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 갤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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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
MC: How does it feel to be the greatest guitarist in the world?
Jimi Hendrix: I don’t know, go ask Rory Gallagher.
로리 갤러거는 아일랜드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블루스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정통 블루스에 기반을 둔 하드 록 및 블루스 록 연주자였으며 머디 워터스 사단의 시카고 블루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비틀즈와 더 후가 맹활약을 떨치던 브리티쉬 인베이젼 시대인 1960년대에 활동을 시작하였고,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일시적으로 테이스트라는 밴드에 있었으나 그 이후의 기간동안은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 그 유명한 롤링 스톤스에서 세션 기타리스트로 섭외될뻔했지만, 스스로 독창성을 지키고 싶다는 이유로 무소속으로 활동한, 다소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Shadow Play, What In The World 등 평론가들에게서 극찬을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해 약 3천만장 가량의 앨범을 팔았다.
그러나 1995년, 과음으로 인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그는 대수술을 거쳤음에도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해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2. 일생[편집]
버디 홀리, 에디 코크런, 제리 리 루이스, 지미 리드[3] 등으로 뮤지션의 꿈을 키웠으며 9살 때 처음으로 기타를 배웠고 15살 때엔 스쿨밴드의 리더가 되었다.
1960년대 초 ‘폰타나 쇼 밴드’라는 이름으로 당시 인기를 끌던 스키풀 장르의 밴드를 조직하며 순회공연을 다녔고, 1965년엔 그룹명을 ‘임팩트’로 바꾸었다. 그후 독일 함부르크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활동을 했으며, 아일랜드에선 3인조 밴드 ‘테이스트’를 이끌며 곡을 연주했으며 1969년에 런던으로 진출, 기타연주 중심의 앨범들을 발표하였다 이 당시 앨범에는 프로그레시브, 재즈풍의 실험적인 장르를 담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리하여 그룹 테이스트는 블루스나 컨트리 취향의 곡들을 하드록풍으로 연주해 서서히 지명도를 넓혀 갔고 1970년 전설의 와이트 섬 페스티벌의 첫 오프닝 무대에 서는 영광을 얻게된다.
그 후 테이스트가 해산되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몇몇 소규모 밴드들에서 연주활동을 계속했다. 1972년엔 당대의 미국 블루스를 꽉 휘어잡고 있던 아티스트 머디 워터스의 런던 세션 앨범에 참여했고, 1977년에는 영국 스키풀 계의 거물 로니 도네가오의 재기작 ‘Putting On The Style’에 참여하였다.
특히 블루스와 로큰롤 분야에 관심이 있는 기타리스트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라인전개를 펼쳤다. 특히 그중에서도 'Daughter Of The Everglades', 'Livin’ Like A Trucker', 'For The Last Time', 'Hands Up', 'There’s A Light', 'Take It Easy Baby' 와 같은 연주곡들(특히 유튜브에 남겨진 라이브 공연)로 그의 진가를 알 수 있다. 또한 블루스 거장 제리 리 루이스와 생전에 녹음한 롤링스톤즈의 명곡 (I Can’t get no)Satisfaction 또한 명연으로 손꼽힌다.
로리 갤러거는 너무 낡아 색칠이 거의 모두 벗겨져 버린 Fender 스트라토캐스터기타를 사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그는 블루스와 로큰롤에 평생을 걸어왔고 기타를 통해 삶을 관조하며 즐기는 매우 낙천적인 음악 세계를 보여주었다.
철저하게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기를 싫어했던 그의 성격은 TV 쇼조차도 거부하고 오로지 앨범과 라이브 공연을 통해서만 음악을 계속했던 그의 활동에서 드러난다. 그가 이끈 테이스트는 8장의 앨범을 내놓고 해체했지만 로리 갤러거 본인은 솔로 활동을 통해 유행의 변화에 쫓지 않고 록에 바탕을 둔 블루스 연주자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지켜나갔다. 실제 롤링스톤즈와 같은 거물급 밴드에서 오는 러브콜들을 정중히 거절하는 자세에서 볼 수 있었으며, 자신이 심각한 병에 걸린 것을 알면서도 1994년 말까지 라이브를 계속함으로써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애착을 알 수 있다. 1995년 1월 당시에는 공연을 앞두고 극심한 복통으로 쓰러져 병원에 후송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병세가 나빠졌다.
