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 바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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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 버콜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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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여우조연상 - 영화
제53회
(1996년)


제54회
(1997년)


제55회
(1998년)

미러 소비노우
(마이티 아프로디테)

로런 버콜
(로즈 앤 그레고리)


킴 베이싱어
(LA 컨피덴셜)





로런 버콜
Lauren Bacall

파일:Annex - Bacall, Lauren_05.jpg
출생명
Betty Joan Perske
베티 조운 퍼스키
출생
1924년 9월 16일
미국 뉴욕주 브롱스
사망
2014년 8월 12일 (향년 89세)
미국 뉴욕주 맨해튼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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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배우, 모델
신체
174cm
활동
1942년 – 2014년
배우자
험프리 보가트(1945년–1957년, 사별)
제이슨 로바즈(1961년–1969년, 이혼)
자녀
아들 스티븐 험프리 보가트(1949년생)
딸 레슬리 험프리 보가트(1952년생)
아들 샘 로바즈(1961년생)
종교
유대교무종교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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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위상
3. 생애 및 활동
3.1. 영화 데뷔 전
3.2. 화려한 데뷔
3.3. 이후
4. 사생활
5. 여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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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배우.


2. 위상[편집]


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배우 20위에 올랐다. <빅 슬립#1946년> 등 하워드 혹스험프리 보가트와 함께 한 대표작들은 커리어 초반에 집중돼있으나 스타 아우라와 개인사 일화가 강렬해 배우로서의 생명력이 길었다. 성녀와 악녀의 이분법을 벗어나 할리우드 영화사에 그전까지는 없었던, 강인하고 똑똑하며 남성적이기까지 한 여성상을 제시한 것이 높게 평가 받는다. 골든 글로브를 한 번 탔다. 아카데미상에미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지만 수상엔 실패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치켜뜨는" "수평으로 길게 찢어진 눈", "어딘가 화난듯하면서도 섹시한" "중저음의 탁성"이 대중에게 가장 크게 박혀있는 이미지 특징이다.


3. 생애 및 활동[편집]



3.1. 영화 데뷔 전[편집]


1924년 9월 16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부모님 둘 다 유대인이다. 본명은 '베티 조운 퍼스키(Betty Joan Perske)'로, 5살 때 아버지 윌리엄 퍼스키[1]가 어머니와 버콜을 버리는 형태로 이혼하면서 루마니아 출신인 어머니 내털리[2]의 결혼 전 성인 와인스틴-버콜(Weinstein-Bacal)에서 뒤의 반만 택하고 L을 하나 더 붙여 버콜(Bacall)로 성을 바꿨다. 버콜은 아버지를 "그 개자식"이라고 부른다.

버콜은 그 시대에 아버지 없이 자라는 바람에[3] 늘 자기 확신이 부족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대계라는 점도 버콜을 불안하게 만들었는데, 유대인 차별이 심하던 시기라 어머니와 플로리다 호텔에서 문전박대 당한 경험도 있다고 한다.

부모님 이혼 후 아버지는 더 이상 보지 못했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굉장히 사이 좋은 모녀지간이었다고 한다. 외삼촌 잭(Jack)과 찰리(Charlie)가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줬다.

원랜 프레드 어스테어와 춤을 춰보는 게 소원이었을 정도로 무용에 뜻을 뒀지만 재능이 없었다. 버콜 본인의 표현으로는 "흐느적거렸다"고 한다. 그 다음엔 연극에 빠졌다. 1941년부터 뉴욕에 있는 미국 극예술 아카데미[4]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커크 더글러스가 동급생이었다. 둘은 이때 데이트를 몇 번 했는데 연애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커크 더글러스는 해군 생활을 할 때 버콜에게 여러 번 편지하기도 했다.

수업을 받는 동안 극장 안내원, 모델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업료를 지불할 돈이 없어 아카데미는 도중 그만 둬야했다. 당시엔 장학금은 오직 남자들만 받을 수 있었다.

