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쌍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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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쌍 왕국
ອານາຈັກລ້ານຊ້າງ


1400년대의 최대 강역[1]
1353년 ~ 1707년
위치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수도
루앙프라방 (1353~1560)
비엔티안 (1560~1707)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만달라 체제
국가원수

언어
라오어
종교
불교
성립 이전
몬족
첸라 왕조
크메르 제국
멸망 이후
루앙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
참파삭 왕국

1. 개요
2. 역사
2.1. 건국
2.2. 전성기
2.3. 중흥기
2.4. 분열



1. 개요[편집]


라오스의 왕조. 1353년부터 1707년까지 약 355년 간 라오스 일대를 다스렸다.

란쌍 왕국은 현대 라오스의 정치적, 문화적 기반을 닦은 왕조로, 오랜 기간 동안 통일 왕조를 유지하면서 라오스인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란쌍 왕국은 1353년에 건국된 이래로 350여 년 동안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들 중 하나였으며 라오스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란쌍'이라는 이름은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이다.


2. 역사[편집]



2.1. 건국[편집]


란쌍 왕국이 세워지기 이전 라오스 지역에서는 여러 토착 민족들이 섞여 통일 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소왕국들을 세우고 난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1300년대에 란쌍 왕국의 시조인 파응움(ຝ້າງູ່ມ)이 등장하면서 라오스의 정치 구도가 본격적으로 바뀌게 된다. 파응움의 할아버지인 수바나 캄풍은 루앙프라방 일대를 지배하는 군주로, 파응움의 아버지인 왕세자였다. 파응움은 어린 나이에 인근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 9세의 양자로 입적되어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야바르만 9세는 자신의 딸을 파응움에게 주었고, 덕분에 파응움은 나름대로 탄탄한 입지를 갖추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1343년에 할아버지 수바나 캄풍이 세상을 떠나자 루앙프라방에서는 왕위계승분쟁이 일어났다. 수바나 캄풍이 제대로 된 후계를 정하지 않고 사망하면서 여러 후계자들이 왕위를 주장하면서 수바나 캄풍이 남기고 간 왕위를 차지하려 들었다.

이 상황에서 크메르 제국은 자신들이 데리고 있던 파응움에게 군사를 주어 왕위 쟁탈전에 내보냈다. 당시 크메르 제국은 흑사병과 내분의 심화로 막 국력이 쇠퇴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인근의 란나 왕국과 수코타이 왕국 등이 크메르 제국의 영토를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크메르 제국은 주변의 동맹국이 절실했고, 루앙프라방 지역에 친크메르 요인인 파응움이 왕이 된다면 크메르 제국에게 더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파응움은 약 1만 명의 군대를 데리고 라오스 남부부터 차근차근 정벌하기 시작했다. 파응움은 대도시인 비엔티안을 복속시킨 뒤 루앙프라방을 차지하고 있던 삼촌을 몰아내고 1353년에 루앙프라방의 왕위에 올랐다. 파응움은 국호를 '란쌍', 즉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으로 바꾸었으며 메콩 강 일대의 영토에 군사 원정을 실시하면서 국력을 높여나갔다.

한편 태국의 우통 국왕이 아유타야를 세우고 점차 크메르 제국을 위협하면서 크메르 제국의 세력은 날로 쪼그라들어갔다. 아유타야 왕국은 크메르 제국의 서쪽 영토를 집어삼켰고, 최종적으로는 크메르의 수도인 앙코르 함락에도 성공하며 크메르 제국에게 치명타를 먹였다. 이후 크메르 제국은 완전히 남쪽으로 밀려났고, 이과정에서 크메르 인근의 정세가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때문에 1356년에 파응움 국왕은 군대를 이끌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비엔티안 지역을 다시 재정벌하였고, 팽창하는 아유타야 왕국을 견제하였다. 한창 내치에 신경을 쓰던 아유타야 왕국은 란쌍 왕국과도 대립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100마리의 코끼리, 황금을 란쌍 왕국에게 넘겨주고 심지어 우통 국왕의 딸을 파응움 국왕의 2번째 왕비로 보내기도 했다. 이후 파응움 국왕은 중국, 베트남과의 국경을 확립하고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파응움 국왕은 이렇게 국경을 안정시키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으나, 수코타이 왕국과 지나치게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신망을 잃었으며 결정적으로 귀족층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에 실패하여 결국 자신의 아들인 삼센타이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파응움은 강제로 루앙프라방의 왕궁에 유폐되었고, 1380년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371년에 왕위에 오른 삼센타이 국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여러 군사적 업적을 남겼으며 인근의 란나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다. 또한 중국의 명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책봉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외교를 펼쳤다. 1416년에 삼센타이 국왕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란 캄 다엥 국왕이 왕위에 올랐다. 란 캄 다엥 국왕은 당시 명나라 치하에서 고통받던 베트남인들이 람썬 봉기를 일으키자 3만 명의 군사와 100마리의 코끼리를 보내어 명나라 군대를 도와주기도 했다.