그는 과음을 자주 하였는데, 그럴수록 간의 기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평소에 비행공포증이 있던 그는 그걸 이겨내기 위해 안정제를 자주 투여하였고 간에 안 좋은 약과 더불어 음주습관이 몸을 망치게 되었다. 간이식 수술을 받아도 돌이킬수 없는 지경(간 이식 후, MRSA에 감염됨.)에 빠진 그는 결국 영국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47세
아일랜드 코크, 세인트 올리버 공동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
타계 후 아일랜드 발리쉐논에 세워진 그의 동상
로리 갤러거의 이름을 딴 거리, 그의 흔적을 엿볼수 있다.
3. 평가[편집]
'How do you get your sound Mr. Gallagher?' and he sits and tells us. So I owe Rory Gallagher my sound."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내나요, 갤러거 씨?"하고 물었더니 앉아서 얘기를 해 주더군요. 제 기타 사운드의 근간은 로리 갤러거에게 있습니다. 전 그에게 정말 큰 빚을 졌죠[4]
[5]
The Man who got me Back into the blues
나를 블루스로 다시 되돌아가게 해 준 장본인
- 에릭 클랩튼
Rory was probably the most natural player I’ve ever seen.
In all the gigs we did together I don’t think I ever heard him play the same thing twice... He was the ultimate performer.
로리는 정말 천부적인 기타리스트입니다, 같은 곡이라도 항상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였고요…
그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뮤지션입니다.
- 리치 블랙모어
I’m a big admirer of Rory Gallagher, When I was in my 20s, he was someone I discovered and was very much a fan of. He left a great mark.”
저는 로리갤러거의 열렬한 팬입니다. 20대 시절을 보내며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그는 아일랜드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 토미 엠마뉴엘
밴 모리슨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아일랜드의 대중음악의 상징이자 아일랜드인 최초의 펜더스트라토 캐스터 사용자이기도 하며 그 명성은 아일랜드 전역을 넘어서 유럽을 강타한 브리티쉬 뮤지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다 롤링스톤 선정 기타리스트 순위 57위라는 점에서 순위권에 있는 지미 페이지, 리치 블랙모어같은 저명한 기타리스트에 비해 저평가 받는다고 생각할수있으나 위에 언급된 레전드들에 비해 과소평가되면 과소평가 되었지 절대로 꿇리지 않는 뮤지션, 오히려 유튜브가 활성화 되고나서 젊은 기타키드들에게 흙속에서 건진 보석과도 같은 걸출한 인물로 추앙 받고있다.
그는 자신만의 개성이나 독자적인 주법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는 기타리스트이다. 속주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특히 다운피킹, 피킹 하모닉스 기교, 그의 전매특허라 할수있는 블루스와 아이리쉬 민요를 녹인 진행 등 영국스타일과 확연히 차이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기타 좀 오래 쳐봤다는 사람들도 잘 모를정도로 한국에서의 지미 헨드릭스보다 훨씬 명성과 업적에 비해 매우 처참한 인지도를 가졌다.
특히 록이 비주류 장르인 한국에서는 더욱 더 찬밥대우를 받는 상황, 그러나 블루스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연구하고 넘어가야할 뮤지션이며 미국에서 유럽으로 넘어온 블루스 신드롬 역사를 논하는데 이 사람을 뺄 수 없다.