1942년 17살 때부터 브로드웨이에서 본격적으로 연기활동을 시작했으며, "Johnny 2 X 4"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 시절 버콜은 어머니와 그리니치 빌리지에 살고 있었는데, 같은 해 그리니치 빌리지 미인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0대 시절 모델 일을 하던 도중 미국-프랑스 편집자 다이애너 브릴런드[5]의 눈에 띄면서 하퍼스 바자에 3개월 연속 화보가 실리게 됐다. 그리고 18살 때 하퍼스 바자의 1943년 3월호 커버에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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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스 바자 커버

사진 배경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전쟁 지원을 위한 헌혈을 호소하려는 목적에서 찍은 화보로, 잡지 내 화보로 들어갔던 것을 커버로 재수록한 것이었다. 이 하퍼스 바자 커버 한 장으로 버콜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버콜의 데뷔작인 <소유와 무소유>의 감독 하워드 혹스의 부인이었던 슬림 혹스[6]가 이 표지를 보고 버콜의 스크린 테스트를 남편에게 제안했던 것.


3.2. 화려한 데뷔[편집]


혹스는 아무 경험이 없는 생신인을 자신의 이상적 여성상으로 가꿔내고 싶다는 꿈을 오래 간직하고 있었다. 혹스의 이상형은 굴복하거나 무력하지 않고 남성적이며 냉담한 여성 캐릭터였다. 희곡 "The Front Page"의 남자주인공을 여자로 바꿔 만든 <연인 프라이데이(His Girl Friday)>는 혹스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예였다. 그리고 강렬한 눈썹을 지녔으며, 고르지 않은 치아를 자랑스럽게 여길 정도로 겁먹지 않는 태도의 버콜은 혹스의 이상형에 딱 들어맞았다.

베티라는 이름을 로런으로 바꾼 건 혹스의 아이디어였다.

버콜이 평생 찍은 프로필 중 최고라고 말한 아래 사진도 혹스가 마련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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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스는 버콜에게 깊은 저음의 목소리를 만들 것을 주문했고, 버콜은 멀홀랜드 드라이브 한 구석에서 소설 "성의"를 큰 소리로 낭독하며 이를 실천했다.

그렇게 데뷔하게 된 <소유와 무소유>에서 버콜은 영화사에 길이 남게 되는 소위 '휘파람 장면'을 만들어낸다.

당신은 나에 대해 뭘 할 필요가 없어요, 스티브. 당신은 그 어떤 말도, 그 무엇도 안 해도 괜찮아요. 전혀. 아, 휘파람 정도면 어때요. 휘파람 부는 법은 알죠, 스티브? 그냥 입술을 모으고 숨을 내쉬면 돼요.

You know you don't have to act with me, Steve, you don't have to say anything, and you don't have to do anything. Not a thing. Oh, maybe just whistle. You know how to whistle, don't you, Steve? You just put your lips together and blow.

-<소유와 무소유>


버콜이 직접 부른 Am I Blue?도 유명하다.

<Am I Blue?>

어니스트 헤밍웨이 원작에 윌리엄 포크너가 대본을 맡은 <소유와 무소유(To Have and Have Not)>(1944)는 1940년 서인도 제도 남동부의 프랑스령 섬 마르티니크의 주도 포르드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 프랑스 제3공화국이 무너진 뒤 들어선 비시 프랑스의 폭정으로 사람들은 자유 프랑스를 응원하게 된 상태다. 보가트가 맡은 스티브(Harry 'Steve' Morgan)는 레지스탕스 부부를 이 섬으로 몰래 데려오는 일을 처음에 의뢰 받았을 땐 단칼에 거절하다가 오로지 돈 때문에 할 수 없이 맡는다. 다시 악마섬에 갇힌 레지스탕스를 빼내는 일은 부탁 받았을 땐 역시 또 거절하고 만다. 그리고 버콜이 연기한 슬림(Marie 'Slim' Browning)과의 성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경찰, 군대의 부조리한 억압을 겪으며 스티브의 선택이 바뀌어가는 과정을 영화는 세련되게 그려낸다.