란쌍 왕국은 란 캄 다엥 국왕 사후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1428년부터 1438년까지 남자 왕 7명과 여왕 1명이 연달아 즉위하는 등 나라가 어지러워졌다.[2] 1440년에는 이 틈을 타 비엔티안 지역이 봉기를 일으켰고, 수도 루앙프라방의 궁정에서는 겨우겨우 비엔티안의 반란군들을 진압했다. 란쌍 왕국의 혼란기는 1456년에 차카파트 국왕이 즉위하면서 종결된다. 참고로 이 시기에 라오스-베트남 전쟁이 일어난다. 당시 베트남의 대월람썬 봉기 때 란쌍 왕국이 명나라 군대에게 협력했던 것에 깊은 앙금을 품고 있었고, 때문에 란쌍 왕국과 베트남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좋지 않았다. 이렇게 긴장 관계가 고조되던 와중 한 사건이 터진다. 베트남 레 왕조성종이 란쌍 왕국에 흰 코끼리[3]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흰 코끼리의 털을 뽑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란쌍 왕국은 이를 왕권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고, 상자에 코끼리 똥을 가득 담아 베트남 조정에 보내버렸다. 당연히 빡돌은 베트남은 18만 대군을 보내 란쌍 왕국을 공격했고, 란쌍 왕국은 20만 대군으로 반격했으나 곧 털렸고 국왕은 베트남 군대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갔다. 베트남 군대는 국왕을 잡기 위해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란쌍 왕국 전역을 헤집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각개격파당했다. 이후 베트남 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하면서 마지막 복수로 수도인 루앙프라방의 왕궁에 불을 놓았다고.[4]


2.2. 전성기[편집]


파일:Wat_Visoun,_Luang_Prabang_Laos_by_Louis_Delaporte.jpg
파일:16534693568_0cbaa73c5b.jpg
왓 위쑨[5]
쎄타티랏 국왕의 동상
이후 즉위한 국왕들은 모두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회복하는 데에 전력을 쏟았다. 국왕들이 내치에 신경을 기울이면서 라오스의 문화와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특히 1500년부터 1520년까지 재위한 위쑨 국왕 시대에는 란쌍의 첫 고전문학이 집필되는 등 여러 문화적 업적들이 남았다. 대승불교의 승려들과 사찰들을 중심으로 교육과 학문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왕국 전역에 여러 사찰들과 장대한 건축물들이 지어졌다. 또한 비엔티안에 모셔져 있던 프라방 불상[6]을 수도인 루앙프라방으로 옮겨오기도 했다.[7] 위쑨 국왕의 뒤를 이어 연이어 즉위한 포티싸랏 국왕, 쎄타티랏 국왕 모두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란쌍 왕국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덕분에 라오스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왕국들 중 하나로 군림할 수 있었다.

1520년부터 1550년까지 라오스를 다스린 포티싸랏 국왕은 라오스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힌다. 포티싸랏 왕은 란나와 아유타야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안정적인 외교를 꾀했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로 힌두교, 정령 신앙 등을 억제하고 불교 진흥에 힘썼다. 포티싸랏 국왕은 궁정을 비엔티안을 옮겨서 베트남과 아유타야 왕국으로부터의 방어가 유리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 외에도 남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확고하게 굳혔으며, 란나의 국왕이 승하하자 자신의 아들이자 란나의 공주 사이에서 낳은 후계자인 쎄타티랏을 란나의 국왕으로 임명하게 만듦으로써 란나 왕국을 사실상 집어삼켰다. 이때 란쌍 왕국이 가장 강력한 세를 자랑하면서 라오스 전통문화의 꽃을 피웠으니, 우리로 치면 태조세종을 합쳐놓은 정도의 성군인 셈. 그러나 포티싸랏은 1550년 경 수도인 루앙프라방에서 외교 사절을 접견하기 위하여 코끼리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떨어져 사망했다고 한다.

