랴오중카이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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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국민정부 재정부장
본명
료은후(廖恩煦)
정체
廖仲愷
간체
廖仲恺
한국식 독음
료중개[1]
영문
Liao Zhongkai

중개(仲愷)
출생
1877년 4월 23일 미합중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사망
1925년 8월 20일 중화민국 광동성 광저우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학력
와세다대학
직업
정치가
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혁명가, 정치가. 국민당의 재정 전문가로서 '쑨원의 돈주머니'라 불리기도 했다. 뛰어난 영어 실력과 쑨원에 대한 충성심을 바탕으로 쑨원의 큰 신임을 얻었으며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를 주도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77년 4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료죽빈의 아들로 태어났다. 즉 화교 출신. 랴오중카이는 미국학교에 다니며 영어를 배웠지만 료죽빈이 전통을 중시했기 때문에 방과 후에 중국인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 16세 때 아버지를 여의자 중국에 귀국하여 청나라의 외무부관으로 일하던 숙부 료유걸과 형 료은도 밑에서 자랐다. 청 정부에 충성하는 집안 내력의 영향으로 한때 과거를 준비하였으나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것에 큰 충격을 받고 혁명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상이 깨어 있던 랴오중카이는 어릴 때부터 개화사상에 눈을 떴던 허샹닝을 만나게 되어 1897년 10월 결혼하게 되었다. 1902년부터 학생조직에 의연금을 지원하는 등 중국혁명에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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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중카이-허샹닝 일가
1903년 허샹닝과 함께 일본 유학을 결정, 잠시 일본어를 습득한 다음에 1904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한동안 신지식 습득에 열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나라 조정의 유학 지원을 받는 등 확고한 반청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변법자강주의자에 가까웠으나 1903년 9월 쑨원을 만나 청국 정부를 타도하고 민국을 건립해야 한다는 그의 강연에 큰 감명을 받고 혁명활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05년 중국 동맹회가 조직되자 8월에 가입했고 외교부이사에 임명되어 해외 화교와 연락을 취해 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민보에 자신의 뛰어난 영어 및 일어 실력을 활용하여 번역한 해외의 유명 정치서적과 자신의 에세이를 포함해 9편의 글을 게재했다.
  • 1호(1905.11) <진보와 빈곤>
  • 7호(1906.9) <사회주의사대강>
  • 8호(1906.10) <무정부주의의 2파>
  • 9호(1906.12)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 11호, 17호(1907.1~1907.10) <허무당소사>
  • 15호(1907) <소피아전>
  • 16호(1907) <바쿠닌전>
  • 10,17호(1907) <비민족자를 물리친다>
  • 21호(1908) <제왕암살의 시대>
처음에 랴오중카이는 쑨원에게 많은 애국청년 중 한명에 불과하며 두드러진 인물이 아니었으나 이런 활동을 하며 랴오중카이에 대한 쑨원의 신임은 두터워졌다. 1905년 10월, 주중 프랑스 공사관의 무관인 부카베이유가 쑨원에게 프랑스 정부가 중국 혁명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타진하자 쑨원은 랴오중카이를 텐진에 파견하여 톈진의 프랑스 군영에서 문건을 영문으로 번역하고 중국 동맹회 톈진 지부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랴오중카이는 와세다대학을 중퇴하여 중국에 귀국했지만 부카베이유가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소득이 없었다. 1907년 초, 랴오중카이는 쑨원의 지시에 따라 홍콩 화교들의 조주 기의를 돕기 위해 톈진, 프랑스령 베트남을 거쳐 영국령 홍콩에 잠입했으나 준비공작이 미미하여 성과 없이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에 돌아온 랴오중카이는 주오대학 경제학과에 편입하여 1909년 주오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이후 쑨원은 랴오중카이에게 혁명당원 장용과 함께 만주 길림성 지역에서 혁명활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했고 랴오중카이는 해외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동향 사람인 길림순무 진소상의 막하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비밀리에 혁명 연락업무와 혁명 동지 보호업무를 진행했다.
1911년 무창봉기가 발생하면서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1911년 11월 후한민이 광동도독에 취임하여 광동성정부를 수립했다. 랴오중카이는 후한민의 요청에 따라 남하하여 성정부 부재정부장에 임명되었고 1912년 4월에는 성정부 재정사장에 임명되어 재정전문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1912년 2월, 선통제가 퇴위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랴오중카이는 새로이 조직된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1912년 6월 광동성의회에 세제개혁안을 제출하여 성정부 재정타개와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등 경제관료로서의 활동을 지속했다. 허나 임시대총통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을 일으키며 의회를 무시한 독재를 일삼았다. 이에 1913년 국민당은 계축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혁명을 일으켜 위안스카이 타도를 시도했으나 위안스카이에게 진압당했고 랴오중카이와 허샹닝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쑨원이 1914년 7월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여 해외에서 중국 혁명을 전개하자 여기에 참여했다. 1915년 2월 랴오중카이는 재정부부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정부장이 신병으로 활동이 불가능하여 실질적으로 랴오중카이가 재정부장직을 수행했다. 황싱, 왕징웨이, 천중밍 등의 동지들 대다수가 독자적 활동을 하며 쑨원의 중화혁명당 활동을 도외시하는 와중에 랴오중카이의 충실한 수행은 쑨원의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

