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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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2.1. 개괄
2.2. 역사관
2.3. 편견
2.3.2. 반그리스인
2.3.2.1.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왜곡, 폄하
2.3.3. 반일신교
2.3.4. 여성 군주에 대한 혹평
2.3.5. 반페르시아
3. 권별 문제점 정리
3.1. 1권
3.2. 2권
3.3. 3권
3.4. 4~5권
3.5. 6권
3.6. 7권
3.7. 8권
3.8. 9권
3.9. 10권
3.10. 11권
3.11. 12권
3.12. 13권
3.13. 14권
3.14. 15권
4. 전반적 문제점
4.1. 노예제도
4.3. 리메스
4.4. 후기 로마 제국 군제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와 무관심
4.5. 객관성 문제


1. 개요[편집]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인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비판을 다루는 문서.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에 논란이 많은 이유는 그녀가 전문 역사가가 아니어서도 아니고[1], 당시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몇몇 가설을 반박해서도 아니다. 역사적 주장에는 논리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가 요구되는데, 그녀의 주장에는 이런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비판 문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여러 비판과 논의가 있어야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논란이 많은 건 서술된 내용에 오류와 왜곡이 많은 게 이유며, 본 문서에서는 특히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 로마인 이야기에서 다루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


2. 설명[편집]



2.1. 개괄[편집]


우선 감안할 점은, 로마인 이야기가 15년에 걸쳐 매년 1권씩 출간된 작품인 만큼 출간 이후 나온 연구 결과는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이 단점은 학계에서도 다소 연구 진도가 늦은 편인 3세기 이후 로마 제국 역사를 다룬 12권 이후에 결정적으로 부각된다. 참고로, 늦는 편이라는 학계에서도 이미 3~11세기의 로마 - 동로마로 이어지는 소위 고대 - 중세사를 객관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은 이미 1990년대에 끝난 상태며, 국내 학계에서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정리되었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런 성과들을 수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 내용이 그녀 특유의 반기독교, 유신론적 사관에 대한 극복으로 집중되어, 그리스도교 발호로 로마 제국이 망했다는 기존 주장과 배치되는 데에 있다. 아래 상세 항목에서도 열거되는 반일신교-친다신교, 반 동로마, 과도한 카이사르 옹호적 관점은 그 자체로 로마인 이야기 전체에 걸쳐 정상적인 역사 해석을 심히 방해한다.

하지만 작중 내내 외치는 정체 불명의 '로마다운 로마'란 말이 더욱 심각하다. 대체 2,000년 넘는 로마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 로마가 '로마다운 로마'란 말인가?[2] 특히 로마는 시대에 맞는 정치 개혁과 군제 운용의 변화를 꾀한 융통성 있는 나라다. 이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가 말하는 답은 작가 자신이 애호하는 특정 시대 로마만 로마라는 것인데, 이는 문학 작품이라면 적합할지 몰라도 역사서가 갖는 객관성으로는 전혀 맞지 않는 기준이며, 문학 작품 기준으로 볼 때도 로마에 살았을 로마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심지어 14권에서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일부 정책을 놓고 "율리아누스는 로마 문명을 알기나 하는지 의심스럽다." 비난하는데, 그 시대를 살았던 로마인, 그것도 황제에게 로마 문명을 알기나 하냐고 쏘아붙이다니 참으로 치기 어린 소리다.

이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를 옹호하는 시각에 따르면 1. 작품 내에서 작가는 자신의 가설을 단정한 경우가 없고, 2. 다른 사람들의 역사관 역시 소개했으며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맡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1. 완전히 틀린 사실을 적었거나, 2. 부정적인 부분만 부각하거나, 3. 다른 사람들의 역사관에서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거의 생략해서 결국 독자를 시오노 나나미 자신이 생각하는 결론에 이르게끔 유도한다. 이런 행태는 역사 교양서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분명하고, 문학 작품으로 봐도 수준이 높다고 보기 어렵다. 교양서로서 올바른 방법은 학계에서 마찰이 있는 주장에 대해서는 양자의 근거를 동등하게 나열하는 것이다.

