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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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bgcolor=#cd0000><width=15%> 초대 ||<width=35%>
인민위원장

블라디미르 레닌 ||<bgcolor=#cd0000><width=15%> 제2대 ||<width=35%>
이오시프 스탈린 ||
||<bgcolor=#cd0000><width=15%> 임시 ||
게오르기 말렌코프 ||<bgcolor=#cd0000><width=15%> 제3대 ||
니키타 흐루쇼프 ||
||<bgcolor=#cd0000><width=15%> 제4대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bgcolor=#cd0000><width=15%> 제5대 ||
유리 안드로포프 ||
||<bgcolor=#cd0000><width=15%> 제6대 ||
콘스탄틴 체르넨코 ||<bgcolor=#cd0000><width=15%> 제7대 ||
미하일 고르바초프 ||






블라디미르 레닌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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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초대 인민위원장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Vladimir Ilyich Lenin


파일:레닌 사진.jpg

출생
1870년 4월 22일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현 심비르스크군 심비르스크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울리야놉스크주 울리야놉스크)
사망
1924년 1월 21일 (향년 53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현 포돌스크군 수하노보면 고르키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주 레닌구 고르키레닌스키예)
재임기간
초대 러시아 SFSR 인민위원장
1917년 7월 6일 ~ 1924년 1월 21일
초대 소련 인민위원장
1923년 11월 8일 ~ 1924년 1월 21일
서명
파일:블라디미르 레닌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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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랴노프[1][2]
(Влади́мир Ильи́ч Улья́нов)
부모
아버지 일리야 니콜라예비치 울랴노프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울랴노바
형제자매
알렉산드르[3]
누나 안나[4], 올가[5]
남동생 니콜라이,[6] 드미트리
여동생 올가,[7] 마리아
배우자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자녀
없음
학력
카잔 황립대학교 (법학 / 제적)
상트페테르부르크 황립대학교 (법학 / 학사)
종교
러시아 정교회무종교 (무신론)
신체
165cm, 72kg
최종 당적



1. 개요
3. 평가
3.1. 긍정
3.2. 비판
4. 여담
5. 어록
6. 저서
7. 레닌의 이름을 딴 지명
8. 대중매체에서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새로운 노동조직을 확립하려면, 노동자는 그 언젠가는 정치권력을 획득해야 한다. 그들은 낡은 제도의 지주로 행세하고 있는 구정치체제를 전복해야 한다. 만일 이것을 잘못해서 이에 실패한다면, 구체제의 번복을 소홀히 하였기에 이 현세에서 그들의 왕국을 실현할 수 없었던 초기 기독교도들과 똑같은 운명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했다 하여 이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 어디서나 천편일률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국가와 혁명》에서[1]


"미국의 필리핀 병합에 반대하는 한 일본인에 대해서, 그가 정말로 그 병합 자체에 반대한다는 것이 진심이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우리는 오직 그 일본인이 일본의 조선 병합에 반대하여 싸우고 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분리될 자유를 요구하는 경우에만 그가 진정 성실하게, 또 정치적으로 정직하게 병합에 반대하여 투쟁한다고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제국주의론》에서[2]

러시아 제국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소련을 건국한 정치인.

러시아 제국의 혁명 조직인 볼셰비키의 지도자였으며, 소련 장관회의 초대 위원장 겸 소련 공산당의 창립자였다.[3]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이론을 발전시킨 레닌주의의 창시자이자 카를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혁명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반면 반공주의자를 위시한 반(反) 좌파 인사들이나 같은 좌파 중에서도 무장봉기를 반대한 멘셰비키, 즉 사민주의자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반대한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 즉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소련의 폭압적 체제의 기반을 만든 원흉이자 이오시프 스탈린 못지 않은 학살자라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블라디미르 레닌/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3.1. 긍정[편집]


"나는 레닌을 사회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바친 사람으로 존경한다. 난 그의 방식이 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 가지는 확신한다. 레닌과 같은 사람들은 인간성의 수호자이자 복원자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평가.[4]

여러 문제를 떠나서 레닌이 세계 역사와 여러 사상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걸 결코 부인할 순 없으며 역사에서 그를 빼놓고 말하기 힘들 정도이다.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이오시프 스탈린은 격하운동이 벌어졌으나, 반대로 레닌에 대해서는 우상화가 유지됐다. 레닌에 대해 흠이 될만한 과오는 모두 숨겨졌으며, 이러한 숭상은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그로 인해 우상숭배가 끝난 오늘날까지도 붉은 광장의 레닌 묘역에는 많은 참배객이 모여들며, 레닌은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당시 시대상황에선 필요했던, 대체로 훌륭했던 위인으로 평해진다.

러시아뿐 아니라 다른 공산권 몇몇 국가들, 특히 구 소련 공화국인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이나 과거 공산권 국가였던 몽골에서는 영웅을 도와 악인을 무찌르는 산신령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주로 공민전쟁 시기 백군 압제자에 대항하여 맞서던 각국의 민족 영웅들이 고생하다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을 만나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적군과 함께 돌아와 압제자를 몰아내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하거나 혹은 그냥 레닌이 와서 압제자를 몰아내고 고통받던 인민들을 해방시켜준다는 내용이다.

종종 러시아 바깥의 반러주의자 중에서도 레닌에는 우호적인 사람도 있다.[5] 특히 스탈린 이전 초창기 레닌시대의 소련은 러시아 민족국가를 초월해 세계 혁명의 전진기지이자 전세계 혁명가의 공통 조국의 성격이 있었고, 알려진 레닌 개인의 성향도 러시아 민족에 국한된 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실제 레닌의 경우 중앙아시아 등지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폐지했고, 소련은 러시아계만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며 러시아어를 법적 공용어로 지정하는 데 반대했다. 그 외에도 실질적 측면에서 인종 차별과 평등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고, 정책적 성과 역시 상당했다. 이는 실제 레닌 집권 시기 소련을 방문했던 미국의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가 직접 목격하고, 인증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을 바탕으로 한 여성 해방론을 필두로 성차별 타파와 제도적 성평등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1919~1921년 편지와 연설문 등지에서 가족, 노동, 정치적 영역에서의 법적 평등권, 가사와 양육의 사회화를 기반으로 한 여성의 노동자화, 그리고 남성의 봉건적 의식 변화와 매춘 폐지 및 매춘부의 노동자화 등을 역설했다. 이에 10월 혁명 이후로는 낙태와 동성애가 비범죄화되었으며 가사노동의 공공화가 추진되었고 사생아에게도 친자와 동일한 권리가 주어졌다. 이러한 성적 자유화에 힘입어 성소수자 인권도 담론화되었는데, 1918년 외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된 게오르기 치체린은 커밍아웃한 게이였으며, 1923년 모스크바 사회보건원 원장인 그리고리 밧키스 박사는 "특정 개인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 한 성생활 문제에 대해 국가와 사회는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유럽 국가들의 법은 동성애 등 다양한 성적 만족의 형태들을 공공도덕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의 법은 이것들을 소위 자연스러운 성교와 동등하게 취급한다."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소련의 사회적 여유는 스탈린 시대에 급격하게 냉각되었고, 그래서 반스탈린, 반러적이면서도 레닌은 괜찮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훗날의 러시아 중심적인 경직되고 폐쇄적인 소련은 전부 스탈린 때문이라고 깐다.[6]

반면 서방 세계에서 레닌은 원조 빨갱이, 빨갱이 교주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 아무래도 소련의 수립에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던 사람인 만큼 냉전기 프로파간다로 가루가 되게 까이는 사람이다. 그 혁명이라는 것을 이룩하기 위해 니콜라이 2세 황제 일가의 몰살 및 체카의 수립, 반대파 숙청과 숱한 인민재판 등 도덕적인 면에 있어 끔찍한 패악이 벌어지곤 했으나,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볼셰비키가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으로 벌인 악행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정권교체 과정에서 이전 왕조가 잔혹하게 근절되는 것은 조선의 왕씨 몰살과 같이 전근대 왕조 교체에서는 자주 나타났던 현상으로, 이전 세력의 구성원은 항상 새로운 집권에 반대하는 세력의 구심점 및 명분으로써 작용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는 제정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체카 오흐라나의 전통이 있었으며, 레닌은 내전기 및 그 이후 시기에 벌어진 수많은 반혁명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러한 정보전 및 비밀경찰을 제대로 활용했다.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용서할 수는 없는 행위이나, 적어도 혁명의 수립 및 그 수호를 목적으로 움직이는 혁명가로서 황족의 영향력을 근절시키거나 비밀경찰을 활용하는 등의 행위는 현실과의 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는 것. 한편 레닌은 이러한 억압 도구를 새롭게 수립된 노동자 권력을 안정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한시적 필요에 의한 조치로 생각했고 권위주의적 통치기구의 활용 역시 극도로 유의하여 활용해야 한다고 여긴 반면, 스탈린의 경우는 그러한 통치기구를 오남용하여 통제와 폭력 자체가 일상화되고, 평범한 노동인민들까지도 감시하고 통제하는 체제로 만들어 버린 것이 주요한 차이점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레닌의 언행이나 정책의 측면에서, 자신에 내세웠던 사회주의적,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이상을 공공연히 배신한 혐의는 보이지 않는다.[7] 내전이 발생하기 전까지 볼셰비키의 사회정책은 노동자-농민의 권익의 향상 및 일반적인 복지, 여성의 권리보장, 사회의 신분적, 계급적 관계의 철폐 등등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어디까지나 20세기 초의 열악한 세계환경 기준이지만. 예컨대 선거권이라든가.