그 명성은 70년대는 물론이고 80년대를 뒤흔든 주다스 프리스트에 소속된 기타리스트 케이케이 다우닝과 글렌 팁튼의 기타 스승으로도 이름을 날린것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딥 퍼플과 롤링스톤즈[6] 의 차세대 기타리스트 후보로 추천 받았고 영국의 레전드 데프 레파드의 기타리스트 비비안 캠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국민밴드 U2의 디 에지또한 자신의 10대시절 그의 공연을 보는게 낙이었다고 인터뷰 하였다.
특히 디 에지는 특히 자국 아일랜드에서 해마다 열리는 Rory Gallagher Festival의 제1회 수상자로써 기쁨의 소감을 드러냈다.[7] 한국과 일본에서 끗발있는 인지도를 지닌 게리 무어조차도 자신의 최고 롤 모델은 로리 갤러거라고 숱하게 드러내며 많은 뮤지션들에게 절대적인 존경들 받고있는 뮤지션이다.[8] 실제 게리무어는 로리갤러거와 친분이 있고 기타줄을 서로 교환하기도 하며 꽤나 가까이 지낸것으로 보인다.
통상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 기타리스트를 뽑는다면 단연 로리 갤러거를 말한다. 그러나 종종 오아시스의 리암 갤러거 혹은 노엘 갤러거와 헷갈려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보통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 기타리스트로 유명한 사람은 게리 무어[9] 이나, 본토에서는 게리 무어와는 비교조차 거부할정도로 추앙받는 기타리스트[10][11] 이다.
Rory Gallagher Festival이 그의 고향에서 매년 6월 2일에 열리고 그를 기리는것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의 Cork공항의 이름을 Cork Rory Gallagher Airport로 변경하자는 움직임도 있으니[12][13] 그의 인지도는 어마어마하다.
토미 엠마뉴엘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주법은 '하이브리드 피킹'으로 불리며 기타 피크를 쥐고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는 지두탄현을 사용하는게 다른 핑거스타일 기타리스트들과 차별화 된다. 당연히 서로 같은 주법을 사용하는점 뿐만 아니라 대략 십년이상 앞서 활동한 대선배이기 때문에 영향을 크게 받았을 확률이 높다.
도덕성에서도 귀감인데 표절시비, 스캔들, 마약사범건이 단 한건도 없다.당시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은 서로 LP판을 돌려듣고 라디오로 귀 카피하던 시대였고 몇몇 아날로그의 수혜를 톡톡히 본 표절 아티스트들은 유튜브가 활성된 지금 시대에 와서야 누가 누구것을 표절했는지 단번에 밝혀지게 되었다. 물론 당연히 표절하지 않은 뮤지션이 더 많지만 브리티쉬 인베이젼 초창기 뮤지션 출신으로 단 한곡조차 표절시비에 거론되지 않는 점은 지금도 존경받을 점이다. 리치 블랙모어의 어떤 아티스트의 어떤 곡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Plagiarism(표절)강의를 보면 더더욱 와닿는다.(이건 웬만한 유명한 블루스 리프는 죄다 표절이라 느낄 정도로 경악할만한 자료[14] )그리고 록 아티스트의 공식처럼 따라다니는 그루피나 성관련 스캔들이나 헤로인 코카인, 범죄경력 따위는 존재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음악에만 몰두한 아티스트이다.