포티싸랏 국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쎄타티랏 국왕은 점점 커져만 가는 인근의 아유타야 왕국과 미얀마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란나를 다스리고 있던 쎄타티랏이 란쌍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기 위하여 란나를 떠나 루앙프라방으로 향하자 쎄타티랏에 불만을 품고 있던 란나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 나갔다. 이후 쎄타티랏 국왕은 란나를 되찾기 위하여 군사적 원정을 펼치면서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결국 란나 왕국을 완전하게 되찾는 데에는 실패했고 이후 란나 왕국은 미얀마 따웅우 왕조의 봉신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쎄타티랏 국왕은 1560년에 수도를 공식적으로 루앙프라방으로부터 비엔티안으로 천도했다. 이로써 란쌍 왕국은 무려 250년 만에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쎄타티랏 국왕은 수도를 천도하면서 대규모 건설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거대한 궁궐들을 세웠으며 란나의 치앙마이에서 옮겨온 에메랄드 불상[8]을 보관하기 위하여 사찰을 개축했다.

그러나 이후 미얀마의 최강국인 따웅우 왕조가 1570년에 쳐들어오면서 란쌍 왕국은 위기에 처한다. 당시 미얀마의 봉신국이던 아유타야 왕국은 미얀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란쌍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란쌍 왕국이 이에 응하면서 아유타야 왕국과 함께 미얀마를 기습공격한 것이다. 미얀마 군대는 빠른 속도로 아유타야 왕국을 무너뜨린 후 란쌍 왕국에게 반격을 퍼부었다. 미얀마 군대는 란쌍이 다스리고 있던 치앙마이를 함락하고 란쌍 왕국을 몰아붙였다. 워낙 압도적인 따웅우 왕조의 군사력으로 인하여 란쌍 왕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결국에는 수도인 비엔티안마저 버리고 도주하는 수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비엔티안을 함락한 미얀마 군대는 왕궁을 불태우고 왕자들을 미얀마로 끌고갔다. 쎄티타랏 국왕은 수도를 버린 후 게릴라 전술과 청야 전술 등을 피면서 따웅우 왕조의 군대를 필사적으로 막아냈고, 결국 미얀마군은 전염병과 식량 부족 등의 이유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2.3. 중흥기[편집]


비엔티안 함락 당시 미얀마로 잡혀간 노케오 쿠만 왕자는 약 16년 동안 인질로 잡혀 살았다. 그러던 중 1591년에 란쌍 왕국의 국왕이 사망하자 귀족들이 쿠만 왕자를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키기 위하여 미얀마에게 왕자의 송환을 요청했다. 쿠만 왕자는 미얀마의 봉신국으로서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풀려나 란쌍 왕국으로 돌아가 비엔티안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통수를 치고 미얀마에 대한 독립을 선포했고, 곧바로 란쌍 왕국의 옛 영토들을 되찾기 위한 수복전쟁을 실시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옛 영토들을 대부분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쿠만 국왕은 이후 아유타야 왕국의 나레쑤언 국왕과도 맞서 싸웠는데, 당시 란쌍 왕국이 아유타야 왕국의 군대와 싸우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결국 란쌍 왕국은 이전의 세를 완벽히 회복하지는 못한 채로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 채로 중흥에 성공했다.

란쌍 왕국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끈 쑤린야웡싸 국왕은 1637년부터 1694년까지 무려 57년이나 재위하면서 라오스의 마지막 황금기를 이루었다. 이 시기 라오스 불교 문화가 발전의 정점에 다다르면서 막대한 경제 발전과 문화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졌고, 문학, 궁정 예술, 조각, 건축 등 이전 혼란기를 거치면서 쇠퇴했던 분야들이 다시 성했다. 쑤린야웡싸 국왕은 또한 법전을 재정비하고 법원을 세웠으며 인근 국가들과의 국경을 확립하는 등 여러 업적들을 동시에 남긴 걸출한 명군이었다. 이 시기부터 유럽의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을 하기 시작한다. 1641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으며 메콩 강 유역에 거래를 트는 등 점점 서양 세력들을 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1년 후인 1642년에는 첫 예수회 선교사들이 란쌍 왕국에 도착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 라오스가 워낙 불교색이 짙은 사회였기에 선교사들이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했다고 한다.


