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지 맥도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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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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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로버트 월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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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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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로버트 월폴
스펜서 컴프턴
헨리 펠럼
토머스 펠럼홀리스
제5대
제6대

윌리엄 캐번디시
토머스 펠럼홀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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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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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토머스 펠럼홀리스
존 스튜어트
조지 그렌빌
찰스 왓슨 웬트워스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대 윌리엄 피트
오거스트 피츠로이
프레더릭 노스
찰스 왓슨 웬트워스
제14대
제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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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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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캐번디시벤딩크
윌리엄 피트
헨리 에딩턴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21대
윌리엄 피트
윌리엄 윈덤 그렌빌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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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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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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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로버트 뱅크스 젱킨슨
조지 캐닝
프레더릭 존 로빈슨
아서 웰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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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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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아서 웰즐리
찰스 그레이
윌리엄 램
아서 웰즐리
제29대
제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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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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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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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
제31대
제3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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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램
로버트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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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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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해밀턴고든
헨리 존 템플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헨리 존 템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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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대
존 러셀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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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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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디즈레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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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아서 밸푸어
헨리 캠벨배너먼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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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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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앤드루 보너 로
스탠리 볼드윈
제56대
제57대
제58대
제59대
램지 맥도널드
스탠리 볼드윈
램지 맥도널드
스탠리 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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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스탠리 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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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대
제60대
제61대
제62대
스탠리 볼드윈
네빌 체임벌린
윈스턴 처칠
클레멘트 애틀리
제63대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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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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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대
제64대
제65대
제66대
윈스턴 처칠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
알렉 더글러스 흄
제67대
제68대
제69대
제70대
해럴드 윌슨
에드워드 히스
해럴드 윌슨
제임스 캘러헌
제71대
제72대
제73대
제74대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제75대
제76대
제77대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
보리스 존슨




램지 맥도널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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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S


파일:Ramsay_MacDonald_ggbain.37952.jpg

본명
제임스 램지 맥도널드
James Ramsay MacDonald
출생
1866년 10월 12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스코틀랜드 머리셔 로시머스
사망
1937년 11월 9일 (향년 71세)
대서양 여객선
재임기간
제56대 총리
1924년 1월 22일 ~ 1924년 11월 4일
제58대 총리
1929년 6월 5일 ~ 1935년 6월 7일
서명
파일:램지 맥도널드_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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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마거릿 글래드스턴
자녀
맬컴, 이시벨 등 6명
학력
버크벡 런던 대학교
종교
개신교 (유니테리언)
정당

의원 선수
10
의원 대수
28, 29, 30, 32, 33, 34, 35, 36, 37, 38

1. 개요
2. 생애
3. 정치 생활
3.1. 총리 취임 이후
3.1.1. 1기: 1924년 1월 ~ 1924년 11월
3.1.2. 2기
3.1.2.1. 노동당 총리: 1929년 6월 5일 ~ 1931년 8월 24일
3.1.2.2. 거국내각 총리: 1931년 8월 24일 ~ 1935년 6월 7일
3.2. 총리직 사임 이후
4. 선거 이력
5. 여담



1. 개요[편집]


영국의 정치가이자 영국 제 56대, 58대 총리로 1900년에 창당한 노동당이 배출한 첫번째 총리이자 사회주의자로서는 영국 최초로 총리가 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866년, 스코틀랜드 빈농의 혼외자로 태어나 15살의 나이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독학으로 공부를 한뒤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3. 정치 생활[편집]



3.1. 총리 취임 이후[편집]



3.1.1. 1기: 1924년 1월 ~ 1924년 11월[편집]


당수로서 처음 맞이한 1923년 조기 총선에서 노동당은 의석수를 49석 늘리며 191석을 차지, 다시 한번 자유당을 누르고 보수당의 뒤를 이은 원내 2당 지위를 유지했다. 스탠리 볼드윈 총리가 이끈 보수당은 86석을 잃으면서 원내 다수당 지위를 상실, 헝 의회(Hung parliament)이 되었다. 당초에는 볼드윈이 총리 자리를 지키기 위해 소수당 정부 출범을 각오하고 다음 국회가 열리는 1924년 1월까지 사임을 거부했지만, 조지 5세의 개회 칙유 발표 이후 있었던 정부 계획안에 대한 승인 투표를 노동당과 자유당이 손잡고 부결시키면서 버틸 수 없게되자 사임을 선택한 것.