그나마 반일신교, 카이사르 애호에 대한 게 영향이 거의 없는 전기 로마사(1, 2권)는 상황이 상대적으로 낫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갈수록 역사서라고 보기 어려워진다. 아무리 학술서로서, 객관적인 역사서로서 로마인 이야기를 저술한 게 아니더라도, 14권 이후로 가면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에서도 높이 봐주기 어려울 지경으로 질이 떨어져 간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건강이 하필 14권을 집필할 즈음에 급격히 나빠진 것에도 이유가 있으나, 설령 건강이 좋았더라도 그 앞권들에서 보인 경향을 볼 땐, 앞서 든 문제들이 나아졌을진 의문이다.


2.2. 역사관[편집]


로마인 이야기의 기저에 깔린 성향은 작은 정부 - 감세를 비롯한 보수, 복고주의며 정치적으로는 제국주의를 옹호한다.[3] 또한 철인 엘리트의 시혜주의에 대한 긍정 내지 환상을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 보수 지식인층의 정치관과 상통한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전통 종교와 모순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적인 성향이나,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로 보는 철인 정치관이라거나. 철인정치를 주장하면서도 무솔리니식의 파시즘은 희화화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사실 히틀러와 협력하기 직전까지의 무솔리니는 시오노 나나미의 성향에 가장 부합한다.

아울러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고대-중세의 전이 단계를 단순히 로마적 정신의 쇠퇴로 인한 퇴화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고대 시스템으로는 더이상 국가 유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화적으로 중세가 퇴화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야만족인 게르만족이 점령한 서유럽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로마 제국의 법통을 계승한 동로마나 각지의 고대 문명을 자양분삼아 새로운 문명을 개척한 이슬람은 고대보다 훨씬 더 번영된 사회를 누리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중세가 고대보다 퇴화했다고 보기 어렵다. 서유럽이 곧 세계는 아니다. 그리고 서유럽도 중세의 전성기인 12-13세기면 이미 후진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문화적 정교함을 보인다. 유럽 곳곳에 있는 고딕 건축물들과 그 시대의 세공품들을 보라. 로마인 이야기는 이 점을 간과한다.


2.3. 편견[편집]



2.3.1. 반(反) 동로마 제국[편집]


로마가 사실상 세계의 수도라는 기능을 상실한 이후 동로마를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는 후반권에서 로마인 이야기가 다루는 주요 주제는 거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비난이다. 주로 로마 전성기의 황제들 및 정치 상태와 비교하며 동로마의 통치자를 제대로 된 국가원수가 아니라고 단죄하는 식인데 이 비난의 이유가 별 근거가 없다. 대부분 동로마의 통치자가 그리스도교를 맹목적으로 믿으므로 고대의 여러 교양을 익히지 않은 무식한 중세의 군주라는 편견이 기저에 깔려 있으며, 또한 로마 제국 전성기의 풍부한 가용 인적, 물적 자원 상황과, 한계 수익성이 떨어진 후대의 체제를 아무런 가감없이 비교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또한 사실의 왜곡도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동로마 최고의 통치자로 일컬어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법학, 음악, 신학, 역사학 등 여러 학문에 두루 능통한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자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연 인물이었음에도 시오노는 15권에서 별 교양도 없는데[4] 불가사의한 업적을 거둔 군주로 폄하했다. 비록 말년에 오점이 있으며[5], 임페라토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직접 최고사령관으로 전장에 나선 적은 없었지만[6], 통치자로서의 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종 취하는 왜곡된 해석에 합당할 만큼 못난 군주가 아니다. 애초에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를 그 자리에 임명하고, 외교적으로 전쟁의 명분을 만들며 적국에 내분을 일으키고, 20여 년 동안 지원을 퍼부은 사람이 누구였겠는가? [7]

