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런스 올리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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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영국의 배우, 영화 감독, 제작자.
셰익스피어 작품 연기의 대가라고 일컬어지는 배우로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AFI에서 선정한 역사상 위대한 남배우 14위인데, 외국인으로서는 10위인 찰리 채플린 다음으로 높은 순위에 올랐다. 동 시대의 유명 여배우였던 비비안 리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에선 성을 올리비에로 오해해 완전히 굳어져버린 것 같은데 얼리비에이다.
2. 생애 및 활동[편집]
1922년 스트랫퍼드 극장에서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페트루키오 역으로 첫 무대를 밟았다.
1926년에서 1928년까지는 버밍엄 극단에서 일했으며, 1935년 마침내 존 길구드와 함께 올드 빅에 참여, 극단의 중심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신인 때는 연기를 못해서 고생했다. <크리스티나 여왕>(1933)을 찍을 땐 연기를 너무 못해서 상대역이며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그레타 가르보가 참다 못해 촬영 도중에 그냥 해고해버렸다. <폭풍의 언덕>(1939)에서 히스클리프 역을 맡았을 때도 과장된 연기톤이 계속 문제가 되는 와중에 감독 윌리엄 와일러나 동료 배우들에 대한 태도도 좋지 않아서 잘릴 뻔 하다가 겨우 살아남았다.
고전극은 물론 현대극·영화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기생활을 이어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 해군 항공대에 종군하였다.
1967년 전 아내 비비안 리가 사망할 당시 전립선암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에 사경을 헤매는 대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성공해서 건강을 되찾긴 했으나 수술비용 때문에 경제적으로 치명타를 입어 하루하루 먹고 살아야 할 걱정을 해야만 하는 지경에까지 몰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 인천>이라는 망작에 출연 제의에 응해야 했고, 주연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역을 맡았다. 덕분에 필모그래피에 흠집이 났지만, 대신 문선명은 말 그대로 돈을 들이 부어댔고, 그의 출연료도 어마어마하게 지급해 올리비에는 죽을 때까지 이 영화 하나로 경제적 위기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2.1. 셰익스피어 배우[편집]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올리비에가 거치지 않은 작품이 없을 정도로 셰익스피어 연극을 위해 태어난 배우 같았다고 한다.
전후에 파괴된 올드 빅의 책임자로서 영국 연극 부흥에 전력을 기울였는데 1947년 랠프 리처드슨과 함께 한 "헨리 4세"와 "오이디푸스" 공연은 특히 올리비에의 명성을 굳건하게 해주었다. 그 공로로 그 해 연예계 종사 인물로는 최초로 기사작위에 서임되었다. 그가 제작·주연·감독한 셰익스피어의 '햄릿', '헨리 5세', '리차드 3세', '오셀로' 등이 유명하다.
'리차드 3세' 오프닝 독백. 여담으로 슈렉의 악당인 파콰드 영주가 올리비에의 리차드 3세를 모티브로 삼았다.
3. 사망[편집]
1989년 7월 11일 신부전으로 웨스트 서섹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82세.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4. 사생활[편집]
- 첫 아내였던 질 에스먼드(Jill Esmond)는 양성애자 의혹이 있다.
- 비비안 리와의 사랑은 할리우드에서 영화 모티브가 됐을 정도로 유명하다. 둘은 각자 가정이 있었지만 함께 영화 <영광의 결전(Fire Over England)>(1937)을 찍으며 사랑에 빠졌다. 리는 연극계에서 찬사를 받던 신인이었고, 올리비에는 이미 연극계의 스타였다. 올리비에는 당시에도 불륜이 잘못됐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비비안의 매력에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남자에게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직후 결혼했으며 같이 나온 연극도 많다. 약 12여 편 정도.
- 리와 불륜을 저지르기 전에도 에스먼드와의 결혼 생활 중에 여러 여성들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다만 이전의 불륜들은 단순히 "욕망"에만 기초했다면 리와는 "사랑"에 빠졌다는 점이 달랐다고 한다.
- 리의 양극성장애 때문에 무척 고생하다가 1960년 이혼했다. 이후로도 친구같이 지냈다.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올리비에는 사망하기 몇 주 전 눈이 촉촉해진 상태로 그녀의 영화를 돌려 보고 있었다고 한다.
- 1950년대에는 클레어 블룸(Claire Bloom)과 불륜 관계였다.
- 1960년 리와 이혼한 뒤 리와 결혼생활을 할 때부터 사귀고 있던 조운 플로라이트와 1961년 재혼했다. 22살 연하였다.
