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클레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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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클레멘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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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토트넘 홋스퍼 FC 로고.svg

22대





레이 클레멘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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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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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레이 클레멘스
Ray Clemence
본명
레이먼드 닐 클레멘스
Raymond Neal Clemence
출생
1948년 8월 5일
잉글랜드 링컨셔 주 스캐그네스
사망
2020년 11월 15일 (향년 72세)
국적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신체
183cm
직업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축구행정가 은퇴
소속
선수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 (1965~1967)
리버풀 FC (1967~1981)
토트넘 홋스퍼 FC (1981~1988)

감독
토트넘 홋스퍼 FC (1992~1993 / 임시 감독[1])
바넷 FC (1994~1996)
잉글랜드 대표팀 (1996~2012 / GK 코치)
행정가
잉글랜드 축구협회 (2006~2012 / 디렉터)
국가대표
61경기 (잉글랜드 / 1972~1984)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4.3. 수훈
5. 은퇴 후의 삶
6. 여담



1. 개요[편집]


잉글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축구감독.

그는 1970년대~1980년대 리버풀의 전성시대를 이끈 수호신이었다. 당시 리버풀은 케빈 키건케니 달글리시 등이 포진한 최강의 공격진과 그레이엄 수네스 등이 포진한 최고의 중원, 그리고 앨런 한센과 필 닐 등이 이끄는 완벽한 수비진이 구축된, 그야말로 무적의 팀이었다. 하지만 이 선수가 골문을 든든히 막아주지 않았다면, 리버풀은 잉글랜드의 강팀이 될 지언정 유럽 전역을 호령하는 붉은 제국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클레멘스는 골키퍼치고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반응속도가 엄청났고 공중볼을 따내는 능력도 좋았다. 특히 수비조율과 쓰루패스 차단은 전 유럽에서 최고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국가대표에서는 2인자로 머물렀는데, 그 이유는 피터 쉴튼이라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골키퍼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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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는 1948년 8월 5일 잉글랜드 링컨셔 주 스캐그네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축구에 관심이 많았고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때 맹활약한 고든 뱅크스 골키퍼를 존경하며 그와 같은 골키퍼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노츠 카운티로 들어가서 축구에 관한 기본적인 훈련을 이수하고 1965년 스컨도프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그는 1966년 경쟁자들을 제치고 팀의 주전 골키퍼로 발탁되었고 48경기를 출전하며 훌륭한 선방을 연거푸 보여주며 팀을 3부리그로 승격시켰다.


2.2. 리버풀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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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클레멘스에 대한 5분짜리 다큐멘티러 영상

1967년 6월 24일, 클레멘스는 리버풀의 감독 빌 샹클리의 관심을 받고 1만 8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리버풀로 이적했다. 그는 1968년 9월 25일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상대는 리그컵 상대인 스완지 시티였다. 그는 이날 모든 유효 슈팅을 막아내며 클린시트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리버풀은 2:0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이후 2년간은 리저브팀에서 뛰어야 했다. 그리고 1970년, 그는 1군으로 올라왔고 이후 리버풀의 주전 골키퍼로 자리잡았다.

1971년, 리버풀은 FA컵 결승에 진출했다. 클레멘스는 아스날과의 결승전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경기는 연장전까지 갔다. 그러나 그는 연장전에서 아스날에게 2골을 허용했고 결국 리버풀은 2:1로 패하고 말았다. 클레멘스는 이 패배를 가슴 깊이 새겼고 이후 2시즌 동안 대활약했다. 리버풀은 그의 선방 행진에 힘입어 1972-73 시즌에 리그를 우승하고 뒤이어 유로파컵도 우승했고 1973-74 시즌에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그는 1981년까지 10여 년의 세월 동안 붉은 제국의 시대를 이끌며 수많은 트로피를 획득했다. 물론 이 수많은 트로피를 획득한 것은 당시 리버풀이 사상 최고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는 665경기에 출전하여 335경기의 클린시트를 기록했다. 665경기는 리버풀 역대 골키퍼들 중 최다 출장으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대기록이기도 하다. 1981년, 남아프리카 출신의 짐바브웨 골키퍼 브루스 그로벨라가 영입이 되면서, 클레멘스는 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1980-81 시즌이 끝난 직후, 리버풀은 3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받고 그를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시켰다.


2.3. 토트넘 홋스퍼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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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는 토트넘으로 이적한 후 공교롭게도 1982년 리그컵 결승전에서 리버풀과 만났다. 경기 결과는 리버풀의 3:1 승리. 그래도 클레멘스는 같은 해 FA컵 결승전에서 QPR을 상대로 훌륭한 경기력을 펼치며 팀의 1:0 승리를 이끌어내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클레멘스는 1983-84 시즌에 팀을 유로파컵 결승에 진출시켰지만 정작 부상 때문에 결승전엔 출전하지 못했고 동료들이 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환호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클레멘스는 1988년까지 현역에서 뛰면서 토트넘에서 240경기를 출장했고 1987-88 시즌이 끝난 후 은퇴를 선언했다.


