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트 요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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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7년 전쟁 이전
2.2. 7년 전쟁
2.3. 말년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황제군의 육군 원수. 일명 '다운 백작', '다운 원수'로 불리며 7년 전쟁프리드리히 대왕의 최대의 숙적이었던 인물이다. 희대의 명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에 비해 전술적 역량은 부족했지만 전략적 안목은 거의 같은 수준이었으며, 소모가 심했던 프로이센 왕국에게 타격을 입혀 궁지에 몰아넣은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다만 승부수를 던지는 과감함이 부족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도 끝을 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2. 일생[편집]



2.1. 7년 전쟁 이전[편집]


다운 백작은 1705년 9월 24일 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비리히 필리프 폰 다운 백작[1]은 장군이었으며 그의 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톨릭 신앙이 깊었던 그는 성직자가 되고 싶어했지만 대대로 군인이었던 집안의 영향으로 군대에 대한 열망을 끝내 뿌리칠 수 없었기에 결국 군인의 길을 택했다. 1718년, 다운 백작은 시칠리아 왕국에 주둔한 아버지 휘하 연대에 복무했다. 이후 1734년에 대령이 되었고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해 이탈리아 반도라인강에서의 전쟁에 참가했다. 또한 1737년부터 1739년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가해 1739년 7월 22일 크로츠카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전쟁 기간 동안 소장으로 진급했다.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한 후, 보헤미아 왕국슐레지엔을 침략한 프로이센군에 맞서 1742년 5월 17일 코투지츠 전투와 1742년 6~12월 프라하 포위전에 참석했다. 그리고 1743년 케벤휠러 원수가 이끄는 군단의 전위부대를 맡아 도나우 전역 승리에 한 몫을 담당했다. 1744년 케벤휠러 원수의 뒤를 이은 트라운 백작은 그를 높이 평가했고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와의 전역을 중단하고 본국으로 철수하던 중 후위대를 다운 백작에게 맡겼다. 1745년, 다운 백작은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조르 전투에서 1개 사단의 지휘를 맡았으나 아군의 패배를 막지 못했고, 이후 트조이크마이스터(Feldzeugmeister)[2]에 임명되었다.

1746년과 1747년, 다운 백작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보내져 라우펠트 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런 그를 주목하여 황금 양모 기사단장 및 빈 사령관에 임명했고 1748년 오스트리아군의 재편성을 맡겼다. 이에 다운 백작은 프로이센군이 이전에 도입했던 것을 본따 꽂을대를 목재에서 철재로 교체하고 대포의 선진화를 이끌었으며 보병대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엄격한 훈련을 실시하고 보다 엄격한 규율을 적용했다. 또한 1751년에 비너노이슈타트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해 장교들의 질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2.2. 7년 전쟁[편집]


7년 전쟁 발발 직후인 1757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보헤미아를 침공해 오스트리아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프라하를 포위했다. 이에 다운 백작이 프라하를 구원하기 위해 진군해오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를 요격하기 위해 친히 출정했다. 6월 18일, 다운 백작은 콜린 전투에서 그때까지 패배를 몰랐던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첫 패배를 안겼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라하 공략을 포기하고 작센 선제후국으로 퇴각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의 공로를 칭찬하고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을 제정한 뒤 첫번째 대십자 훈장 수여자로 다운 백작을 선정했다.

이후 다운 백작은 로트링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 휘하 장성으로서 슐레지엔 침공 작전에 참가하여 1757년 11월 22일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28,000명을 격파하고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를 공략했다. 그러나 12월 5일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절반도 안 되는 병력으로 상대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에게 완패당했다. 패장 카를 알렉산더는 육군 원수 직에서 물러났고, 다운 백작은 로이텐 전투에서 카를 알렉산더에게 적절한 진언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패전의 책임을 지지 않고 육군 원수에 임명되었다.

1758년 봄,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모라비아 침공 작전을 개시하여 모라비아 변경백국의 중심지 올로모우츠(Olomouc)를 포위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콜린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오스트리아 구원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로스바흐 전투로이텐 전투에서 잇달아 대승을 거둔 것에 자신만만해져 있었기에 오히려 구원군이 와서 회전을 벌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다운 백작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의도대로 따라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프로이센군과 정면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소규모 기습전을 벌여 적을 소모시키기로 했다. 이때문에 프로이센군은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물자가 부족해졌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보급물자 운송부대를 대규모로 편성해 단숨에 보급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리하여 약 4,000대의 보급 마차로 구성된 보급대가 3만 명의 프로이센군의 보호를 받으며 올로모우츠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운 백작은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 등에게 14,000명의 분견대를 줘서 이들을 공격하게 했고, 6월 30일 라우돈 남작은 돔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보급부대를 괴멸시켰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은 올로모우츠 공성전을 중단하고 본토로 퇴각했다. 이후 다운 백작은 동프로이센을 침공한 러시아 제국군과 합류하기 위해 작센으로 진군했지만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은 러시아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운 백작은 러시아군이 철수하고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으로 귀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우첸의 동쪽으로 9km 떨어진 호크키르히 마을 동쪽에 참호를 파고 방어 진지를 구축하며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일단 적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진지를 치는 건 상책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적이 먼저 공격해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다운 백작은 이를 응하지 않았고 프로이센군의 거듭된 도발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에 10월 10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장군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운 백작의 진영과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위치, 즉 호크키르히 서쪽에 진을 쳤다. 이에 많은 휘하 장교들이 오스트리아군이 기습해올 것을 우려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이 소심한 사람이니 그럴 리 없다며 비웃었다.

