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슈미 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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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사후
4. 대중 매체에서
5.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Lakshmibai(झाँसी की रानी)
생몰년: 1828년~1858년

지위
기간
잔시의 왕비
1842년~1853년
잔시의 섭정
1853년~1854년
1857년~1858년

인도의 여성 독립운동가, 북인도 잔시[1]의 라니.[2]


2. 생애[편집]


바라나시의 상위 카스트 계급 출신이며, 원래 이름은 마니카르니카(मणिकर्णिका)였지만 결혼 후 비슈누 신의 아내 락슈미에서 따온 락슈미 바이로 이름을 바꿨다. 락슈미 바이가 잔시를 다스리던 라자[3] 강가다르 라오의 왕비가 될 무렵, 인도는 영국영국 동인도 회사가 대부분 장악했었고, 동인도 회사 영토가 아닌 곳도 잔시처럼 영국에게 종속되고 있었다.

1851년에 락슈미 바이는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1853년에 남편 강가다르 라오도 죽자 동인도 회사는 적법한 후계자가 없을 경우 동인도 회사가 인도 번왕국의 영토를 병합할 수 있다는 규정[4]을 내세워 잔시를 병합해버렸다. 이를 예상한 강가다르 라오와 락슈미 바이는 생전에 친척인 다모다 라오[5]를 양자로 들였지만 동인도 회사는 다모다 라오의 계승권을 부정했다.[6] 이 부분이 정말 내로남불인데, 양자 계승은 남편이 죽기 하루 전에 동인도 회사측 직원이 입회한 상태에서 이뤄졌던 것이라 그냥 억지 주장이다.[7]

결국 1854년에 잔시는 동인도 회사에 병합됐고 락슈미 바이는 은거해야 했다. 하지만 1857년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락슈미 바이는 잔시의 영국군을 몰아내고 스스로 '잔시의 라니[8]'라고 칭해 영국과 맞서 싸웠다. 얼마 후 잔시가 함락되자 락슈미 바이는 남은 병력을 모아 다른 인도 저항군과 합류해 반영 항쟁을 이어가다가 1858년에 괄리오르에서 전사했다.


3. 사후[편집]


인도가 독립한 이래 독립투사로 추앙 받고 있다.

상술한 댈후지의 번왕국 계승 문제가 워낙 파장이 컸던 사건이어서 세포이 항쟁 진압 이후 영국은 인도 제국 성립 이후 기존의 번왕국 합병 규정을 폐지하고 영국 본토처럼 초대 번왕의 후손이면 먼 친척이라도 번왕국의 후계자가 자동 계승이 가능하도록 인정했다.

나중에 댈후지도 락슈미 바이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후작 작위가 단절 당하는 인과응보를 겪는다.[9]


4. 대중 매체에서[편집]




5. 참고 자료[편집]


  • 김형준, <이야기 인도사>, 청하출판사(2006)
  • 김후, <불멸의 여인들>, 청아출판사(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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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타르프라데시 주 서남부의 분델칸드 지방에 위치했었고, 마라타 동맹 계열의 국가였다.[2] '라니'는 인도 문화권의 군주 칭호인 '라자'의 여성형으로, 여왕 또는 왕비를 의미한다.[3] '라자'는 인도 문화권의 왕의 칭호다.[4]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댈후지(Dalhousie)가 정한 규정이었다.[5] 강가다르 라오의 사촌의 아들, 즉 5촌 조카였다.[6] 부디카가 로마 제국에게 이케니족 영토를 잃은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당했다. 부디카의 남편인 프라스타구스 왕도 유언장에 부디카와 두 딸의 계승권을 명시했지만 로마 측은 유언장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7] 게다가 영국은 남계 친척이면 일반적으로 작위가 자동 계승이었다.[8] 위엄을 살리려 여왕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있는데, 락슈미 바이가 자칭한 라니는 여왕이 아닌 왕비로서의 의미이다. 그녀는 양아들을 놔두고 왕위를 차지하려 한 적 없다.[9] 댈후지는 백작 작위만 겨우 사촌에게 계승하는게 허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