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네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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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네이더
Ralph Nader


출생
1934년 2월 27일 (90세)
미국 코네티컷 윈스테드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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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프린스턴 대학교 인문사회계 (학사/졸업)
하버드 대학교 법학부 (학사/졸업)[1]
직업
변호사, 정치인, 작가, 사회운동가
종교
정교회
소속

[[무소속|
무소속
]]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서명
1. 개요
2. 생애
2.1.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
3. 이후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이자 사회운동가, 변호사, 그리고 작가이다.

1960년대부터 소비자 운동을 이끈 미국 사회운동의 전설로,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은 편이긴 하지만 미국 시민운동의 역사를 언급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당장 현재 어느 자동차에서나 볼 수 있는 안전벨트를 상용화한 것이 이 사람의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편집]


1934년 레바논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2] 코네티컷에서 출생, 성장했다. 네이더의 부모님은 원래 가난했고 직물 공장 노동자로 일했지만 이후 빵집 주인, 레스토랑 주인을 거치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사람이었다. 네이더 역시 그다지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한 것은 없이 자랐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을 자격이 되었는데도 아버지가 장학금은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야한다며 이를 거절하게 한 일화가 있었다. 네이더의 진보적인 성향은 이런 부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네이더는 하버드 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했지만 권태감을 느끼고 미국 전역을 히치하이킹하며 어려움에 처한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 빈민가, 흑인 슬럼 등을 방문하며 자신이 신봉하던 자유주의 철학에 회의감을 가진다. 또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쿠바,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렇게 견문을 쌓은 랄프 네이더는 1959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돈을 많이 버는 로펌에 들어가는 대신 소비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몇 년 후에는 노동부차관 대니얼 모이니한(Daniel Moynihan)의 보좌관으로 일하며 워싱턴 정계에도 발을 들여놓는다.

2.1.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편집]


1965년, 랄프 네이더는 자동차 사고를 당한 고객들의 업무를 봐주면서 쌓은 지식을 토대로 자동차 회사들의 비도덕성을 고발한 책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Unsafe at Any Speed)를 저술하며 유명세를 얻는다. 이 책에서 네이더는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안전하지 않은 설계로 자동차를 만들었으면서 사고가 일어나면 그걸 전부 소비자에게 책임을 문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GM사에서 내놓던 자동차 쉐보레 콜베어(Corvair)를 비판한 1장의 내용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네이더는 엔진이 후방에 부착된 콜베어의 특성상 핸들을 꺾으면 엔진의 무게 때문에 차가 더 돌아가 전복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GM사에서는 네이더의 폭로에 과민반응하며 이 책의 내용이 대중에게 전파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우선 사립 탐정을 고용해 네이더의 주변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뒷조사는 실패로 돌아간다. 또 콜걸을 이용해 네이더가 함정에 빠지도록 유도하기도 했지만 네이더는 이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내용을 네이더가 폭로하면서 GM사는 전국적으로 관심을 받게 되었고 급기야 이듬해에는 뉴욕타임스에서 심층보도를 통해 네이더의 주장을 보강해주었고, 상원에서 청문회까지 열린다.

