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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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
Sacco di Roma
영어
Sack of Rome
한국어
로마의 약탈
1. 개요
2. 연혁
2.1. 기원전 390년, 브렌누스켈트(갈리아)계 세노네스족에 의한 약탈
2.2. 410년 알라리크 1세서고트족에 의한 약탈
2.3. 455년, 가이세리크반달족에 의한 약탈
2.4. 546년, 549~550년 토틸라동고트족에 의한 약탈
2.5. 846년, 사라센 해적의 로마 외곽 약탈
2.6. 1084년, 로베르 기스카르노르만족에 의한 약탈


1. 개요[편집]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는 직역하면 로마 약탈을 의미하며, 역사상 여러 차례 일어났다. 전쟁이 빈번했던 유럽 대륙에서 약탈은 흔한 일이었지만 로마 시는 기나긴 시간 유럽인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온 도시였기에 당대에 미친 충격은 상당했다. 그래서 역사상의 로마 약탈 중 다수가 시대의 중요한 이정표로 여겨지거나, 후대까지 길이길이 영향을 미쳤다.

그중 특히 중대했던 것은 455년 가이세리크의 휘하 반달족에 의한 로마 약탈1527년 카를 5세 재위 기간 동안의 로마 약탈인데, 전자는 반달리즘이라는 용어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후자는 로마 약탈 중에서도 가장 참혹해 '사코 디 로마'가 아예 이 사건을 일컫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2. 연혁[편집]



2.1. 기원전 390년, 브렌누스켈트(갈리아)계 세노네스족에 의한 약탈[편집]


기원전 390년 알리아 전투에서 갈리아의 세노네스족에게 참패한 후 약탈된 것으로, 이때 세노네스의 왕 브렌누스가 했다는

"패자는 비참하도다!"

("Vae victis, Woe to the Vanquished.")

라는 말이 유명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 이전의 기록이 유실되면서 초기 로마 시대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어져 자세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신화시대의 로마와 역사시대의 로마는 흔히 이 사건을 기점으로 잡는다.


2.2. 410년 알라리크 1세서고트족에 의한 약탈[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로마 약탈(410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앞서 언급된 로마 약탈이 로마가 약하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라면, 서기 410년의 약탈은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헬레니즘 3대 왕조를 정복하며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등극한 이후, 즉 로마의 최전성기가 지난 이후에 벌어진 대사건이다. 무려 800년만에 로마를 내준 것으로, 로마 제국의 쇠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지며 이후 서로마 제국은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동게르만의 서고트족은 훈족의 침입으로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밀려와 제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대신 로마군의 동맹군인 '포이데라티'가 되었다. 이후 서고트족은 로마군의 동맹군으로 종군하면서 훈족 및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은 매번 서고트족을 전쟁터의 최전방에 배치하여 화살받이로 사용했고, 서고트족의 군인들은 무참하게 죽어나갔다. 게다가 로마는 약속된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몰상식한 행태를 저지르기도 했다. 또 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일원이 되었지만, 제국 내에서 게르만인들에 대한 극심한 차별이 이어졌다. 로마 제국의 배신이 계속되자 395년 마침내 서고트족의 지도자였던 알라리크 1세는 군사를 일으켜 로마 제국에 대항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의 반달족 혼혈의 명장 스틸리코의 존재로 인해 알라리크 1세는 로마를 굴복시킬 수 없었고, 스틸리코 역시 알라리크 1세의 서고트족을 근근히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토벌하지는 못하는 힘의 균형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408년 스틸리코가 게르만족에게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소환된 후, 암군호노리우스 황제에 의해 반역죄로 몰려 어이없게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알라리크 1세와 서고트족은 409년까지는 어떻게서든 로마 제국 내에서 공생해보려는 생각을 했다. 알리리크 1세의 요구 사항은 로마 제국 내에서 서고트족의 반자치적인 영토 보장, 서고트족 군인의 처우 개선, 그리고 알라리크 1세 자신을 스틸리코의 후임 장군으로 임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알리리크 1세는 두 번이나 로마시를 포위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알라리크 1세와 협정을 맺었지만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스틸리코가 처형당한 후 알라리크 1세는 서로마 황제에게 마지막으로 최후 통첩을 했고, 호노리우스 황제와 원로원은 또다시 거절했다. 결국 알라리크 1세는 로마 제국과 공생하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410년 로마로 다시 진군했다.