2.2. 1차 호법운동호법전쟁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여 황제에 오르자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이를 타도하기 위해 호국전쟁을 일으켰고 쑨원이 중화혁명당을 이끌고 참여하기로 결정하자 쑨원을 보좌하여 광동으로 귀국하여 군무원에 참여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취소하고 사망하고 대리총통 리위안훙이 계임하여 국회를 복구했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대총통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이라는 정쟁이 벌어지게 되면서 중국은 다시 혼란에 휩싸였다.
1917년 돤치루이가 막무가내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요구하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국회 해산을 요구하자 리위안훙은 돤치루이를 국무총리에서 경질해버렸다. 격노한 돤치루이가 연구계, 교통계와 결탁하여 톈진에서 임시 정부와 임시 의회 수립을 준비하고 각성의 독립을 사주하자 리위안훙은 안휘독군 겸 장강순열사 장쉰에게 사태를 중재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베이징에 입성한 장쉰은 리위안훙에게 국회 해산을 강요하고 약법을 폐지한 후 선통제를 복위시키는 장훈복벽을 일으켰다. 장훈복벽은 12일 만에 리위안훙, 돤치루이, 펑궈장이 연합하면서 진압되었으나 돤치루이는 7월 14일 연구계를 중심으로 내각을 조직하면서 구국회 복구를 거부하고 8월 14일 일방적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에 쑨원은 7월 17일 광저우로 남하하여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연합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고 1차 광동 군정부를 수립하여 같이 남하한 국회의원들로부터 대원수로 추대되었다. 랴오중카이는 재정 분야의 능력을 인정받아 재정총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돤치루이가 남방의 호법운동을 무력으로 토벌하려 하면서 호법전쟁이 벌어졌다. 호법전쟁 기간 내내 랴오중카이는 13개월 동안 해외화교들로부터 139만원의 차관을 들여와 성정부 수입 49만원의 몇배나 되는 재원을 마련했다.
하지만 호법정부는 의회 내부에서 천춘쉬안의 정학회와 민우사, 익우사의 갈등이 극심했고 군사력 면에서는 군벌들이 전횡하면서 정상적인 명령 계통이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정학회와 서남군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자 군정부 개조를 단행하여 대원수제를 7인 총재제로 개편했고 실망한 쑨원은 5월 21일 대원수를 사퇴하여 일본을 거쳐 상하이로 떠났고 랴오중카이와 허샹닝 부부도 뒤를 따랐다.

