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트 폰 랑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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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pold von Ranke, 1795.12.21. ~ 1886.5.23

Wie es eigentlich gewesen[1]


1. 개요
2. 생애
3. 학문적 업적 및 여담
4. 평가


1. 개요[편집]


테오도르 몸젠과 더불어 독일이 세계에 자랑하는 역사학자. 19세기 독일 역사학의 대표자로, 근대적인 의미의 역사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795년 작센 선제후국루터교회 가문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고전학을 전공한 이후 김나지움 교사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연구를 진행하였고, 이러한 연구 성과는 1824년 출판된 <라틴 및 게르만계 민족의 역사, 1494~1514>(Geschichte der romaenischen und germanschen Voelker von 1494 bis 1514)로 이어진다. 내용[2]보다도 서문의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Wie es eigentlich gewesen) 사실을 다루고자 했다.'라는 글귀가 역사학자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고, 프로이센의 높으신 분까지도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랑케는 1825년 베를린 대학교 역사학과의 정교수로 발탁된다.

정치적으로 보수성향이었던 랑케는 이 시기 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3] 메테르니히를 비롯한 독일 연방 보수계의 거물들과 친분을 쌓았고 이러한 친분은 이후 그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 [4] 특히 메테르니히는 그에게 베네치아의 문서보관소를 개방해주는 파격적인 특혜를 주기도 했다. 내친김에 메테르니히와의 친분을 이용하여 교황령의 문서보관소까지 열람해 보려고 했지만 프로테스탄트였던지라 단박에 거절당했다. 그리고 이때의 앙금이 남았는지, 나중에 종교개혁 시기 교황들의 행적을 다룬 저서에서 자신에게 보관소 열람을 거절한 교황청을 잘근잘근 씹어준다.

이후로도 랑케는 유럽사에 대한 방대한 저서들을 저술했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1841년 호엔촐레른 왕실의 공식 역사가로 지명되는 한편 1865년에는 귀족 작위를 추서받아 성 앞에 Von을 붙이는 것이 허락된다. 70대 이후로는 점차 건강이 악화돼서 급기야 한쪽 눈이 멀었지만 역사에 관한 그의 열정은 식지않았고, 85세였던 1880년에는 세계사 전체를 다루는 저서 집필에 착수한다. 하지만 이미 나이가 나이였던지라 집필 작업은 12세기 무렵까지를 다룬 6권 정도에서 중단되었고, 1886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5]


3. 학문적 업적 및 여담[편집]


  • 이냐시오 데 로욜라, 바오로 4세, 비오 5세가 중심이 된 16세기 가톨릭 교회의 일련의 개혁 시도를 역 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이라는 명칭으로 부른 최초의 인물이다.
  • 프리드리히 대왕의 빠로도 유명했다. 호엔촐레른 왕실의 역사를 다룬 저서에서 '프로이센이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거는 순전히 프리드리히 대왕뿐임 ㅋㅋ'라는 논조를 시전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프로이센을 독일 연방의 지도적 위치에 놓인 국가로 묘사하는 대신 단순히 연방 구성국 중 하나로 묘사했고, 그래서 프로이센 사람들은 퍽 자존심이 상해버렸다고...
  • 처음 베를린 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된 시절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키배를 뜬 적이 있었다. 헤겔은 역사의 흐름성을 강조한 반면 랑케는 각 시대별 고유성을 강조하면서 벌어진 키배.
  • 그 시대 역사학의 한계이겠지만, 철저히 정치사에만 관심이 있었다. 미시사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현대 사학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경제사, 문화사 같은 분야에는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 '과거사 반성을 통해 인간이 발전한다'라는 오늘날에는 당연히 여겨지는 통념도 거부했다.[6]그 이유로 그의 종교적 배경을 들 수 있는데, 랑케는 목사 가문에서 태어난 독실한 기독교신자였고 그에게 최고존엄은 기독교와 하느님이었기 때문.


4. 평가[편집]


많은 역사학 연구법이 랑케에 의해서 고안됐다. 19세기 초반 독일에서 유행하던 비판적 역사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역사학에 도입하였고, 대학에서 역사학이 정식 전공으로 편제되는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논문 인용법이나 저술방법부터 시작해서 1차 사료, 2차 사료의 구분이라는 개념도 랑케에 의해 도입된 것.