원래 대본에서는 보가트가 연기하는 스티브가 레지스탕스 부부의 아내 쪽과 불륜을 저지르는 걸로 설정이 돼있었지만, 혹스는 촬영 도중 버콜과 보가트 사이에 불꽃이 튀는 걸 감지하고 대본을 수정했다. 이땐 아직 버콜과 유부남이었던 보가트와 사랑에 빠지기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소유와 무소유>의 평에서 19살의 버콜은 "그레타 가르보, 마를레네 디트리히, 캐서린 헵번을 다 합친 뒤 메이 웨스트를 살짝 섞은 것 같다"는 극찬을 들었다. 역시 혹스가 찍은 <빅 슬립>(1946)에서도 버콜은 찬사를 받았다.

이 당시 버콜과 보가트 조합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워너 브라더스에서 단편 패러디 만화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1944년 아직 유부남이었던 보가트와 몰래 클럽에 간 적이 있는데, 우연히 마주친 극작가 모스 하트가 버콜에게 "(지금이 정점이고) 넌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7]

이 악담은 곧 현실이 되었다.


3.3. 이후[편집]


버콜과 보가트의 사이를 질투한 하워드 혹스는 <소유와 무소유> 촬영 도중 B급 영화 전문인 모노그램 픽처스[8] 스튜디오에 버콜을 팔아버리겠다고 협박을 해댔다. 이걸 알고 보가트가 화를 내며 몇 주 촬영 파업을 하기도 했다. 결국 1945년 버콜이 보가트와 결혼하자 혹스는 워너 브라더스에 버콜의 계약서를 팔아버렸다. 가격이 100만 달러였다는 얘기가 있다.

이후 버콜은 또 보가트와 <The Dark Passage>(1947), <키 라고(Key Largo)>(1948)를 찍어 성공 시켰지만 데뷔 때와 같은 위력은 다시는 발휘하지 못했다. 보가트와 결혼한 순간부터 버콜은 그저 보가트의 아내가 되었다. 훗날 버콜은 보가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경력상으론 더 성공했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보가트와의 결혼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덧붙이면서.

존 휴스턴이 연출하고 에드워드 G. 로빈슨, 라이어널 배리모어가 나온 누아르 <키 라고>는 버콜과 보가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협력작이다. 육군 참전 용사가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우다 몬테카시노 근방에서 사망한 부하의 아내와 아버지가 운영하는 플로리다주 키스 제도(Keys)의 호텔 키 라고로 찾아가면서 세미놀족[9]쿠바가 얽힌 뜻밖의 사건에 엮인다.

버콜은 워너에서 안겨주는 배역을 대부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워너는 제시 받은 배역들에 대해 자주 항의하던 버콜에게 벌을 주기 위해 버콜을 데리고 있는 동안 무려 12번이나 활동 정지를 시켰다. 버콜이 워너 밑에서 찍은 마지막 작품 <Bright Leaf>(1950)에는 게리 쿠퍼퍼트리셔 닐이 나왔는데, 버콜은 이 영화를 그야말로 꾸역꾸역 찍었다.

1951년작 <Storm Warning> 출연을 거부해 워너 브라더스에서 괘씸죄로 찍혀 워너와의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한동안 영화를 찍지 못했다. 버콜의 배역은 진저 라저스가 대신 했다. 1953년작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으로 스크린에 3년만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버콜보다는 같이 출연한 매럴린 먼로의 작품이었다.

<바람에 쓴 편지>(1956)도 버콜보다는 록 허드슨의 작품이었으나 버콜의 필모에 좋은 한 줄을 남겼다. 흥행에 대성공 했을뿐만 아니라 감독 더글러스 서크가 경력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던 작품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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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찍은 <바람에 쓴 편지>(1956)의 장면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록 허드슨과 버콜. 1957년.

