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트루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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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트루히요
Rafael Trujillo

파일:Rafael Trujillo.jpg

이름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
(Rafael Leónidas Trujillo Molina)
출생
1891년 10월 24일
도미니카 공화국 산크리스토발
사망
1961년 5월 30일 (향년 69세)
도미니카 공화국 산토도밍고
정당
도미니카당
신체
180cm, 74kg
종교
기독교(가톨릭)
배우자
마리아 마르네티스 데 트루히요
1. 개요
2. 생애
2.2. 파슬리 학살(Parsley massacre)
2.3. 베네수엘라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2.4. 미라발 자매(Mirabal sisters) 사건
3. 긍정적 면모
4. 기타
5. 대중문화에서



1. 개요[편집]


도미니카 공화국의 제36, 39대 대통령, 독재자로, 육군사령관으로 있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어 32년간 독재정치를 했다.

수도 재건을 비롯하여 산업 진흥, 시설 확충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중남미 일대에서 악명높았던 독재자로 현재까지도 그 악명이 남아 있다. 세계기록유산에도 "도미니카 공화국의 인권 투쟁 및 저항에 관한 기록유산"이라고 해서 트루히요 정권의 악행과 당시 민주화 투쟁에 대한 기록물들이 등재되어있으며, 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 한동안 도미니카 공화국하면, 바로 트루히요가 연상될 정도였다고 한다.


2. 생애[편집]



파일:Rafael Trujillo 2.jpg

젊은 시절. 육군 준장으로 복무하던 때의 모습이다.
1891년 10월 24일에 산크리스토발의 소규모 상인 가정에서 백인+흑인의 혼혈아로 11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10년부터는 가축 절도, 수표 위조, 우편 강도 등을 일삼다가 몇 달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고, 1916년에는 대놓고 폭력적인 강도 갱단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얼마 안 가 개심했는지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들을 감시하는 일을 맡다가 1918년에 '국가 방위군'에 입대한 트루히요는 1927년 육군 준장이 되어 대통령 H.바스케스 밑에서 육군 사령관으로 있었다. 1920년에는 16세도 안 된 소녀를 강간하고 갈취한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미국은 1904년, 먼로 독트린에 따라 도미니카에서 유럽 채권단을 배제하고 미국의 절대적 지배력을 추구했다. 미국은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 도미니카를 점령해 내정 간섭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젊은 시절부터 미국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미국 해병대의 훈련을 받은 육군사령관 트루히요는 1930년 2월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 그해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고는 1930년 8월 16일부터 집권을 시작했으며 미국의 후원 아래 도미니카 민중들을 제멋대로 억압하면서 32년 간에 걸친 독재 정치를 폈다. 트루히요는 수도 재건을 비롯하여 산업의 진흥, 여러 시설의 확충 등을 실행하였으며 1932년 국회로부터 대원수의 칭호를 받았다.