로마인 이야기 완결 이후에 출판된 시오노의 저서《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서는, 로마 이후에 지중해권에 유통된 금화들을 나열하면서 이슬람의 디나르 금화나 베네치아, 피렌체의 금화는 소개하면서도 이들보다 일찍 유통되어 근동권의 기축통화 역할을 했던 동로마의 솔리두스 금화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그나마 로마인 이야기 13권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솔리두스 도입을 언급하고[8], 그 이전에 출판된 저서《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에서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기축통화 도입 시도를 설명하면서 솔리두스와 디나르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나 시오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솔리두스 금화 도입에 대해 군인/공무원/관료/군납업자와 일반인 사이의 빈부 격차를 악화시켰다며 좋게 평가하지 않았고, 솔리두스(노미스마)금화가 11세기까지 동로마에서 기축통화로 계속 쓰인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고대 로마 제국과는 달리 강력한 상비군의 전통이 없는 비잔틴 제국은 용병을 쓰는 데 익숙했다.”(1권 59쪽)는 글이 있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 치하에서, 비잔틴군의 총수는 70,000 명에 달했으며, 그 가운데 20,000 명은 상비군이었다. (Under Alexius Comnenus the total strength of Byzantine army was about 70,000 men, with about 20,000 of that total in the standing army.) - Men at arms Armies of the Crusades 17page


동로마 제국은 용병을 쓰는 데 익숙했지만 한편으로는 테마 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오랫동안 거대한 상비군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는 십자군 시대 당시에도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테마 제도의 근간인 둔전병들이 완전한 상비군은 아니었고, 각 군관구의 중심부에 위치한 소수 부대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에 주둔한 타그마들만이 상비군이라고 할 수 있기에 고대 로마에 비해서는 상당히 축소되고 비중이 떨어진 건 사실이다. 이는 나라 규모에 비해[9] 너무나도 다종다양한 적들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기에[10] 그 적들을 한꺼번에 다 상대할 병력과 병종을 구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의 상비군 조직은 7세기 이후로 꾸준히 확충되었으며 적어도 10세기~11세기 중반까지, 즉 십자군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제국은 유럽과 이슬람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상비군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이사키오스 1세의 쿠데타로 붕괴된 군대가 만지케르트 전투와 그 여파로 완전히 무너지기 했으나, 당시 시점에서조차 이슬람 아랍 제국을 제외하면, 근 오백 년 동안 그리고 유럽에 한정하면 가장 강력한 상비군 조직을 갖춘 국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용병 중에도 거진 상비군화된 부류들이 있었다. 예컨대 바랑인 친위대는 용병이지만 가장 믿을만한 상비군이기도 했다.

즉 동로마 제국에는 국민군이 부재했던 것도 아니며 상비군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1081년 시점에 연이은 내전과 디라히온 전투의 패배로 용병의 비율이 높아져 있었을 수는 있으나, 강력한 상비군 전통이 없다고 한 시오노 나나미의 서술은 동로마 역사와 문화에 대한 비논리적인 혐오에 따른 무지와 동로마는 무조건 로마 제국과는 다르다고 여기는 편견의 산물이다.[11]


2.3.2. 반그리스인 [편집]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도읍으로 정했기 때문에 상당히 난처하고 개탄스러운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것은 지칠 줄 모르고 논쟁을 좋아하는 그리스인이라는 인종을 제국의 중추에 앉히는 체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로마인이 '말보다 실행'이라면 그리스인은 '실행보다 말'이었다. - 로마인 이야기 13권 268~269페이지에서.

