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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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집권 이후로는 좌파 진영의 인사로 분류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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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촌락과 산악 쪽에서 저항하던 조직인 마키(Maquis)[1]
Résistance
1. 개요
2. 역사
3. 활약상과 한계
4. 유명한 레지스탕스
5. 보통명사화
6. 미디어
6.1. 동음이의어의 캐릭터들
7.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1944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단원들의 컬러 영상

"Celui qui ne se rend pas a raison contre celui qui se rend."

"굴복하는 자가 아니라 굴복하지 않는 자가 옳다."

최초의 항독전단

에드몽 미슐레,[2]

1940년 6월 17일[3]


"Quoi qu'il arrive, la flamme de la résistance française ne doit pas s'éteindre et ne s'éteindra pas."

"프랑스 저항운동의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며, 꺼질 수도 없습니다."

샤를 드골, 1940년 6월 18일자 연설,[4]

영국 런던


저항을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이다. 직접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비시 프랑스나치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서의 저항운동을 가리킨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일어났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이후에 발생한 저항운동 및 그 단체를 지칭하기도 하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점령국에 맞선 네덜란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이탈리아 왕국나치 독일 내부 등 여러 국가들의 저항운동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확장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2. 역사[편집]


본거지에서 당신이 아는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조직하라. 당신이 지명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당신의 지도자들은 활동 방향을 결정하고, 다양한 계층을 통해 활동에 대해 보고할 검증된 인물들을 찾을 것이다. ...(중략)... 당장의 임무는 명령을 받는 날 전투를 재개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이다. 분별력있게, 단호한 사람들을 모집하고,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간부로 배치하라. ...(중략)... 조국을 부인하고 배반한 자들을 색출하고 감시하라. 매일 당신의 지도자들에게 유용한 정보와 견해를 모아서 전달하라. 불굴의 규울을 준수하고, 언제나 신중하고 절대 보안을 지켜라.

《레지스탕스》지[5]

제 1호 1면 논설, 1940년 12월 15일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각국은 독자적으로 독일 국방군에 저항하는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레지스탕스는 그 중 프랑스인들의 대독 저항조직을 말한다. 특히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파리를 무시하고, 진격하려던 연합군을 파리로 끌어들이기 위해 파리 레지스탕스들이 총봉기를 시도했고, 결국 연합군의 진격로를 바꿔버리기도 했다.[6]

레지스탕스의 구성원은 대체로 자크 뒤클로프랑스 공산당이 이끌었던 프랑스 내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대체로 레지스탕스의 대략 절반이 급진파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7] 30% 정도는 중도좌파 사민주의자들 그리고 나머지가 우파 계열로 추정되고 있다.[8] 사실 이 공산주의 계열은 비시 프랑스가 설립되었을 때 페탱 정부를 지지했다. 왜냐하면 독소 불가침 조약 때문에 적국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공산당 놈들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고, 또한 코민테른 역시 프랑스 공산당에 나치 독일을 지원하라는 지령을 하달했기 때문이었다. 페탱이 나치 독일과 휴전을 맺자 프랑스를 전화에서 구해낸 페탱이라고 지지했으며, 심지어 모스크바의 지령대로 반전 선동과 대독 지지 선동을 했다. 공산당의 서기장 대행이자, 선전 실무자였던 자크 뒤클로가 나치당과 프랑스 공산당 간의 협약을 주도했을 정도였다. 물론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당연히 반독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그 이전까지 초기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아직도 노선 문제와 페탱 정부에 대한 입장을 두고 갈팡질팡하던 프랑스 국내의 단체들이 아니었다. 서부전선에서의 개전부터 프랑스 점령을 거쳐 1942년 자유 프랑스군 설립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 활동과 무장투쟁의 중심은 프랑스 내 외국인 망명자 및 이민자들인 동유럽 및 남유럽 출신 이주 근로자나 공산주의자, 유대계, 아르메니아인[9], 그리고 특히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하고 망명와 있었던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전국 노동 연맹 출신의 스페인 망명자들이 이끌었다.

이렇다 보니 초기 레지스탕스 운동 당시 나치 독일 점령당국과 비시 정부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외국인, 유대인, 빨갱이와 이들의 사주를 받고 협력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작당질하는 범죄조직이라고 선전하여, 혐오 정서를 자극했고 쏠쏠한 효과를 보았다.