트루히요는 자신의 정당인 도미니카당을 도미니카 공화국 유일의 합법 정당으로 삼고 모든 공무원들로부터 급여의 10%를 강제로 도미니카당에 기증하도록 해 막대한 정치자금을 마련했다. 1930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트루히요는 반체제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전면적인 테러를 실시했다. 라파엘 트루히요가 참여하기도 했었던, '파울리노(Miguel Angel Paulino)'가 이끄는 폭력 조직인 '42단(La 42)'이 도미니카 내에서 온갖 테러를 자행했다, 일명 죽음의 차에 총으로 무장한 폭도들을 태우고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고 하며, 트루히요는 보다 철저한 독재를 위해 군정보부 SIM(Servicio de Inteligencia Militar)를 만들어 정보 수집과 도미니카의 야당 인물등과 자신에게 반항하는 정치인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거나 고문한 뒤 살해했고, 군 복무를 거부하는 사람도 누구든 투옥되었다. 또한 트루히요는 군정보부로 언론을 통제하여 재갈을 물리고 도미니카 공화국에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이렇게 트루히요가 재임할 동안 아이티 국경 인근에 살던 최소 1만 7천 명의 아이티 주민들을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1] 그리고 트루히요는 1956년 2월 27일에 자신의 통치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쓴 스페인인 헤수스 갈린데즈[2]를 동년 3월 12일에 뉴욕 맨해튼에서 납치해서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끌고 갔고, 이후 갈린데즈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트루히요는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이미 1938년 시점에 트루히요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식품, 제조 및 통신 회사의 절반을 개인적으로 소유했으며, 트루히요의 가족은 대규모 가축 농장과 도미니카 전체 농경지의 1/3에 달하는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며 고기와 우유, 소금, 설탕, 담배, 목재사업도 독점하며 총 111개의 회사를 소유했고[3], 1960년까지 트루히요가 소유한 재산은 8억 달러(2023년 기준으로 76억 달러)에 달해 트루히요는 세계 6대 부자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트루히요는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2천 벌의 옷과 만 개의 넥타이를 수집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트루히요의 반인륜적인 독재 정치에도 반공주의 정책을 펴는 트루히요를 이용할 수 있었기에 그에게 계속해서 지원을 해주었다. 특히 일본 제국이 진주만 공습을 실시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히요는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또한 전후에는 미국을 따라 유엔의 창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친미정책으로 인해 중남미의 코스타리카, 베네수엘라와 같은 사회주의 성향의 국가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트루히요는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4], 니카라과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등의 독재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서로서로 협조했다고 한다. 1952년에는 동생 엑토르 트루히요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으나 실제로는 라파엘 본인이 국정농단을 하며 계속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치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막대한 재산과 이권을 독점하는 동시에 자신의 친척이나 가족들을 주요 공직에 앉히고 자신의 반대파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집권 말기에는 후술할 베네수엘라 대통령 암살 미수와 '미라발 자매 사건'을 일으키며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갔으며, 이런 상황 속에서 트루히요는 1960년 8월 3일에 엑토르의 사임을 강요하고는 당시 부통령이던 호아킨 발라게르(Joaquín Balaguer, 1906~2002)를 대통령에 앉혔다.

그러던 1961년 5월 30일, 트루히요는 고향 산크리스토발에서 자신의 쉐보레 벨 에어 승용차를 몰고 달리던 도중 CIA의 후원을 받은 무장괴한에게 급습당해 기관총 7발을 맞고 암살당했다.

2.1. 우상화[편집]


1936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의 이름을 산토도밍고에서 '트루히요의 도시'를 뜻하는 '시우다드 트루히요(Ciudad Trujillo)'로 개칭했고[5], 해발 3,098m에 달하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최고봉인 '피코 두아르테(Pico Duarte)' 역시 '피코 트루히요(Pico Trujillo)'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물론 트루히요는 박사, 학사, 새 국가의 아버지, 국가의 후원자, 교회의 수호자 등 여러 칭호로 부여받았으며, 대학에 입학하려는 사람들은 트루히요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려는 사람들도 트루히요에 대한 찬양심을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했다.

물론 트루히요의 동상은 도미니카 공화국 전역에 세워졌고, 다리와 공공 건물에는 트루히요 이름이 명명되었으며, 도미니카 공화국의 모든 차량 번호판에는 '트루히요 만세(Viva Trujillo!)'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시우다드 트루히요'에는 '신과 트루히요'를 낮과 밤에 볼 수 있도록 전광판이 세워졌으며, 심지어는 교회조차 'Dios en cielo, Trujillo en tierra(천국의 신, 지상의 트루히요)'라는 슬로건을 개시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문구의 순서는 '지상의 트루히요, 천국의 신'으로 변경되었다. 물론 트루히요는 저명한 사람, 국가의 은인, 새 국가의 아버지, 최초의 군인, 최초의 건설자, 최초의 의사, 최고의 아들, 소중한 남편, 5성 대원수 등 많은 칭호로 불렸으며, 트루히요는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명패를 수천 채의 집에 배포하고는 이를 예수의 형상 옆에 배치하도록 했다.