문제는 1918년 내전과 함께 전시공산주의라는 비상상황이 벌어지면서 그 모든 것이 틀어져버린 것. 이를 계기로 정부와 농민의 관계는 극한으로 꼬이기 시작했으며, 입안된 수많은 정책들은 비상사태의 선포와 함께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내전이 종식된 상황에서 혁명은 고립되어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는 쫓겨나는 상황에서 권위주의적 통치기구가 스탈린 관료집단의 수중에 넘어간 결과 스탈린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혁명 이후의 정치적 행적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있을지언정, 혁명활동 자체에 능력에 대해서는 자타공인 본좌. 대중의 혁명적 열기를 감지해내고, 현재 상황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기반으로 대중과 동조하여 그들의 힘을 통해 일련의 목적을 수행해가는 면모는 가히 천재적이라는 평. 공산주의에서 마르크스가 혁명의 당위성을 이론적으로 세웠다면, 레닌은 그 혁명을 어떻게 잘 해낼 것인가, 마르크스의 저작에서는 거의 빠져있던 부분을 스스로 만들어 채워넣은 존재다. 공산주의가 괜히 교조를 기려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10월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야 이거 했다가 우리 다 죽는 거 아니야?" 하고 벌벌 떠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 입헌민주당은 여전히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승전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닌은 민중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라는 것을 잘 캐치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혁명에서의 지지를 확보한 것. 주변인들은 죄다 우려한 그 10월 혁명도 결국 성공시키는 위엄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난세의 간웅이며, 한 나라의 건국자 자리를 꿰어차기에 손색이 없다는 의미다.

실제로 레닌 살아생전에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가 부정된 적은 없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와해된 것도 공산당이 탄압해서가 아니고, 전시공산주의 때 페트로그라드에 식량이 부족해지며 소비에트에 참가하던 노동자계급이 식량을 찾아 농촌으로 떠나버린 것이 결정타였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해산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놀랍게도 공산당에 입당해서 의견개진을 할 수 있었으며, 레닌이 살아있을 때에는 프라우다 지에 공산당 내의 토론 내용과 각 저명인사의 정치적 의견이 공공연히 실렸었다. 그 악명높은 분파금지령 이후에도 분파는 공식적으로 없어졌을 뿐 고스란히 남았을 정도.[8]

공산당 내에서도 레닌은 당수가 아닌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가장 저명인사로 남았으며, 인민위원평의회 주석이긴 했으나 레닌 본인이 자신의 입으로 행정부와 당이 분리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수상으로써의 권위로 당내 의사개진을 막은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레닌의 후계자 선정인데, 실제로 그나마 인민참여적 민주주의, 즉 원리 그대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긍정적이었으며 실제로 실천할 의지도 있었던 인물은 레닌의 후계자급 인물 중에서는 트로츠키밖에 없었으며, 레닌이 죽고 바로 권력을 잡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스탈린은 레닌을 신격화하며 가장 먼저 저지른 짓이 프라우다에 정치적 의견이 실리는 것을 막은 것이었고 부하린도 이를 도와주었다. 레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것이 설령 자유민주주의와는 엄연히 달랐을지언정 레닌이 더 오래 살았다면 소련이 민주적으로 흘러갔을 것이다가 아주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또한 러시아의 체제 전환 등을 이야기 하지만 오히려 레닌은 의견개진 및 민주적 토론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명목상 국가원수였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중앙집행위원회 주석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가 레닌이 주장한 사회혁명당원 및 멘셰비키 당원의 사형을 막고, 오히려 대부분의 당원을 사면시켜버렸을 때에도 막지 않았다. 이렇게 사면된 이들 중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살려두었다면 엄청난 후환이었을 당대 사회혁명당의 지도자이자 저명한 혁명인사인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도 있었다. 1919년 이후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나 비 볼셰비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식으로 복권되었으며 그중 많은 이들은 공산당에 입당하여 정치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들을 죽인 것은 스탈린이지, 레닌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레닌 집권기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체제 전환 과정의 사회악 일소의 과정이었으며, 비록 외형적이고 방법론적인 유사성은 있었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을지언정 그 자체로 청산 대상이 되어버린 스탈린 집권기의 전체주의적 관료 독재와는 그 주체나 목적 면에서 본질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그것이 왕도였다는 것이 반스탈린계 레닌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레닌에 대한 옹호론의 핵심이다. 따라서 권위주의적 통치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라면 그것조차도 용납할 수 없고, 권위주의적 통치 자체는 필요하지만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면 안 된다고 여기는 입장에서라면 그것은 인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긍정하게 된다. '권위주의적 통치는 절대악인가?'에 대한 가치판단은 각자 알아서 할 문제이다. 비판론은 '그렇다. 절대악이다'라는 관점을 전제했다.


3.2. 비판[편집]


레닌의 생부는 그의 아들이 장차 경멸하게 될 전형적인 자유주의 신사였다. 레닌의 귀족적인 출생 배경은 레닌의 소련 전기 작가에게는 곤란한 요소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군림하려드는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준다. 그것은 하급자로부터의 비판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나, 대중을 그저 그의 혁명적 계획을 위해 필요한 인간 재료로 보는 그의 성향에서도 엿보인다.[9]

1917년 막심 고리키가 썼듯이, "레닌은 지도자인 동시에 러시아 귀족이었다. 그에게는 이 멸종된 계급의 어떤 심리적 특성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 국민에게 이미 실패할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 하나의 잔인한 실험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정당하다고 생각했다."[10]

올랜도 파이지스. 『혁명의 러시아 1891~1991』

그러나 실상 1917년 12월 체카의 창설 이래로 비밀경찰의 탄압 수위는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해산 일정 같은 건 전혀 잡혀 있지 않았다. 또한 소련은 분명 여성과 소수민족 등이 투표권을 획득한 최초의 국가 가운데 하나지만, 자유선거가 보장되지 않는 한 얼마 못 가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전락했다. 다른 여러 권익도 마찬가지다. 소련 건국 직후에는 그런 권익은 분명히 높은 평가를 받을만한 것이었고, 파시즘의 시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열악했으나,[11] 스탈린의 대숙청 시대를 거치고 1980년대까지 소련과 다른 나라의 자유, 권리 수준 차이가 점점 커졌던 것이다.

내전 이전에도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겨우 전체 득표의 24%[12]를 얻은 의회를 곧장 해산시키고 공산주의를 따르지 않은 조직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했다.[13] 여기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는 말같지도 않은 변명으로 볼셰비키를 옹호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보통 이를 비판하면 비판했지 지지를 보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카를 카우츠키는 볼셰비키의 행동은 발칸반도식 독재이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으며,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볼셰비키의 이런 행동에 의구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14] 레닌이 쫓아낸 멘셰비키들조차도 가혹한 독재정권을 주장하진 않았고 멘셰비키가 건국한 조지아 민주공화국은 사회혁명당과 그외 좌파정당이 연합한 다당제 민주공화국이었다. 조지아 민주공화국 역시 볼셰비키에 의해 멸망하였다. 멸망 후에도 1924년 8월 봉기가 일어났는데, 8월 봉기로 1만여 명이 죽고 2만여 명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사막으로 추방당했다. 심지어는 소비에트 러시아 초기 당시 2인자이자 마찬가지로 학살과 적색테러에 책임이 있는 레프 트로츠키가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나 심지어는 레닌보다도 민주주의쪽에 가까웠다는 주장까지 있다.[15]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 계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레닌을 비판하는 경우가 꽤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명명하는 통념과는 상반되는데, 이런 경우는 대부분 마르크스 본인의 주된 목적이 인간 소외 현상을 비판하는 것에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이들에 따르면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소수의 직업적인 혁명가들을 기반으로 하는 사상으로 탈바꿈시키고 대중주의를 배제하면서부터 치명적인 왜곡이 시작됐다고 보는데 이러한 전문화와 대중주의의 배제로 인해 종래에는 인간 소외에 대한 담론이 더 이상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선 마르크스주의가 갈수록 온건 개혁 성향의 서구 사상가들에게서 매력을 잃어가던 것과 20세기 자유 진영에서 공산주의의 반댓말은 민주주의라는 왜곡된 사고가 형성된 것 모두 그 원흉은 레닌에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레닌주의는 그 주의가 태동하면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사민주의자들은 레닌주의를 국가를 절대화시킨 권위주의적 공산주의라고 비판하였다. 당장 사민주의자들은 생산수단의 자유와 억압당하지 않을 자유를 주장했으나 레닌주의에선 경제적 평등을 기초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면에서 모든 평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전 국민적으로 자유가 침해되며, 사상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 한마디로 레닌주의는 기존 마르크스주의가 국가를 억압의 대상으로 본 것과 달리 국가라는 체제를 절대화했다라는 것.[반론]

레닌주의와 후에 악명을 떨치게 되는 스탈린주의의 연계성에 대해서 레닌주의자들은 스탈린 체제 후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식 민주주의를 많이 후퇴시켰고, 스탈린은 항상 자신의 비민주적인 사상을 레닌주의와 동일시하려고 했기 때문에 레닌주의는 현재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어 왜곡된다라고 주장하였다. 대표적으로 슬라보예 지젝 같은 사람은 '레닌의 시대에 일어났던 공공연한 폭력과 스탈린 시대에 벌어졌던 은폐된 폭력을 구별하고, 스탈린 시대에 자행된 폭력이 가진 은폐되고 비밀스러운 속성 때문에 밀고자와 방관자, 비겁한 수동적 협력자들이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회주의 진영인 좌파공산주의 진영, 사민주의 진영 그리고 아나키즘 진영에선 레닌주의는 큰 비판을 받았으며 근본적으로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의 토대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레닌주의는 중앙의 의견이 우선시되고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억압되고 있으며 구조적으로 비민주적이고 전례에 없던 권위주의를 새로 만들어낸 사상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무비판적이며 권위주의를 앞세운 덕에 중앙에 뜻에 맞지 않은 자들은 무자비하게 숙청될 수밖에 없는 체제였고 스탈린뿐만 아니라 레닌 역시도 그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스탈린은 의외로 레닌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였을 수 있다.

실제로 체카는 반혁명세력의 축출이라는 명목으로 수만명을 고문하거나 처형했고 레닌은 체카의 처형방식을 정당하다고 인식했다. 그는 1920년 1월 12일의 연설에서 "우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수천 명을 쏘았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체카의 숙청을 옹호했다. 또한 1921년 5월 14일 레닌이 주도하고 있던 당 정치국은 체카의 즉결처분권을 확대하는 조치를 통과시켰다.