로마인 이야기 전반에 걸쳐 작가는 "그리스인은 창의적이고 진취적 성향이 있다"고 묘사하기도 하지만 동로마 제국에 대한 비판이 강해지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제국의 중핵을 담당하기 시작한 그리스인에 대한 비난은 거의 인종차별 직전의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 한두 문장 정도로만 국민성의 문제를 언급하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 문제의 만악의 근원이 그리스인의 국민성 때문이라 주장하는 수준이라서 이 책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내놓는다면 당장 그리스에서 일본에 항의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이는 그리스인에 대한 작가의 편견으로밖에 볼 수 없는데, 후기 로마를 다룬 13권~15권에서 서로마 지역이 쇠퇴하고 멸망했어도 '오늘날의 이탈리아인이 로마인의 후손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쉴드를 치기 때문이다. 시오노의 논리를 따르면, '오늘날의 그리스인이 고대 아테네인들의 후손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라는 식의 반론이 가능하다.

더구나 동로마인들에게서 로마라는 보편제국이 아닌 그리스인으로서의[12] 일종의 민족의식 비슷한 게 다시 분출한 것은, 도저히 동로마인들 스스로도 로마라는 이름을 감당하기엔 자신들의 처지가 너무 부끄럽다고 할 정도로 쇠퇴한 12~13세기 이후였다.


2.3.2.1.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왜곡, 폄하[편집]

그리스인이 오리엔트인을 지배한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백성들이 지배받는 데 워낙 익숙해서 문제가 적었지만, 지배받는 데 익숙지 않은 그리스인을 지배하게 된 마케도니아 왕국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늘 긴장 관계가 존재했다. 그리스인이야말로 100이 모이면 100가지 의견이 나온다는 민족이 아니던가 - 로마인 이야기 2권 354페이지에서.

그리스인들에게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타민족인 로마인이 위기에 처해 있는 그리스의 독립과 자유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비용으로 자신의 피까지 흘려가며 싸우고, 게다가 이긴 뒤에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사실을 도무지 밑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로마인 이야기 2권 359페이지에서.

반그리스인 관점의 연장선으로 못지 않게 문제로 지적받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반그리스인 정서 안에 헬레니즘 세계와 레반트 및 아나톨리아 일대 그리스인, 원주민들에 대한 왜곡을 심어 놓고 로마가 마치 좋은 의도만으로 지중해 동부에서 전쟁을 치렀다고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면서 로마의 행동이 온건적 제국주의 관점에서 상당히 세련되고, 민심을 얻었음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2권 후반부터 언급되는 로마의 지중해 동부 장악 과정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서술 내용을 살펴보면 로마가 강대국이 된 이후, 어쩔 수 없이 강대국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의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로마사 연구가 최근 20~30년 사이 급격히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설령 정통 사관에 입각한 서양 로마사 권위자들도 이 지겅으로까지 포장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주장처럼 그리스인들이 외세를 끌어들였고 로마는 그리스 문화에 열중한 풍조가 나타났다고 해도, 로마사 연구를 하는 서양 학자들이 말하듯 로마는 책에서 말하는 주장처럼 온건하고 세련된 제국주의 관점에서 악당을 혼내주는 정복자, 사심 없이 그저 그리스문화를 동경하면서 지중해 평화를 위해 나선 강대국이 아니었다.

로마사 기본서 중 하나를 만든 하이켈하임의 경우, 로마가 헬레니즘 세계에서 전쟁을 벌이며 지중해 동부에 힘을 과시한 것에 대해, "이 국가들은 궁극적으로 크든 작든 모든 나라들이 로마의 지배에 종속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고 서두부터 말하면서, 로마가 작가의 주장처럼 정의의 사도가 되면서 그리스인들을 돕고 지배자인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조를 혼내줬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디아도코이 전쟁 등의 세력 균형 과정과 로마의 개입 등이 연관되어 있던 부분이 있다고 해도, 로마가 경제적 동기와 팽창에 대한 야심, 스키피오 가문 등 당시 원로원 안의 명망가들로 대표되는 군공에 대한 야망 등도 컸다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이는 다른 서양학자들의 의견도 비슷한데, 그들 역시 로마의 헬레니즘 세계 장악 과정이 현대 제국주의 관점과 결이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경제적 동기와 원로원 내 야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보다는 마케도니아의 경우, 그리스인들의 자주 독립 정신이나 외세 의존 등을 언급하면서 헬레니즘 세계 내 오리엔트인들의 피지배 의식 등도 언급하고 있다.