심지어 트루히요의 지지자들은 1936년에는 트루히요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으며, 1955년 12월 29일에 트루히요의 집권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가 GDP가 1억 달러도 되지 않았을 때 무려 3천만 달러(2023년 기준으로 약 3.1억 달러) 이상을 들여 열린 '평화 박람회'에서 반문맹이었던 트루히요의 아내를 '작가이자 철학자'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2.2. 파슬리 학살(Parsley massacre)[편집]


제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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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 기술.
(20세기 이전에 벌어진 대표적인 제노사이드 사례로는, 인디언 전쟁미국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 있다.)
※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사건이라면 ⚖️ 표시.
사건 목록
세부 사항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홀로도모르 [!]
,1932 ~ 1933,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파슬리 학살
,1937,
발생 위치}}} 파일:도미니카 공화국 국기.svg 도미니카 공화국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제2차 세계 대전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홀로코스트 ⚖️
,1941 ~ 1945,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발생 위치}}}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 크로아티아 독립국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관련 단체}}} 체트니크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발생 위치}}}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발생 위치}}}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발생 위치}}} 파일:방글라데시 국기(1971-1972).svg 동파키스탄
이키자
,1972,
발생 위치}}} 파일:부룬디 국기.svg 부룬디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발생 위치}}} 파일:우간다 국기.svg 우간다
관련 인물}}} 이디 아민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킬링필드 ⚖️
,1975 ~ 1979,
발생 위치}}} 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민주 캄푸치아
재판}}} ECCC
관련 단체}}} 크메르 루주
수용소}}} 뚜올쓸라엥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발생 위치}}} 파일:짐바브웨 국기.svg 짐바브웨
관련 인물}}} 로버트 무가베
안팔 학살
,1986 ~ 1989,
발생 위치}}} 파일:이라크 국기(1963-1991).svg 이라크 쿠르디스탄
관련 인물}}} 사담 후세인
이사크 학살
,1987 ~ 1989,
발생 위치}}} 파일:소말리아 국기.svg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관련 인물}}} 시아드 바레
보스니아 전쟁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스레브레니차 학살
,1995,
발생 위치}}} 파일:스릅스카 공화국 국기.svg 스릅스카 공화국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발생 위치}}} 파일:르완다 국기(1962-2001).svg 르완다
관련 단체}}} 후투족 | 투치족
제1차 콩고 전쟁 중 후투족 학살
,1996 ~ 1997,
발생 위치}}} 파일:자이르 국기.svg 자이르 키부
밤부티인 학살
,2002 ~ 2003,
발생 위치}}}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1997-2003).svg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주
다르푸르 학살
,2003,
발생 위치}}} 파일:수단 공화국 국기.svg 수단 공화국 다르푸르
관련 인물}}} 오마르 알바시르
야지디 학살
,2014 ~ 2019,
발생 위치}}} 파일:이라크 국기.svg 이라크 니나와주 Sinjar
관련 단체}}} ISIL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발생 위치}}} 파일:미얀마 국기.svg 미얀마 라카인주
[!] 논란의 여지가 있음.



트루히요는 아이티 출신의 농장 노동자들이 도미니카 농민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자신의 지지율이 떨어진다고 믿으며 도미니카 공화국 내에서 반아이티주의를 조장해왔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1937년 10월 2일에 트루히요는 자신을 찬양하는 파티 속에서 '아이티인들이 도미니카 국경 지역 주민들로부터 소와 농작물을 훔쳤다'는 보고를 듣고는 자신을 찬양하는 파티 속에서 술에 취한 채 '해결책', 즉 도미니카군에게 아이티 국경 인근 지역인 시바오(Cibao)에 사는 모든 아이티인을 학살하도록 지시했다.[6] 취중의 대통령의 지시를 하달받은 도미니카군은 라이플, 마체테, 도끼, 삽, 칼, 총검으로 잔인하게 죽이거나 손과 발을 묶고 바다에 던지는 식으로 아이티인을 학살했으며, 심지어는 크메르 루주마냥 아이티인 아이들을 공중에 던지고는 총검으로 꿰거나 아예 바위와 나무 줄기에 패대기쳐 죽이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살해된 희생자 대부분의 시신은 바다에 유기되었다.