프랑스 함락 시점에서 프랑스 남부의 난민수용소에는 무려 300,000명 가량의 스페인 망명객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까지 파시스트 세력에게 넘어가면서 갈 곳이 없어졌고, 애초에 페탱 정부에 대한 충성 여부로 고민할 필요도 없는 입장에 있었기에 프랑스가 점령되자 약 60,000명이 저항세력에 가담하여 싸웠다.[10]

프랑스 점령 이후 노동수용소에서 탈출한 10,000명 가량의 스페인인들은 산이나 들로 숨어들었고, 이때만 하더라도 도피 중인 노조원과 좌익 지하 세력 중심에 점조직으로만 존재했던 레지스탕스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스페인 내전 때부터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 초기 레지스탕스 조직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11]

레지스탕스 운동은 초창기 이후 추축국이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고, 나치 독일 점령당국의 통치가 가혹해짐에 따라 세력이 점점 확대되었다. 그러던 1942년 말, 연합군이 횃불 작전으로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히틀러가 비시 프랑스의 나머지 부분까지 점령해버렸다. 이듬해인 1943년 무렵에는 프랑스 내에서의 물자수탈도 가혹해졌다. 또한 동부전선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제약없이 저항세력을 진압하는 무자비한 법령[12]이 프랑스 전체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절멸전쟁 중이었던 소련 땅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마을 파괴, 주민 강제이송, 심지어 집단학살과 같은 초토화작전이 이제 프랑스 땅에서도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로써 비시 정부는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독일과 휴전하여 협력한다.'는 존립 기반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1943년 5월 27일에는 공산당을 비롯한 여러 레지스탕스 조직들이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CNR)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국민적 대중운동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전 국민적 공감과 참여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초기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부 인텔리나 정치당원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대중과의 접점이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대략 이때를 기점으로 일반 대중의 참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런던의 자유프랑스 및 서방 연합군과의 협력도 진행되었다. 1944년 무렵, 나치 독일의 패망과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이 임박해오자 레지스탕스 운동의 참여 및 협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이후 레지스탕스 조직들은 프랑스 국내군(FFI)으로 편성되어 독일군 후방 교란 및 정보 제공, 향도 임무 및 민사작전 지원 등을 수행하여 연합군의 프랑스 해방에 크게 기여했다.

현재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레지스탕스의 숫자는 220,000명이며, 학계에서는 200,000명에서 400,000명 사이로 추산하기도 한다. 이는 당시 전체 프랑스 성인 인구의 2%에 달하는(!!) 수치이다. 비공식적으로는 대략 2,000,000명, 다시 말해 전체 성인 중 10%가 레지스탕스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하거나 옹호했을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만 레지스탕스 대원이 절정에 이른 것은 1944년 여름, 그러니까 프랑스 해방이 명백히 임박한 시점에서의 일이었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점령기간 중인 1943년 말의 나치 독일 점령당국 측에서는 레지스탕스의 규모를 약 130,000명 가량으로 파악하고 있었다.[13]

사실 1~2% 정도라는 숫자가 미묘한 것이긴 한데, 68운동 이후의 학계에서는 레지스탕스가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보기까지는 힘들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1940년 자유 프랑스가 처음 발족할 때만 해도 샤를 드 골은 국내에서는 듣보잡 신세[14]였다. 1943년까지도 다수 프랑스인들의 조국은 비시 정부에 있었지, 자유 프랑스에 있지는 않았다. 나치당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자유 프랑스에 대한 심정적인 지지가 늘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사실상 비시 프랑스가 아니라 페탱 본인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봐야 한다. 페탱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었고, 비시 프랑스를 건국할 때까지만 해도 1차 대전급의 참혹한 화마를 프랑스에 미치지 않게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친 페탱파 레지스탕스들도

"페탱 원수는 프랑스를 구하려고 노력을 하신다. 나쁜 건 페탱 원수 주변의 친 나치 인사들 때문이다."

라는 논조의 지하신문을 돌리기도 했다.