사실 다운 백작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상대로 프로이센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경계해 함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 등이 적이 아군을 무시하며 완전히 방심하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기습을 감행할 호기라고 설득했고, 다운 백작은 고민 끝에 10월 13일 저녁 전쟁 협의회에서 적을 기습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3일 밤에서 10월 14일 새벽에 걸친 기습 작전을 수립, 집행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다운 백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을 또다시 격파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더이상의 공세 작전을 포기하고 수비에 전념해야 했다.

1759년 봄, 다운 백작은 러시아군이 다시 동프로이센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라우돈 남작이 이끄는 기병대 18,500명을 급파해 러시아군과 합세시켰다. 이후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최악의 패배를 안겨줬다. 만약 이때 다운 백작의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향한 합동 공격을 개시했다면 프로이센은 패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은 러시아군은 더 이상의 군사 작전을 중단하고 숙영지로 귀환했고, 다운 백작은 러시아군의 도움 없이 오스트리아군 단독으로 베를린으로 진군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고 여겨 작센을 공략하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개시했으나 그마저도 조라우 전투, 지나 전투, 코르비츠 전투, 호이어스베르다 전투 등 수차례의 소규모 전투를 치른 뒤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고 여기고 중단했다.

이후 다운 백작이 드레스덴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가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의 유능한 장군들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핀크 휘하의 14,000명을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으로 보내 오스트리아군과 보헤미아 사이의 보급로를 끊어 적을 고립시키는 시도를 벌이게 했다. 대왕은 이를 통해 신중한 성격의 다운 백작이 후방이 위협받는 걸 경계하여 철수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다운 백작은 오히려 핀크의 군대가 본대와 멀리 떨어져 있어 고립되어 있으니 포위 섬멸할 수 있다고 판단, 그들을 포위섬멸하기로 결심한다. 이리하여 벌어진 막센 전투에서 압도적인 적군에게 포위된 핀크 휘하 14,000명은 항복했다. 다운 백작은 여세를 몰아 필립 레빈 폰 벡 장군 휘하의 군단을 급파해 쾰른에 주둔한 프로이센군 분견대를 공격하게 했고, 벡 장군은 마이센 전투에서 쾰른의 프로이센군을 괴멸시켰다.

1760년 5월, 다운 백작은 라우돈 남작에게 슐레지엔을 침공하도록 지시했다. 라우돈 남작은 명령을 받들어 32,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슐레지엔을 전격 침공해 6월 23일 란데스후트 전투에서 슐레지엔 수비대를 괴멸시켰다. 이후 라우돈 남작은 다운 백작과 합세해 슐레지엔 구원에 나선 프리드리히 대왕을 공격하려 했으나 8월 15일 리그니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습격당해 격파되었다. 이때 다운 백작은 전투 막판에 8만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했으나 자신이 너무 늦었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에 대해 라우돈 남작은 자신이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켜가며 맞서 싸웠거늘 근처까지 와놓고 철수해버린 것에 격노해 다운 백작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다운 백작은 라우돈 남작의 패퇴 이후 철수를 개시해 작센의 토르가우에 숙영지를 설치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를 몰아내기 위해 11월 3일 토르가우 전투를 감행했으나 지리적 이점을 등에 업은 다운 백작 휘하 오스트리아군에게 고전해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던 중 다리에 입은 총상으로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던 다운 백작은 전투는 이미 끝났고 아군이 이겼다고 확신한 채 지휘권을 상급 장교 오도넬에게 넘기고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아군이 승리했다는 보고서를 보냈다. 그러나 한스 요아힘 폰 치텐 백작 휘하 프로이센군이 역습을 감행하여 고지를 공략한 뒤 프로이센 포병대가 오스트리아군 진영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다운 백작은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상대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결과적으로는 패퇴했고, 다운 백작은 섣불리 승리했다고 판단해 일을 그르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1760~61년 오스트리아 본토에서 군대 재정비 작업을 수행한 다운 백작은 1761년 9월 시비드니차 요새를 탈취한 후 이곳에서 숙영하면서 이듬해에 러시아군과 합세해 프로이센으로 공격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1762년 1월 5일 즉위한 러시아 차르 표트르 3세가 돌연 프로이센과 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군 2만 명을 파견해 프리드리히 대왕을 돕게 했다. 러시아의 갑작스런 배신에 경악한 다운 백작은 전의를 상실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기회를 틈타 공세를 개시해 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에서 다운 백작을 격파한 뒤 시비드니차 요새를 포위했다. 다운 백작은 시비드니차 요새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구원병을 파견했으나 프로이센군은 라이헨바흐 전투에서 적 구원병을 격파했고, 결국 시비드니차 요새의 오스트리아 수비대는 그해 10월에 항복했다.

그 후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를 향한 최후의 공세를 개시해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한 후 11월에 나움베르크, 뷔르츠부르크, 레겐스부르크를 공략하자, 다운 백작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더 이상은 승산이 없으니 프로이센과 협상할 것을 권고했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1763년 2월 15일 라이프치히 교외의 후베르투스부르크에서 프로이센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2.3. 말년[편집]


전쟁이 끝난 뒤, 다운 백작은 제국 군사회의의 의장에 지명되었으나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보내다가 1766년 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빈의 아우구스티노 교회에 "그녀 국가의 구조자"라는 명문이 새겨진 비석을 세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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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토리노 공방전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함께 활약했으며 당시 토리노 요새를 지켰다. 전쟁 후 공로를 인정 받아 카를 6세로부터 나폴리 왕국 부왕으로 임명되었고, 그가 나폴리 부왕으로 재직하던 시기 표트르 대제의 맏아들 알렉세이가 도주하여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2] 보병 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