랑케는 역사학에서 철학, 법학, 경제학까지 영향을 미친 당대 독일의 역사주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도 '실증'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는 있으나,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실증주의하고는 입장이 달라서 오히려 혼동만 야기하는 경우가 잦다. 역사주의에서도 실증을 이야기할 때에도 물론 실제적 증거를 중시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자연과학에서처럼 개별 사례를 보편적인 것으로 환원할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즉 역사적 사례는 그 자체로 독자성과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관점이다. 이에 따라 민족사는 독자적인 것으로서 특수한 지위를 갖게 된다. 더 자세한 것은 역사주의 항목 참고

랑케의 'wie es eigentlich gewesen'으로 대표되는 실증주의E.H 카와 같은 영국사학자들에 의해서 다소 의미가 왜곡된 감이 있다. 랑케의 역사관은 오히려 과학적 역사학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루터파 종교관에 큰 영향을 받은 역사신학에 가까운 관점이었으며, 랑케의 후계자들인 프로이센학파의 경우 애국주의,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을 발전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단적으로, 랑케 자신만 해도 실증주의와 거리를 둔 역사가였다. 이러한 영미 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된 랑케 역사관은 근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전파되었고, 오늘날 한국 대중들에게도 실증주의 역사학의 대표자로 잘못 알려진 경향이 있다. 단적으로 이병도 등의 실증사학은 독일 역사주의라기보다는 영국, 프랑스의 실증주의와 유사한 학파였다.[7]

랑케의 이 유명한 구절의 전문은 “역사학은 과거를 재판하고 미래의 유용함을 위해 동시대인들을 교육한다는 직무를 갖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의 시도는 그런 고귀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본래 어떠했는가를 단지 말하는 것이다.”인데, 전체 문맥을 보면 알겠지만, 그것이 본래 어떠했는가라는 음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말한다라는 서술어가 중요한 것이다. 랑케는 이 문구를 자신의 첫 책 2판 서문에 집어넣었는데, 이는 랑케가 자신의 역사학이 과거를 평가하고 사람들에게 미래 역사의 발전방향을 제시한 것과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닌 단지 과거 사실에 대해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맞는다. 즉 문맥을 무시한 인용의 적절한 예인 셈. 외국에서는 관련 연구가 이미 끝났지만 이상하게도 국내에서는 아직도 이게 고쳐지지 않고 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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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어로 '있었던 그대로'라는 뜻. 랑케의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독일 역사학을 대표하는 경구로 쓰인다.[2] 간략히 요약하자면 게르만족의 대이동, 십자군 전쟁 등을 통하여 어떻게 유럽이 중세 이후 하나의 문화권으로 통합되는지를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3] 물론 당연히 프랑스 혁명도 미친듯이 깠다.[4] 그렇다고 랑케가 어용학자였던건 아니다. 오히려 권력층이 그의 능력과 명성에 감화되었다.[5] 사후 그의 제자들이 랑케가 남긴 미완성 원고들을 모아 15세기까지의 역사를 출판한다.[6] 그리고 이는 E.H 카 이후 역사학계에서 지금까지 굳건하게 확립된 역사학의 명제들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7] 한국의 사학계와 관련해 랑케가 언급되는 이유는 랑케의 제자인 루트비히 리스가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동경제국대학 사학과에서 교편을 잡았었기 때문이다. 이후 리스의 일본인 제자들이 경성제국대학에까지 자리를 잡기 때문에 한국 사학계의 학맥이 이들과 맞닿는다는 주장이다.[8] 상식적으로 나무위키에도 언급되어있는 내용이 한국 학계에서 이미 논의되지 않았을리는 없다. 이미 국내에서도 개별 연구 및 논문 차원에서 랑케에 대한 연구가 이뤄진 바 있으며, 여기에서 랑케의 주장에 대해서 정확한 설명이 이뤄진 바 있다. 다만 실증주의 역사학에 대해서 설명할 때 랑케를 관용적으로 인용하는 행태가 그치지는 않고 있는데, 국내 뿐 아니라 E. H. 카를 비롯해 영미권 역사학계에서도 이러한 오남용을 상당히 오랫동안 겪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