1959년 유명 제작자 릴런드 헤이워드가 만든 연극 "Goodbye, Charlie"로 브로드웨이에서 첫 주연 데뷔를 치렀다. 시드니 채플린이 상대역이었다. 작가 조지 액설러드(George Axelrod)가 직접 연출했는데 공연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09회차까지만 찍고 커튼을 내렸다. 이 작품은 1964년 빈신트 머넬리 연출, 데비 레널즈, 토니 커티스 주연의 동명 영화로 만들어졌다. 찰리(Charlie)라는 매력적인 남성이 망나니처럼 살다가 천벌을 받아 여자가 되어간다[10] 내용이었다.

그러나 1965년에 올라간 뮤지컬 "Cactus Flower"는 2년 내내 매진 사례였다. 버콜은 10대 시절 이 뮤지컬의 공연장인 로열 시어터[11]에서 극장안내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1970년엔 영화 <이브의 모든 것>을 뮤지컬화한 "Applause"에서 베티 데이비스의 배역을 연기했다. 브로드웨이 공연이 잘 돼 투어(1971-72), 런던 공연(72-73), TV판(73) 제작까지 이어졌다.

1996년 <로즈 앤 그레고리(The Mirror Has Two Faces)>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어머니 역으로 나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지만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쥘리에트 비노슈에게 놓치고 말았다.

2003년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에 카메오로 나왔다. 후속작인 <만덜레이>에서도 한 장면에 등장했다.

2004년 <탄생(Birth)>에서 주연 니콜 키드먼의 어머니 역으로 나왔다. 키드먼은 10살 짜리 소년이 죽은 남편의 환생이라고 생각하는데, 버콜의 역은 이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접근한다. 버콜은 이 영화의 감독 조너선 글레이저를 높이 평가했다.


4. 사생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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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프리 보가트와의 결혼식

1945년 3월 1일 버콜은 무려 25세나 많은 아버지뻘의 배우 험프리 보가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버콜의 첫사랑이자 첫남자다. 버콜은 연상의 남자들 쪽이 더 흥미롭고 재밌게 느껴져 평생 연상의 남성에게만 끌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보가트는 버콜이 집에서 먼 장소에서 촬영하는 걸 격렬하게 반대해 버콜의 경력에 차질을 주기도 했다.

<키 라고> 이후 8년 만에 소설 Goodwin, USA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 공동 출연할 계획이 있었으나 바로 보가트의 식도암이 발견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그로부터 일 년도 채 못 돼 보가트가 사망했다.

보가트가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버콜은 9살 연상의 프랭크 시나트러와 교제를 시작했다. 그런데 시나트러가 버콜에게 청혼을 한 직후 둘의 사이는 끝나고 만다. 이유는 둘의 약혼 사실이 언론에 새어나갔기 때문이었다. 버콜이 친구였던 유명 에이전트 스위프티 러자[12]에게 시나트러에게서 청혼 받았다는 사실을 알렸는데 러자가 연예계 기자에게 이를 털어놓았던 것이다.

기사가 난 뒤 시나트러는 바로 연락두절 상태가 되었다. 깊은 수치심을 느끼며 절망한 버콜은 도저히 할리우드에서 버틸 수가 없어 캘리포니아의 집을 팔아 뉴욕으로 이사해 한동안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일했다. 몇 년이 지나서야 시나트러는 버콜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시인하고 버콜에게 사과했다.

브로드웨이에서 버콜은 2살 연상의 배우 제이슨 로바즈를 만났다. 1961년 7월 16일 오스트리아 에서 결혼식을 올리려 했으나, 오스트리아 당국에서 혼인 허가증을 교부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결혼이 미뤄졌다. 네바다주에서도 혼인을 거부당하자, 1961년 7월 4일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멕시코 엔시나다까지 차를 몰고 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이렇게 고생해서 올린 결혼도 1969년 끝이 났다. 당시 아들 샘은 8살이었다. 버콜의 자서전에 따르면 로바즈의 알코올 의존증이 이혼의 원인이 됐다고 한다.


