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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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야신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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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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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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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 1964 · 1966 ·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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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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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롱도르 드림팀






소련의 前 축구선수


파일:레프 야신.jpg

이름
레프 야신
Лев Яшин | Lev Yashin
본명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
Лев Иванович Яшин
Lev Ivanovich Yashin
출생
1929년 10월 22일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사망
1990년 3월 20일 (향년 60세)
국적
[[소련|

소련
display: none; display: 소련"
행정구
]]

신체
189cm / 체중 82kg[1]
포지션
골키퍼
소속팀
FC 디나모 모스크바 (1949~1971)
국가대표
파일:소련 축구 연맹 로고.svg 74경기 (소련 / 1954~1970)

1. 개요
2. 유년기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4. 은퇴 이후
5. 플레이 스타일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서훈
6.4. 개인 기록[2]
7. 야신에 대한 언사
8. 어록
9. 기타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골키퍼 포지션을 재탄생시킨 인물.jpg}}}

총알 제조공에서 발롱도르까지: 골키퍼를 재창조한 남자
Bullet maker to Ballon d'Or: The man who reinvented goalkeeping

BBC

소련의 전 축구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대표하는 아이콘[3]이자 현대 축구에 스위퍼 골키퍼라는 정의를 정립한 인물이다.

실제로 90분 동안 골문에 서서 선수들에게 소리를 치고 크로스를 쳐내기 위해 골대를 벗어나 처리하는 것, 그리고 돌진하는 상대 공격수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나가는 등 현대 스위퍼 골키퍼의 역할이라고 불리는 것들 모두가 야신이 처음 선보인 것이다.

선수 생활은 줄곧 FC 디나모 모스크바 소속으로 해냈고, 소련 대표팀 소속으로 유로 초대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현재까지 발롱도르를 수상한 유일한 골키퍼이며 발롱도르 유효 표 획득만 10차례[4]나 된다.

현역 시절에는 ‘검은 거미’[5]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전세계적으로 처음 중계된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선보인 엄청난 퍼포먼스를 통해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안겼다.


2. 유년기[편집]


1929년 모스크바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12세 무렵 군수공장에 다니면서 축구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3. 선수 경력[편집]



파일:Лев Иванович Яшин.jpg



3.1. 클럽 경력[편집]


1949년 20세의 나이로 입단했는데 당시 FC 디나모 모스크바에는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뛰어난 골키퍼 알렉세이 호미치(Алексей Хомич)가 있었기 때문에 처음 3년 동안은 후보 선수에 머물렀다. 그는 부업으로 같은 FC 디나모 모스크바의 아이스하키 팀의 골키퍼를 맡기도 했는데, 이때 그의 팀은 소련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53년 알렉세이 호미치가 부상을 당하면서 야신에게 기회가 생겼다. 야신은 데뷔전에서 매우 실망스러운 경기력 때문에 고위급 관계자에게 썩 꺼지라는 독설을 듣기도 했지만 금방 폼을 끌어올리며 주전 골키퍼 자리를 굳혔다. 이후 FC 디나모 모스크바에서 326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소련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5회, 소련 컵 대회 우승 3회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심각한 부진에서 재기하여 발롱도르를 수상하던 1963년에는 소련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 밖에 하지 않는 우주방어를 펼쳤다. 상술했듯 현재까지 골키퍼로서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수상한 선수이다. 41세가 되던 1971년, FC 디나모 모스크바 VS 유럽 올스타 팀의 친선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당시 이 경기에는 소련이 폐쇄적인 공산권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10만 명이 운집했으며 보비 찰턴, 에우제비우, 게르트 뮐러 등 축구계의 거성들도 참여했다.