2.3. 2차 호법운동영풍함 사건


이후 랴오중카이와 허샹닝 부부는 쑨원의 언론 활동을 보조하면서 혁명 활동을 계속했다. 랴오중카이는 5.4운동 이후 후한민, 주집신 등과 함께 건설 등 잡지를 창간하고 번역물을 개제하며 민생주의를 주장, 제국주의 침투로 인해 발달하지 못한 중국 실업 발전에 착수하고 구미의 선진과학기술과 생산관리를 학습하며 도로를 건설하여 인민의 이동의 자유와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압박에서 벗어나 세계진보를 향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광동 군정부 내부는 정학회에 반발한 민우사와 익우사 의원들이 이탈하고 쑨원의 루룽팅 토벌 호소에 민남에 주둔한 광동군벌 천중밍이 호응하여 월인치월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1920년 루룽팅을 축출하였다. 천중밍은 쑨원과 노선 차이로 그리 친하진 않은 인물이었으나 주집신이 천중밍과 쑨원의 사이를 중재했다. 이때 랴오중카이는 장제스, 주집신과 함께 1920년 4월과 7월 두 차례 천중밍을 만나 광저우로의 진격을 논했고 군자금을 지원했다. 쑨원이 천중밍에게 광동성장, 육군부장, 내무부장 자리 등을 약속하자 천중밍은 1920년 11월 광저우를 점령한 이후 쑨원을 다시 광저우로 초빙했고 쑨원은 1920년 광저우로 돌아와 1921년 4월 민우사 의원들을 중심으로 2차 군정부를 수립하여 비상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랴오중카이는 행정부장, 재정부장 겸 재정차장에 임명되어 쑨원의 북벌 자금을 모집을 도왔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쑨원은 돤치루이, 장쭤린과 연합하여 차오쿤우페이푸직예군벌을 타도하려 했다. 하지만 천중밍은 쑨원의 북벌이 광동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무모한 일이라고 반대하며 쑨원의 참모장이자 자금책인 등갱을 암살하는 등 강경하게 쑨원의 북벌을 방해했다. 이에 쑨원은 천중밍과의 동맹이 실패했다고 공언하며 천중밍을 광동성장, 내무부장, 월군사령관 직에서 해임하고 북벌을 강행했다. 랴오중카이는 왕징웨이와 함께 이 결정에 반대하며 천중밍과의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쑨원은 강경했다. 1922년 6월 14일, 천중밍이 랴오중카이에게 자신의 예금을 모두 이체하겠다고 통보하자 랴오중카이는 천중밍을 설득하기 위해 혜주에 있는 천중밍의 사령부를 찾아갔다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감금당했다.
6월 16일, 천중밍은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의 사령부를 공격했고 장제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지와 부하들은 쑨원을 저버리고 직예군벌과 협상하여 구국회 회복에 매달렸다. 쑨원은 영풍함을 타고 천중밍과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인해 상하이로 퇴각했다. 6월 24일, 허샹닝이 랴오중카이가 감금된 것을 알고 찾아오자 랴오중카이는 자신이 곧 천중밍에게 살해될 것이라면서 작별시를 건네주었다. 천중밍의 부하 홍조린은 허샹닝에게 만약 영풍함이 포격을 중단한다면 다음날 랴오중카이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허샹닝은 이를 거절했다.
8월에 백운산에서 열린 천중밍의 총사령부 회의를 소집하자 허샹닝은 백운산에 직접 찾아가서 천중밍이 쑨원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며 "랴오중카이가 도대체 당신들에게 무슨 잘못한 점이 있어서 그를 가두는 것인가?"라고 질책했다. 이에 천중밍은 랴오중카이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날 밤 랴오중카이는 집에 돌아왔다. 랴오중카이 부부는 다음날 새벽, 즉시 상하이로 떠나 8월 21일 쑨원과 합류했다.