게다가 도미니카군은 고립된 지역에서 집단 학살을 해서 목격자가 없거나 소수의 생존자만 남은 학살이 흔했으며, 이 학살의 영향으로 도미니카 국경에 거주하던 거의 모든 아이티인이 살해당하거나 강제로 국경을 넘어 아이티로 도피해야 했고, 강을 건너 아이티로 도피하려다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 학살에는 '파슬리 학살'이라는 이색적인 이름이 붙었는데, 사실 이 이름의 유례에는 관동대학살과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 도미니카군은 아이티인들을 학살하면서 어두운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파슬리 가지를 보여준 뒤 이것이 뭔지 알아봐달라며 '파슬리(perejil)'라는 말을 큰 소리로 발음하게 하는 십볼렛으로 아이티인인지의 여부를 구분했는데, 만약 그 사람이 'r' 부분을 '스페인식'(무성 연구개 마찰음)으로 발음하면 도미니카인으로 간주하고는 살려두었으나, '프랑스식' '크레올식'(유성 연구개 마찰음)으로 발음했으면 아이티인으로 간주하고 처형했기에 이 학살은 '파슬리 학살(Parsley massacre)'이라는 별칭까지 붙었다.[7][8] 1937년 10월 2일부터 10월 8일까지 벌어진 단 6일간의 학살로 아이티 당국이 인정한 수치만 12,168명, 최대 수치로는 3만 5천 명의 아이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지탄을 받은 트루히요는 대외적으로 "나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우리 국민의 희망에 반하여 고위직 재선을 거부합니다."라고 말하며 '사생활로의 복귀'를 선언했고, 1938년에 있을 예정이었던 대통령 선거 출마를 포기하게 되어 1942년까지 잠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동안 도미니카의 대통령직은 부통령이던 하신토 페이나도(Jacinto Peynado, 1878~1940)가 물려받았으며, 페이나도가 1940년 2월 24일에 병으로 물러나고 동년 3월 7일에 사망하자 그 뒤는 페이나도 시기의 부통령이던 마누엘 트론코소 데 라 콘차(Manuel Troncoso de la Concha, 1878~1955)가 이어받았다. 물론 트루히요는 그 뒤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1942년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3선에 출마하자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 당선되어 동년 5월 18일에 다시 대통령으로 등극한다.

당시 도미니카 공화국과 협력 관계를 맺으며 재정적 지원을 받아온 아이티의 대통령 스테니오 빈센트(Sténio Vincent, 1874~1959)는 처음에는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외교 관계 악화를 우려하며 이 학살을 공론화하는 것을 금지했고, 오히려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사이의 좋은 관계는 어떠한 손상도 입지 않았음을 선언합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사건을 덮으려 했으나, 얼마 안 가 아이티 정부는 마음을 고쳐먹고는 학살에 대한 국제 조사를 촉구했다.

학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던 트루히요는 1938년 1월 31일에 미국의 중재로 워싱턴 D.C.에서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간의 이주를 금지하는 법률을 수립하며 도미니카 공화국이 아이티인 피해자들에게 75만 달러(2023년 환율로 약 16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합의를 했으나[9], 그 금액은 얼마 안 가 52만 5천 달러(2023년 환율로 약 1120만 달러)로 줄었다. 이로 인해 원래 학살의 생존자들에게는 30달러(2023년 환율로 약 641달러)의 보상금이 지불될 예정이었으나, 아이티의 관료들이 이 보상금을 모조리 빼돌리면서 아이티에 도착한 생존자들에게 실제로 지급된 보상금은 고작 2센트, 2023년 환율로도 43센트라는 거의 안 준 것만도 못한 수준의 푼돈이 지급되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처참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에게 고작 500원짜리 동전 하나 던져준 꼴인 셈.


2.3. 베네수엘라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편집]


심지어 트루히요는 문자 그대로 외국의 현직 대통령을 암살하려고까지 했다. 실제로 트루히요는 자신의 독재를 비판하며 도미니카인 망명자들을 도와준 베네수엘라의 로물로 베탕쿠르(Rómulo Betancourt, 1908~1981) 대통령을 경멸하며 베탕쿠르를 전복시키려는 베네수엘라인 망명자들을 지원해줬고, 이러한 개입 패턴으로 인해 베네수엘라 정부는 트루히요에 대한 사건을 미주 기구로 가져가자 이에 격분한 트루히요는 그의 요원들에게 베탕쿠르의 차에 폭탄을 설치해 베탕쿠르를 폭사시키도록 지휘했다.

