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션다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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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쉔디스트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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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46
1957
1967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레드 쇼인딘스트 명예의 전당 헌액 동판.png
레드 션다인스트
헌액 연도
1989년
헌액 방식
베테랑 위원회





파일:레드 쇼인딘스트.MLB.jpg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No. 2
{{{#ffffff {{{+2 알버트 프레드 "레드" 쉔디스트[* 한국에서는 션다인스트지만, 미국 현지에서는 쉔디스트라고 불린다.]
Albert Fred "Red" Schoendienst

출생
1923년 2월 2일
사망
2018년 6월 6일 (향년 95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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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지
일리노이 주 저먼타운
신체
183cm / 77kg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양타
프로입단
1942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STL)
소속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45~1956)
뉴욕 자이언츠 (1956~1957)
밀워키 브레이브스 (1957~1960)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61~1963)
지도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 (1965~1976, 1980, 1990)

1. 개요
2. 일생
2.1. 데뷔 전
2.2. 마이너리그 시절
2.3. 선수 시절
2.4. 은퇴 이후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의 야구인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명망 있는 선수이자 감독으로 손꼽힌다.


2. 일생[편집]



2.1. 데뷔 전[편집]


일리노이주 저먼타운에서 조 션다인스트와 메리 션다인스트의 7명의 자식들 중의 하나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탄광의 광부였으며 가족은 물과 전기 없이 가난하게 살았다.

션다인스트는 어린 시절 야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학창 시절에 좌타에는 뛰어난 소질을 보이진 못하였다. 1939년, 16세에 퇴학된 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요 공공 사업 고용 프로그램인 「시민의 숲 서비스」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와이어 작업 중 와이어에 왼쪽 눈을 크게 다쳤지만 그것을 이겨내려고 뼈를 깎는 두통을 감수하며 수년간의 재활을 견뎌냈다.

눈 부상 후에 그는 오른손 투수를 상대하면서 커브를 파악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학창 시절 포기했던 좌타를 시작해 양손타자가 됐다. 1942년 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입단하여 팀의 다른 400여 명의 지원자와의 예선에서 계약을 따지 못했지만 팀의 메인 스카우트인 조 머시스는 나중에 생각을 바꿔 그가 살고 있던 저먼타운까지 찾아가 입단을 권유했고, 결국 션다인스트는 카디널스와의 계약서에 서명한다. 이로서 션다인스트는 세인트루이스에 입단하게 된다.


2.2. 마이너리그 시절[편집]


션다인스트는 싱글 A 조지아 플로리다리그 앨버니 카디널스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고 이어 싱글 A 켄터키-일리노이-테네시리그 유니온시티 그레이하운드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초 안타를 몰아치며 순조로운 스타트에 힘입은 그는 AA 인터내셔널리그의 로체스터 레드윙스로 승격돼 136경기에서 0.337을 기록하며 21개의 2루타, 6홈런, 20도루를 달성했다. 그의 타율 0.337은 리그 최고 기록으로 내셔널리그 MVP의 후보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1944년 로체스터 경기에 출전하던 션다인스트는 총 25경기에 출전했다. 시즌 도중 육군에 징병됐으나 1945년 1월 1일 눈 부상과 외상이 계속되자 퇴원했다.


2.3. 선수 시절[편집]


1945년 일리노이 주 케이로에서 열린 있는 스프링캠프에서 카즈의 선수단들은 션다인스트를 초청했다. 션다인스트가 마이너리그에서 유격수로 활약하던 1944년 당대 최고의 유격수 마티 마리안이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했고, 그에 따라 겹치는 포지션인 쇼인딘스트를 좌익수로 기용하였다. 그는 데뷔 시즌에 총 137경기에 출전해 도루 26개와 0.278의 타율을 기록했다.[1]

1946년 카디널스는 5년 만에 세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향해 달려가던 중 좌익수였던 션다인스트를 2루수로 전향시켰다.

1946년 션다인스트는 카즈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 후, 션다인스트는 뉴욕 자이언츠로 이적하였고, 훗날 밀워키 브레이브스로 또 한번 이적하게 된다.

1957년 밀워키 브레이브스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에서 밀워키는 뉴욕 양키스를 꺾고 1914년 이후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브레이브스는 1958년에도 내셔널리그 지구 우승자로서 월드 시리즈에 또 다시 출전했지만 1년만에 펼쳐진 리매치전에서 양키스에 패했다. 여담으로 션다인스트는 이 때, 양키스의 레전드 미키 맨틀과 만나 대결하였다.

1958년 비시즌부터 1959년 비시즌까지 션다인스트는 결핵 판정을 받아 1959년 2월 폐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는 1960년에 브레이브스로 돌아와 단 한 경기도 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즌이 끝날 때 방출된다. 1961년, 그는 카디널스에 복귀했고, 그 후 조니 킨과 쏘리 헤머스의 후임으로 카디널스의 감독에 취임했다. 마지막 두 시즌 동안 선수 겸 코치를 맡았다.

그의 최종 성적은 2216경기에 출전해 84홈런, 773타점, 1223득점, 2449안타, 427개의 2루타, 78개의 3루타, 89도루, 0.289이다.[2]


2.4. 은퇴 이후[편집]


1965년부터 친정팀 카디널스의 감독으로 돌아와 11년을 재직했고, 밥 깁슨과 커트 플러드, 조 토레 등을 앞세워 1967년 월드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꺾어 트로피를 드는 데 공헌했다. 1980 및 1990 시즌 도중에 감독대행으로 복귀했다.

1989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1996년에는 등번호 2번이 영구결번됐다. 2018년 6월 6일, 미주리 주 타운 앤 컨트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95세.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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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도루 1위였다.[2] 3000안타도 치지고 못했고, 100홈런도 100도루도 기록하지 못한 그가 헌액된 것이 조금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사실 이보다 안좋은 성적으로 입성한 선수도 꽤 있다. 레이 샬크, 래빗 마란빌 등이 그와 성적이 비슷하거나 더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