2.4. 국공합작


상하이에 있는 쑨원과 합류한 이후, 랴오중카이는 당 조직과 당의 정신진작의 필요성을 느껴 민권사상에 대한 외국 서적 번역 작업을 계속하였고 정치경제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민정치>와 <민권사상> 등을 소개하였다. 쑨원도 그의 활동을 크게 칭찬하며 그의 번역물을 읽어볼 것을 사람들에게 권했다.
한편 계속된 군벌들의 배신으로 혁명사업에 실패하던 쑨원은 영풍함 사건에서 열강의 싸늘한 반응까지 접하게 되자 영미에 실망을 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카라한 선언을 발표, 반제국주의를 천명한 소련과의 합작 가능성을 타진하게 되었다. 이미 1921년 레닌의 비서 마링이 북벌을 준비하던 쑨원과 접촉한 바가 있으며[2]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도 1922년 6월 국공동맹을 주장한 바가 있었다. 국제청년공산당이 코민테른 대표 달린을 파견하여 국민당에게 국공합작 의사를 먼저 타진했으나 이때 국민당은 거절했다. 쑨원은 달린에게 공산당원과 청년공산당원들이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의 원칙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국민당에 입당할 수 있다고 밝혔고 8월, 항저우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비상회의가 개최되어 쑨원의 요구를 수용, 리다자오를 시작으로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쑨원도 1922년 9월 4일, 장계 등 53명의 국민당원을 소집하여 국민당 개편을 결정하고 국민당 개조 작업에 착수했다.
1922년 8월 독일계 유대인 아돌프 요페가 주중 소련 대표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요페는 먼저 우페이푸의 북양정부와 접촉하면서 동시에 쑨원과 접촉했다. 쑨원은 외몽골 문제와 중동로 철도에 관해 매우 적극적으로 견해를 표출하며 소련과 합작 의사를 드러냈고 소련에게 북양정부와 협상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1922년 9월 쑨원은 랴오중카이에게 요페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소련 측과 접촉할 것을 지시했고 랴오중카이는 9월 25일 중국을 출발, 9월 27일 일본에 도착하여 허샹닝의 내조를 받아가며 온천 요양, 딸의 결혼식 참석 등으로 자신의 활동을 은폐하며 40여일 동안 소련과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9월의 일본 방문에서는 소련측 대표의 방일이 실패하면서 성과 없이 돌아와야 했다. 1923년 1월 12일 상하이에 도착한 쑨원은 요페를 상하이에 초청했고, 요페가 상하이에 오면서 1월 17일 요페와 쑨원이 상하이에서 회담을 가졌고 1월 26일, 쑨원-요페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마침 천중밍도 광저우에서 축출되어 쑨원은 3차 광동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고 쑨원은 요페가 선언 발표 다음날인 1월 27일 요양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자 연소정책의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 협상에 능한 랴오중카이를 다시 일본으로 파견하게 했다. 1923년 2월부터 랴오중카이와 요페는 일본의 아타미에서 <아타미 회담>을 열고 1개월 동안 소련의 구체적인 국민당 원조계획과 국민당 개편에 대해 논의했다. 요페는 랴오중카이에게 "소련이 중국 공산당에게 국민당에 가입하라고 명령한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국민혁명을 달성케 하기 위해서다. (...) 중국은 어디까지나 쑨원 선생의 삼민주의를 실행해야 하고, 공산주의를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이에 랴오중카이는 "소련은 공산주의를 언제 국내에서 달성하려는 것인가?"라고 물었고 요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랴오중카이가 "앞으로 60년 쯤 지나면 공산주의가 소련에서 실현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요페는 의문이라고 대답했다. 아타미 회담 직후인 1923년 3월, 소련은 쑨원에게 200만 멕시코달러의 재정지원을 결의했으며 5월 1일 중국에 군사고문과 정치고문을 파견하겠다는 전문을 보냈다.

2.5. 국민당 개조


1923년 3월 2일 3차 광동군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랴오중카이는 일본에서 귀국 직후 재정부장에 임명되었고 이어 5월 7일 광동성장에 임명되었다. 1923년 8월 18일 장제스가 소련을 방문하여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한 소련의 주요 지도자들을 만나고 왔고[3] 1923년 10월 10일 랴오중카이는 광저우에서 국민당 개조작업의 적극적 참여를 호소했다. 1923년 10월 25일, 쑨원은 랴오중카이, 등택여 등과 특별회의를 열고 국민당 개조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때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이 대규모 고문단을 이끌고 도착했다. 보로딘은 국민당이 혁명정신이 해이하며 군중기초가 결여되었고 조직도 산만하며 기율을 지키지 않고 선전기술이 미흡하므로 재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랴오중카이는 보로딘의 주장에 동조했다. 이어 국민당 임시중앙집행위원회가 결성되고 보로딘, 랴오중카이, 등택여, 린썬, 담평산, 쑨커, 쉬충즈 등 14명이 위원으로 임명되어 소련 공산당 조직을 모방하여 민주집중제 원칙에 기반한 당 개조 작업에 들어갔다. 1924년 1월 20일부터 30일까지 광저우에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정식으로 소집되는 것이 결정되었다. 11월 13일 보로딘은 광저우시 국민당 각구당부위원회 석상에서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토지 몰수 등을 제의했으나 랴오중카이는 이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랴오중카이는 담평산과 함께 1923년 11월 29일 광저우를 떠나 12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중앙간부회의를 소집, 왕징웨이, 후한민, 다이지타오 등 7명의 중앙임시 집행위원에게서 국민당 개조에 대한 동의를 얻고 국민당 상하이집행부의 개조를 주도했다.
1924년 1월 20일에 후한민, 왕징웨이, 셰츠, 리다자오, 쑨원이 주석단으로, 린썬을 대회주석으로 삼아 열린 1전대회에는 리다자오, 마오쩌둥, 담평산, 임조함 등 공산당원과 다이지타오, 쑨커, 허샹닝 등 국민당원을 포함한 165명이 참석했다. 광저우 특별구 대표 방서린이 '본당 당원은 타당에 가입할 수 없다'라는 조문을 삽입할 것을 주장하며 공산당을 견제하려 하자 리다자오가 발언하여 공산당이 국민당을 적화하려는 음모에 대해 그럴리 없다고 불식했고 왕징웨이가 그의 연설을 적극 지지했다. 이에 국공합작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흐르자 캐나다 지부의 황계륙이 제동을 걸었다.