1960년 6월 24일, 카라카스의 주요 도로 중 한 곳을 지나가던 베탕쿠르의 차에서 트루히요의 부하들이 설치한 소이탄이 터지며 경호 책임자는 즉사하고 운전사는 심한 화상을 입고는 사경을 헤매다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나, 베탕쿠르 본인은 심한 부상을 입기는 했어도 살아남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세계는 트루히요의 극악무도함에 분노했고, 이에 따라 미주 기구 회원들은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를 끊고 경제 제재를 가하자고 결의했다.


2.4. 미라발 자매(Mirabal sisters) 사건[편집]


트루히요 통치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자 트루히요의 몰락의 결정타가 된 사건. 미라발 자매 문서 참조.


3. 긍정적 면모[편집]


그러나 이러한 트루히요가 시행한 정책 중 훗날 도미니카에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끼친 정책이 있는데 바로 녹화사업이다. 트루히요는 환경주의자를 자칭하면서 벌목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습지대를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였으며, 국립공원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각종 댐 건설 및 도로 공사를 취소하였다. 이 녹화사업은 사실상의 후임인 호아킨 발라게르 정권에도 이어졌고[10] 이 결과 도미니카의 산림은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 이전부터 녹화사업의 중요성을 연구한 발라게르와는 달리 트루히요의 경우 환경 정책을 추진하게 된 이유에 대해선 명확하지 않다. 순수한 개인 취향일 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트루히요의 녹화사업은 현재 공화국에게 무시할 수 없는 이익을 가져다 주는게 확실한 것은 변함이 없다. 당장 구글맵에서 옆동네인 아이티와 비교해보면 답이 나온다.

그리고 트루히요는 1947년에 도미니카 공화국의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동년 1월 10일에는 도미니카 페소를 공식 화폐로 지정해 미국 달러를 법정 화폐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동년 7월 19일에는 외채를 모두 반환했다.


3.1. 야구[편집]


본인이 야구팬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야구를 적극 권장하기도 했다. 부의 상징인 극소수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에게 야구팀을 만들 것을 권장해 수많은 지역 팀이 탄생했다. 이렇게 도미니카의 야구 인기와 저변이 갈수록 굳건히 자리를 잡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4. 기타[편집]


  • 트루히요는 생전에 일본을 몹시 흠모하여 국화꽃과 일본도에 심취했고, 메이지 천황을 존경했다고 했다. 그는 10대 소년 시절, 러일전쟁에서 동양의 소국이 러시아 제국을 패배시킨데 감격한 이후부터라고 일본에 열광적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2차 대전 때는 미국을 따라 일본에 선전포고한다.

  • 자신의 아들인 람피스 트루히요(Ramfis Trujillo, 1929~1969)를 세 살밖에 안 됐을 때에 대령으로 임명했고, 그 아들이 아홉 살이 되자 준장으로 승진시키며 람피스 트루히요는 고작 9살에 군 서열 2위가 되었다.[11][12]

  • 워낙 훈장을 매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해 별명이 '병뚜껑들'을 뜻하는 '차피타스(Chapitas)'였으며, 당시 도미니카에 살던 어린이들은 병뚜껑으로 장난감 훈장을 만들어 트루히요를 모방했다.

  • 3번이나 결혼하면서도 정부를 두며 총 8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이런 여성 편력 때문인지 집권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트루히요가 약을 먹이고 젊은 여자들을 강간했다' '임기 내내 소위 '미녀 발굴단'을 만들어 연애, 납치, 강간을 위해 자국 내 젊은 여성들 중 대상을 골라 데려 오게 했다'는 괴소문까지 돌았다.

  • 피부를 표백하고 키높이 구두를 신었으며, 나폴레옹 시대의 복식을 좋아했다고 한다.