3.2. 국가대표 경력[편집]


야신은 1954년에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는데 당시 소련은 이고르 네토(1930~1999), 발레리 보로닌(1939~1984), 알베르트 셰스테르네프(1941~1994) 등 월드 클래스 선수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는데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 야신은 소련이 금메달을 따는 데 큰 공헌을 한다.[6] 이후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도 출전했는데 잉글랜드와는 2:2로 비기고,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었으며 펠레브라질을 만났는데 바바에게 2골을 허용해 패했다. 이후 4조 순위 결정전에서 잉글랜드를 1: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하나 닐스 리드홀름, 군나르 그렌이 이끄는 스웨덴에게 2:0으로 패하고 만다.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에서 야신은 대활약을 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를 연파하며 소련의 우승을 이끌어 소련을 유로 초대 챔피언으로 만들었다.[7]

그러나 야신이 언제나 최고의 골키퍼였던 것은 아니었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는 예선전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 18분 만에 3골[8]을 실점했는데 골키퍼라면 당연히 막아야 할 평범한 슛을 막지 못해 실점을 하는 등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당시 손꼽히는 강호였던 소련이 8강에서 탈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야신은 이때의 심각한 슬럼프로 축구선수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지만 심기일전하여 다시 뛰어난 활약을 펼쳐서 1963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그 이후로 은퇴할 때까지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서 군림했다. 이때 뇌진탕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야 알려졌다.

1963년에 부활한 야신은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에서 다시 한번 소련을 유로 결승으로 이끄나 개최국 스페인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친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도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된다.

이후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을 상대로 3:0 승리, 이탈리아에게 1:0으로 승리, 칠레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고 헝가리를 2:1로 격파하며 4강까지 이끄나 결국 우베 젤러가 이끄는 서독과의 경기에서 헬무트 할러와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골을 내줘 1:2로 패배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고 만다. 그리고 이어지는 3·4위전에서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과 대결하는데 전반 12분에 에우제비우에게 페널티 킥 선제골을 내주고 이후 에두아르두 말로페예프가 동점골을 넣었으나 후반 89분에 통한의 결승골을 내줘 4위에 그치고 만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도 국가대표에 뽑혔으나 후보에 그쳤다. 이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4. 은퇴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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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한 해에 남긴 사진
이후 코치로 활동하다가 선수 시절 입었던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1986년도에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9] 말년에는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199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조국이었던 소련이 바로 다음 해인 1991년 해체되면서 야신은 소련 시절 러시아 축구의 영광 그 자체로 남게 되었다.

이후 1994년 미국 월드컵부터 그를 기려 대회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골키퍼에게 야신상[10]을 수여하게 되었다.

이후 2019년부터 프랑스 풋볼에서 한 해 최고의 골키퍼에게 야신 트로피를 수여하며 다시 한번 골키퍼라는 포지션에서 그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5. 플레이 스타일[편집]






전 세계 골키퍼들의 우상이자 골키퍼의 대명사로 동경받고 있는 것에서 야신이 얼마나 명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동체시력과 선방 능력 모두 축구 역사상 최고 수준이다. 야신의 이름은 골키퍼의 대명사가 되었고, FIFA 월드컵 골든 글러브의 초창기 이름이 야신 상이었을 정도다. 흔히 실력 있는 골키퍼에게 '거미손' 내지는 '문어발' 등의 별명이 붙곤 하는데, 이러한 별명들의 시초가 바로 레프 야신이다.

현역 시절에 검은 천모자, 검은 옷, 검은 장갑을 착용하고 나와서 공격수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들어갈 법한 슈팅도 막아내는 신들린 모습을 보여주며 명성을 떨쳤다. 웬만한 공은 그 자리에 서서 팔만 뻗어 잡아내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얻은 별명이 흑거미 혹은 검은 문어. 이 때문에 이후 이름 좀 날린 골키퍼들은 검은 옷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즉 경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현대 골키퍼의 이미지를 구축한 셈.

또한, 축구 골대의 좌우 상단 구석 위치는 골키퍼가 막기 매우 어려운 사각지대를 일명 '야신 존(Yashin Zone)'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레프 야신은 사각지대로 날아오는 슈팅조차도 매우 잘 막았다고 한다. 지금도 축구 팬들이 골대 상단 구석의 사각지대를 '야신 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골키퍼들은 골대의 사각지대를 쉽게 못 막았지만 오직 야신만이 잘 막았기 때문이다.

