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러더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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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상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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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1907 - 에두아르트 부흐너

어니스트 러더퍼드

1909 - 빌헬름 오스트발트


OM PRS HonFRSE
The Right Honourable
넬슨의 러더퍼드 남작
Ernest Rutherford, 1st Baron Rutherford of Nelson


파일:Sir_Ernest_Rutherford_LCCN2014716719_-_restoration1.jpg

본명
어니스트 러더퍼드
Ernest Rutherford
출생
1871년 8월 30일
뉴질랜드 식민지 브라이트워터
사망
1937년 10월 19일 (향년 66세)
영국 잉글랜드 케임브리지
국적
[[뉴질랜드|

뉴질랜드
display: none; display: 뉴질랜드"
행정구
]]
(시민권)[1] ·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국적)[2]
직업
물리학자, 화학자
학력
뉴질랜드 대학교 캔터베리 컬리지[3]
케임브리지 대학교[4] 트리니티 컬리지
경력
맥길 대학교 교수
맨체스터 대학교 교수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배우자
메리 조지아 뉴턴 (1900년 결혼)
자녀
딸 1명
서명
파일:Ernest_rutherford_sig.jpg

1. 개요
2. 업적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물리학 외의 과학은 우표 수집에 불과하다."[5]

All science is either physics or stamp collecting.

영국의 물리학자. 출생지는 뉴질랜드의 브라이트워터이며, 캐나다 맥길 대학교에서의 연구가 빛을 보게 되며 훗날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지프 존 톰슨의 지도하에 기체의 이온화 현상을 연구하다가 더 나아가 우라늄 방사선 연구를 하였다. 1902년에 방사능이 물질의 원자 내부 현상이며 원소가 자연 붕괴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종래의 물질관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2. 업적[편집]


방사능에 대해 연구하면서 방사능의 법칙을 세웠고, 알파선베타선을 구분해내기도 했다. 알파입자 산란실험[6]으로 원자 내부 구조에 새로운 가설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며, 1908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어느 나라 학생이든 어디서 수업을 듣든 과학을 공부해봤다면 이 사람의 이름을 안 들을 수가 없다.

"자연과학물리학과 우표 수집 둘로 나누어진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리학자가 아닌 과학자가 듣기에는 기분이 나빠질 만한 말이지만, 정작 러더퍼드 자신도 물리학상이 아닌 화학상을 받았다.노벨 우표수집상 화학상을 받게 된 원인이 되었던 원소의 변화는 물리학이고, 심지어 본인도 "노벨화학상을 받게 된 것이 원소의 변화보다 신비롭다"고 얘기했다. 러더퍼드의 이 유명한 발언에 대해 국내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서울대 최무영 교수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자연과학은 물리 과학과 생물 과학 - 또는 생명 과학 - 으로 나눠지고, 대표적인 물리 과학으로서 물리학의 핵심적인 의미는 보편 지식 체계, 곧 이론을 탐구한다는 점이라고 앞에서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물리학은 전형적인 이론 과학이죠. 이와 관련해서 원자의 행성계 모형을 제안한 러더포드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연 과학은 물리학이거나 아니면 우표 수집이다(Science is either physics or stamp collecting)." 이론 과학 외에 다른 과학은 자료를 모으는 활동이라는 거죠. 다시 말해서 보편 지식 체계를 구축하는 이론 과학이 아니면 단순히 현상을 기술하는 현상론(phenomenology)이라는 뜻입니다. 생 체계 물리 말고도 화학 물리(chemical physics), 지구 물리(geophysics), 의학 물리(medical physics) 따위에서 보듯이 무슨 물리라고 이름을 붙이는데 이는 이론 과학의 관점에서 보편 지식 체계로 엮어 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여담[편집]