옹호론 항목을 보면 레닌이 정적의 살해에서 가장 강경하였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수뇌부가 오히려 사면을 강행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쪽이든 레닌이 단순한 숙청을 넘어 정적을 살해하고 망명시키는 것을 주된 활동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 셈이고 다르게 말하면 다른 혁명 동지들이 레닌을 막을 정도로 레닌의 정적제거가 가혹하고 심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이때 살아남은 인사들을 보자면 반혁명 인사였던 코르닐로프는 처형할 경우 카자크 기병대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으며 사회혁명당 세력들은 지방에서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으며 아나키스트들은 서유럽 사회주의쪽에서의 의견이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2월 혁명 직후부터 볼셰비키와 협력해서 임시정부를 붕괴하는데 공헌했음에도 정권 장악 직후부터 태도를 전환하여 러시아 전역에서 불법체포와 즉결처분을 저질렀다. 이에 볼셰비키를 피한 아나키스트들은 말살을 피해 볼셰비키와 협력하거나 아나키스트가 장악하고 있던 남동부 우크라이나로 이동했으나 볼셰비키들은 그곳까지 추격해 와서 20만명의 농민들을 학살하는 적색테러를 자행했다. 이후 아나키스트 민병대를 이끌던 네스토르 마흐노에게 두 차례 자객을 보내 암살시도를 하고 그가 망명을 하자 망명대상국인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지속적으로 송환요구를 한 것은 덤이었다. 여담으로 마흐노는 파리로 망명을 가서 영양실조로 인한 폐결핵으로 죽었으며, 그의 딸은 나치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고 전쟁이 끝나 대신 NKVD에게 끌려간다. 마흐노와 함께하던 아나키스트 볼린은 내전 중 볼셰비키에 의해 죽을 뻔했다. 아나키스트 역사가 표트르 아르시노프는 볼셰비키로 전향하였으나 대숙청 시기에 아나키즘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내전 시기 아나키스트 연맹 나바트(Nabat) 설립에 참여한 파냐 바론은 하르키우에서 체카에게 체포된 후 구타당했고, 랴잔 감옥에서 모스크바로 탈출, 거리에서 살다가 옘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에게 발견되었는데, 똑같이 체카에게 붙잡혀 갇힌 남편–아론 바론을 탈옥시킬 계획이었으나 체카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루블화 위조, 강도질, 테러를 포함한 여러 체카에 의해 날조된 범죄 행위로 기소되어 처형당했다. 골드만은 항의하려 했지만, 친구들이 만류하여 결국 러시아 혁명에 완전히 환멸을 느끼고 떠나고 말았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으로 말하자면, 그가 죽은 1921년의 말 그와 아나키스트들의 저작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체카에 몇몇 인사가 참여할 만큼 볼셰비키에 협조적이었으나, 모조리 배신당했다. 10월 혁명 2주 후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사회혁명당은 37%의 득표율을 얻으며 전국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정당임이 입증되었다. 볼셰비키는 1918년 1월 의회를 해산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레닌의 반대자들이 양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조약 과정에서 그는 대단히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론 러시아인들은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이는 독일이 인구의 34%, 탄전의 90%를 요구하면서 분노로 변했다. 레닌을 제외한 거의 모든 러시아인이 베르사유 조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굴종적 조약에 분개했다. 트로츠키는 조약에 반대했고, 부하린은 아예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안드레이 부브노프, 카를 라데크 등과 함께 당내 분파까지 조직해가며 조약에 극력 반대했다. 스탈린은 처음엔 조약 반대파였으나 레닌의 의중을 알고 조약에 찬성했다. 두 명의 사회혁명당 체카 요원은 주러 독일 대사 빌헬름 미르바흐 백작을 암살했다. 1918년 7월, 농민 강제 징발을 지속적으로 비난하던 좌파 사회혁명당은 볼셰비키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알고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펠릭스 제르진스키를 억류했고, 좌파 사회혁명당원 적군 미하일 무라비요프는 심비르스크를 점령했다. 하지만 봉기에서 사회혁명당원들은 볼셰비키를 너무 자비롭게 대하였고 중앙위원회로 진격하길 주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봉기는 라트비아 소총병의 도움으로 진압당했으며 무라비요프는 전사하였다. 재판 없이, 사회혁명당–즉 SR의 체카 요원 13명이 즉각 처형당했으며 소비에트에서 SR이 완전히 추방당했다. 살아남은 SR은 우크라이나에서 마흐노우슈치나와 합류하여 영향력을 얻었고, 그곳에서 반 백군 운동과 자유 소비에트 건설을 위해 아나키스트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발틱 함대 선원 출신으로 SR에 입당해 봉기에서 살아남은 드미트리 포포프는 마흐노우슈치나와 적군이 안톤 데니킨남러시아 정부에 대항하여 동맹했을 때 볼셰비키와 협상하는 대표단으로서 협상을 수행하였다. 데니킨이 파멸하자, 1920년 마흐노파 대표단 전체가 모스크바로 추방되어 제르진스키의 명령에 의해 총살당했다. 농민을 잔인하게 탄압한 지주 루제놉스키를 암살한 것으로 명망을 얻었던 좌파 SR 지도자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는 브레스트 조약을 찬성할 만큼 레닌의 관용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봉기에서 군사적 이점을 활용하지 않고 이미 지쳐버린 대중의 자발적 봉기를 기대하는 등 너무 ‘혁명가답게’ 행동한 죄로 실패하였다. 많은 SR 지도부가 모스크바에 수감되었고, 스피리도노바 자신에 따르자면, 200명 이상의 당원들이 즉각 총살되었다. 그 후 그녀는 평생 감옥 안에서 살며 심문에 시달렸고, 독일의 소련 침공 3개월 후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메드베데프 삼림 학살로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노동자 반대파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노동자 반대파는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나타나고 있던 지나친 관료화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공산당 내 분파였다. 주로 노동자 출신의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산업 행정가들로 구성된 그들은 경제를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관리하길 원했고,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원했다.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16], 세르게이 메드베데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유리 루토비노프 등을 포함하는 이 분파는 러시아 공산당 제 9차 대회에서 빛났다. 루토비노프는 그의 연설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의 즉각적 구현을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이를 지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의에서 ‘당내 파벌 분쟁’ 을 막는 임무를 맡은 통제위원회를 신설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반대파들의 투쟁은 점점 더 빈번해졌으며 중앙위원회의 결정과의 모순이 지역과 중앙에서 심화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상류층과 하류층 문제를 다루었던 노동자 반대파들은 노동자 당원들 사이에서 실질적 지지를 형성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화이트 칼라,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 수직적 위계질서의 대표자를 직접 선출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 대표자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되어야 할 것이며, 구성원들에게 책임을 가지기에, 구성원들이 원할 때 소환되어야 할 것이었다. 1920년 말과 1921년 초에 대두되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러시아 공산당 제 10차 대회에서 노동자 반대파의 견해가 거부당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레닌은 노동조합을 자발적으로 구성된 기구가 아닌 그저 공산당 산하의, 당의 명령이나 받는 종속적 행정기구로 격하시켰다. 레닌은 이를 다수결을 통해서 통과시켰다. 다수결을 통해서 정책을 통과시킬 거면 제헌의회 해산이나 농민 징발도 다수결을 통해서 민주적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노조 토론으로 끝장난 노동자 반대파들은 이후 NEP의 시행 상태를 비판하며 견해를 이어나갔다. 예를 들어, 콜론타이는 코민테른 제 3차 대회에 참석하여 NEP가 노동자들을 환멸에 빠지게 하고, 자본주의를 강화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노동자 반대파가 정치적으로 점점 더 주변화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실랴프니코프, 메드베데프, 콜론타이는 1922년 러시아 공산당 제 11차 대회로 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실랴프니코프와 메드베데프는 일명 "노동자 반대파"라고 불리는 반혁명 그룹에 가담하고 "반혁명적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주의 테러리스트 블록"과 연계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1937년 그들은 처형당했다.

한마디로 볼셰비키의 관용이란 몇몇 이용가치가 있던 대상에 한정되었을 뿐 기본적으로는 정적의 물리적 제거가 당연시되었고, 레닌은 이보다도 더 심해서 다른 볼셰비키 동지[17]들이 레닌을 막아설 정도로 잔혹했다. 나아가 기존의 기득권 세력에 대해서도 당연히 잔혹하고 강경하였고, 정교회에 대한 탄압도 종교인 탄압을 위한 무신론자 단체까지 따로 만들 정도로 강경했다. 카를 마르크스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발언을 읽고 흥분한 많은 사회주의자들처럼 레닌 또한 소련 초기에는 종교를 존중하는 듯 하다가 결국 암묵적으로 종교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한편 적백내전으로 인한 경제사정 악화와 볼셰비키의 권력독점화가 결정적으로 굳어질때쯤인 1921년 10월 혁명의 주력세력이었던 크론슈타트에 있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들의 명분은 바로 레닌의 초기 슬로건과 동일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였다. 그러나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콜론타이 같은 극소수 반대파의 의견을 묵살해가며 이 봉기가 외국 세력의 선동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반란을 진압한 직후 뻔뻔하게 파리 코뮌 5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또한 레닌을 띄우기 위해 스탈린을 끌어내려 레닌이 하려는 혁명은 인민을 위한 것이었는데, 패륜아 스탈린이 숭고한 레닌의 혁명정신을 왜곡해 망가뜨렸다라고 종종 주장되기도 하는데, 사실 스탈린이 강대국 소련을 건설해 내지 않았다면 과연 레닌의 이름이 세계사에 그토록 크게 기억되기나 했을지도 의문이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한계가 뚜렷한 정책이었고 무자비한 스탈린의 13년에 걸친 1, 2, 3차 경제개발 5개년이 바로 소련을 당대 최강의 공업국가중 하나로 만든 정책이었다. 이런 스탈린이 자신의 독재정권을 공고히 하고, 다른 지도자 후보들보다 강하지 못했던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레닌의 이름을 줄창 팔아먹었기에 레닌의 명성이 더욱 높아진 것이다.