야신은 A매치 78경기 출장에 실점이 불과 70골(경기당 평균 실점 0.89)이었다. 21세기의 전설적인 골키퍼인 잔루이지 부폰은 2014년 11월 기준 평균 실점 0.81골을, 이케르 카시야스는 0.55골을 기록 중이지만 수비수들의 실력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의 부폰에게는 파비오 칸나바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파올로 말디니, 잔루카 잠브로타 등이 있었고 스페인 대표팀 소속의 카시야스에게는 페르난도 이에로, 카를레스 푸욜, 세르히오 라모스 등의 최상위 클래스의 수비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야신과 함께 뛰던 수비수들은 당시 소련의 축구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곤 하지만, 부폰과 카시야스와 함께 뛰던 수비수들에 비해선 한 수 아래였다.


파일:fifa-gols.png


역대 FIFA 월드컵 경기당 평균 점수

당시의 축구는 지금보다 경기당 평균 실점률이 2배 가량 높았다. 그 이유는 당시 포메이션에는 현대의 전술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WM 포메이션으로 일컬어지는 3-2-5 형태의 포메이션이 가장 널리 사용됐으며, 이는 근대 축구 태동기에 쓰이던 2-3-5 같은 공격 일변도의 포메이션보다는 낫지만, 현대 축구만큼 정교한 수비를 구사할 수 있는 전술은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당시 축구는 우리 팀이나 상대 팀이나 공격 위주의 축구를 구사했으며, 많이 넣고 많이 실점하는 메타 속에서 상대보다 더 많이 득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게 일반적인 방향성이었다. 야신의 실점률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심각한 부진에서 재기하여 발롱도르를 수상하던 1963년에는 소련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밖에 하지 않는 우주방어를 펼쳤다. 야신이 출전하지 않은 나머지 11경기에서의 실점 수가 8실점으로 오히려 더 많다!

발롱도르 투표에서 유효 표를 받은 횟수도 골키퍼로서는 역대 최다인 10번이다.[11]

FIFA 월드컵에 총 4번 출전[12]하여 13경기 중 4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냈으며, 전체 출장 경기 812경기 중 무실점으로 막아낸 경기가 절반이 넘는 480 경기[13]나 된다.




손이 큰 것과 동시에 힘도 매우 좋았는데, 특히 어깨힘과 팔힘이 매우 강하여 허리를 제대로 쓰지 않아도 충분히 공을 센터 서클까지 던질 수 있었다. 또한 몸도 근육질의 탄탄한 체형이다. 거기에 야신은 현대의 스위퍼 키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시대에 드물게 수비진을 모두 통솔하고 자신이 직접 에어리어 밖으로 나가 공을 쳐내거나 좋은 킥력으로 팀의 공격 방향을 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14] 그의 활약상을 담은 영상을 보면 필드 수비수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지시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모든 기록들을 제치고 그가 과연 인간인지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통계는 바로 페널티 킥 방어율이다. 그는 선수 시절 총 150번의 페널티 킥을 막아냈다고 전해진다. 페널티 킥의 평균 성공률은 80%라고 하지만, 야신의 페널티 킥 방어율은 50%가 넘었다. 즉 야신을 상대로 페널티 킥을 차서 골을 넣으려면 차는 입장에서는 사실상 동전 뒤집기와 다름 없는 에 기대서 슛을 찼다는 의미가 된다.

현재 시점보다도 과격하고 쉴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 위주의 축구인만큼 득점률과 실점률이 더욱 높아 골키퍼가 활약하기에는 너무 까다로운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히 인간임을 의심하게 하는 선방을 수없이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야신이라는 골키퍼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야신은 사기적인 동체시력과 선방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뛰어난 근력을 통해 손발 가릴 것 없이 높은 패스 성공률로 팀의 공격에 가담할 정도로 영향력이 지대하기까지 했던, 현존했던 골키퍼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도달한 인물로 설명할 수 있다.