조지 5세가 사임한 볼드윈을 대신해 맥도널드에게 소수 정부 수립을 명했는데, 자유당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전 총리의 전략적인 지지를 받는 상황이 되자 이를 수락하면서 영국 역사상 최초의 노동당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1 또한 최초의 노동자 출신 총리, 종합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몇 안되는 총리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2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정부 구성에 협조한 자유당의 리처드 홀데인 경에게 대법관 겸 상원의장을 맡기고, 자유당 출신인 필립 스노든을 재무장관에 임명하면서 야심차게 움직였다. 취임 이후 첫 과제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지워진 과도한 전쟁 보상금과 이로 인해 촉발된 프랑스의 루르 점령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1924년, 맥도널드 총리는 런던에서 전시 연합국 회의를 소집해 프랑스가 도스 안을 수용하도록 압박하고 영독 상업조약을 체결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숨통을 터줬는데 이 과정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견해를 많이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프랑스가 루르 점령을 포기하고 배상금 조정을 받아들이면서 취임 후 여럿 외교 성과를 내었다.

또한 1924년 2월, 소비에트 연방을 승인하고 수교 협의를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유당의 반발을 사게 된다. 특히 신생 국가인 소비에트에 차관을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고 보수당이 기회를 노려 자유당에 호응하면서 노동당과 자유당 간의 느슨한 연대가 깨지게 된다. 특히 이 사이에 벌어진 캠벨 사건(Campbell Case)가 맥도널드 내각의 운명을 끝장내고 만다.

공산주의자이자 신문 편집자이었던 존 로스 캠벨(J.R. Campbell)이 공개적으로 군인을 모욕하는 서한을 기고한 것에 대하여 영국 검찰에서 폭동을 선동한 죄로 기소하자 맥도널드와 노동당 내각이 기소를 중지하도록 압박했다는 폭로가 터져나오면서 그야말로 난리가 나고 말았다. 보수당과 자유당은 즉시 맥도널드 내각에 대한 불신임결의를 하원에 제출해 찬성 364표, 반대 198표라는 어마어마한 차이로 통과시킨다. 이는 역대 영국 내각불신임결의 중 가장 큰 격차로 가결된 결의안이다.

결국 램지 맥도널드는 이에 대응해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선언했다. 1924년, 1년만에 열린 조기 총선에서 노동당이 40석을 잃고 151석에 그친 상황에서 보수당이 의석을 무려 154석을 늘려 401석을 확보해 단독 과반을 달성. 1월에 굴욕을 당했던 스탠리 볼드윈이 화려하게 총리로 복귀하게 된다.[1]

특히 선거를 4일 앞두고 지노비예프 서간 사건이 터진 것이 치명타였다. 보수 계통 일간지인 데일리 메일에서 지노비예프가 서명한 ‘코민테른 서간’의 비밀문서를 공개했는데 거기에 영국 노조와 군대에게 공산주의 쿠데타를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 이로 인해 노동당은 색깔론에 대책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더 억울한 것은 이 편지가 알고보니 위조된 가짜였다는것과 앞서 맥도널드 내각에 대한 내각불신임 근거였던 캠밸 사건은 노동당 맥도널드 내각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떻게보면 매카시즘의 선배격 전략에 그대로 당하고 만것.