추가로 레닌은 미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의 다양한 민주주의 체제에 일관되게 부정적이었다. 대통령제는 나폴레옹 3세나 만드는 독재체제이고, 의회민주주의는 국회의원에게 투표할 때만 주권이 있는 노예들의 체제이고, 아나키즘은 그냥 폭력이며, 룩셈부르크의 평의회 민주주의는 러시아처럼 노동계급의 활동이 길지 않은 국가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소비에트 러시아 국내에서 사회혁명당이 왜 소비에트가 아닌 공산당과 인민위원평의회가 권력을 쥐고 있느냐고 항의하여도 무시하였으며,[18] 크로포트킨은 뒷방 늙은이로 무시했고, 멘셰비키가 세운 노동계급 정당의 자유로운 정치참여가 보장되어 있던 조지아 또한 붉은 군대를 이끌고 가 박살내 버렸다. 8월 봉기에서 멘셰비키는 종말을 맞이했다. 바로 위에 언급된 크론시타트 반란 이후에는 마르토프의 멘셰비키, 스피리도노바와 체르노프의 사회혁명당 좌우파, 실랴프니코프의 노동조합을 공평하게 탄압했다. 이러한 레닌의 권력 독점적인 정책에 콜론타이, 스베르들로프, 심지어는 트로츠키조차도 반대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레닌의 결정을 거스르지 못했다.

트로츠키처럼 “혁명의 배반” 운운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또는 유물론적 개념뿐만이 아니라 보다 평범한 상식에서조차 벗어난 “설명”이다.

이 “배반”은 어떻게 가능했으며 그토록 아름답고 완벽한 혁명의 승리 이후의 시대란 어떻게 발생했는가?

그것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이 계획된 “배반”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혁명이 취해 온 방식 그 자체에서 파생된 “물적(物的)”이자 엄밀히 논리적인 귀결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러시아혁명의 부정적 결과는 단지 특정한 과정에서 귀결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 정권은 레닌 및 트로츠키에 의하여 수행된 방책의 불가피한 귀결에 불과했다. 트로츠키가 “배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잘못된 방법으로 인해 조금씩 진행되어 온 타락의 피치 못할 결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부와 국가의 절차가 “배반”으로, 즉 오늘날의 “배반”을 허용하는, 파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놓았다. “배반”은 이 파산의 두드러진 한 측면일 뿐이다. 다른 절차들은 다른 가능성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

트로츠키는 맹목적인 편견에서 (혹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위선으로) 용서할 수 없는 가장 명백한 혼란을 범하고 있다. 그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조잡하게 자신을 기만하여 (또는 자신을 속인 것처럼 꾸며 놓고, 자신의 이론을 방어할 수단을 발견하지 못하고서) 원인에서 결과(= 스탈린에 의한 배반)를 도출하고 있다. 무엇이 “스탈린주의”를 가능하게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트로츠키가 간과한 것은 오류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교묘한 수법인 것이다.

“스탈린은 혁명을 배반했다.” 간단하다. 하지만 너무도 간단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설명은 간단하다. “스탈린주의”는 진정한 혁명에 대한 파산의 당연한 결과지 그 반대가 아니다. 다시 추론해 보면, 혁명의 파산은 볼셰비즘이 취한 잘못된 과정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다시 말해서, 좌절하고 실패한 혁명의 타락이 스탈린을 이끌어간 것이지, 스탈린이 혁명을 타락시킨 것이 아니다.

이 병마(病魔)에 공격받았을 때, 혁명적 유기체는 대중의 자유로운 행동을 통해 의기양양하게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닌과 트로츠키 자신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대중으로부터 악에 대한 모든 자기방어 수단을 빼앗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병마가 유기체를 침범하여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노동대중이 “배반”의 준비에도, 그 달성에도 반항하지 않았기에 “배반”은 가능했다. 그리고 대중은 그들의 새 주인에 완전히 복속되어 진정한 혁명의 의미와 모든 주도 정신, 자유로운 행동과 그 반응의 의미를 빠르게 상실했기에 그에 대하여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속박되고, 복속되고, 지배당하고 있었기에 모든 저항이 헛되고 쓸모가 없다고 느꼈다. 트로츠키는 대중 사이에서 맹목적인 복종 정신을 깨우고, “상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둔감한 무관심을 되살리는 데 직접 참여했다. 대중이 패배한 채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그 이래로 어떠한 “배반”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우리는 독자들이 볼셰비키의 “성과”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기를 권한다.

볼린,《알려지지 않은 혁명 1917~1921》



4. 여담[편집]


  • 레닌이 죽은 이후 스탈린에 의해 추진된 레닌 우상화에 따라 레닌의 동상은 소련 곳곳에 세워졌다. 냉전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 사회주의 국가라면 레닌 동상이 여러 곳곳에 세워졌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공산주의 몰락과 함께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에 있던 레닌 동상은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일부 국가나 지역에 따라서는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 러시아에서는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에 레닌 동상 중 상당수가 철거되었고, 폴란드나 체코 등 반러감정이 강한 국가들처럼 레닌 동상이 완전히 혹은 거의 대부분 철거된 국가들도 있지만 너무 많이 만들어진 탓에[19]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레닌 동상이 5,300여 개가 넘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러시아 주요 거리나 광장에서 레닌 동상을 쉽게 볼 수 있는 편이다. 특히 시베리아나 극동과 같은 오지에서 많이 보이는 편. 노보시비르스크의 오페라극장 광장에도 큰 동상이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러시아군이 동부지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공산당이 일개 야당에 불과함에도 레닌 동상을 복구하는 일이 있었다.

  • 우크라이나에서도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이전까지는 적잖은 수가 잔존하였으나, 2010년대에 도네츠크와 루한스크를 제외하고는 전부 철거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레닌 동상을 소련 체제의 상징이자 러시아 압제의 상징으로 여겨 대부분 철거하였으며, 다른 소련 시절 동상들도 탈공산화의 여파로 대부분 철거되었다.

  • 스위스의 사진가인 닐스 아커만이 철거당한 레닌 조각상들의 현재 모습을 추적한 사진집 《Lost in Decommunization》을 발간해 현재의 동상들의 모습들을 담기도 했는데, 허리 윗부분만 싹둑 잘려나가 방치되거나 지하실에 곰팡이 낀 채로 처박히거나 완전히 산산조각나서 코만 한조각 발견되거나 공장 구석에 방치되거나 철조망에 걸려 있거나 하는 취급을 당하고 있다. 개중에는 아주 희한한 최후를 맞이한 케이스도 있는데, 오데사에 있는 조각상은 알렉산드르 밀로프라는 조각가가 다스 베이더로 깎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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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좀 특이한 사례로, 시애틀에서는 그의 동상을 매입해서 매년 성 패트릭의 날, 하누카나 크리스마스 같은 때마다 트리 겸 장식물로 활용하고 있다. 코로나 시국엔 한동안 빨간 마스크를 씌워놓았다. 이 동상은 본래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것으로, 동구권 붕괴 이후 버려져 있던 것을 한 영어 교사가 매입해 들여와서 전시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반공주의자들이 계속해서 철거를 요구하고 있지만, 사유지에 있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간혹 반공주의자들의 반달리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기네스북에도 오른 바 있는데, 바이칼 호수 근방의 울란우데라는 도시에 세워진 레닌 두상이 세계에서 가장 큰 레닌 머리이라는 이름으로 1991년 등재된 것이다. 폭 4m 이상에 무게는 42톤짜리로 레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기존의 레닌 상 셋을 대신해 세운 거라고 하는데, 소련 붕괴 후 이걸 철거하자니 철거 비용이 너무 나와서 그냥 방치해 놓은 것이 기네스북에 올라가면서 애물단지였던 상이 본의 아니게 관광 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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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극 도달불능점에 모스크바 방향을 바라보는 플라스틱제 레닌 흉상이 있다.# 이 흉상을 두고 웃기는 냉전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소련 탐사대가 이 흉상을 세웠음을 안 미국이 도달불능점으로 탐사대를 파견해서 흉상을 워싱턴 D.C. 방향으로 돌려놓았고, 이를 안 소련은 다시 도달불능점을 찾아 흉상을 모스크바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 러시아의 문호인 레프 톨스토이의 애호가로,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고 극찬할 만큼 높이 평가했으며 이 때문에 공산 혁명 이후 과거 러시아 제국의 유산이 비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오히려 톨스토이와 그의 작품은 갈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 첼리스트 그리고리 퍄티고르스키(Григорий Пятигорский) (1903년 ~ 1976년)가 15살 나이에 현악 4중주단을 만들었는데 베토벤 4중주단이라는 이름을 지어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한 존경을 내비쳤다. 그런데 당에서 이 이름을 레닌으로 바꾸라고 명령했고, 퍄티고르스키는 "레닌은 혁명가이지 음악가가 아니다! 죽어도 못 바꾼다!"며 당에 대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레닌이 직접 그를 만났고, 퍄티고르스키는 죽음을 각오했는데 레닌은 껄껄 웃으면서
"자네 말이 맞아. 난 음악에 대하여 도통 아는 게 없는데 내 이름을 악단으로 짓는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예술가로서 그 용기 정말 멋졌네. 아, 이름이야 자네 마음껏 짓게나."
하며 되려 그를 격려했다. 하지만 레닌의 격려와 달리 주변에선 아무래도 레닌 4중주단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하여 결국은 이 이름으로 바꿔 활동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 분위기로선 자유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어렵다고 느낀 퍄티고르스키는 18살 나이로 식구 및 음악 동료들과 같이 해외로 망명해 버렸다. 국경을 넘을 때 수비병들에게 걸렸지만 무사히 망명에 성공했다. 다만 그가 아끼던 첼로가 이 과정에서 부서졌을 뿐.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레닌은 "나는 음악가 하나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건가."라면서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 민영환을 만날 뻔한 적 있다. 1896년 7월 3일, 민영환이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해 외교 활동을 모두 치르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문물을 두루 살펴보는 중 감옥을 들렀는데, 레닌이 이 감옥에서 수감 중이었다. 민영환이 레닌을 면회했다는 식의 직접적 인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민영환의 당시 여행기 《해천추범》에는 감방 구조를 설명하는 부분도 있어서 아마 감옥을 들여다보던 민영환이 레닌과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물론 외국에서 오신 나름 높으신 분이었던 민영환이 한낱 반역자이었던 레닌을 진짜로 만났다 해도 별 관심은 없었겠지만.