2.3.3. 반일신교[편집]


또한 로마인 이야기 전반에 걸쳐 작가는 그리스도교, 유대교, 그 외 일신교로 간주되는 종교에 대한 근거없는 비난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스도교가 주류를 이루는 로마 제국 말기를 다루는 후반부에는 한 페이지에 최소 한 번 이상은 그리스도교 비판이 들어갈 정도.[13]

심지어 페르시아 제국그리스침공한 것까지 일신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신교인 그리스에 대한 공격이라는 언급을 하기도 한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공격한 것은 종교에도 원인이 있다는 주장인데, 이 전쟁이 종교가 원인이었다는 당대 사료는 전혀 없으며 당사자인 그리스인들조차 종교가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이 전쟁은 페르시아인들의 그리스에 대한 팽창 목적의 침략 전쟁일 뿐이다.

이처럼 사료적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추론이라고 가정해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가 제국 내의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해서 대단히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점을 보면 이런 추론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종교 꼴통인 유대인들조차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용 정책을 시작한 키루스 2세를 다른 나라의 왕에게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찬하여 칭송했을 정도이다. 또한 조로아스터교 자체가 아후라 마즈다에게 따르는 일종의 '부속신'을 인정하여 그리스도교, 이슬람과 같이 유일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신격을 배제하는 철저한 일신교와는 차별성이 있었으므로 동일시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다.

이러한 반일신교적 역사관은 비단 시오노뿐 아니라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에서 이미 비롯되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쇠망의 주요 원인으로 그리스도교의 흥기를 꼽았으며 데이비드 흄도 <일신교와 다신교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비슷한 점을 주목한다. 이로 미루어 시오노 나나미의 일신교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18세기 계몽주의 전반의 역사관이 투영된 것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통일된 교리가 없던 다신교가 교리의 체계화와 철학적 복잡화를 통해 고등종교로 진화하는 일은 자주 있던 일이다. 사실 모든 고대 종교는 다신교적이지만, 실제 신앙 생활에서 한 신관이 말 그대로 여러 신을 모시는 사례는 별로 없고, 이런 경우라도 중심이 되는 특정한 주신은 존재하는 것이 보통이다. 교리와 철학의 심화 과정에서 이러한 '주신'이 강조되면서 다른 세력이 약한 신들은 삭제되거나 권속으로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중세로 접어들면서 이런 고등종교가 국가이념으로 도입되는 일은 보편적 현상이다.

이 고등종교가 그리스도교이슬람교 같은 일신교가 될 수도 있고 힌두교와 같은 다신교, 또는 구분하기 곤란한 유교불교도 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역사 발전 과정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그 미덕을 설파하는 로마 신화나 일본식 신토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상적으로 보는 일본식 신토조차 고대국가 형성에서 왜국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사그라들었고,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신토 세력은 그저 불교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기번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은 결과와 원인을 혼동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일신교 감정으로 인한 해독은 후기 로마사 해석에 가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건 로마사를 비그리스도교적 사관에서 제대로 해석한 게 아니라, 그냥 틀린 소리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 후기에 유행했던 미트라교에 대한 서술도 엉터리이고[14], 또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증오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그리스도교 관련 내용을 모조리 삭제하기도 하며[15] 로마 후기의 여러 교리 논쟁을 다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16] 그런데 이러한 교리 논쟁들은 단순한 교리 문제가 아니라 교리를 지지하는 종족이나 지방들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가볍게 서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중요하지 않다고 봐서 생략했다기보다는 아예 무지했기 때문에 생략했다고 보는 게 맞다.