"공산분자가 삼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우리 당에 가입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먼저 가진 조직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단 말인가. 하나의 당 속에다가 또 하나의 당을 만드는 것은 당내에 당을 만드는 결과밖에 안된다."

이 발언에 후한민과 랴오중카이가 반대를 표명했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끼어들어 호남성 사투리로 토론을 중지하고 즉각 표결에 들어갈 것을 주장했는데 그가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대회 결과 연소, 용공, 부조노농 3대 정책이 확립되었으며 정식으로 공산당원 및 사회주의 청년당원의 개인자격으로의 국민당 가입을 허용하면서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국민당을 소비에트식 민주집중제 원칙에 따라 개조했다. 1924년 1월 31일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임원 선거 결과에서도 중앙집행위원 24명 중 3명이 공산당원, 후보위원 17명 중 7명이 공산당원이라 공산당이 상당한 약진을 이루었다.
1924년 5월 국민당 자체 무장력 확보를 위해 붉은 군대 창립 경험을 모방하여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면서 장제스가 교장을, 랴오중카이가 당부대표를, 허잉친이 총교관을, 다이지타오가 정치부주임을[4], 리지천이 교련부 주임을, 왕바이링이 교수부 주임을 맡았다. 5월 24일 랴오중카이는 황포군관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러시아는 조직적이며 계획적인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 이래 국가개조의 일체의 사업은 모두 통일된 조직, 통일된 의지, 통일된 정신에 의해 추진되어 소비에트 공화국의 신생명이 되었다. (...) 중국을 구하려면 세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통일된 조직, 통일된 의지, 통일된 정신이다."

1924년 7월 11일 국민당중앙정치위원회가 설립, 랴오중카이는 왕징웨이, 후한민, 담평산, 소원충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8월 광동성 농민대표대회에서 "조직은 바로 힘이며, 힘은 단결에서 생겨난다."라고 연설하는 등 대중의 조직화와 단결을 주장하며 소련의 대중운동을 벤치마킹하자는 그의 주장도 계속되었다. 1924년 8월 광저우 상단 사건이 일어나자 강경한 무력토벌을 주장했다. 또한 천궁보, 간나이광, 천여우런, 우차오수를 비롯한 신인물들을 영입하여 국민당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2.6.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eadlch.png
암살된 랴오중카이와 랴오중카이 일가
이후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면서 장쭤린, 돤치루이, 펑위샹의 연합이 우페이푸직예군벌을 몰아내고 돤치루이를 임시 집정에 추대하여 임시 집정 정부를 열었다. 펑위샹이 쑨원을 북으로 초청함에 따라 쑨원은 북상선언을 발표, 베이징으로 올라와 돤치루이의 정책을 비난하며 남북통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그도 모르게 앓고 있던 지병인 간암이 악화되어 몸져 눕게 되었다. 이 시기 랴오중카이는 국민당의 1차 동정에 참여하여 천중밍 토벌에 나서던 중이었다. 1925년 3월 20일, 쑨원이 사망하면서 국민당은 분열의 위기를 맞이했다. 5월 국민당 제1회 3차 중앙전체회의는 중소협정을 높이 사면서 반제투쟁을 주장했지만 국민당 내부의 갈등은 불거지고 있었다.
국공합작 과정에서부터 쑨원의 아들 쑨커를 비롯하여 장쥐, 셰츠, 황계륙 등 국민당 원로들과 다이지타오를 비롯한 국민당 우익 이론가들은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후한민 등도 계급투쟁은 중국에 맞지 않는 방식이라고 비난했다. 쑨원과 랴오중카이 역시 중국에는 프롤레타리아 전정과 급진적 공산혁명이 맞지 않다고 인정했으나 공산당과 소련에 신뢰를 표하며 국공합작에는 적극적이었던 반면, 다이지타오나 후한민 등은 국공합작이 공산당이 국민당을 잠식하려는 술책으로 여겼다. 이런 갈등을 무마하던 쑨원이 사망한 후 국민당은 쑨원의 후계자 자리와 향후 정책을 놓은 정쟁과 국공갈등이 겹치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쑨원의 북상을 보좌하며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왕징웨이는 자신이 쑨원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으나 다이지타오, 후한민, 랴오중카이 등 역시 왕징웨이에게 못지 않은 세력과 입지를 가지고 있었고 소련에서는 주석인 왕징웨이가 아니라 랴오중카이가 국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라고 판단했다.[5]
1925년 3월 27일, 대원수 대리 후한민이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 군벌 양시민, 유진환 등에게 복종을 요구했으나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랴오중카이는 장제스, 쉬충즈와 함께 이들을 6월 12일 토벌했다. 1925년 6월 14일 대원수 대리 후한민이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를 소집하여 국민정부 설립을 논의했다. 7월 1일, 기존의 대원수부가 폐지되고 국민정부가 수립되었는데 후한민, 왕징웨이, 장런제, 탄옌카이 등 16명이 정부위원에 선출되었고 그 중 왕징웨이가 국민정부 주석에, 랴오중카이가 재정부장에 추대되었다. 대원수 대리였던 후한민은 실질적 업무가 없는 외교부장으로 좌천되었고 공인부, 농민부 등이 설치되어 공산당원들이 상당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국민당 우파의 불만은 가중되었으며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에 앞장섰던 랴오중카이에게 분노가 집중되었다. 그러던 중 1925년 8월 20일, 허샹닝과 함께 출근하던 랴오중카이를 노린 괴한의 총격이 벌어져 랴오중카이에게 적중했다. 보로딘, 장제스, 후한민, 쉬충즈 등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고 랴오중카이는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지고 말았다. 국민당은 애도를 표하며 3일간 반기를 게양하고 전 당원에게 1주일 동안 상장을 달게 함으로 랴오중카이를 애도하게 했다. 허샹닝은 장례가 끝난 후 '정신은 죽지 않았다'라는 큰 현수막을 문 앞에 걸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애통한 마음은 다만 당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분발할 것이며 언제가 되어서야 나라를 위하려는 이 마음을 다할 것인가? (...)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나의 온 집안을 송두리째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다. (...) 절대로 좌절하지 말고 랴오중카이의 혁명정신을 배우고 힘써 선열들의 뜻을 계승하여 힘껏 나아가야만 한다."

