업 등으로 연결된 커넥션이 작동하고 있으며 현재진행형으로 라틴아메리카 정세에 개입중이다.

냉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칠레의 경우에는 어지간한 유럽 국가와 비교될 정도로 안정적인 정치로 유명한 국가였으나 아옌데가 좌파라는 이유만으로 쿠테타를 압박했고[25] 이를 거부한 칠레 군부가 저항하자 피노체트를 앞세워가며 저항을 분쇄하고 강제로 정권을 뒤집고 이를 시작으로 다른 라틴아메리카 정권의 쿠테타를 지원하고 국민들을 탄압하는 것을 적극 협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미 CIA 지부는 많은 라틴 아메리카 인들을 탄압하는 데 적극 협조했으며 카르텔과 결탁해 마약을 재배해 미국에 팔아먹는(!) 행위를 일삼았다.

냉전 이후에도 이는 다르지 않아서 멕시코는 NAFTA로 인해 가맹국 중 가장 피해를 보는데도 불구하고[26] 워싱턴은 멕시코의 사회적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을 방기하거나 조장했고 이는 마약 카르텔의 성장과 미국으로 입국하는 라틴 아메리카 인구의 증가를 낳게 된다. 중미랑 남미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존 볼턴이 폭로했던 2019년 베네수엘라 정권 전복 시도부터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던 미국의 전형적인 라틴아메리카 정권 전복 절차를 그대로 밟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27]


6.4. 결론[편집]


결과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적 문제를 보면 상당히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게 꼬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관련된 주체가 모두 문제가 꼬이도록 잘못을 저지른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꼬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겠지만 서로간의 불신이 쌓이고 쌓인 상황이라 어려운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좌파도 우파도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도 단기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잘한것이 없으며 오히려 라틴아메리카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만 했다.

[1]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식 명칭이었던 남아메리카 합중국과는 다르다.[2] 이 전쟁에서 아시아/태평양에서는 필리핀 득템.[3] 아이러니한 사실은 피노체트하에서 다른것은 민영화가 착착 진행된 반면에 구리국유화만큼은 변하지 않아서 이후로 칠레 정부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4] 이러한 점은 한국의 박정희전두환과 유사한 면이 있다.[5] 하지만 이 성공이라는것도 다른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낫다는 정도로 해석하는것이 타당하다. 피노체트 후반기 실질임금은 거의 동결수준을 넘어 반토막이 날 정도였기 때문. 다만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페루처럼 초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 판이 아니라서 성공이라고 평가하는 것.[6] 사실 쿠바도 굴복만 하지 않았지 1990년대 초반 동구권 붕괴와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서 교역이 꽉 막히면서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어 실질적으로 구조조정 작업을 시행한것은 마찬가지였기는 했다. 단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복지제도의 붕괴와 실업자 양산만 되지 않았을 뿐.[7] 역시 쿠바도 미국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고있다 국민들이 정권을 뒤집으려 하지 않는이상 친미적 모습을 보이는것을 그대로 내버려놓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미국과의 거례는 없어도 암매장으로 미제상품들이 들어오고 있다.[8] 프랑스 4공화국 시절의 샤를 드 골과 비슷하다.[9] 대신 이쪽은 친차베스파와 반 차베스파간의 물리적인 폭력이 판을 쳤지만 말이다.[10] 피노체트가 군사독재와 인권탄압으로 악명높았지만 적어도 경제와 외교에서는 성과를 거두었기에 칠레 내에서 지지자가 있는것이다.[11] 물론 외국 자본도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하게 받아들여야 의미가 있는거지 정경유착 등으로 인해 쓸개까지 다 빼주는 식의 외국 자본 도입은 하등 도움이 안된다. 그 좋다는 외국 자본 받아들인 쌍용자동차가 뭔 꼴이 났는가. 하지만 2007년 차베스가 오리노코 벨트의 개발을 원하는 해외 석유 기업들을 전부 내쫓고 국유화한 일은 10년 뒤 베네수엘라를 파탄으로 몰아넣은 최악의 자충수로 판명났다. 베네수엘라/경제 항목 참조.[12] 여기서의 고립은 외교적인 고립이 아니라 자본적인 고립에 가깝다. 사실 국제적인 고립이라고 그러기엔 남미지역에 좌파가 다수정부를 구성한지라 굳이 고립정책을 펼 필요도 없다.[13] 헌데 이건 1999년 제헌의회 소집건이라면 모를까 2005년도 총선때의 야권 보이콧은 그냥 야당의 자충수에 가깝다.[14] 하지만 2002-2003년도의 쿠데타 미수사건과 자본파업으로 까먹은 몫이 엄청나다보니 그 만큼의 경제성장률을 까먹어서 실질적으로 그보다 높다.[15] 물론 비판하는 쪽에서는 미국이 평소 라틴 아메리카의 '후진성'을 비난하는 것을 답습한다는 평이 많았고, 실제로도 그런 내용이 많다.[16] 거기다 그러면서 독립 이후에는 아즈텍이나 잉카, 마야, 마푸체, 과라니 같은 자신들이 속한 나라에 존재하였던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과 부족들의 후예를 자처하기도 했다(...).[17] 악명높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같은 경우처럼, 아예 임금을 돈이 아닌 회사 쿠폰으로 줘서 회사가 제공하는 의식주를 사게 만들고 임금을 회수하는 악랄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과정이 대규모로 지속되면 자체 산업 역량도 아작나고 농경지가 식량 작물이 아닌 상업 작물만 키우게 되니 농사를 짓는데 식량은 모자르게 되는 악순환도 발생한다.[18] 이른바 좌파식 경제정책을 비난하며 시장 방임에 맡기라는 보수주의 경제학파 세력은 메넴의 실패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거나 오히려 메넴을 포퓰리스트로 몰아가는 적반하장을 보이고 있다.[19] 통계를 보면 멕시코 농업의 경제적 수익은 나아지는데 극빈층은 오히려 늘어나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다.[20] 해방 이후부터 끈질기게 코노 수르와 카리브에서 영향력을 늘리려 시도했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지속적으로 충돌했다.[21] 아이티에게 독립으로 인한 손해 배상을 요구해 기어이 관철시켰고 멕시코 제국 건설을 시도하는 등 지속적으로 개입했다.[22] 스페인은 진지하게 이 지역을 자신들의 '국토'로 생각했기 떄문에 오랜 세월을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다시 수복하려고 시도했다.[23] 독일은 통일 이후 카리브 해역에 식민지를 확보하려 시도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참전을 결정한 것도 독일의 신대륙 영향력 확보 시도로 인한 갈등이 치머만 전보 사건으로 폭발했기 떄문이다.[24] 카리브 해역 일대에서 해적질을 하던 미국인들의 사설 무장 조직으로 의사 진행 방해 행위를 이 해적집단에 빗대서 부른 게 오늘날의 필리버스터라는 정치 용어가 되었다.[25] 아옌데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이 나오고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가 칠레 헌법에 의거한 법적 정당성을 어긴 적은 없었으며 그를 선거나 다른 법적 절차도 아닌 쿠테타로 숙청한 것은 당시 국제적으로도 손 꼽을 수준이었던 칠레의 민주주의를 탄압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26] 멕시코가 여전히 농업과 광업 같은 1차산업 종사 인구가 많은 국가인데도 미국과 캐나다의 농작물이 너무 싸게 들어와서 농민들이 큰 피해를 입는 상황이다.[27] 당장 에보 모랄레스를 축출한 볼리비아 쿠테타부터가 베네수엘라 쿠테타 계획과 똑같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