  • 2020년 3월 7일에 독일 법원이 겔젠키르헨시에서 레닌 동상을 세울 수 있는 판결을 내렸다.#

  • 우드로 윌슨보다 앞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여 세계에 큰 파급력을 미친 사람이다. 단, 민족자결주의가 레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에서는 적국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민족의 자결을 본격적으로 구호로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내전 시작 시기에 봉기했던 구 러시아 제국 산하 체코 군단도 이러한 목적으로 차르 정부에서 육성한 것이었다.[20] 레닌의 민족 자결론은 이를 자타를 가리지 않고 적용하면서 러시아 제국의 해체 및 식민지로부터의 우호 획득에 이용하고자 한 것이었고, 그 결과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을 꾀하던 국외의 여러 지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이다.[21] 다만 러시아 제국의 해체 이후 내전기에 캅카스,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3국, 부하라, 히바 등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면서는 당시 민족문제인민위원이었던 스탈린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어도 러시아 제국의 권역 내에서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거부하되 프롤레타리아 민족주의는 받아들인다는 식의 논리로 선회하기도 했다. 단, 레닌의 민족 자결론을 단지 자국 이익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생각했다고 해석하는것은 편향된 시각이다. 애초에 서강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식민지들의 경제적 착취 문제를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분석한것이 레닌주의, 즉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 가한 이론적 공헌이다. 레닌은 민족 자결주의, 즉 서강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항하는것을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이론적 배경은 ‘제국주의론’을 비롯한 그의 저작들에서 여러번 명시된 바 있다. 또 제정 러시아 시절 중국에게서 강탈한 영토를 돌려주겠다는 제안을 공식적으로 중국에게 한 적도 있다. 이를 감안하면, 그의 반식민주의적 태도에 대한 진심성은 부정하기 힘들다. 한편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승인요구를 철저히 묵살[22]한 반면, 소련은 아시아 식민지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지원도 했었다.[23] 이러한 일환 중 하나로 임시정부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레닌을 여러 차례 만나고 조언을 구하는가 하면 400만 루블이라는 거금의 공작금을 원조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이 자금의 행방을 둘러싸고 임시정부가 더 분열되었고,[24] 이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은 김립김구에게 사살되었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김립이 죽을 만해서 죽였다고 써 놓아서 다들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와서야 밝혀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조.

  • 20대일 때 벌써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고[25] 수염도 자라는 대로 내버려뒀던데다가 목소리도 걸걸하여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왠지 무서워했다. 이 덕에 소비에트 정권이 생긴 이후에 국가원수의 사진을 대중에게 공개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조차 꼴이 말이 아니라서, 지도자의 공식 사진은 1918년에 가서야 최초로 언론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이런 외모가 해외로 피신할 때는 의외로 도움이 되었는데, 가발을 쓰고 면도만 하면 완벽하게 변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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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1917년 핀란드 망명 시절 레닌의 변장 모습. 정말로 변장한 거라곤 면도하고 가발을 쓴 것밖에 없다. 이때 레닌의 수염을 면도해준 사람은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레닌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 "누가 봐도 핀란드 농부로군. 이러면 잡힐 일이 없겠어!"라고 크게 흡족해했다고 한다.

  • 레닌은 학창 시절에 최우수 학생이었으므로 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교육 방식은 미칠듯한 암기와 물어봐서 답을 못 대면 패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레닌의 집에는 밤이면 밤마다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심지어는 상급자에 대한 절대복종을 강요하여 동생에게 울라고 명령한 다음 반응이 없으면 쥐어패서라도 울린 다음 너는 네 명령에 복종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어머니마저 동생들을 그만 좀 때리라고 말렸을 정도다.

  • 당시 러시아 제국의 대학교에서 각광받던 학과는 과학, 기술 혹은 의학과였다. 실제로도 누나와 형 모두 그렇게 진학했고 마찬가지 성적이 뛰어났던 레닌도 그럴 것이라고 보였지만, 레닌은 뜬금없이 당시 비인기 학문인 법학을 선택한다. 레닌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의 선택을 말렸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고, 결국 레닌은 법대에 진학했다.

  • 동상이나 초상화 등에서 옷깃을 한 손으로 붙잡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긴장했거나 두려울 때 하던 버릇이었다. 이 덕에 옷깃이 너덜너덜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옷을 한번 사면 낡아 빠질 때까지 입었기 때문에 더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파리 망명 당시 발에 안 맞아서 못 신는 구두를 버리지 않고 트로츠키에게 줬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로 봐서, 의외로 구두쇠였는지도 모른다.

  • 위와 마찬가지 맥락으로, 레닌의 사진을 보면 양복이나 코트를 거의 풀어 헤치고 있는데, 기본적인 이유는 더워서다. 활동량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었던 듯 하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집안의 온도를 섭씨 16도 이상 올리지 못하게 했으므로 아내 크룹스카야는 집안에서도 옷을 껴 입고 있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나중에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 주치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온도를 조금 더 올리긴 했지만 그때는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 외국어 능력이 뛰어났다. 제정 러시아 귀족층의 공용어는 러시아어가 아닌 프랑스어였는데, 레닌은 하급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어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했다. 학창 시절엔 라틴어그리스어 성적이 좋았고,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 이후 외국의 혁명가들과 교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독일어영어를 익혔다. 거기다 폴란드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 다만 망명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던 외국어는 프랑스어 정도였고, 독일어와 영어는 이후 스위스[26]영국에서 생활하며 유창해졌다.

  •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계 본좌이지만 사실 그 자신은 아버지가 심비르스크 시 총 장학관인 쁘띠 부르주아로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부유하게 살았으며, 이때 뿐만이 아니라 그는 평생 육체노동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특히나 노동자와 자신을 분명히 다른 계층으로 보고 있었으며 집에도 하녀를 두고 있었다. 본래 공산주의의 시조인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도 노동자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그 외에도 유명한 사회주의 운동가 중에는 오히려 출신 신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 계층과 거리가 있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출신 성분의 차이라는 아이러니함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연구에서 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선 레닌을 시작으로 중국의 마오쩌둥도 젊은 나이에 학교를 설립할 정도로 부자였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라울 카스트로도 아버지가 농장 소유주였고 체 게바라도 아버지가 귀족 출신에 병원 원장이었다. 레프 트로츠키는 8살 때 당시 우크라이나에선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열대 관엽식물이 잔뜩 놓인 사진관에서 입학 기념 사진을 찍을 만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폴 포트는 왕의 외척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왕족들과 교류했고 쑤파누웡왕자였다. 반대로 가난한 집안 출신들로는 이오시프 스탈린, 저우언라이, 요시프 브로즈 티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호찌민을 들 수 있는데, 이 와중 저우언라이랑 호찌민은 경제적으로 가난하지만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자체는 확고한 몰락 유학자 선비 집안, 스탈린도 비슷하게 주머니는 텅텅 비어도 글은 배우는 신학교를 나오는 등 고등교육에 대한 인식과 기회 자체는 있는 배경 출신이 많았다. 문제는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려면 고대 철학에서부터 헤겔을 비롯한 고등교육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진짜배기 가난한집안에 독학으로 공산주의를 배운 인물로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있다.

  • 소련 시절에 나온 레닌에 관련된 책에서는 그가 아버지 사후 기지를 발휘해 가족들을 부양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레닌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도 어머니 밑에서 값비싼 여러가지 부대비용을 요구하는 벅찬 존재였다. 위에서도 썼지만 그는 육체노동을 해 본 적이 없다. 단지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거나 도서관에서 아예 안 오거나 했을 뿐이다. 이 덕에 레닌의 어머니는 영지를 팔기도 하고, 레닌의 요구에 따라 이사를 다니며 집에 세를 내거나 하는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레닌의 어머니는 러시아 제국의 국채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국채에서 나오는 이자가 레닌의 망명비용으로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나마 사치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기는 했다.

  • 학창 시절에 담배를 달고 살았었다. 이에 어머니가 "담배는 건강에 해롭다."라고 충고했는데, 이때만 해도 레닌은 그 충고를 무시하고 계속 담배를 피웠지만 어머니가 보다못해 "너에게는 네 담뱃값으로 가족의 재산을 소모할 권리가 없다."라고 지적하자 반박할 수 없었던 레닌은 즉시 금연했다.[27]

  • 형 알렉산드르가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자, 레닌의 담임 교사는 아직 어린 레닌에게 이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나 걱정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그는 동요하지 않고 "형이 스스로 옳은 일을 하였다고 여기고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면, 형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형의 국가반역 행위 덕에 레닌은 대학교에서 뭔 사건만 터지면 주동자로 몰려서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다가 청강생으로 법학 공부를 겨우겨우 하고 졸업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수석이었다. 변호사 면허도 최우수 성적으로 받고 사무실에 취직한다. 그러나 이 당시 레닌은 사소한 소송에서도 매번 패소한 데다가 한 달에 대략 6번 정도의 의뢰만을 받았을 정도로 이 일에 관심이 없었다. 즉 그저 생계를 위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서민들의 억울함과 사회 현실의 부조화 등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28]

  • 레닌은 책을 사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쪼들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독촉해서라도 돈을 구하거나 빌려 책을 샀을 정도로 유명한 책벌레다. 책의 요약 및 정리하는 능력이 일반인과는 넘사벽 수준이었고, 칸트나 헤겔, 마르크스의 저서를 읽고 비판과 개인적인 주석까지 달 정도의 수준이었다. 토론에 들어가면 논쟁에서 유리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많게는 400권씩 읽었다. 또한 5,000단어로 된 문서 하나 쓰는 데는 4시간이면 충분했으므로, 레닌이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연설가이자 세계구급 논객이었다는 것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였다.[29]

  • 아이러니하게도 공화혁명의 시발점이자 공산주의의 발상지인 프랑스를 싫어하고 자본주의의 상징국이자 세계 최대의 제국인 영국을 좋아했다. 레닌은 프랑스 망명시기 프랑스를 두고 더럽고 규칙도 없는 제일 추악한 곳이라며 욕을 퍼부었을 정도. 당시 그가 살았던 아파트의 맞은 편에 살던 푸줏간 주인이 매일같이 소시지를 만들어대는 통에 풍기는 돼지 창자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레닌은 아무리 더워도 창문을 열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앞집 사람은 독일계였다.