결국 야심차게 출범한 영국 역사상 첫 노동당 내각은 보수당자유당마타도어식 날조에 불과 10개월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3.1.2. 2기[편집]



3.1.2.1. 노동당 총리: 1929년 6월 5일 ~ 1931년 8월 24일[편집]

그렇게 자유당의 배신과 색깔론 공격 속에 치를 떨며 총리직을 내려놓은 맥도널드지만 기회는 5년만에 찾아왔다. 볼드윈이 이끄는 보수당 정권이 1926년 총파업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데다가, 높은 실업률이 임기 내내 그 발목을 잡고 있었다. 거기다 오랜만에 나타난 장기 집권 내각의 부작용으로 국민들이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 반작용으로 1929년 열린 총선에서 노동당이 136석을 추가로 확보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원내 1당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단독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번에도 자유당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전 총리의 지원 속에 2차 내각을 출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맥도널드는 첫 집권때 외교 문제에 집중하다가 국내 문제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가지고 실업 수당을 인상하고 노동당의 핵심 지지층인 석탄 산업의 임금과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법안을 차례로 통과시켰다. 또한 빈민층이 거주하는 슬럼의 위생상태 개선에 초점을 맞춘 주택법을 입안하는 등 비로소 노동당 정권다운 행보를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외교 문제 역시 포기한 것은 아니라,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주도하여 전 세계의 해군 군비를 제한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번 맥도널드의 앞길을 막는 대형사고가 터졌으니 바로 대공황이다.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가 영국 경제도 덮치면서 1930년 말즈음에 이르러서는 실업률은 두 배가 되었고, 실업자 수도 250만 명이 넘었다. 문제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전 총리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맥도널드 총리에게 적극적인 확장 재정 정책을 펼 것을 요구했음에도 재정보수주의 성향에 가까운 필립 스노든 재무장관이 재정 압박을 이유로 적자 지출을 한사코 거부한 것. 보수당 역시 대규모 공공부문 임금 삭감과 실업수당 등 공공 지출 규모 축소를 요구하는 등 맥도널드 내각을 계속해 압박했다.

한편 아서 핸더슨 외무장관 등 노동당 내 일각에서는 이런 압박에 굴해선 안된다며 즉각적으로 확장 재정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반대로 맥도널드를 압박했고, 결국 진퇴양난에 빠진 맥도널드는 총리직 사임을 선택했다.

이렇게 다시 한번 노동당 내각이 붕괴하는 듯 했지만, 일은 의외의 방향으로 진행됐다.

3.1.2.2. 거국내각 총리: 1931년 8월 24일 ~ 1935년 6월 7일[편집]

대공황의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럽게 정권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은 조지 5세는 맥도널드 총리에게 위기 극복을 위한 거국내각 수립을 제안했고, 맥도널드는 이를 받아 보수당, 자유당과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라는 이름의 거국연립정부를 수립하기로 한다.

이로 인해 노동당은 그야말로 두 개로 쪼개졌는데, 맥도널드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은 국민노동당(National Labour)으로 분리되어 나갔으며 노동당에는 아서 핸더슨 등 보수당과의 연립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남았다. 졸지에 정권을 잃은 노동당은 분노에 차 맥도널드 총리, 스노든 재무장관 등을 당에서 제명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버린 상황이 됐다.

노동당의 강력한 지지층이었던 노조의 분노가 맥도널드와 국가노동당을 덮쳤고, 런던과 맨체스터에서는 연이어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노동당에 남은 수많은 사람들 역시 맥도날드가 자기만 살려고 당을 버린 배신자라고 비판했으며 맥도널드는 그 희생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취임 직후 있었던 총선에서 국민 정부 내 다수당을 차지한 보수당이 국민정부가 선거 연합을 해 선거를 치르도록 맥도널드 총리를 압박했고, 노동당은 사실상 유일한 야당으로서 선거에 임하게 됐다. 결국 선거에서 국민정부 연합이 615석 중 554석(90.1%)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연장하는 데 성공한다. 근데 이중 470석을 보수당이 차지하면서 거국내각은 사실상 보수당 정부가 된다.(...)

덕분에 명목상 맥도널드는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의석 수를 보유한 총리가 됐지만, 실제 권력은 추밀원의장에 오른 스탠리 볼드윈 전 총리와 새롭게 재무장관에 오른 네빌 체임벌린이 주도하게 되면서 일종의 바지사장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오타와 협정 체결 이후 관세가 도입되자 맥도널드의 동료로 함께 해왔던 필립 스노든 역시 이에 반대해 내각을 떠나고 만다.