레지스탕스를 프랑스의 대독 협력과 규모면에서 비교해보자면, 프랑스에서 해방 직전부터 1950년대 초까지 진행된 대독 협력자 숙청때 전국적으로 350,000명의 재판이 검토되었다. 이는 프랑스 전체 인구(약 4,050만 명) 중 약 0.9%가 부역자 혐의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중 120,000명 이상이 재판을 받았고, 재판을 받은 사람들 중 98,000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없이 진행된 레지스탕스의 약식 처형이나 여성 부역자 삭발, 해방 이후 공직사회에서 수행된 각종 징계 및 불이익과 같이 해방 전후의 초법적인 숙청까지 포함하면 부역의 규모는 더 크게 잡을 수 있다. 부역자 숙청이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음을 보면 프랑스의 대독 협력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즉 레지스탕스 운동만큼이나 대독 협력 역시 그에 못지 않게 규모가 컸다. 레지스탕스 운동은 초기 이후 분명한 대중운동의 성격을 띄긴 했으나 나치 독일 점령 이후 대다수 국민이 일치단결하여(특히 샤를 드골의 영도 아래) 나치에 저항했다는 인식이나 이미지는 만들어진 신화에 가깝다.

프랑스 수복 이후 친독파들은 사살당하거나 입지를 잃어버렸고, 레지스탕스계 인원이 합류한 좌파계 정당이 신공화국의 의석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이 정권에서 축출되고[15] 중도좌파(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중도파(급진사회당)-중도우파(자유공화운동)의 연합정권이 이어졌다. 1950년대 후반에는 드골리즘의 깃발 아래 우파가 드골파와 연합을 하거나 흡수되었고, 중도파와 좌파는 쿠데타에 대한 찬반문제로 인해 내부적으로 갈등을 빚었으며, 이후 드골과 마찰을 빚은 상태에서 총선에서 참패해 야당으로 전락하여 드골파가 정권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우파가 지속적으로 집권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업적과 평가 그리고 재평가는 특히 드골의 집권과 퇴임, 그리고 68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3. 활약상과 한계[편집]


많은 사람들이 레지스탕스를 굉장히 미화해서 생각하고 있으며, 이들의 규모와 활약상도 과장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 어디든 역사적으로 게릴라만으로 외국의 정규군을 몰아낸 경우는 전무[16] 하고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대독일 전선에 있어 절대 주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에서 물러난 것은 연합군의 공세가 있었기 때문이지, 레지스탕스 때문은 아니었다. 만약 연합군의 공세가 없었다면 비슷한 시기 스페인 내 반프랑코 빨치산들이나 우크라이나, 발트 3국의 반소 게릴라들처럼 장기적으로는 치안 유지와 통치 확립에 걸리적거리는 역할 정도는 했었어도, 결국 각개격파당한 이후 처참하게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레지스탕스는 소련이나 동유럽[17] 빨치산들에 비하면 훨씬 규모가 작았고, 같은 서부전선 내에서도 무려 1920년대부터 조직을 만들어 스페인 내전에도 참가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에서는 유럽 각지의 좌익 레지스탕스 조직과 접점이 있었던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빨치산이 프랑스보다 더 오래, 효과적이며, 더 큰 규모로 전장에서 싸웠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은 70,000명이 넘는 독일군을 유고 전역에 묶어두었고,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빨치산은 적극적인 철도 파괴와 기습으로 독일 동부전선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는데 심지어 명장 발터 모델을 공격해 중상을 입힌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레지스탕스 활동의 실상을 그린 대표적인 영화로, 아래에도 설명이 등장하는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그림자 군단>이 있는데,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는 힘들고 나치에게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속에서 인륜을 거스르며 살아야 하는 레지스탕스의 현실적인 모습을 잘 그려냈다.

전쟁 이후 역사학계에서 치열한 수정주의 논쟁을 겪으며 정립된 것이지만, 상술한 스페인 공화파나 전쟁 이전부터 골수 좌익 분자로 찍혀서 점령군과는 타협의 여지 자체가 없었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대중적인 운동으로 급격히 성장한 건 1942년 이후 점령 당국의 강제 노동 징발령, 페탱 휘하의 비시 정부 해체, 그리고 연합군의 상륙 같은 딱 봐도 "아 나치스 세력이 오래 가지 못하겠구나" 싶은 기점에서였다. 어떻게 보면 기회주의적인 일면이 컸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고 해서 레지스탕스의 의기와 역사적인 의미를 굳이 평가절하해야 하는 건 아니다. 한동안 레지스탕스 운동은 투쟁의 성과만이 조명받아 영웅신화로 남았었다. 성과뿐 아니라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겪었던 곤경과 희생, 의의와 한계, 그리고 실재적인 진행 양상까지 균형있게 같이 살펴봐야 레지스탕스 운동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 사회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분명히 거대 열강이면서도 일찍부터 떡실신 당해 점령군 치하에 있었던 치욕스러운 입지 때문에 전후 과거사 청산 과정을 거쳐 점령기의 역사를 마주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큰 홍역과 깊은 성찰이 있었다.