6. 기록[편집]



6.1. 대회 기록[편집]





6.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1963[15]
  • 발롱도르 드림팀[16]: 2020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60, 1964
  • USSR 올해의 골키퍼: 1960, 1963, 1966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3, 1964, 1966, 1967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FIFA XI: 1963, 1968
  • FIFA 공로장: 1988
  • FIFA 세기의 골키퍼: 1998
  • UEFA 주빌리 어워드: 2003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유럽팀: 1998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세기의 골키퍼 - 세계
  • IFFHS 세기의 골키퍼 - 유럽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유럽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러시아 드림팀: 2022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월드 베스트 XI: 1970


6.3. 서훈[편집]




6.4. 개인 기록[17][편집]


  • 프로 통산 812경기 470클린시트
  • 국가대표 78경기 70골 실점 24클린시트
  • FIFA 월드컵 12경기 4클린시트
  • 1000회 이상의 1:1 찬스에서 50골 실점: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모두 1000회가 넘는다. 게다가, 레프 야신이 활약하던 시대에는 현대 축구의 전술만큼 수비수들의 역량이 지금처럼 뛰어나지 못한 경우도 많았고 단체로 11명 버스 세우기 같은 전술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대단한 것이다.
  • 150회 이상의 페널티 킥 선방


7. 야신에 대한 언사[편집]


직접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진 못했으나, 이 선수는 꼭 언급해야겠다. 야신은 역대 최고의 골키퍼 명단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나는 영상을 통해 그가 곡예사처럼 폴짝 뛰어 한 손으로 환상적인 세이브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야신은 아이스하키 골키퍼도 했다고 들었다. 그는 유일한 골키퍼 발롱도르 수상자이다. 검은 거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그는 존재 그 자체로 상대 팀에게 위협이었다. 킥오프 전부터 상대 선수들에게 심리적 우위를 점하는 것은 정말 큰 이점이다.

이케르 카시야스


야신은 나보다 축구를 잘한다.

산드로 마촐라


내가 유일하게 무서워했던 골키퍼.

펠레



8. 어록[편집]


세상에 그 어느 골키퍼가 실점하는 것이 괴롭지 않을까? 골키퍼라면 실점하는 것이 괴로워야 한다! 만약 실점하는 것이 괴롭지 않은 골키퍼가 있다면, 그가 과거에 어떤 존재였든간에 그에게는 아무런 미래가 없다.


사각지대는 어떤 골키퍼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막을 수 있다.


우주를 나는 유리 가가린을 보는 즐거움만이 페널티 킥을 막을 때의 기쁨에 비할 수 있는 기분이다.


난 세계 최고의 골키퍼가 아니다. 그건 블라디미르 베아라가 들어야 할 말이다.


세계에 월드 클래스 골키퍼는 단 두 명이 있다. 하나는 나고, 하나는 맨체스터에 있는 독일인 청년이다.



9. 기타[편집]


  • 축구 황제 펠레와 1:1 페널티 킥 승부를 벌인 적이 있었다. 1967년 브라질 축구 연맹이 주최한 산투스 FCFC 디나모 모스크바의 친선 경기 후 승부차기 이벤트가 열렸는데, 양 팀을 합쳐 키커 5명과 골키퍼 5명을 뽑아서 키커 한 명이 한 골키퍼를 상대로 10개씩, 모두 50개의 슛을 해 가장 많은 골을 넣은 키커와 가장 많은 슛을 막아낸 골키퍼를 뽑는 방식이었다. 첫 골은 야신이 펠레의 슛을 막아냈지만, 나머지 9골은 펠레가 성공시켰다. 펠레는 50개 중 48개의 슛을 성공시켜 1위를 차지했다. 야신도 50개 중 25개의 슛을 막아내어 골키퍼 부문 1위에 올랐다.[18]

  • 그의 이름을 딴 상이 월드컵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골키퍼에게 주어지고, 야신이 세상을 떠난 지 28년이 지나서 러시아월드컵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월드컵 공식 포스터에 있는 검은 옷을 입은 골키퍼는 레프 야신이다. FIFA 공식 사이트에 레프 야신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것이라고 나와 있다. 지구 위 모든 축구 대회 중 가장 권위있고 선수들이 나가고 싶어하는 월드컵 대회의 공식 포스터에 등장한다는 것은 야신이 러시아 축구계에, 또 세계 축구계에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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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보드카를 마셨다고 한다. 지금에서야 프로 선수로서의 몸 관리를 위해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선수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이때는 선수들 개개인이 건강에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고 프로 의식에 몸 관리라는 범주가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 골키퍼로서의 중압감이 상당하긴 했겠지만 제 명을 못 채우고 위암으로 사망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점.