이전에 알라리크 1세가 로마를 포위한 것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서였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로마를 정복하기 위해서였다. 알라리크 1세는 스스로 로마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로마에 입성한 서고트족은 관례에 따라 3일 동안 약탈했다. 알라리크 1세가 로마를 점령한 것은 막대한 재물을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약탈한 돈을 가지고 알라리크 1세는 서고트족을 데리고 로마를 떠나 풍요로운 북아프리카로 가서 서고트족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은 주로 재물을 가져가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며, 방화, 살인, 파괴 행위는 심한 편이 아니었다. 살육 대신 포로로 잡아 가족들에게 몸값을 받고 풀어주거나 그러지 못하면 노예로 팔았다.

로마 약탈로 엄청난 재물을 손에 넣은 알라리크 1세와 서고트족은 그길로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하했고, 이탈리아 남부에서 함선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함대를 편성했다. 서고트족을 데리고 로마를 떠나 북아프리카에 자리잡고 새로운 서고트족의 나라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풍랑으로 함대가 와해되었고, 알라리크 1세도 이 시기에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말았다.

알라리크 1세의 후계자가 된 아타울프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북상한 후,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갈리아 남부와 이베리아 반도에 터전을 잡았다.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동맹군으로서 로마와 가장 밀접하게 접촉했고, 로마를 약탈하면서 로마 문화의 정수를 제대로 체험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로마화된 게르만족이 되었다. 혼란한 상황속에서 로마와 서고트족의 관계는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로마 약탈로부터 5년 후 서로마 제국은 서고트 왕국을 정식으로 인정했고, 동맹을 맺었다. 이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서고트족의 군대는 서로마군의 가장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451년 아틸라가 지휘하는 훈족과의 카탈라우눔 전투에서도 서고트군은 서로마군의 주력으로 활약했다.

2.3. 455년, 가이세리크반달족에 의한 약탈[편집]


걸출한 영웅 가이세리크반달 왕국이 로마를 약탈한 사건이다. 사실상 뇌사 상태에 빠진 서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다만 반달 왕국의 약탈로 뇌사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전에 이미 서로마 제국은 연이은 정변으로 인해 스스로 막장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서로마 제국이 이미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임을 파악한 가이세리크가 반달 왕국의 함선들을 이끌고 와서 별다른 유혈사태 없이 비교적 평화롭게 로마 시의 값진 물건들을 싹쓸어 스틸해간 것이다. 갈데까지 간 서로마 제국을 보여주는 사건으로서 이 약탈이 일어난지 20년만에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의 정치 상황은 막장 그 자체였다. 치열한 권력 암투가 이어졌는데, 그 과정 속에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정적의 아내를 강간하여 그 보복으로 쿠데타가 일어나고, 새로 황제가 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복수를 위해 전 황후를 학대하는 등의 막장 상황이 이어졌다.

서로마 제국의 막장급으로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학대당하던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황후가 반달 왕국의 국왕이자 사돈이 될 예정이었던 가이세리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가이세리크가 황후의 요청 때문에 로마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반달군이 로마 시에 진군하는 명분은 되었다.