노동부차관 보좌관으로 일하며 워싱턴 정가와 연이 있었던 네이더는 미국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GM사의 치졸한 행보를 낱낱이 폭로하였다. 결국 GM사의 사장 제임스 로슈(James Roche)는 네이더에게 공개적으로 사찰과 함정수사에 대해 사죄하고, 42만 5,000달러를 합의금으로 지급한다. 네이더는 이 돈을 자동차 안전을 감시하는 시민단체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이러한 네이더의 노력은 빛을 발해 린든 B. 존슨의 입법에도 영향을 주었다. 존슨 대통령은 자동차 안전 법규에 관한 새로운 법을 구상하고 있었으나, 자율적으로 적용될 전망이라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네이더의 정력적인 활동으로 자동차 안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네이더가 주장한 여러 강제적 안전 규정안이 입법안에 포함된다. 대표적으로 안전벨트 착용 및 설치를 의무화한 것이 이때였으며, 앞창 유리가 사고가 났을 때 가루가 되도록 하는 안전유리 장착을 강제한 것도 네이더의 노력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네이더의 활동은 당대 청년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네이더처럼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젊은 네이더 추종자들은 네이더 군단(Naider's Raiders)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전국적 인지도를 얻은 네이더는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후보자로 점쳐졌으나, 자신은 출마하지 않고 대신 벤저민 스포크(Benjamin Spock)라는 시민사회 후보를 지지하였다. 비록 스포크는 엄청난 표차로 낙선하긴 했으나 신생 정당이었음에도 전국 득표 5위를 기록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2.2.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편집]


1990년대부터 빌 클린턴앨 고어의 영향으로 민주당이 NAFTA 협정을 체결하고, 노동개혁법을 추진하는 등 보수적인 행보를 보이자, 네이더를 비롯한 시민사회 인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2000년 대선에서 다소 보수적인 공약을 내세운 앨 고어가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진보적인 공약을 내세운 빌 브래들리를 압도적으로 꺾고 본선에 진출하자,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은 소외감을 느꼈고 네이더는 이들을 대표하는 후보로 공식 출마한다.[3]

네이더는 군소 정당인 녹색당 소속으로는 꽤 많은 표인 2%를 득표하긴 했으나 결국 양당 우위제인 미국의 정치 지형상 낙선했다. 게다가 진보 진영의 표심을 잠식해 조지 W. 부시의 당선을 이끌었다는 비판도 받게 되었다.[4] 마이클 무어의 증언에 의하면, 네이더 캠프 측에서도 부시의 당선을 막기 위해 사퇴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결국 사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어는 아쉽긴 하지만 네이더 입장에서도 섣불리 사퇴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라며 네이더의 편을 들어줬다.


3. 이후[편집]


2004년에는 개혁당에 입당했으나, 2004년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개혁당의 지지를 받는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였다. 2008년 마지막으로 대선에 도전했으나, 역시 낙선. 이후로는 정당 입당 없이 무소속으로만 활동 중이며,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에 에티오피아 항공 302편 추락 사고로 조카손주를 잃자, 보잉 737 맥스를 완전히 은퇴시키는 사회운동을 펼치고 있다.[5]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96 - 2000
입당

[[무소속|
무소속
]]

2000 - 2004
탈당

[[무소속|
무소속
]]
(
)
2004[6]
입당

[[무소속|
무소속
]]

2008 - 현재
탈당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996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684,871 (0.71%)
낙선 (4위)

2000
미국 대통령 선거
2,882,955 (2.74%)
낙선 (3위)

2004
미국 대통령 선거

[[무소속|
무소속
]]
/

465,650 (0.38%)

2008
미국 대통령 선거

[[무소속|
무소속
]]

739,034 (0.56%)


6.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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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중동계이지만, 코카소이드 비중이 높은 지중해 연안 출신이라 백인과 외모가 전혀 차이가 없다. 게다가 그의 부모는 안티오키아 그리스 정교회의 신자이기도 했다.[3] 1992년, 1996년에도 네이더가 표를 받긴 했으나 공식 출마는 이때가 처음이었다.[4] 득표율 2.7%, 288만표 가까이 득표하여 군소후보로서는 상당한 득표를 했을 뿐 아니라 승패를 결정지은 플로리다에서 고어와 부시의 표차인 537표보다 백 배 넘게 많은 9만여표를 득표해서(...) 고어의 패배 1등공신으로 기억된다. 다만 네이더에게만 책임을 돌리긴 뭐한게 표차가 워낙 적어서 네이더 뿐 아니라 다른 많은 군소후보들도 그보다 많이 득표했다.[5] #[6] 2004년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으나 개혁당의 지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