암살 사건의 배후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으나 담평산,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원들은 랴오중카이의 원수를 갚을 것을 호소했고 왕징웨이와 미하일 보로딘 등은 이 사건이 후한민의 사촌동생 후이성, 혁명기념회와 문화당의 지도자 임직면, 주탁문 등의 소행으로 간주하여 이들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했다. 또한 외교부장 후한민, 군사부장 쉬충즈 등에게 관련이 있다는 혐의를 씌워 숙청하였고[6] 린썬, 쩌우루를 비롯한 원로들도 화북으로 추방했다. 이에 분노한 국민당 우파들은 1925년 11월 서산회의를 개최하여 국공합작 종식을 요구했고 상하이 당부를 접수, 상하이 당중앙을 창설함에 따라 국민당은 둘로 갈라지게 된다. 자세한 것은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문서 참조.
이후 허샹닝은 남편의 죽음에 국민당 극좌 노선으로 기울어져 국공합작 노선을 추종했고 중일전쟁국공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류한다.

3.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지식산업사.
  •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민두기, 지식산업사.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국민당 좌파의 기수 랴오충까이(寥仲愷)와 국민당 개조작업, 장공자, 글로벌정치연구 2권 2호,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정치연구소.
  • 何香凝의 정치활동과 사회인식, 김문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국공합작과 孫文·요페공동선언 : 몽골문제와 중동철도문제를 중심으로, 이승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2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제1차 국·공합작 : 성립배경과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김영숙, 호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제1차 국·공합작의 과정과 실패원인에 관한 연구, 오수열, 채명희, 한국동북아논총 19권 1호, 한국동북아학회.

4. 관련문서


[1] 두음법칙을 적용해 요중개라고 표기하는 곳도 있다.[2] 랴오중카이도 1922년 1월 마링과 회견했다.[3] 이때 장제스는 소련인들이 국민당을 우습게 한다고 랴오중카이에게 크게 불만을 터트렸다.[4] 이후 얼마 안가 사임하면서 정치부 부주임 저우언라이로 대체되었다. 예젠잉도 이때 교수부 부주임을 맡았다.[5] 코민테른 대표 마링의 회고.[6]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광저우 위수사령관에 취임하여 우파 숙청에 활약한 것이 장제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