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아워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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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농구인.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안목을 가진 감독이자 프런트 그리고 스카우터 그 자체였다.
2. 일생[편집]
2.1. 셀틱스 이전[편집]
조지 워싱턴 대학 시절의 모습.
해군 재직 시절의 모습.
1917년에 벨라루시 민스크에서 이민 온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난 아워백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재학하며 농구를 배운 뒤 1941년에 고교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 2년 뒤에 해군에 입대하여 노포크에 있는 해군 농구팀을 지휘했고, 1946년에 NBA의 전신인 BAA가 창설되자 워싱턴 캐피톨스의 감독으로 취임, 1948-49 시즌에는 파이널까지 올리기도 했다. 이후 트라이시티 블랙 호크스를 거치면서 그럭저럭 감독직을 잘 수행해 냈다.
2.2. 셀틱스 시절[편집]
2.2.1. 감독 시절[편집]
1950년에 구단주 월터 브라운의 부름을 받아 단장 겸 감독 자리에 올라 팀의 전권을 부여받았고, 그 해에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번 픽으로 밥 쿠지(홀리 크로스 대학)을 지명, 그리고 세인트루이스 봄버스에서 뛰던 에드 매컬리를 트레이드로 영입, 1951년에는 워싱턴 캐피톨스 소속인 빌 셔먼을 트레이드했고, 먼저 이 셋을 축으로 해서 보스턴을 차차 강팀으로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1956년 드래프트에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로 1라운드 2픽으로 뽑힌 빌 러셀을 트레이드해 얻어왔고, 그 외에 KC 존스, 톰 하인슨 등이 가세해 보스턴은 강팀의 포스를 만들어냈고, 이렇게 해서 아워백은 1957년 파이널에서 첫 우승을 이끌어 냈고, 1959년부터 1966년까지 NBA 역사상 최다 연속 우승인 8연속 우승을 이끌어 내며 왕조를 만들어 낸다.
2.2.2. 프런트 시절[편집]
1979년 래리 버드 영입 당시 모습. 오른쪽이 빌 피치 당시 감독.
1986년 파이널 우승 당시 래리 버드와 함께.
감독 생활 중인 1951년부터 단장으로 취임(1984년까지), 1970년부터는 사장으로 승진했다. 프랭크 램지, 빌 러셀, 톰 하인슨, KC 존스, 돈 넬슨, 데이브 코웬스, 조조 화이트, 톰 샌더스, 짐 로스컷오프, 크리스 포드, ML 카, 세드릭 맥스웰, 래리 버드, 로버트 패리시, 케빈 맥헤일, 대니 에인지, 데니스 존슨 등의 슈퍼스타들을 스카우트하는 데 앞장섰다. 1984년에는 잔 볼크 부사장 겸 부단장을 단장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1986년에 1라운드 2픽으로 야심차게 지명한 렌 바이어스(메릴랜드대)가 약물중독으로 사망했고, 1987년에는 1라운드 22번 픽으로 뽑은 노스이스턴 대학 출신인 레지 루이스를 축으로 재편하려 했지만, 1993년에 레지가 요절함과 동시에 구단에 암흑기가 겹침에 따라 결국 1997년에 사장 자리를 릭 피티노 감독에게 넘겨주고 부회장으로 추대됐다.
2006년 첫 레드 아워백 어워드 시상식장에서 상을 받은 폴 피어스와 함께.
사망 3일전인 2006년 10월 25일의 모습.
그러나 2001년에 사장으로 컴백해 80이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상태로 종횡무진 활동하면서 팀을 부흥시키는 데 관여했지만, 2006년 10월 28일에 재직 도중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9세.
3. 특징[편집]
그는 승부욕이 넘쳐나서 1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는데, NBA 최초로 흑인 선수를 드래프트 1위로 지명(50년 척 쿠퍼)하고 처음으로 스타팅라인업을 흑인 선수로만 채웠다(64년). 66년 빌 러셀을 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 자리에 앉힌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그는 독재자처럼 일방적으로 통제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선수들과 상의하고 협상했다. 명령하는 대신 경기 중 스스로 판단해서 플레이할 것을 요구했다. 선수 및 구단 관계자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으며 존중했고 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 셀틱스는 팀이기보다 마치 가장을 중심으로 한 가족 같았다. 아워백 역시 생전에 "셀틱스는 단순한 농구팀이 아니다. 바로 인생이다"고 말했다.
그는 모두에게 인정받는 명장이지만 매너는 그에 걸맞지 않았다. 감독 생활 내내 거친 말을 일삼아 심판들과 마찰을 일으켜 자주 퇴장당했으며, 상대 팀 감독들과 선수, 팬, 기자들과도 언쟁을 일삼았다. 한번은 상대팀 구단주와 시비를 일삼다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워백 본인은 나름대로 "선수들이 다른 요소에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라고 항변했다.
1953년에 쓴 저서 <Basketball for the Player the Fan and the Coach>에서도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으로 트래시 토크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말미엔 "이 모든 게 고약한(dirty) 방법인지, 교활한(tricky) 수법이 될진 선수들의 인성에 달렸다"는 당부도 덧붙였다.
4. 여담[편집]
- 생전에 그는 보스턴의 승리가 확실시되면 시가를 피우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 때문인지 '승리의 시가'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스포츠에서 우승팀들이 우승 후 라커룸에서 시가를 피워 무는 관습 자체가 이 아워벡의 습관에서 나온 것이는 설이 많다.
보스턴 셀틱스 로고에 시가 물고있는 남자는 그를 상징한다는 말이 있다.
- NBA 감독상 트로피의 명칭인 레드 아워백 트로피는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위의 트로피의 수상자는 그렉 포포비치이다.
- 백인이지만 차별을 받았었던 러시아계였다. 이렇듯 직접 인종차별을 겪어본 경험때문이지 몰라도 흑인 백인 가리지 않고 동등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 보스턴 셀틱스의 훈련 시설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아워백 센터'라고 불린다.[2]
5.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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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0년대와 60년대에 셀틱스를 이끈 밥 쿠지의 말에 따르면, 본명인 아널드라 불리는 걸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아널드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쿠지를 포함해 극소수 뿐이었다고.[2] 참고로 옆에 같은 경기장을 쓰는 보스턴 브루인스의 훈련장이 위치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