  •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트리니티 컬리지물리학과인 캐번디시 연구소(Department of Physics - The Cavendish Laboratory)에 소속되어 조지프 존 톰슨의 지도 하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나중에 톰슨의 뒤를 이어 캐번디시 연구소장 자리도 역임했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이 아닌 자 중 최초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자가 된 이 중 하나다. 여담으로 현재 캐번디시 연구소의 로고로는 웬 악어가 사용되는데, 이는 1933년부터 1972년까지 사용하던 구 캐번디시 연구소(Old Cavendish Laboratory)[7]의 몬드 연구소(Mond Laboratory) 건물의 외벽에 있는 조각으로, 러시아인 물리학자 표트르 카피차가 러더퍼드를 부르던 별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몬드 연구소는 원래 카피차가 자기장 연구를 하기 위해 왕립학회의 지원을 받아 세웠는데, 러더퍼드가 자기 머리를 뜯어먹을까 봐 혹은 러더퍼드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피터팬에 나오는 악어의 자명종처럼 러더퍼드가 오기 전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고 하여 별명을 지어주고 건물 외벽에 조각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 혹은 "악어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직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 입으로 모든 것을 삼켜버리듯이 해야 한다"는 발언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파일:attachment/뉴질랜드 달러/nzd215.jpg
  • 공식적으로는 영국인이지만, 뉴질랜드 출생이라서 뉴질랜드 달러 고액권인 100달러 지폐에 알파 입자 산란 실험으로 받은 노벨상 메달과 더불어 나온다.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과학 교과서에 등장할 분이니 그럴 만하다.

  • 104번 원소 러더포듐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출생지인 브라이트워터엔 러더퍼드의 어린 시절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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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는 뉴질랜드 자치령 출신이기 때문에 본국 시민이 아니라 British Subject, 대영제국 시민이었다. 영국계 백인이고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자신의 국적에 대해 고뇌했던 선배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와 후배 운동선수 손기정과는 달리(다만 손기정은 말러, 러더퍼드와는 달리 생전에 고국의 독립을 목격했다.) 딱히 자신의 국적에 대한 고뇌도 하지 않은 데다가 죽기 전까지 모국의 독립으로 인한 국적 변경조차 없었기 때문에 영국 국적자라고 봐도 사실 별 무리는 없다.[2] 러더퍼드가 살아있는 동안 뉴질랜드는 독립국이 아니었다. 1867년 이래 캐나다, 1901년 이래 호주, 그리고 1907년 이래 뉴질랜드 등의 대영제국 자치령들은 내정에서는 전권을 누리고 있었으나 외교권과 군사권 등은 영국 정부에 귀속되어 있었다. 자치령들의 독립은 1931년에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면서 이루어졌으나, 각 자치령이 원한다면 독립을 승인한다는 의미에 더 가까웠다. 자치령 의회가 비준해야 효력이 발생했기 때문. 실제로 모든 자치령이 독립을 원한 건 아니었기에 뉴질랜드 의회가 이를 비준한 것은 1947년이었다. 이 때는 러더퍼드가 죽은 지 10년이 지난 시점. 자치령들의 국적은 웨스트민스터 헌장 비준 이후에 제정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국적은 영국 국적이고 시민권은 자치령 시민권을 자치령 사람들이 가지는 상태였다. 따라서 러더퍼드가 뉴질랜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것은 과장 좀 섞으면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셈이었다.[3] 뉴질랜드 대학교 산하 캔터베리 컬리지(Canterbury College) 출신. 뉴질랜드 대학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런던 대학교와 같은 여러 대학들의 연합체다. 1874년에 설립된 후 1961년에 해체됐다. 그 후 캔터베리 컬리지는 캔터베리 대학교가 되었다.[4] 물리학과인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 출신.[5] 이렇게 말한 그는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자 놀랍다고 표현하기도 했다.[6] 이 실험에 대해 러더퍼드는 "15인치 포탄을 종이에 쏘았는데 그것이 튕겨져 나온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실험은 몇 년간 조교들을 착취하다시피 해서 성공한 실험으로 튕겨나간 입자와 통과한 입자를 일일이 관찰하고 세어야 했는데 어지간한 건 조교들에게 맡겼기 때문. 이 현상은 실험실에서 일하던 학부생인 어니스트 마르스덴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이에 대해 일은 조교가 하고 논문은 교수 이름으로 내는 현재의 시스템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카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마르스덴 말고도 이 실험을 위해 굴려진 대학원생이 또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가이거. 그는 훗날 가이거 계수관을 발명한다. 방사선을 측정할 때 뚜뚜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늘이 움직이는 그것.[7] 현재는 문화재로 등재돼 있으며, 사회과학정치학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