파일:external/www.schachclub-badsoden.de/lenin_chess_with_bogdanov.jpg[30]
  • 레닌은 만성적인 위장 질환을 앓았다. 주치의들이 광천수를 마시도록 처방하고 각종 검사를 해봐도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는데, 원인은 다름아닌 체스였다. 실제로 레닌은 체스를 매우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레닌은 체스 도중 좋은 수가 떠오르면 숙이고 있던 상체를 갑자기 일으키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버릇이 몸에 힘을 주게 되어 위장에 무리를 준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실제로 체스를 끊자 고통이 많이 사그라졌다. 사실 알고 보면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수준인데, 특히 신경쇠약은 항상 달고 다녔으며 불면증으로 며칠이나 잠을 못 잘 정도로 고생하기도 했다. 그의 말년 뇌일혈이나 기타 사소한 질병들은 그의 아버지 쪽 가족력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 원래 힘이 장사였다. 학창시절에는 실제로 성적도 최상위권이었고 공부만 하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만약에 자신이 책을 읽을 때 시비를 거는 학생이 있으면 폭력을 시전. 덕분에 레닌이 책을 읽고 있을 때는 아무도 그의 옆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평범한 강도는 그냥 제압해 때려 눕힐 수 있을 정도였고, 토론 자리에서 언성이 높아질 때 자기 측의 인원 중 하나가 폭력을 쓰려고 하자 그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회의장 밖으로 끌고 나와서는 "논쟁의 자리에서 폭력을 쓰는 자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또 2월 혁명 이후 독일에서 러시아로 향할 때 기차 안에서 수상해 보이는 인물을 발견하자, 다짜고짜 그 사람을 기차의 플랫폼으로 던져버렸다.

  • 운동을 좋아하여 볼가 강을 따라 카누 타는 것는 것을 어려서부터 즐겼을 뿐 아니라 스키와 등산도 좋아하여 알프스를 등반하는 것도 즐겼다. 따라 온 일행들이 퍼지면 "벌써 퍼지는 건가?"라고 핀잔을 준 뒤 그래도 못 따라오면 버리고 갔다. 국가원수가 된 이후에도 차를 타기보단 크렘린 주위를 자주 걸어다녔으므로 강도를 만났던 적도 있고 저격 미수사건도 이 도중 일어났다.

  • 레닌은 패션, 요리, 청소, 집안 인테리어 등에 대해서 굉장히 무지하였다. 옷도 누가 사주지 않으면 입던 옷만 계속 입었고 집에서도 누가 요리를 안 해주면 그냥 굶었다. 실제로 일만 하는 혁명 로봇 수준.[31] 1917년 비밀열차를 타고 돌아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치는 유명한 사진과 그림 당시의 말쑥한 옷차림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노동자와 군인들이 귀국한 레닌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카를 라데크가 스톡홀름에서 열차를 멈춰 백화점에 목불인견 상태의 레닌을 끌고 가 사 준 옷이라 한다.

  • 다혈질에 자타공인 아가리 파이터로 유명하다.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역에서 실제 객차의 자리수보다 표를 많이 발권하는 오류로 승객들과 승무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을 때, 레닌은 분명히 올바른 좌석 표를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열차가 지연되자 승강장으로 박차고 나가 승무원을 붙잡고 입배틀을 시전, 결국 모두 타고 갈 수 있게 한 적이 있다. 설전이 붙으면 상대가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논쟁했으며 이 시간이 몇 시간씩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말년에 투병 중이라 말도 잘 못하는 레닌을 상대로 논쟁했을 때도 백이면 백 털렸으며 볼셰비키 최강의 이론가이자 꿀리지 않는 아가리 파이터인 니콜라이 부하린도 레닌과의 논쟁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 다만 레닌을 말빨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레닌이 가장 말싸움으로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었고,[32] 레프 트로츠키와도 논쟁 중 밀려서 트로츠키의 의견이 옳다고 인정해야 했던 적이 한 번 있다.

  • 소비에트의 국가원수가 된 이후, 관용차로 당원들이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에 관심없던 레닌은 시큰둥한 반응이었고, 한번 타 보았을 때 눈보라에 바퀴가 박혀 버려 운전사와 함께 차를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자 돌아와서 "이 차는 사치품일 뿐 쓸모가 없다!"라고 일갈하며 내다 버리라고 명령했다. 왜 레닌이 자동차를 사치품이라 칭했냐면, 당시에는 자동차 자체가 진귀한 명품이었다. 1920년대 시점에서는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나 자동차가 보급된 수준이었고,[33] 대부분의 국가들과 식민지에서는 자동차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고위급이나 일부 부유층이나 타고 다닐 수 있던 수준이었고, 훨씬 이후에도 고급품이자 부의 상징이었다. 당장 소련만 해도 자가용의 대중화는 늦게 이루어져서 자동차가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라다 공장이 완공되고 나서부터의 일이었으며, 한국은 1980년대 중반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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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레닌의 일갈에 당황한 각료들은 차량에 무한궤도와 썰매를 달아서 눈길도 잘 달리도록 만들었는데, 이렇게 개조된 이후에 타 보곤 그제서야 제 기능을 한다며 마지못해 이용했다. 그리고 이 실버 고스트는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레닌의 별장전시되어 있다.[34] 실제로 레닌은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그다지 좋아했던 편이 아니다. 후에 뇌일혈로 불구자가 되었을 때, 영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전동휠체어를 선물했을 때도 참전 군인들에게 주라고 거절했었다.

  • 깔끔하고 정돈된 상황을 좋아했고 주변인에게 그렇게 요구했다. 특히 자신의 집무실 이외의 장소는 어질러지든 더럽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집무실에서만큼은 업무를 볼 때 연필을 반드시 뾰족하게 깎아서 길이를 맞추어 일렬로 배치해야 했고, 자리에 앉을 때 책상을 반드시 걸레로 닦은 뒤에야 업무를 보았다. 뇌일혈로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크렘린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 물건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았는지 점검하러 올 정도. 집무실에 있을 때 소음이 들리는 것 또한 매우 싫어해서 크룹스카야는 그가 집무실에 있을 때면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야만 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타인이 집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면 밖의 날씨가 어떻든 무조건 창문을 열어 버렸다. 일례로 스탈린이 집무실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자 레닌은 창문을 열었고, 스탈린은 담배를 껐다.[35]

  • 특히 아이들을 좋아했다. 집에 아이들이라도 놀러오면 근엄한 모습을 내버리고 아이들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방 안을 뛰어다니는 등 정신이 없었다. 이를 본 볼셰비키 당료들이 오히려 당황해 했을 정도이다. 특히 레닌은 늘 손주나 다른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했다. 다만 레닌의 아내인 크룹스카야는 병을 앓았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따라서 레닌의 직계 자손은 없다.

  •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논객답게 연설과 토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말년에 체력적으로 매우 무리가 따르는 상황에서도,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연설을 감행하기도 했다가, 연설 직후 기절한 적도 있다. 그러나 비생산적인 논쟁이나 논쟁을 위한 논쟁은 매우 싫어했으며, 논쟁이 무익하다고 판단할 때는 그냥 상대를 하지 않았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노선차를 둘러싼 논쟁이 도저히 해결이 안 되자 깔끔히 볼셰비키멘셰비키로 분당된 것은 레닌의 이런 면도 크게 작용했다.

  • 러시아 혁명이 완수되고 크렘린이 집무실이 되었을 때, 레닌은 거대한 크렘린 궁전의 딱 세 방만을 사용했는데 침실, 집무실, 서재이다. 이후 대부분의 소련 서기장들은 이러한 레닌의 검소함을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대부분 비슷한 방식의 구역을 사용했다. 이 방들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나, 건물 자체가 러시아 대통령의 집무실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

  • 호신용으로 항상 리볼버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렀던 적도 있다.

  • 사후 1930년에 그를 기리기 위하여 소련 최고 등급의 국민훈장인 레닌훈장이 제정되었다.

  • 레닌이 사망한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레닌 동지가 도대체 어떻게 천재적인 혁명적 위업을 수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주제로 그의 뇌를 절단해 세계 각지에 보내 공밀레를 시전했다. 당연히 답이 없다. 그러나 독일의 한 과학진이 레닌의 뉴런 집합체가 일반인보다 크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 혁명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서 반대파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한때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마르토프는 10월 혁명 후 레닌이 어떻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냐는 질문에 "온종일 혁명만 생각하고, 혁명에 대한 글만 쓰고, 혁명에 관한 글만 읽는 사람이 어찌 집권할 수 없었겠소."라고 되물었다. 레닌은 한때 혁명 동지였으나 노선 차이로 갈라진 멘셰비키 인사들에 대해 매우 관대했으며, 옛 동지 마르토프도 해외 망명을 허가해줬다.

  • 아름다운 프랑스 여자 혁명가 이네사 아르망(Inessa Armand)과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이 있었다. 2004년 EBS에서 방영한 레닌의 전기영화 레닌의 혁명으로 가는 열차(Lenin:the Train, 1988)는 이 소문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영화는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혁명가들이 봉인열차를 타고 스위스를 떠나 독일을 횡단하면서 러시아로 갈 때 벌어진 일화를 다루고 있다. 이네사 아르망은 레닌에게 크룹스카야와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하자고 재촉하지만 영화에서 레닌은 단호히 이렇게 말한다. "혁명가가 조강지처를 버린다면 도대체 누가 그 혁명을 지지하겠소."[36]
이네사 아르망은 레닌을 따라 러시아에 왔고 그가 집권하는 것을 봤으나, 혁명 이후 창궐했던 티푸스에 걸려 사망한다.[37] 이네사와 레닌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는 소문이 퍼진 이후에도, 뜻밖에도 레닌의 아내인 크룹스카야와 이네사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서로를 혁명 동지로서 존중하고 아껴준 흔적이 편지나 주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남아 있다. 이네사가 사망한 이후 크룹스카야는 진심으로 슬퍼하며 그녀를 위한 추도사를 작성해 주었으며, 이네사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앙드레를 후견인으로서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레닌이 바람피웠다는 증거는 없고, 아르망과의 관계는 그냥 소문이다. 그러나, 존경하는 혁명가에게 이러한 '추문'이 도는 것을 불편해 한 볼셰비키들은 레닌 사후, 기록 말살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이네사 아르망에 대한 기록과 레닌과의 연관성을 지워 버렸다.