  • 그의 손자인 람피스 도밍후에즈-트루히요(L. Ramfis Domínguez-Trujillo, 1970~)는 미국으로 망명한 트루히요의 딸 안젤리타(Angelita Trujillo, 1939~)의 자식이며, 부동산 개발업자로 일하며 부유하게 살다가 2012년에는 할아버지의 통치를 두둔하며 할아버지의 독재를 다룬 도미니카 저항 기념 박물관의 건설에 반대하며 할아버지를 기리는 박물관을 세울 계획도 세웠으며[13], 2016년에는 2020년에 열릴 도미니카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할 의사를 밝히기도 했으나, 이는 2020년 초에 도미니카 공화국 정부가 람피스 도밍후에즈-트루히요가 이중국적자라는 이유로 대통령 선거 출마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5. 대중문화에서[편집]


  •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2000년에 쓴 소설 <염소의 축제(La Fiesta Del Chivo)[14]>가 트루히요 암살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책에서 라파엘 트루히요는 가신들의 부인이나 정부를 강간하는 호색한으로 나오며, 아들 람피스는 한술 더 떠 여자를 강간한 후 살해까지 하는 막장 인간으로 묘사된다.


  •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소설 <자칼의 날>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자 살인 청부업자 자칼이 트루히요를 죽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를 높이 산 OAS측이 그에게 드골 암살을 의뢰하게 된다.

  •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그의 도미니카당의 이념이 파시즘으로 나온다. 표정이 특이하기 때문에 유저들에게 '도미니카 아저씨'라고 하면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안다.
파일:Rafael Trujillo(Hearts of Iron IV).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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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만 명이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2011년 5월 31일에 개관하여 트루히요 시대의 폭정에 대해 다루는 도미니카 저항 기념 박물관의 추산에 따르면 이는 1916년부터 1978년까지 도미니카에 있던 정치적 격변의 영향으로 사망한 사람의 총계라고 한다. 출처[2] Jesús (de) Galíndez Suárez, 1915~?. 1939년부터 1946년까지 도미니카 공화국에 체류할 동안 법학 교수로 일하며 트루히요의 맏아들을 가르치기도 했다.[3] 특히 트루히요는 쌀 수입을 금지하고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국민들이 그가 소유한 회사에서 유통하는 쌀만 소비할 수 있게 했다.[4] 한국에선 흔히 보수언론에 의해서 좌파성향의 표퓰리스트 독재자 정도로 알려져있는 경향이 있는데 메스티소였기에 인종차별과는 거리가 있지만 어쨌든 파시즘의 영향을 꽤 받았었고,(덕택에 공산당을 때려잡은 전적도 있다고) 좌파적인 정책을 시행하기는 했지만 정작 당대 아르헨티나 내에서는 꽤 우파적인 스탠스였고 실각한 뒤로 망명을 갔던 나라들도 죄다 우파 성향의 독재자가 정권을 받았던 곳이었다.[5] 물론 도시 이름은 트루히요의 사후에 원상 복귀되었으며, 이 개칭을 기념한 137피트(약 41.8m) 높이의 오벨리스크는 1997년에 미라발 자매를 기리는 벽화로 칠해지게 되었다.[6] 참고로 1937년 9월 말에 트루히요는 나치 독일의 대표단으로부터 나의 투쟁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 책의 인종차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면이 이 학살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7] 다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에피소드가 실화가 아닌 '신화'에 불과하다며 이 에피소드는 허구라고 보고 있다.[8] 참고로 한국어에는 유성 연구개 마찰음은 존재하지 않고, '흐'의 'ㅎ'에서 무성 연구개 마찰음이 난다, 다만 현대에는 모호해지고 있다. 또한 한국어는 유/무성음을 구별하지 않는다.[9] 여기서 트루히요는 뻔뻔하게도 이 학살이 '바람직하지 않은 아이티인의 국가 이주를 막기 위한 필요악'으로 정당화했으며, 자신이 이 학살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10] 트루히요 사후에 도미니카 공화국에 무차별 벌목이 재개되자 발라게르는 아예 군사력까지 동원해가며 벌목을 막았다.[11] 참고로 람피스 트루히요는 방탕한 생활로 악명이 높았으며, 아버지의 사후에는 스페인에서 호화롭게 살다가 1969년 12월 27일에 마드리드 외곽에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12] 사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트루히요의 사후에는 애완견을 대령으로 앉힌 독재자사망한 푸들을 공군 대장에 임명한 국왕도 나왔기 때문.(...)[13] 다만 이 계획은 후에 무산되었다.[14]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문학동네에서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는데, 이 소설은 역사적 정확성보다는 스토리텔링에 집중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성욕과 권력의 관계와 폭력적인 사건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