그는 에릭 클랩튼과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이나, 팝적인 히트곡을 주로 제조한 에릭 클랩튼과는 달리 상업성, 대중성과 거리가 먼 블루스 곡들을 주로 작곡하였으며, 라이브공연과 폭발적인 무대매너로 기억하는 팬이 많다. 그의 음악은 빈티지 스트라토캐스터에서 우러나오는 강력한 크런치톤이 장점이며, 특유의 즉흥 애드리브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하모니카와 슬라이드 기타 테크닉에도 능수능란 하였으며, 밴조와같은 기타류 악기도 상당히 잘다룬다. 그의 절정에 다다른 연주는 Irish Tour '74 라이브쇼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15] 그리고 그의 실력에 비해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중 하나는 당시 아일랜드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한몫하였다. 통상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멸시하던 나라 아일랜드인을 터부시하던것도 있고 텃세도 심했으니.[16] 더군다나 그는 싱글로 음반을 발표하는걸 극도로 기피한점도 작용하였다.(누적 음반 판매량은 3,000만장 이상)
사진설명 : 1977년으로 추정되는 올해의 기타리스트 우승자 목록 일간지 '멜로디 메이커'이다. 70년대 기타리스트 순위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리고 1972년 올해의 기타리스트에 뽑힌 로리 갤러거의 이름이 올라간 모습. 그 당시 쟁쟁한 기타리스트들의 이름도 돋보인다.[17]
아래 영상은 펜더 스트라토 캐스터 로리갤러거 시그내쳐를 설명하는 버즈비의 홍보 영상이다. 전 신촌블루스 출신의 기타리스트 김병호씨의 자세한 설명과 로리 갤러거의 짤막한 이야기가 들어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시청해 볼것. [18]
슬래쉬, 브라이언 메이, 조 보나마사, 디 에지, 조니 마와 같은 기라성의 음악가들이 존경하는 기타리스트로 뽑는다. 아래 인터뷰 참조
브라이언 메이의 인터뷰
4. Discography[편집]
Rory Gallagher – 1971
Deuce – 1971
Live in Europe – 1972
Blueprint – 1973
Tattoo – 1973
Irish Tour '74 – 1974
Against the Grain – 1975 Rolling Stone review at the Wayback Machine (archived 1 October 2009)
Calling Card – 1976 Rolling Stone review at the Wayback Machine (archived 1 October 2009)
Photo-Finish – 1978
Top Priority – 1979
Stage Struck – 1980
Jinx – 1982
Defender – 1987
Fresh Evidence – 1990
특이하게 정규 앨범보다 라이브 앨범의 평가가 더 높다. Live in Europe과 Irish Tour 앨범은 라이브 앨범 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으로도 불린다. 로리 갤러거의 낮은 인지도 때문에 묻히곤 하지만, 평론가들의 평은 압도적으로 좋다.
5. 대표곡[편집]
6. 여담[편집]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엄청난 훈남이었다. 늙었을때는 약간 살이 찌긴 했지만 그 나이대 치고는 동안이었다.
술을 매우 잘 마셨다고 한다. 역시 아일랜드인.
여권을 말하길 '신이 만든 가장 불필요한 물건'이라고 했다. 아마도 투어를 좋아하는 그의 성격상 이미그레이션에서 기다리는게 꽤나 지루했던듯... 극도의 비행 공포증도 한몫 했을 것이다.
팬서비스가 엄청났다. 길 가는 중 싸인도 물론이고, 사람들이 손을 뻗자 관중석을 손으로 쓸어주고, 자기 기타를 잠깐이긴 하지만 보여주고 만져보게 해주는 등의 영상들이 있다.
이펙터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트레블 부스터를 애용했고 후기에는 플렌져, 옥타퍼즈 등 다양한 제품군들을 썼다. 앰프도 그렇고 뭐든지 가리지 않고 썼던 듯... [19] 다만 라이브에서 일명 손 와우[20] 나 손 아밍[21] 등 다양한 트릭들을 보여준다.
여자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루피들 뿐 만 아니라 실제 여자친구와도 흐지부지 했다고 한다.[22] 지인으론 동생이랑 무지 가까웠다고 한다. 실제 성격은 수줍음이 무지 많았다고 한다. 전기의 표현을 빌리면 극도의 수줍음이었다.
주변인들의 가장 그럴듯한 평은 그는 이미 블루스에 목숨과 모든걸 바쳤기에 그 무엇도 그의 인생에 간섭할수없었다고 한다.낡은 스트라토캐스터와 청바지를 입고 고독한 스파이처럼(실제 007시리즈와 추리소설 작가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을 즐긴걸로 추정)무대위에 올라 연주하는것이 삶의 낙이었다.
그리고 땀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산성이었다고 한다.
멕시코 음식을 좋아한다고 한다.