5. 여담[편집]


  •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사진이 찍힌 적이 있다. 이후 트루먼의 지인이 "자네 부인이 사진에 대해 뭐라 말 안하던가?"라고 물어보자 트루먼은 "아내가 '당신 피아노를 치는 거예요? 아니면 그 여자랑 노는 거예요?'라고 묻던데?"라고 말했다. '피아노를 치다'와 '놀다' 모두 영어로는 'to play'임을 이용한 트루먼의 말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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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인 표현에 의하면 "밋밋한 가슴에 발이 큰 꺽다리"였는데, 이처럼 기존 여배우들에 비해 굴곡이 없는 몸으로도 관능미의 표출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것 역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관능미는 타고난 몸의 형태 문제가 아니라 표현 주체의 됨됨이에 달려있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 연기면에서 업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걸 뼈 아프게 생각했다.



  • 사석에선 원래 이름인 베티(Betty)로 불렸다.

  • 유대계는 못생겼다는 편견이 팽배하던 시절이라[13] 데뷔했을 때 버콜이 유대계라는 사실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한다.

  • 회녹색의 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녹색 아이섀도를 썼다. 실제로 보면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더 착 가라앉은 느낌의 짙은 회색으로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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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화로 인한 외모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여든이 넘어서도 사진기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 태도가 멋지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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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다로운 성격이라는 게 지배적인 평판이었다. 호의적으로 써진 기사에서도 언급할 정도다. 1981년 캐서린 헵번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의 영화를 뮤지컬화한 "Woman Of The Year"에 출연할 때 제작자들이 버콜의 생일잔치를 열면서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시급까지 지불하면서 참석을 강제해야했다는 얘기가 있다.

  • <탄생>(2004) 기자회견에서 "같은 전설적인 배우인 니콜 키드먼과 함께 일한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키드먼은 전설이 아니죠. (아직 영화) 초보잖아요. 전설이라고 할 수는 없죠. 전설이 되려면 나이를 (더) 먹어야해요"라고 답해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버콜은 나중에 이에 대해 "키드먼은 재능이 뛰어난 배우지만 시작하는 단계의 초심자인데" "그런 딱지를 붙여버리면 부담이 돼서" 어떻게 일하겠냐고 말했다. 그리고 "전설이라는 건 전부 과거랑 관련이 있는 거지 현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고 덧붙였다.

  • 80년대에 금연을 시작했다.

  • 화장기 없는 얼굴로 유명한데, 실은 화장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다만 "난 특이하게 생겨서 화장을 안 한 것 같은 화장을 했을 때가 제일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화장을 추구했다.

  • 자서전이 개정판까지 나왔을 정도로 잘 돼서 첫 출간 당시 내셔널 북 어워드에서 수상했다. 여기서 프랭크 시나트러를 비판했다. 버콜에 따르면 품행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 막 할리우드에서 데뷔했을 때 우상이었던 로버트 먼거머리를 파티에서 만난 적이 있다. 몬거머리가 차까지 데려다주고 번호를 달라고 했을 때 버콜은 기쁜 마음으로 줬는데, 몬거머리는 "쉬운 (여자)네."라고 비웃은 뒤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 말년에 소피(Sophie)라는 이름의 빠삐용을 키웠다.

  • 외모상으로 캐서린 헵번과 꽤나 유사하다. 실제로 배우 이미지도 비슷했고, 헵번 역시 하워드 혹스랑 작업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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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illiam Perske.[2] Natalie.[3] 아버지가 없으면 어머니가 계셔도 고아로 간주되던 시절이다.[4] American Academy of Dramatic Arts.[5] Diana Vreeland.[6] Nancy "Slim" Hawks.[7] 그럼에도 나중에 버콜 부부와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8] Monogram Pictures.[9] Seminole.[10] 찰리는 여자 남자 모두에게 쓰이는 이름이다.[11] Royale Theatre.[12] Irving "Swifty" Lazar. 무수한 할리우드 황금기 배우들이 고객이었다.[13] 큰 코 등. 지금도 어느 정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