2.4. 국가대표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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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는 1972년 11월 15일 웨일스와의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이날 잉글랜드는 웨일즈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서 클레멘스는 국가대표로 데뷔하자마자 클린시트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후 클레멘스는 벤치에 박혀 있어야 했다. 당시 잉글랜드 골문에는 피터 쉴튼이라는 희대의 먼치킨 골키퍼가 확고한 자리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멘스는 그저 쉴튼이 부상이라도 당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던 잉글랜드 감독들은 중요한 경기가 아닌 친선경기 때는 그를 기용하곤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피터 쉴튼이 마침내 주전 자리에서 내려오자, 클레멘스는 그제야 주전을 확보하고 경기를 많이 뛰기 시작했지만.... 불행히도 이번엔 무릎 부상에 시달리는 바람에, 그는 또다시 벤치에 박혀야 했다.(...) 그래서 클레멘스는 1972년부터 1984년까지 12년간 국가대표로 활동했지만 61경기 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동안 피터 쉴튼은 1970년부터 1990년까지 20년 동안 125경기를 뛰며 잉글랜드 역사상 A매치를 가장 많이 소화한 골키퍼로 기록되었다. 저 대단한 선수를 벤치워머로 만들어버리다니, 피터 쉴튼 이 사람...


3. 지도자 경력[편집]


클레멘스는 1988년에 은퇴한 뒤 곧바로 토트넘의 코치로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92년, 그는 덕 리버모어와 함께 토트넘의 공동 감독이 되어 한 시즌을 치렀다. 이후 1994년 1월, 그는 바넷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2년간 지휘했다. 바넷은 이 기간 동안 3부 리그에서 각각 9위와 13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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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6년 8월 글렌 호들 잉글랜드 감독의 부름을 받고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의 골키퍼 코치가 되었다. 이후 그는 2007년까지 11년의 세월 동안 글랜 호들, 케빈 키건 그리고 스벤예란 에릭손 등 여러 감독들을 모셨다. 그러다가 2007년 12월, 스티브 멕클라렌 잉글랜드 감독은 클레멘스 대신 Franco Tancredi를 골키퍼 코치로 선임했다. 이후 클레멘스는 잉글랜드 벤치 코치가 되었고 로이 호지슨이 새 잉글랜드 감독이 되자 다시 골키퍼 코치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유로 2012가 진행 중이던 2012년 6월 11일, 클레멘스는 잉글랜드 골키퍼들의 훈련을 감독하던 중 그만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결국 그는 현장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4. 기록[편집]



4.1. 대회 기록[편집]




4.2. 개인 수상[편집]




4.3. 수훈[편집]




5. 은퇴 후의 삶[편집]


클레멘스는 부상으로 골키퍼 코치에서 물러난 뒤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부름을 받고 잉글랜드 U21 대표팀 감독인 스튜어트 피어스의 보조 코치가 되어서 20세 이하 잉글랜드 선수들을 교육시켰다. 또한 그는 가끔 TV와 라디오에 출연하여 현재 골키퍼를 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조언 몇마디를 하곤 했다. 그러다가 2013년, 클레멘스는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클레멘스는 2005년부터 앓아오던 전립선암으로 오랜 기간 투병한 끝에 2020년 11월 15일 운명을 달리했다.


6. 여담[편집]


  • 클레멘스는 축구 선수로서 많은 공헌을 한 것을 인정받아 1987년 대영제국 훈장 중 5등급 MBE(Memb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를 받았다.관보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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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아들 스테판 클레멘스는 토트넘과 버밍엄에서 미드필더로 뛰었고 나중에 레스터 시티로 이적했으나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2010년에 은퇴했다. 현재 그는 헐 시티의 리저브팀 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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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레멘스의 딸 사라 클레멘스는 스코틀랜드의 前 스트라이커이자 현재 노팅엄 포레스트의 감독인 더기 프리드먼의 아내다.

  • 2005년 2월 2일, 클레멘스는 전립선암에 걸렸음을 알렸다. 이로서 그는 스벤예란 에릭손의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브라이언 키드가 유로 2004에서 전립선암에 걸린 데 이어 두번째로 같은 질병에 걸린 코치가 되었다.

  • 클레멘스는 "콥들을 놀라게 한 플레이어 100인"에서 11위로 선정되었다.

  • BBC는 클레멘스를 20세기 최고의 팀에서 골키퍼에 선정되었다. 또한 20세기 역대 최고 선수를 뽑는 투표에서 피터 쉴튼, 레프 야신, 고든 뱅크스를 제치고 최고의 골키퍼에 선정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실력으로 따졌으면 절대 나올수 없는 철저한 인기투표의 결과물이다. 야신은 소련인이고, 뱅크스와 쉴튼은 레스터, 스토크 같이 팬덤 규모가 작은 클럽들을 여러곳 전전해서 고정 지지층이 적다. 그틈을 콥이라는 거대 팬덤을 등에 엎은 클레멘스가 치고 올라간 것. 정작 클레멘스는 현역 시절 내내 쉴튼에게 밀려 대표팀 벤치 신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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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글러스 리버모어와 공동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