  •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감독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였다고 한다. 둘은 초기 공산주의자, 즉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정작 그리피스의 작품들은 심각한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 레닌이 죽은 뒤 시신이 앰버밍 처리되자 미국 언론에서는 그 사진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했다. 그러다가 라이프에서 사진을 구해 독점 보도로 보도했는데, 알고 보니 장의업계 전문잡지에서 이미 선수를 쳐서 라이프는 뒷북을 쳤다고 한다.


5. 어록[편집]


소비에트 권력이란 무엇인가? 국민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 새로운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점점 노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권력의 본질은 부자들과 자본가들이 독점하던 국가 경영이 이제는 처음으로 억압받고 박해당하던 계급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레닌의 정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언제나 고대 그리스 공화국들에 있었던 자유, 즉 노예 소유자들을 위한 자유와 거의 같은 것이다. 현대의 임금노예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조건으로 인해 궁핍과 빈곤에 몹시 짓눌려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신경 쓸 여지도 없고 정치에 신경 쓸 여지도 없으며 따라서 모든 일이 통상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될 때에는 주민의 다수가 공적 생활과 정치 생활에서 배제되어 있다.

저서 《국가와 혁명》 중


어려움이 실행 불가능은 아니다.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는 확신이 중요한 것이니, 이 확신은 기적을 이룰 수 있는 혁명적 정력과 혁명적 열정을 백 배 강화해 준다

저서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중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빠르게 연단에 올라 '동지들이여'라고 목을 굴리며 명확히 말하였다. 그는 말을 잘 못하는 것 같아 보였으나 잠시 후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말에 빨려들어갔다. 매우 복잡한 정치문제들을 그토록 단순하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문장을 아름답게 말하려 하지 않았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놀랍도록 손쉽게, 그리고 단어의 의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듯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가볍게 위로 올려져 앞으로 내민 그의 팔과, 말을 담고 있는 듯한 그의 손은 적의 주장들을 축출하면서 노동자 계급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뒤나 옆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들을 내세웠다. 이 모든것은 탁월하였다. 레닌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간결하게 하는군 이라고 소곤거렸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막심 고리키가 묘사한 레닌의 연설


국가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자유가 있을 수 없다. 자유가 있으면 국가는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공산주의이다.



6. 저서[편집]


레닌의 저작은 총 120권의 책으로, 1960년에 소련 공산당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에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민주화 이후 가장 유명한 저작 일부만이 번역되어 출판되어왔으나, 2017년부터 아고라라는 출판사에서 전집 출간을 시도하고 있다.#

  • 《이른바 시장문제에 관하여》, 1893
  • 《인민의 벗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우는가》, 1894
  • 《우리의 임무》, 1899
  •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 1899
  • 《무엇을 할 것인가》, 1902
  • 《가난한 농민에게 바란다》, 1903
  •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1905
  • 《유물론과 경험비판론》[38], 1909
  •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39], 1916
  • 《국가와 혁명》, 1917


7. 레닌의 이름을 딴 지명[편집]


더 보고 싶으면 여기를 참고. 굵은 글씨는 현역 지명이다.

  • 레닌그라드 - 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레닌그라드 주 -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둘러싼 주
  • 울리야놉스크 -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40]
  • 레니노고르스크 - 러시아 타타르스탄 공화국
  • 레닌스크 - 러시아 볼고그라드
  • 레닌스키 구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구
  • 레니나칸 - 현 아르메니아 규므리
  • 레닌고리 - 남오세티야[41]
  • 레닌스키 - 카자흐스탄 북부
  • 레닌스크 - 현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 레니나바드 - 현 타지키스탄 후잔드
  • 레닌그라드 - 타지키스탄
  • 레닌 봉 - 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 국경[42]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기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43]


8. 대중매체에서[편집]



  • 심슨 가족 시즌 9에서 등장한다. 호머가 해군에 입대해 핵잠수함을 강탈하는 에피소드인 Simpson Tide[44]에서 러시아가 소련으로 돌아가자[45] 퍼레이드 중인 러시아 국기가 소비에트 연합 국기로 덮어지고 퍼레이드 구조물에서 탱크가 나오며 병사들이 절도있게 움직이고 베를린 장벽이 다시 쳐지며 보존처리된 레닌이 유리관을 깨고 부활하더니 "MUST CRUSH CAPITALISM!!"[46]라고 외친다.


  • 굿바이 레닌에서는 동독이 무너지면서 헬리콥터에 실려가는 동상으로 등장하며, 작중 주인공의 어머니가 진실에 다가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 메트로: 라스트 라이트에서 그의 유골이 등장한다.[47] 관 앞에는 공산주의 계열 스토커가 놓고 갔는지 초와 음식이 놓여져 있다.

  •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도 소련관련하여 동상과 초상화로서만 등장한다.[48]

  • 하프라이프: 알릭스에서는 북극성 호텔 앞에 세워진 동상으로 등장하나 목이 잘려진 상태로 서있다.알릭스의 배경시간대는 하프라이프 2의 5년전으로 해당동상은 콤바인 침공이전부터 목이 잘려나간것으로 추측된다.참고로 알릭스와 하프라이프2편의 배경은 동유럽 그중에서도 구소련권으로 보인다.


  • 대통령 각하 만세라는 대체역사 소설에서는 암살미수사건이 없었기에 1940년대 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장수하며 자신의 후계자로 트로츠키를 지명하는데 성공한다. 그래서 스탈린은 그냥 평범한 레닌과 부하린의 부하로 살게 된다.[49]

  •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가 저술한 레닌 평전 4부작이 국내에 들어와 있다. 다만 클리프주의의 관점이 뚜렷하게 드러나, 이른바 속류 민주주의[50]의 관점에서 레닌의 활동과 사상을 다소간 곡해하고 있으므로 읽을 때 이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클리프주의 경향에서는 이 책을 거의 종교경전으로 숭상하고 있다. 사실상 레닌을 자기네들 입장에 맞게 끼워 맞춰서,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익숙한 대중들에게 레닌은 독재자가 아니다[51] 라고 호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한 책인 셈인데, 막말로 스탈린이 레닌을 왜곡한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레닌과 스탈린을 왜곡하고 있다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을 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클리프 본인부터가 역사학자가 아닌 정치운동가에 가깝고 클리프가 주로 소스로 삼은 1차 사료들은 기껏해야 망명자들의 매우 단편적인 증언이나 일부 법령집 따위의 내용들이며, 90년대 이후 소련 문서고가 공개되었을때 클리프는 이미 노쇠한 상태라서 문서고를 뒤져가면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할 수준의 연구를 할 수 있을 여력 자체가 안되었다.[52] 애초에 러시아어로 그 많은 문서들을 해독해야 할 능력 자체는 둘째치고 말이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클리프의 소련에 관한 여러 저작들은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환상 속의 소련을 제시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크게 비판하고 있다. 노경덕 교수 또한 클리프의 소련관이 미국 주류학계의 시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고, 당시 시대적 혹은 상황적 맥락을 파악하지 않고, 스탈린 격하에 치중하여 오류를 범한다고 학술적으로 크게 비판한 바 있다. 당장 레닌의 군수공업 육성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의 위협을 논하면서 스탈린의 군수공업 육성에 대해서는 소련의 자본주의화의 증거로 갑자기 잣대를 바꾸는 모습 등에서 소련사의 맥락에 대해 진지하게 고착했다고 보긴 어려운 인물이 클리프. 애초에 클리프의 주장 자체가 한국의 운동권 사이에서 인기가 이상하게 높아서 그렇지 국제적으로 그리 명성이 높았던 것도 아니다.

  • 2001년 삼인출판사에서 영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저술한 레닌 평전이 정발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되고,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출판사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 12권으로 다시 출간했다. 저명한 러시아 연구자 김남섭 교수가 번역했다.