반대로 레지스탕스를 잡기 위한 친독 의용대도 존재했다. 대표적인 단체가 프랑스 친독 의용대 밀리스(La Milice française)였다. 이들의 수는 40,000명에 달했는데 레지스탕스를 색출하고, 유대인을 탄압했다.

프랑스인들이 자발적으로 밀리스에 가입한 이유는 레지스탕스가 주로 친유대계 좌파 조직이었고, 밀리스는 반유대계 우파 단체였기 때문이었다. 즉 밀리스는 반유대주의와 극우주의의 결합 사례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milice'란 단어는 독일의 나치처럼 프랑스에서 종종 욕으로 쓰인다. 밀리스 대원들 중 상당수는 대전 말기에 무장친위대의 프랑스인 외인부대였던 샤를마뉴 여단[18]에 들어갔다.


4. 유명한 레지스탕스[편집]


  • 마르크 블로크 - 프랑스의 역사학자. 역덕이라면 《봉건사회》라는 책이 도서관에 꽂힌 것을 알 것이다. 그 책의 저자가 맞다. 정발시의 저자명은 마르크 블로크로 적혔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대위로 전역한 경험이 있었으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할 때 끝내 체포되어 총살형으로 사망했다.

  • 자크 뒤클로 - 실질적인 좌익 레지스탕스의 최고 지휘관. 모스크바로 달아난 모리스 토레즈 공산당 총서기를 대신하여 프랑스 공산당의 지하 활동을 총괄했으며, 항독 레지스탕스의 총 70%에 달했던 공산주의 성향의 레지스탕스를 조직화하하여 나치 독일과 맞섰다. 1969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 스테판 에셀 - "마지막 레지스탕스"라 불린다. 《분노하라》라는 책으로 유명세를 얻은 전직 외교관으로 역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잡혔었다. 2013년에 95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 앙리 롤 탕기 - 육군 대령 출신의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지도자. 파리 해방 전투에서 휘하 조직원들을 이끌고 독일군의 파리 군정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을 체포하여 항복협상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 장마리 로레 - 자신이 히틀러의 아들이라 주장한 사람. 죽기 전 자서전으로 이 사실을 주장했다. 또한 영국군이었던 레오나르드 윌케스의 일기가 2012년 3월에 공개되면서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2008년에 이미 히틀러의 혈족과 장 마리 로레의 유전자를 비교분석한 결과, 로레가 히틀러의 미국인 친척의 후손과 Y염색체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 규명되면서, 히틀러의 숨겨진 프랑스인 아들의 가설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은 일이 되었다.[19]

  • 장 물랭 - 레지스탕스 운동의 상징적 인물.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 당대 최연소 도지사로 유명했으며, 비시 정부가 들어서자 런던으로 망명했다. 그때 드골의 자유 프랑스 운동에 합류했으며, 그의 지원을 받아 레지스탕스의 통합 조직인 레지스탕스 국민평의회를 조직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사후 레지스탕스 신화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기려지게 된다.

  • 장피에르 멜빌 - 본인이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그림자 군단>을 만들었다. 레지스탕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때문에 개봉 당시 흥행에 참패했다. 그러나 이후 재개봉과 DVD 출시 등을 거치며 미국 쪽을 중심으로 재평가받았다.

  • 조르쥬 비도 - 본래 신문기자 출신. 레지스탕스 국민평의회에 합류했으며, 장 물랭이 체포되자 그를 계승하여 프랑스 해방때까지 의장직을 수행했다. 전후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제4공화국 시기에 총리까지 역임했지만, 알제리 전쟁 시기에 알제리 독립 반대 테러 조직을 주도하다가 망명하기도 했다. 후에 사면되어 귀국함.

  • 아베 피에르 - 가톨릭 사제이자 정치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며, 프랑스 내 유대인들을 스위스알제리로 피신시켜 많은 생명을 구했다. 전후에는 노숙자들을 위한 자립공동체인 엠마우스(Emmaus)를 만들어 빈민 구호 활동을 했다.# 프랑스인들의 정신적, 종교적인 아버지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 보리스 빌데 - 초기 레지스탕스 중 하나인 인류 박물관 조직[20]의 일원 중 한 명이었다. 직접적인 저항은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군의 무기를 은닉하거나, 탈출한 프랑스군 포로를 숨기고 외국으로 탈출시켰다.