반달군의 로마 약탈은 15일 동안 이루어졌다. 제국의 최고 신전이었던 유피테르 신전의 황금 지붕까지 뜯어갈 정도로 로마 시의 재물이란 재물은 모두 싹싹 긁어갔으며, 특히 도심의 중심이었던 포로 로마노에는 성한 건물이 없었다. 반달 왕국의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하여 로마 시의 보화를 북아프리카로 실어날랐다. 종교 시설의 약탈은 금지되었으며, 살인과 강간 역시 금지되었으나 앞에서 말했듯이 유피테르 신전이 대놓고 약탈당하는 등 철저히 지켜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살인 및 강간 등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으며, 주로 재물을 실어나르는 데 역점을 두었다. 상술했듯이 이 사건은 반달리즘의 유래가 되었다. 다만 이 사건의 충격이 워낙 커서 그렇지, 막상 당대나 후대의 여러 세력과 비교하면 반달족들이 그렇게 문화재 파괴나 약탈의 대명사가 될 만큼 특별히 더 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2.4. 546년, 549~550년 토틸라동고트족에 의한 약탈[편집]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전성기에 이른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이탈리아 수복 전쟁을 통해 동게르만계 동고트족에게 빼앗긴 이탈리아 지역의 영토를 탈환하기 시작하면서, 수세에 몰려있었던 동고트 왕국은 명장 벨리사리우스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의심을 사 소환되자 이때를 틈타 토틸라를 왕으로 세우고, 반격을 가해 이탈리아 중부를 상당 부분 탈환했다.

이후 546년 동로마군이 탈환했던 로마 시를 공격하여 장기적인 포위 공성전 끝에 함락시키고, 닥치는 대로 약탈을 단행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재투입되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의 불화로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이후 고트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인 549년~550년 토틸라는 다시 로마를 공격해 또 함락시키고 약탈을 했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측근인 환관 나르세스를 투입하여 토틸라를 패사시키고, 동고트족을 제압했다.


2.5. 846년, 사라센 해적의 로마 외곽 약탈[편집]



게르만족에 이어 이슬람이 새로운 중대한 위협으로 등극한 서기 9세기 전반, 아글라브 왕조의 시칠리아 섬 & 이탈리아 남부[1] 정복에 고무된 아랍계 무슬림 해적들이 846년 로마 시의 외곽을 습격해서 약탈한 사건이다. 이때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외곽에 있었던 옛 성 베드로 성당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이 약탈을 당하고 로마 시의 외곽이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성벽 안으로 들어가서 농성을 하자 사라센 해적들은 철수하여 다행히 로마 시 내부는 약탈되지 않았다. 이후 교황 레오 4세는 파괴된 로마 시 외곽의 화재를 진압하고 여러 시설들을 복구했다. 또한 방어탑을 세우고 성벽을 세웠는데, 이때 세워진 성벽 안쪽을 일명 레오의 도시라고 불렀다. 849년 또다시 로마 시에 접근한 사라센 해적들에 맞서 나폴리, 아말피, 가에타 등과 동맹을 맺고, 오스티아 해전에서 격파했다. 이는 중세 교황령 역사상 매우 중요한 전투로 손꼽힌다. 여러 공적으로 인해 레오 4세는 사후에 시성되었다.

2.6. 1084년, 로베르 기스카르노르만족에 의한 약탈[편집]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7세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 사이의 다툼으로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나 황제가 일시적으로 굴복했다. 하지만 이 수치에 분노한 하인리히 4세가 힘을 회복한 후, 로마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 성으로 일시 도피한 뒤 이탈리아 남부를 평정한 노르만족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로베르의 노르만족 군대가 북상하자 하인리히 4세는 쓸데없는 전투는 피한다는 방침에 따라 로마 시를 비워주고 철수했다. 그런데 로베르가 교황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로마 시민과 전투가 벌어지자 분노한 노르만군이 로마를 공격하여 약탈했다.

이때 방화가 크게 있어 로마가 불바다가 되었고, 이는 과거 서고트족이나 반달족의 약탈 때보다 더 큰 피해를 낳았다. 로마를 지키려고 데려온 노르만족에 의해 로마가 망가져버리면서, 교황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원망은 더욱 커젔고, 결국 그레고리오 7세는 로마를 떠나 로베르 기스카르의 근거지인 살레르노로 망명하여 쓸쓸하게 객사했다.


2.7. 1527년, 카를 5세의 독일 용병들에 의한 약탈[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사코 디 로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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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40년 타란토 점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