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쉐스타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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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르보비치 쉐스타코프(Лев Львович Шестаков / Lev Lvovich Shestakov : 1915. 12. 28~1944. 3. 13)

1. 노동자의 아들
2. 입대와 임관
3. 루마니아 공군의 천적
4. 전사
5. 전적



1. 노동자의 아들[편집]


그는 우크라이나 지방 도네츠크주의 아우디이우카(Авдіївка)라는 소도시에서 1915년 12월 28일에 태어났다. 레프 소년의 아버지는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였다. 6학년을 마친 소년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고, 고향인 아우디이우카 역의 열차 공작창에서 기관차와 열차를 손보면서 정비사로 일했다. 그는 19세가 되던 1934년에 붉은 군대에 입대했고,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 보로쉴로프그라드 군사항공학교(Ворошиловградской военной авиационной школой : ВВАШ)에 들어가게 된다. 1930년에 문을 연 이 군사학교는 최근까지 루간스크 군사항공/항법학교(Луганское высшее военное авиационное училище штурманов : ЛВВАУШ)로 운영된 정규 군사교육기관으로, 모든 교육 과정을 수료한 학생들은 장교로 부임하게 된다.



2. 입대와 임관[편집]


생도 자격으로 1936년에 항공학교를 졸업한 쉐스타코프 소위는 키예프 군관구에 주둔하고 있던 제36전투기여단(36-й истребительной авиационной бригады)에서 조종사 생활을 시작했다. 1937년스페인 내전에 종군할 것을 지원하며 중위 계급을 받은 쉐스타코프는 그 해 여름에 파견되었고, 스페인으로 건너 간 그는 공화국 공군 전투기 군단에 배속되었다. 소련에서 현지로 보낸 최신예 단엽 전투기 폴리카르포프 I-16에 탑승한 그는 스페인 내전 동안 90회 출격하면서 단독 격추 8기 / 공동 격추 31기를 기록했다.

쉐스타코프는 스페인 파견 근무를 마치고 1939년 9월에 귀국한 후 제69전투기연대(69-го ИАП)로 전속했는데, 노동자 출신에 하늘의 영웅이 된 그가 가진 체재 선전 효과에 주목한 당 지도부에 의해 이때쯤 되자 소련 공군에서 가장 유명한 에이스 파일럿으로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다.

1941년 6월 22일에 독소전이 발발하자, 쉐스타코프는 제69전투기연대에서 비행대대장 자격으로 오데사 전투에 참가했고, 1941년 7월 16일에는 비행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오데사 전투에서 그가 이끄는 부대원들은 주로 루마니아 공군을 상대하면서 94기 격추를 기록하고 있었던 탓에, 소련 공군을 통틀어 가장 많은 전과를 세우고 있던 정예부대로 취급받았다.


3. 루마니아 공군의 천적[편집]


이와 같은 쉐스타코프 소령의 대활약으로 인해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하면서 유전 지대만 지키려고 했던 루마니아 공군은 피해가 극심해서 얼마 후 공군 전체를 동부전선에서 철수시키기에 이른다. 제69전투기연대는 1941년 말에 구식 전투기로 전락한 I-16 대신 신예 전투기인 LaGG-3으로 기종 전환을 마치고 독일군의 공세가 집중되는 스탈린그라드로 이동했다.

쉐스타코프는 그후 3년 동안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포함하여 각 전선을 전전하며 틈틈이 실전 출격을 하면서 지휘를 했다. 8월 9일에 쉐스타코프는 루프트바페 제77전투항공단 소속의 메서슈밋 Bf 109 전투기 14대의 엄호를 받는 제27폭격항공단(KG 27) 소속의 하인켈 He 111 폭격기 편대와 딱 마주쳤다. 이 교전에서 제69전투기연대는 9대의 Bf 109를 격추했다고 보고했지만, 이런 주장과는 반대로 제77전투항공단은 단 1대만 피탄되어 중파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1943년 1월 10일에 쉐스타코프는 코타르니코프(Котельников) 부근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독일 전투기들과 난전을 치르다가 부하들과 떨어진 채 혼자서 무려 3대의 메서슈밋 전투기에 둘러싸인 연대장은 필사적으로 이리저리 조종간을 꺾어대며 싸우다가 문득 실탄이 떨어져버렸다. 어차피 살아남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 그는 가까운 Bf 109 한 대를 골라잡고 돌진해 충돌을 감행했다. 뜻밖의 역습에 날개가 부러져버린 그 독일 전투기는 추락했지만, 그가 탄 야크 전투기도 캐노피가 떨어져나가고 프로펠러도 휘어버렸다. 잠시 후 프로펠러의 비대칭 회전으로 격심하게 떨리던 엔진에서는 불길까지 솟구치기 시작했다. 불붙은 전투기를 필사적으로 달래 기수를 아군 점령지 쪽으로 돌린 그는 간신히 불시착에 성공할 수 있었다.

부하들은 이처럼 용맹한 자기들의 연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송시를 지어주며 "사자 쉐스타코프"[1]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우리 독수리들은 먹구름 위로 당당한 날개를 펼지고 하늘을 누볐네. 겁없는 쉐스타코프 사령관과 싸우는 우리 근위비행대."


4. 전사[편집]


쉐스타코프는 1944년 3월 13일에 추락해 사망할 때까지 200회 이상 출격을 거듭하며 32회의 공중전을 치르면서 26대의 격추를 기록했다. 그는 이 날 독일 폭격기 편대의 요격으로 인해 돌아오지 못했다고 기록되었는데, 목격한 부하들에 따르면 슈투카 1대를 격추시킨 다음 두 번째 슈투카에게 바짝 붙어 사격을 가하자 그 기체가 대폭발을 일으켰다고 한다.

어쩌면 싣고 온 폭탄을 투하하기 전이었다고 추측되는데, 어쨌든 그 폭발의 충격으로 쉐스타코프의 탑승기도 부서져 왼쪽으로 추락했다. 쉐스타코프는 기체에서 벗어나 추락했지만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설원에 쌓인 눈이 녹은 5월에야 발견되었다. 당일 독일 공군의 전투보고서가 남아있어 비교한 바에 따르면, 쉐스타코프가 격추시킨 슈투카는 SG 77 소속의 Ju 87D-5였다고 전한다.


5. 전적[편집]


소련 공군 에이스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특히나 쉐스타코프는 격추 기록에 관한 논란이 많은 에이스이다. 한때 그가 스페인 내전에서 세운 전과와 독소전의 공동 격추를 포함하면 65대 격추라는 주장이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쉐스타코프는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가 주어졌고 레닌훈장과 적기 훈장 및 대애국 전쟁 1급 참전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다.

유명세를 누리던 항공전 연구자였던 토마스 폴락과 크리스토퍼 쇼어스의 연구에 따르면 쉐스타코프는 한때 소련 공군 톱 에이스로 잘못 알려지던 바실리 M. 네이덴코(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Найденко : 1915~1969)가 주장하는 전과인 99대 격추에 이어서 소련 공군에서 2번째로 높은 격추수로 알려지고 있는데, 3위인 이반 코제두프(Иван Hикитович Кожедуб : 1920~1992)의 62대와 너무 많은 차이가 나고 있어 부자연스럽다. 이와 같은 기록은 당시 소련 공군에서 부대의 격추수를 지휘관에게 몰아 합동 격추로 기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게다가 그런 기록 방법을 실제로 적용한 기간도 부대마다 달라서 이와 같은 혼동이 벌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혼란스러운 전과 집계 방식이야말로 소련측 에이스들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큰 요인이다.


[1] 원래 그의 이름 레프가 사자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