  • 크리스 마커 - 프랑스 다큐멘터리 감독/사진작가. <12 몽키즈>의 원작으로 유명한 <활주로>를 만든 감독이다. 레지스탕스 경험이 다큐멘터리 작업에 녹아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사뮈엘 베케트 - 아일랜드인이지만, 전쟁 직전 프랑스에 정착해 레지스탕스가 되었다. 본인은 보이스카우트나 다름없었다고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 오드리 헵번 - 벨기에에서 태어난 영국 국적의 할리우드 영화배우. 헵번은 1942년에서 1945년까지 네덜란드인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의 펠프 마을에 살았는데[21], 이 시절 네덜란드의 저명한 레지스탕스 지도자인 헨드릭 피세 후프트 박사 밑에서 레지스탕스 소식지를 배포하고, 고립된 연합군 공수부대원들을 도운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10대 소녀로 발레리나 수업을 받고 있었던 헵번은 후프트 박사의 심부름을 도왔으며, 레지스탕스 활동 모금을 위해 비밀 모임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 프랑수아 미테랑 - 원래는 비시 정부의 하급 관료였으나 위에서 언급되는 1943년부터 전향하여 좌익 성향의 레지스탕스에 합류했다. 사실 페탱에게 훈장도 받았기에 논란이 될 뻔 했지만 미테랑 본인이 언론플레이를 잘했고, 이미 말년이라 별 탈 없이 넘어갔다.


5. 보통명사화[편집]


그 활약이 과장됐든 아니든, 레지스탕스라는 이름 자체는 전쟁이나 역사에 관심없는 일반인들도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기에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점령지 주민들의 게릴라 활동"을 레지스탕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21세기 현대에 레지스탕스라고 부를 만한 사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때 있었는데, 러시아군의 침략과 전쟁범죄에 대항하여 헤르손을 비롯한 점령지 주민들이 야밤을 틈타 순찰 중인 러시아군을 교살하거나, 우크라이나 특수부대와 협력해 사보타주를 벌이고, 러시아군에 대한 정보를 넘기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특히 북부전선에서는 와해되어 숨어있다가 재집결한 우크라이나군과 후방에 침투한 특수부대, 지역에서 결성된 민병대 및 주민들이 모여 러시아군의 후방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결과 러시아군이 북부전선에서 붕괴되는 데 크게 일조했다.

러시아도 이들 레지스탕스들에 큰 위협을 느껴 예정된 군사 퍼레이드와 괴뢰국 수립, 러시아와의 강제 합병 절차를 무기한 연기시켰을 정도였으며, FSB를 투입해 레지스탕스를 색출하거나 숨은 무기고를 발굴하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군이 벌인 학살과 고문은 레지스탕스들과 주민들의 활약에 러시아군이 완전히 패닉에 빠졌음을 반증한다.


6. 미디어[편집]











  • <스틸 디비전> 시리즈 - 자유 프랑스 사단이나 미군 사단에 레지스탕스 유닛들이 합류하여 등장한다. 총격전이나 대전차전에서 뛰어나진 않지만 근접전에서는 화염병으로 독일군 보병들을 엿먹일 수 있다.


6.1. 동음이의어의 캐릭터들[편집]