  • 간과되기 쉽지만 현역 시절에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게다가 러시아인은 무뚝뚝하다는 편견과는 달리 표정이 있는 편이라, 단체 사진을 보면 필드 플레이어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어도 쉽게 눈에 띄는 경우가 많다.

  •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 골키퍼 장갑의 사용에 있어서도 선구적이었다. 제대로 된 장갑을 착용하는 골키퍼가 드물던 그 시절에 현재의 골키퍼 장갑과 유사한 온전한 형태의 가죽제 장갑을 상시 착용하고 경기에 임했다.

  • 항상 검은 옷을 입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가 주로 입은 상의 색은 처럼 새까만 색이 아니라 약간 남색을 띤 검은색이었다고 한다.


  • 소련의 대표적인 선수였지만 대한민국에도 기사가 많았다. 반공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당시 대한민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일.


  • 러시아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도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에서는 2020년 9월에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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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골키퍼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최고의 골키퍼 1위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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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골닷컴 시대별 최고의 골키퍼.png}}} ||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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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프 야신 아카데미 공식 사이트 프로필[2]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만 적는다.[3] 수비수 분야에서 프란츠 베켄바워와 마찬가지로, 포지션 내에서 절대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각종 매체에서 포지션별 사상 최고 선수를 선정할 때 베켄바워가 자리하는 센터백 한 자리와 함께 그의 골키퍼 포지션은 가장 논란이 없고, 거의 만장일치의 선발로 공인되는 수준.[4] 1956, 1957, 1958, 1959, 1960, 1961, 1963, 1964, 1965, 1966,1967,1968,1969,1970,1980,1985,1998,2008,2009[5] 머리부터 발끝까지 겉옷으로 검은색을 입었기 때문. (실제 색깔은 매우 진한 파란색.)[6] 지금이야 올림픽 축구 경기는 A 대표팀이 아니라 U-23 팀이 출전하며 그 위상이 FIFA 월드컵에 한참 못 미치지만, 과거에는 올림픽의 위상이 월드컵 못지 않았다. 우루과이의 엠블럼에 붙은 별 4개 중 2개가 올림픽 우승을 뜻하는 것일 정도.[7] 이 대회에서 야신은 당연히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보여준 야신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고든 뱅크스유로 1976이보 빅토르, 유로 1992피터 슈마이켈, 2002 한일 월드컵올리버 칸, 2006 독일 월드컵잔루이지 부폰, 유로 2008,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로 2012이케르 카시야스, 2014 브라질 월드컵마누엘 노이어, 유로 2020잔루이지 돈나룸마와 함께 단일 메이저 대회 역대 최고의 골키퍼 퍼포먼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8] 심지어 이 3골 중 1골은 월드컵 역사상 유일한 코너킥 골이다. #[9] 야신의 선수 시절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오른쪽 다리에 항상 붕대를 감고 있다. 다만 다리 절단의 직접적인 원인은 혈관 문제였다.[10] 이후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상의 이름이 월드컵 공식 스폰 아디다스의 명칭을 빌려 아디다스 골든 글러브로 공식 변경되었다. 이때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축구선수의 이름을 딴 상을 돈으로 갈아버렸다는 불만이 많았다.[11] 2위는 총 9회 유효 표를 받은 잔루이지 부폰이며, 3위는 7회 유효 표를 받은 소련의 리나트 다사예프다.[12] 1958, 1962, 1966, 1970(1970년 대회에서는 후보 골키퍼로 대회에 참가)[13] 407 경기라고도 한다.[14] 출처: 베스트 일레븐[15] 골키퍼로서 이 상을 수상한 선수는 오직 야신뿐이다. 그 후 디노 조프잔루이지 부폰이보 빅토르, 올리버 칸, 마누엘 노이어가 각각 2위와 3위를 했을 뿐이다.[16]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팬데믹으로 인해 발롱도르를 수여하는 대신 각 포지션의 올타임 넘버 원을 선정하였고, 야신이 골키퍼 포지션에 선정되었다.[17]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만 적는다.[18] 북한에서 발간된 '세계 축구계의 별들'(2001)에서 발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