색소폰도 연주할줄 알았다
롤링스톤즈에서 세션 기타리스트 영입제의도 받은적이있다.[23]
(아래 그의 동생 Donal Gallagher의 증언)
7. 사용한 악기, 이펙터[편집]
그의 Stratocaster(스트랫) 기타에는 비화가 있는데, 어느 날 공원에서 도둑맞고 일주일이 지난 뒤 다시 그 자리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바디 상태는 하드 렐릭이 되어 있었다고한다. 이 스트라토캐스터는 생전에 그가 애용하였으며 픽업년도는 1961년으로 알려져있다. Fender사의 61년산 스트라토캐스터 제품은 양산형으로 생산된게 아니라 그 값어치가 최소 2천만원 이상으로 판명되며 세상에 하나뿐인 로리갤러거의 것은 이름값을 고려하면 억은 거뜬히 뛸거라 예상된다. 이 기타는 현재 아일랜드 코크 시에 위치한 로리갤러거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그는 이 스트랫을 제외한 나머지 기타도 많이사용하였다.[24]
동생 Donal Gallagher가 다른 뮤지션들도 사용할수있게 종종 빌려준다. 위 영상은 고인의 Stratocaster로 연주하는 조 보나마사
조니 마의 시연
주로 사용한 어쿠스틱 기타는 Martin D-35 모델이며, 그의 이름을 딴 시그내쳐 모델도 판매가 되었었다.
펜더 사에서 그의 이름을 딴 스트랫 모델을 출시중이다. 가격은 500만원~600만원 선, 원래 이 모델은 몇십대만 한정으로 제작하려 하였으나, 폭발적인 주문과 수요로 인해 펜더 커스텀측에서 아예 제품라인으로 돌려 생산중이다. [25]
General
Model Name: Rory Gallagher Signature Stratocaster® Relic®, Rosewood Fingerboard, 3-Color Sunburst
Model Number: 0150080800
Series: Custom Artist
Color: 3-Color Sunburst
Body
Body Shape: Stratocaster®
Body Material: Select Alder
Body Finish: Nitrocellulose Lacquer
Neck
Neck Material: Maple
Neck Shape: Early '60s "C"
Scale Length: 25.5" (648 mm)
Fingerboard Radius: 9.5" (241 mm)
Number of Frets: 21
Fret Size: Medium Jumbo
String Nut: Synthetic Bone
Nut Width: 1.650" (42 mm)
Neck Plate: 4-Bolt Serialized
Neck Finish: Nitrocellulose Lacquer
Fingerboard: Rosewood
Position Inlays: Clay Dots with One Mis-matched White Plastic Dot at the 12th Fret
Electronics
Bridge Pickup: Custom '60s Single-Coil Strat
Middle Pickup: Custom '60s Single-Coil Strat
Neck Pickup: Custom '60s Single-Coil Strat
Controls: Master Volume, Tone 1. (Neck Pickup), Tone 2. (Middle Pickup)
Pickup Switching: 3-Position Blade: Position 1. Bridge Pickup, Position 2. Middle Pickup, Position 3. Neck Pickup
Pickup Configuration: SSS
Hardware
Bridge: 6-Saddle American Vintage Synchronized Tremolo
Tuning Machines: 5 Sperzel® Die-Cast Machine Heads with 1 Mis-Matched Gotoh®
Orientation: Right-Hand
Pickguard: 3-Ply Mint Green
Control Knobs: Parchment Plastic
Miscellaneous
Strings: Fender® USA 250R, NPS, (.010-.046 Gauges)
Unique Features: Aged White Plastic Parts, Original Dot Spacing, One Mis-matched Sperzel®; Tuning Machine, Clay Dots with One Mis-matched White Plastic Dot at the 12th Fret, Slot-Head Mounting Screws in Selector Switch, Heavily Worn and Distressed with Most of the Paint Missing, Replicates the Wear Patterns of Rory's Original Guitar
Included Accessories: Deluxe Hardshell Case, Strap, Certificate of Authentic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