레지스탕스에서 어원이 유래한 단체가 등장하는 가상 매체











  • <Ingress> - 레지스탕스 진영







7.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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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키라는 단어는 <스타트렉 TNG>, <스타트렉 DS9>, <스타트랙 보이저> 시리즈에서 카데시안에 대항하는 무장단체의 이름으로 등장한다.[2] Edmond Michelet(1899 ~ 1970), 프랑스의 기독교 민주주의 운동가.[3] 날짜를 살펴보면 알 수 있지만, 아직 휴전협정이 체결되기도 전이었다.[4] Appel du 18 Juin[5] 나치 독일 치하의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초기 저항단체인 인류박물관(Musée de l'Homme)이 발간한 기관지이다.[6] 이 부분은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에서 아주 상세하게 다뤄지고 있다. 사실 이 파리해방을 둘러싼 여러 정치세력들 사이의 각축이 21세기 현재까지의 프랑스 정치구도를 결정지었다.[7] 원래 지하조직 및 반체제 혁명투쟁은 이쪽 계열의 전공이었으니, 이들로선 바뀐 상대가 더 포악하고 지랄맞은 놈들이라는 것뿐이었다.[8] 샤를 드골이 주도하는 자유 프랑스가 프랑스 국내의 레지스탕스를 지도했다는 이야기는 종전 후에 언론에 의해서 유포된 허구이다. 애초에 전쟁 기간 중 프랑스 국내의 우파 계열 레지스탕스들조차 드골을 인정하지 않았다.[9] 프랑스에는 옛날부터 아르메니아계 디아스포라가 많이 살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리 근처에 살고 있었던 아르메니아계 이민자 노동자들은 본국인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와의 연줄도 있고, 본인들도 도시 프롤레타리아 처지인 데다가, 대다수가 사는 동네도 파리의 '붉은 벨트' 일대라서 좌익 성향이 강했다. 볼셰비키 혁명과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탄생 이전부터 이미 다슈나크 같은 아르메니아계 자체 좌파 혁명조직의 영향력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10] 독일군의 포로로 잡힌 스페인인들은 나치와 프란시스코 프랑코 극우 정부 사이의 협약에 따라 전쟁 포로로서의 취급도 못받고, 바로 마트하우젠이나 다카우 등의 나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11] 그 외에도 전 세계로 퍼진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은 부근의 연합국 군대에 자원 입대해서 싸웠다. 미국으로 간 한 인민전선 병사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소련 대사관에 붉은 군대 자원 신청을 냈으나 거리상 반려된 후, 진주만 침공이 일어나자 미군으로 싸우라는 권고를 받고 훈장을 수여받은 뒤 부사관까지 되었다. 이런 자본주의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들은 승진에 불리했고, 단 한 명도 장교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념 하나만으로 파시즘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웠다.[12] <밤과 안개 법령>(Nacht und Nebel )이다. 이 법령 적용 이전까지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북부에서는 가혹하기는 해도 군법에 따른 체포와 재판 절차를 거쳤다. 비시 정권의 '자유지대'에서도 저항세력 탄압은 비시 정권이나 현지 경찰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13] Jean-François Muracciole, 《Histoire de la Résistance en France》(PUF, 2003), p. 92;다니엘 리비에르, 최갑수 옮김, 《프랑스의 역사》(까치, 2000), p. 392.[14]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드골은 육군 준장으로 기갑여단장이었다. 각국의 군인들 사이에선 기동전을 주장한 군사전략가로 유명했지만 프랑스의 일반인들이 기껏해야 육군 준장을 어떻게 알았겠는가.[15] 그래도 득표율에선 제1야당 자리를 차지하긴 했다. 1978년 총선때 사회당에게 밀린 이후에 거의 매번 세가 축소되다시피 한 상황이지만...[16] 이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게릴라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군사전문가인 현대 미 특수부대에서 실행하는 UW 특수작전 또한 레지스탕스 지하조직들의 무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로 점령 세력이나 우세 세력 내부에서 정치공작을 실행해 자체적으로 내분을 유도한 후, 허점을 찔러 반대파 반군들과 함께 나라를 갈아엎는 방식으로, 이란이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등을 전복시켰다. 이후 미군 본대가 해당 국가를 동시에 침공하는 건 덤이다. 허나 아예 국가 정규군 자체가 패배한 이후의 점령지에서 과거 민간인이었던 레지스탕스들이 이런 심오한 고난도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17] 특히 요시프 브로즈 티토 휘하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들수 있다. 명색이 빨치산이면서 전차와 항공기를 운용할 정도로, 거의 정규군에 가까웠다. 종교/언어/민족/역사가 전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라는 단일한 독립국가로 우뚝설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빨치산 투쟁을 이끈 티토의 강력한 리더십 때문이었다. 그리고 티토가 죽은 지 10년 만에 유고는 갈가리 찢어졌다.[18] 추후 사단으로 승격되었다.[19] 애초에 장 마리 로레의 친모는 평생 자신이 히틀러의 아이를 낳았는 사실을 숨기고 살았고, 장 마리 로레 또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자신이 히틀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는데 영국 병사가 무슨 수로 히틀러에게 아들이 있고, 레지스탕스 일원으로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지 의문이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다.[20] 사실 정식 조직 명칭이 아니다. 이들의 동료들이 인류 박물관의 서기나 인류학자, 언어학자, 경비들이 참여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임시적으로 붙여진 이름이었다.[21] 아른험 근교에 있는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