1934년에는 당시 연립정부의 재무장관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이 일본 외무대신으로 재임하고 있던 히로타 고키와 접촉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종료된 영일동맹을 대체하는 영일불가침조약을 새로 체결하려 했지만, 램지 맥도널드는 이 조약이 미국에게 영일동맹의 재림으로 보일까 우려했고, 일본 역시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이권을 보장해줄 의지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 탈퇴 통보를 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주로 외교 문제에 집중하는데 여러 군축 활동, 세계 경제회의 주재 등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니,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독일을 상대로 유화책을 실시하면서 나치 독일이 성장할 시간을 주고 만다.

1935년까지 자리를 유지했으나 건강이 계속 악화되어 총리직을 계속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스탠리 볼드윈에게 다시 총리 자리를 양보하고 사임하게 된다.

3.2. 총리직 사임 이후[편집]


1935년 총선에 다시 출마했으나, 노동당의 매니 신웰 후보에게 36.4%p 차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전직 총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만큼 큰 격차로 분당 이후 한동안 고통받았던 노동당으로서는 의석수를 대폭 불리는 동시에 '배신자 맥도널드'에게 그야말로 한방을 먹인 셈.

그래도 스코틀랜드 대학교 혼합 선거구에서 열린 1936년 1월 재보궐선거에서 56.5%를 득표해 다시 서민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보궐선거 직전 조지 5세가 서거하면서 실의에 빠졌다고 전해지며 이후 요양을 위해 딸과 여행을 하던 도중인 1937년, 대서양을 가로지르던 여객선 안에서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맥도널드의 유해는 화장한 뒤 고향인 모레이 카운티의 가족묘에 안장 되었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895
1895년 영국 총선
사우샘프턴

867 (4.0%)
낙선(5위)

1900
1900년 영국 총선
레스터
[2]
4,164 (13.0%)
낙선(4위)

1901
런던 카운티 자치의회 선거
핀스버리 센트럴
? (?%)
당선(1위)
초선[3]
1906
1906년 영국 총선
레스터
14,685 (39.8%)
당선(2위)
초선
1910.1
1910년 1월 영국 총선


14,337 (31.4%)
재선
1910.12
1910년 12월 영국 총선
12,998 (38.5%)
3선
1918
1918년 영국 총선
레스터 웨스트
6,347 (23.6%)
낙선(2위)

1922
1922년 영국 총선
애버라본
14,318 (46.6%)
당선(1위)
4선
1923
1923년 영국 총선
17,439 (55.6%)
5선
1924
1924년 영국 총선
17,724 (53.1%)
6선
1929
1929년 영국 총선
시햄
35,615 (72.5%)
7선
1931
1931년 영국 총선

28,978 (55.0%)
8선
1935
1935년 영국 총선
17,882 (31.8%)
낙선(2위)


5. 여담[편집]


  • 윈스턴 처칠은 자신의 저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와 스탠리 볼드윈을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대독 유화책을 내세워 아돌프 히틀러가 성장하도록 방기했다는 이유. 물론 최종 오판은 네빌 체임벌린이 한거긴 하다만, 사실 이런 류의 비난은 결과론적이긴 하다. 노동당의 맥도널드나 보수당의 볼드윈, 체임벌린이나 히틀러를 경계하지 않은건 아니기 때문. 다만 전쟁이 터지고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점에선 결국 할 말 없긴 하다. 독일이 팽창하고 영국이 밀리면서 일관되게 히틀러를 깠다는 이유만으로 처칠이 당시 뒷방 늙은이 신세에서 결국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 히틀러가 키워준 처칠? 다만 맥도널드는 이 라인에선 가장 앞쪽에 있던 총리인데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도 전에 사망해서 더 억울할 법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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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웃긴 점은 자유당은 노동당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무려 118석을 잃으면서 의석이 겨우 40석으로 줄고 당수였던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도 낙선하고 말았다. 자유당 입장에서는 가미카제 총선이 된 셈.[2] 독립노동당 당원 자격도 유지[3] 1904년 국외 부재로 자격 박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