- 양성애자였다는 루머가 후대에 많이 돌고 있다. 리와 결혼한 상태에서 남성과 만났다가 리에게 들켰다는 증언이 여러 전기에 등장한다. 리의 정신 상태에 더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랜치 드부아를 연기한 이후로 급속도로 조울증이 악화되었는데, 극중 블랜치는 결혼한지 얼마 안된 남편이 사실 게이였고 블랜치의 눈앞에서 자살하는 일을 겪은 과거가 있다.
그래도 여러 행적을 보았을 때 올리비에가 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건 사실인듯 하다.
그래도 여러 행적을 보았을 때 올리비에가 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건 사실인듯 하다.
5. 서훈[편집]
- 1947년 Knight Bachelor(기사작위) 서임
- 1970년 남작 작위(Baron Olivier of of Brighton) 서임
- 1981년 오더 오브 메리트(Order of Merit, OM)
6. 작품 목록[편집]
6.1. 출연[편집]
- 영광의 결전 (Fire Over England, 1937)
- 사라진 비행사들 (Q Planes, 1939)
- 폭풍의 언덕 (1939)
-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1940)
- 레베카 (1940)
- 21일 (21 Days, 1940)
- 북위 49도선 (49th Parallel, 1941)
- 해밀턴 부인 (That Hamilton Woman, 1941)
- 데미 파라다이스 (The Demi-Paradise, 1943)
- 헨리 5세 (Henry V, 1944)
- 햄릿 (Hamlet, 1948)
- 매직박스 (The Magic Box, 1951)
- 캐리 (Carrie, 1952)
- 왕자와 쇼걸 (The Prince and the Showgirl, 1957)
-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1960)
- 버니 레이크의 실종 (Bunny Lake Is Missing, 1965)
- 카르툼 공방전 (Khartoum, 1966) - 마디 역
- 어부의 신발 (The Shoes of Fisherman, 1968)
- 데이빗 코퍼필드 (David Copperfield, 1969)
- 공군 대전략(Battle Of Britain, 1969)
-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Nicholas and Alexandra, 1971)
- 발자국 (Sleuth, 1972)
- 폐허에서 꽃피는 사랑 (Love Among the Ruins, 1975)
- 마라톤 맨 (Marathon Man, 1976)
- 머나먼 다리 (A Bridge Too Far, 1977)
- 나자렛 예수 (Jesus of Nazareth, 1977)
-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The Boys from Brazil, 1978)
- 자동차 왕 로렌 (The Betsy, 1978)
- 드라큘라 (Dracula, 1979)
- 리틀 로맨스 (A Little Romance, 1979)
-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 1980)
- 오! 인천 (Inchon, 1981)
- 타이탄의 멸망 (Clash of the Titans, 1981)
- 두 얼굴의 스파이 (The Jigsaw Man, 1983)
- 바운티호의 반란 (The Bounty, 1984)
- 황혼의 연정 (A Talent for Murder, 1984)
- 전쟁 레퀴엠 (War Requiem, 1989)
6.2. 연출[편집]
- 헨리 5세 (Henry V, 1944)
- 햄릿 (Hamlet, 1948)
- 리차드 3세 (Richard III, 1955)
- 왕자와 쇼걸 (The Prince and the Showgirl, 1957)
- 세 자매 (Three Sisters, 1970)
6.3. 제작 참여[편집]
6.4. 각본 담당[편집]
7. 여담[편집]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를 찍게 된 당시 아내 비비안 리의 정신건강을 돌보기 위해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윌리엄 와일러 연출의 <캐리>(1952)를 찍었다. 그러나 올리비에는 여주인공인 제니퍼 존스를 싫어했고, 한살배기 아들을 잃은지 얼마 안 된 윌리엄 와일러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올리비에는 다리까지 다쳤고, 영화는 흥행에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혹평을 받아 올리비에에게 최악의 영화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올리비에 본인은 BAFTA 후보에 올랐다.
- 제1회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남우조연상 수상자다.
- 영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전설이기에 그의 이름을 딴 '로런스 올리비에' 상은 영국 연극계의 최고상이다.
- 많은 동료 배우들이 능력을 흠모하고 존경했다. 그중 하나가 그레고리 펙. 사실 올리비에의 가장 열렬한 팬은 아내 비비안 리였다. 그녀는 남편의 연기를 언제나 극찬하고 자신이 함께 살며 연기를 배울 수 있는 게 행운이라고도 말했다.
- 2019학년도 EBS 수능특강 교재에 등장하였다.
[1] Order of Me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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