2.4. 분열[편집]


파일:Laos_-_Division_territòriala_vèrs_1750_(vuege).png
분열 이후 라오스의 판도[9]

라오스의 중흥을 이끈 쑤린야웡싸 국왕이 1694년에 사망하면서 란쌍 왕국은 분열된다. 쑤린야웡싸 왕에겐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아들이 고위 관료의 아내와 간통을 해서 처형되는 바람에 왕위계승을 할 사람이 딱히 없었다. 이 혼란은 쑤린야웡싸의 손자가 왕위를 계승하고 쑤린야웡싸 왕의 사위가 섭정을 하게되면서 잠시 가라앉았다가, 1700년에 남부의 실력자에 의해 찬탈당했다.

이렇게 왕실이 무너지고 찬탈자가 활개치는 와중에 베트남으로 망명했었던 쑤린야웡싸의 맏형의 아들이자 쑤린야웡싸에게는 조카였던 싸이 옹 후에(Sai Ong Hue)가 비엔티안으로 돌아와 찬탈자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쑤린야웡싸의 손자들이 살아있었음에도 그가 손쉽게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후계자들이 각각 지방으로 도망가 있었기 때문. 가장 유력한 후계자들 중 하나였던 킹킷싸랏은 씹송 파나 지역으로 도망가 있었고, 다른 공주는 참파삭 지방으로 도피해 있는 등 도망간 지역들도 다양했다. 그와중에 싸이 옹 후에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킹킷싸랏은 곧바로 작은 군대를 꾸려서 루앙프라방으로 향했고, 싸이 옹 후에가 임명한 루앙프라방의 영주가 도망치면서 루앙프라방에 무혈입성했다. 킹킷싸랏은 루앙프라방에서 따로 대관식을 치르고 란쌍 왕국의 정당한 계승자를 자처하면서 1707년 루앙프라방 왕국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란쌍 왕국은 1707년에 루앙프라방 왕국과 비엔티안 왕국으로 분열된다. 이어 1713년에는 또다시 남부의 참파삭 지방이 비엔티안에게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 나가면서 결과적으로 란쌍 왕국은 북부의 루앙프라방 왕국, 중부의 비엔티안 왕국, 남부의 참파삭 왕국으로 분열되면서 공식적으로 무너진다.

참고로 이렇게 나누어진 란쌍 왕국 계열의 왕국들은 1779년에 태국이나 베트남의 속국으로 전락할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특히 이중 비엔티안 왕국은 후에응우옌 왕조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는데, 1826년에 비엔티안 왕국의 마지막 군주인 아누봉 왕이 태국을 상대로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결국 베트남에 합병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라오스 땅이 태국과 베트남에게 찢겨져 나라 자체가 없어졌다고 나왔지만, 실제로는 루앙프라방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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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우 연한 보라색으로 표시된 국가가 란쌍 왕국이다.[2] 신기한 것은 이 남자 왕 7명이 모두 뒤에서 국가를 좌지우지했던 한 왕비에 의해서 암살되었다고 한다. 왕비의 이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보통 '낭 깨오 핌파', 즉 '잔인한 자'라고 불린다. 낭 깨오 핌파는 1438년에 7번째 남자 왕을 죽인 뒤 직접 왕위에 올라 라오스 역사상 유일한 여왕이 되었으나, 재위 몇 달 만에 조정에 의해 나가에게 제물로 바쳐져 강에서 익사했다.[3] 당시 동남아시아에서는 백색 코끼리가 신성한 왕권의 상징이었다.[4] 이후 약 200여 년 간 베트남과 라오스의 직접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다. [5] 위쑨 국왕이 세운 사찰의 모습이다.[6] 라오스 최고로 신성한 불상. 83cm 정도의 크기로 입식 금제 부처상이다. [7] 참고로 이 프라방 불상이 옮겨온 것을 기념해서 도시의 이름이 '루앙프라방'으로 바뀐 것이다. 이전까지의 이름은 '무앙 수아'였다. [8] 현재 태국의 왓 프라깨우에 있는 그 불상 맞다. 당시에도 이미 동남아에서 유명할 정도로 신성한 불상이었다.[9] 위에서부터 루앙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 참파삭 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