  •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가 쓴 《레닌을 회상하며》라는 책이 있다. 박종철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 빅토리아 3의 DLC 인민의 목소리에서 역사적 선동가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레닌을 밀봉열차에 태워 타국에 보낼 수 있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원래역사랑 너무 변해서 레닌이 아닌 울리야노프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이 지연되면서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자가 아닌 알렉산드르 2세 암살자가 되어 러시아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 결국 오스트리아로 이주해서 반독일인 되었고 독일식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카리스마는 원 역사와 같이 여전하지만 맨셰비키와 볼셰비키의 분열은 없어지며, 러시아에서의 기반도 없어서 자신도 독재자가 아니라 집단지도체제의 일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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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라디미르 레닌, 김영철, 국가와 혁명, 265쪽.[2] 블라디미르 레닌, 남상일, 제국주의론, 160쪽.[3] 소련의 초대 서기장은 레닌이 아니라 스탈린인데, 이는 스탈린 집권 이전에 서기장이 정무직이 아닌 한국 정당의 사무총장과 같은 실무 총괄직이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현대로 치면 총리와 유사한 직책인 인민위원장으로서 소련을 통치했으며 당과 정부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4] Feuer, Lewis S. (1989). Einstein and the Generations of Science. Routledge. p. 25.[5] 단 우크라이나의 경우 유로마이단 이후 레닌 동상들이 파괴된 사례를 보았을 때, 이 쪽은 아니다.[6] 다만 스탈린주의가 소련 국내 정치에 집중하면서 대외 팽창을 자제하는 폐쇄적인 방침이었긴 했지만 스탈린이 딱히 민족주의자였던건 아니다. 소련이 민족주의적, 러시아적인 성향을 띄게 된건 2차대전에서 독일의 맹공에서 밀리면서 국민들의 집결과 선전을 위한 조치였지 그 전에는 범민족적인 기조를 따르고 있었다.[7] 다만 전시공산주의가 끝나고 경제성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신경제정책이라는 자본주의화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이에 반대하는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을 좌익소아병이라고 까고 탄압한 적은 있다. NEP는 원래부터 현실적 필요에 의한 한시적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다.[8] 볼셰비키의 의회 전복 같은 사건은 상황 자체의 맥락 파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평균 교육 수준은 정말 말 그대로 처참했는데, 일례로 착한 볼셰비키가 우리에게 토지를 나눠줬는데 나쁜 공산당이 다시 빼앗았다는 생각이 러시아 농민들에게 전반적으로 팽배해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사회혁명당 내부에서는 우파와 좌파로 첨예하게 나뉘었고, 집권 사회혁명당 우파들은 기존의 러시아 지주들, 자본가들, 귀족 등 기득권과 단합하는 행보를 보였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혁명당 우파들이 당내 주요직을 거의 다 차지했다는 것. 정작 농민들이 좋아하고 지지하던 건 사회혁명당 좌파였는데 말이다. 심지어 사회혁명당 우파들은 백색테러를 몰래 지원하고 조장하녔다. 결국 이러한 레닌의 의회 전복에는 사회혁명당 좌파들이 대거 동참하였고, 이후 사회혁명당 좌파와 볼셰비키가 대립하기 시작한 것은 브레스트 조약 체결 이후의 이야기다.[9] 기근 시기에 그는 혁명의 발발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 (책 속 주석)M. Gorky, Untimely Thoughts: Essays on Revolution, Culture and the Bolsheviks, 1917-1918 (New Haven, 1995), p. 88.[11] 영국, 프랑스과는 비교 불가능하지만 이탈리아, 스페인 등 대부분의 다른 국가는 파시즘 독재를 시행했다.[12] 다만 지역정당을 포함해 정당들이 하도 많이 난립한지라 24%도 적은 득표수는 아니다. 애초에 도시에서는 볼셰비키가 휩쓸었으니.. [13] 소수파들이 망명 간 다음에는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14] 1919년 1월에 사망해서 직접적인 저술은 부족하다.[15] 이는 트로츠키가 민주주의를 실현해서 그런게 아니라, 레닌 사후 권력투쟁에서 소련에 쥐꼬리만큼 남아 있던 좌파공산주의자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 등이 모든 후계자 후보군인 레프 카메네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이오시프 스탈린, 니콜라이 부하린, 그리고 트로츠키를 통틀어 이 중에서 그나마 정치적 동지가 반대의견 냈다고 괴롭히는게 가장 덜 할것 같은 사람인 트로츠키와 대동단결했던게 크다. 물론 트로츠키는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하고 약 1200~2100명을 처형하였다.[반론] 여기에 대해서는 레닌 자신보다는 레닌의 후계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견해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바 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자본의 사회화의 과정으로서 자본의 국유화를 추진했는데, 레닌의 후계자들은 자본의 사회화=자본의 국유화로 생각했고 이 때문에 국가를 절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이오시프 스탈린, 레프 트로츠키, 니콜라이 부하린 등 여러 후계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16] 레닌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망명간 사이 러시아 제국 국내에서 당을 사실상 이끈 진짜 노동계급 출신의 지도자였다. 노동조합원들로 구성된 ‘노동자 반대파’ 들은 만년 야당 신세를 변변치 못하다가 결국 사라졌다. 실랴프니코프는 연합 정부를 지지했으나, 1933년 공산당에서 제명되었고 1937년 처형당했다.[17] 특히 사회혁명당 수뇌부의 사형을 막은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나 크론시타트 수병반란의 무력진압에 반대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18] 다시 말하지만 러시아 혁명의 슬로건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였다.[19] 이건 단순히 많이 만들어져서라기보다는 1990년대 러시아 경제사정이 안 좋아져서 철거를 미처 못했고, 옐친 시절 실정에 대한 반동으로 소련에 대한 향수도 강해지다 보니 레닌 동상을 굳이 철거할 필요가 있나라는 식으로 여론이 반전되다 보니 철거 논의가 힘을 잃은 것에 가깝다. 현재도 통합 러시아 등에 의해 철거 논의가 간간히 벌어지기는 하지만 반응은 미미한 편.[20] 물론 이 군단의 주 목적은 어디까지나 범슬라브주의라는 것이 정설이긴 하다.[21] 그런데도 중국은 티베트나 위구르 등은 독립해선 안 된다는 이중잣대를 내밀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중국의 붉은 별》을 보면 마오쩌둥은 조선마저도 중화연방의 일원이라는 식으로 말해서 인터뷰한 작가인 에드거 스노우가 따로 지적하는 주석을 달기도 했다.[22]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열강들은 아시아 식민지 문제에 대단히 소극적이었던 자세로 일관했었고, 일본 제국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23] 실제로 아시아 여러 지역의 여러 지도자급 인물들이 여기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쑨원도 이러한 전략적 필요성에 공감해 소련과 손잡았다. 독립군 무장이 보통 모신나강이나 PPSh-41 같은 소련제 무기인 것으로 보아 무기도 지원해 준 것으로 보인다.[24] 이는 독립운동가들 사이 내부 계파가 생각이상으로 분열이 심각했기 때문이다.[25] 25세가 되던 1895년에 찍은 머그샷을 보면 이미 탈모가 상당히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26] 독일어공용어로 사용함.[27] 반대로 이오시프 스탈린은 담배를 신나게 피웠다.[28] 레닌 에센스 중 하나인 무엇을 할 것인가? 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29] 모스크바 대학을 나오고 당내 최고 이론가인 니콜라이 부하린도 레닌에게 논쟁으로 이긴 적이 없다! 인터넷에서 반박 근거를 바로 찾아낼 수 있는 현대에도 아는 게 많고 글과 말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꺾는 건 매우 어렵다.[30] 망명 시기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와 체스를 두는 레닌의 모습. 가운데 있는 인물은 막심 고리키이다.[31] 레닌의 초상화에서 그가 입은 셔츠가 다운버튼 스타일이라 패션 리더가 아니냐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다운버튼이 아니고 넥타이가 풀어지지 않게 하는 목적으로 카라를 조이는 링크버튼을 끼운 것으로 당시에는 꽤 많이 사용되었다. 지금도 탭 카라라는 이름으로 쓰이며 버튼다운보단 훨씬 고전적인 아이템으로 꼽힌다.[32] 레닌은 보그다노프를 반박하고 출당하기 위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라는 책까지 저술해야 했다.[33] 이것도 포드 사가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을 개발, 자동차를 염가에 팔아먹을 수 있게 만들어서 그렇지 그게 아니었으면 자동차의 대중화는 훨씬 늦었을 것이다.[34] 위 기록사진보다 완성도가 좋은데, 위 기록사진은 일단 급한 대로 기능부터 추가한 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35] 레닌이 "이 아시아놈 같은 작자를 보게! 할 줄 아는 건 앉아서 담배 빠는 것밖에 없잖아!" 라고 소리치며 창문을 열었고, 레닌의 말에 화가 치민 스탈린이 창 밖으로 파이프를 던졌다는 설이 있다.[36] 이에 반해 트로츠키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딴살림을 차렸다. 대체적으로 혁명가들은 보수적 성향과 거리가 있다보니 연애 문제에 대해서도 개인의 의지가 중요하다면서 관대한 사람이 많았다. 유명한 여성 볼셰비키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프리섹스를 주장했다. 다만 섹스는 물과 같다고 주장한 콜론타이의 주장은 볼셰비키 당 내에서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았고, 상당한 비판까지 받았다는 점에서 연애 문제에 대한 혁명가들의 보수성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레닌은 그렇다고 아무 물이나 마실 수는 없다며 콜론타이를 논파했다. 한편, 콜론타이의 직책이 주로 공사, 대사 등 외교관이었던 것 역시 대단히 명예롭고 대외적으로 소련의 남녀평등을 과시할 수도 있지만, 실권은 별로 없는 자리에 박아넣은 것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37] 당시 유행했던 티푸스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데,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존 리드도 그때 사망한다.[38]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를 논박하고 출당시키기 위해 출판한 책이다.[39] 《제국주의론》이라고도 불린다.[40] 원래 도시의 이름은 심비르스크(Симбирск).[41]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조지아에서는 아할고리(ახალგორი)라고 한다.[42] 타지키스탄에서는 2006년 이븐 시나 봉(Қуллаи Ибни Сино)으로 개칭했다. 다만 키르기스어 이름은 아직도 레닌 봉(Ленин чокусу).[43] 그 체르노빌 맞다.[44] 시즌 9 에피소드 19로 크림슨 타이드, 붉은 10월을 비롯한 잠수함 영화들 패러디이다.[45] 이 때 알렉산드르 보로딘이 작곡한 오페라인 이고르 공의 일부인 Boyar's Chorus가 흘러나온다. 나라 이름만 바뀐게 아니라 멀쩡하던 베를린에 다시 장벽이 생기는 등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사회주의 공화국들이 다시 흡수된다.[46] EBS 더빙판에서는 "자본주의를, 쳐부수자!"로 번역되었다.[47] 아무래도 핵전쟁으로 러시아가 멸망해버리는 바람에 관리를 못 받아 백골화된 듯 싶다.[48] 이오시프 스탈린레즈노프한테 대차게 까이며, 피델 카스트로암살 시도로 대역과 애첩이 죽고, 유리 안드로포프는 졸지에 좀비 사태의 흑막이 되어버렸다.[49] 역사와 달리 레닌이 조지원에게 스탈린을 우호적으로 소개 하는 것을 보면 사이가 원만한 사이인것 같다.[50] 국가자본주의론 및 좌익 공산주의. 이런 경향은 레닌 본인이 강하게 비판한 바 있는 노선이다. 레닌의 저작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이 아예 대놓고 독일의 좌익 공산주의를 대차게 까는 내용이다.[51] 레닌, 그리고 레닌 시기에 2인자였던 트로츠키가, 계급 중립적 입장에서 볼 때 독재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분명 볼셰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추구하였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전제로 하여 그 체제 안에서 제한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의 정치적 다양성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그마저도 송두리째 부정하고 짓밟아 버린 게 스탈린인데,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그런 스탈린과 같은 유형의 독재를 추구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지만 속류 민주주의자들이 마치 스탈린이 처음 발명한 것인 것처럼 왜곡하는 KGB나 굴라크는 이미 레닌 시절에 트로츠키가 만든 것이고, 스탈린은 그걸 오남용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일 뿐, 정통 트로츠키주의 쪽에서도 그런 권위주의적 통치 기구의 필요성 자체는 인정한다. 반면 클리프주의자들은 아예 어떤 유형의 독재도 절대악이라 규정하기에 레닌의 활동과 사상에서 그런 부분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기네들 마음에 드는 레닌을 만들고자 온갖 무리수를 두고 있는데 그 시도의 결정체가 바로 레닌 평전이다.[52] 하지만 국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일부 법령집 따위를 가지고 클리프가 소련 1차 사료에 능통했다는 왜곡까지 거침없이 자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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