아울러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유대교가 포교를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라고 했지만, 이는 그녀가 유대교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유대교도 나름대로 포교에 열심이었고,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압족과 암몬족 같은 부족들이 신약성경 시대로 가면 사라지는 것도 유대인들이 그들을 정복한 다음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여 유대인에 흡수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튀르크족이 세운 하자르 칸국 같은 경우는 9세기 중엽에 아예 유대교로 개종하여 국교로 삼기까지 했다.

2.3.4. 여성 군주에 대한 혹평[편집]


시오노 나나미는 여성 군주를 혹평하는 경향이 있다. 이집트의 독립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로마 장군들을 미모로 홀린 클레오파트라는 전통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시오노는 정반대로 혹평. 12권에서는 제노비아도 비판한다. 사실 클레오파트라와 제노비아만 대표적으로 거론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여자가 권력을 잡고 정치적인 행위를 하려고만 들면 대대적으로 포화를 쏴댄다. 예를 들면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라든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어머니 율리아 마미아라든지. 물론 그녀들의 잘못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반면 여성이 정치에 나서도 속된 말로 나대지 않거나 혹은 내조에만 전념하면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은근히 있다.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 라든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할머니 율리아 마이사를 묘사할 때 조금 그런 느낌이 있다.

당시 정치에 적극 참여한 여성들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주장은 사실이고, 또한 여성이 정치 및 사회에 본격 참여하기 시작한 것 자체가 인류 전체 역사에서 그리 시간이 길지 않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은 이런 것을 넘어서서 여자의 속성 자체가 정치하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식으로 은근히 몰아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게다가 클레오파트라와 제노비아가 혹평받은 건 단순히 여성으로서 정치를 했다기보다는 감히 여자 주제에 대제국 로마에게 맞서려 하다니라는 식의 비논리적 감성이 은근히 깔려있다.[17]

2.3.5. 반페르시아[편집]


오리엔트 군주와 주민들은 반드시 강자에게 달라붙는다.


로마인이 생각하는 군주는 통치하는 사람이지만, 페르시아인이 생각하는 군주는 전쟁이나 사냥이나 잔치를 하는 사람이다.


샤푸르 1세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역사에서 역대 어느 왕보다 영웅시되는 군주로서, 오리엔트에서도 계몽 군주가 나오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학문과 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기술의 중요성도 알고 있었다.[18]

시오노 나나미


페르시아가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하면 거의 항상 위와 같이 '서방'과 '동방', 또는 '옥시덴트'와 '오리엔트'를 비교하며 페르시아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19] 대체로 '서방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반면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 동방은 전제군주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멍청한 놈들' 이라는 식인데, 가만히 읽다 보면 '페르시아는 로마에게 정복당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현실적인 로마인들이 참고 넘어가 준 것' 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이 점은 사실 시오노의 견해라기보다는 근대의 서방 역사관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기도 한데, 동양인인 시오노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매우 괴이쩍은 일이다.일본인은 탈아입구해서 서양인이다.

물론 '서방'이 민주주의를 실시한 것은 사실이고 '동방'이 전제군주정을 실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문화적 차이로 접근할 일이지 단순히 힘의 논리로 보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물론 '그냥 다를 뿐이다' 라는 식의 말도 쓰지만, 대충 읽어보기만 해도 '그냥 다를 뿐' 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여담으로 근동 군주국의 군주들이 벌인 "사냥이나 잔치"는 결국 로마의 "빵과 서커스"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기 정책이다. 이때의 사냥은 단순한 군주의 유흥거리라기보다는 정기 군사 훈련으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으며, 잔치 또한 사치라기보다는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귀족들에 대한 유화책으로 보아야 한다.

3. 권별 문제점 정리[편집]



3.1. 1권[편집]


  • 로마 국왕이나 당시의 에피소드들은 현재로서는 거의 전설에 가까운 설화이며 상당히 근거가 얕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실제성을 가리지 않고 상당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런 전설들을 놓고 현실 정치나 군주론을 논하는 것은 상당히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 두번째로 다신교와 일신교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일신교와 다신교의 차이는 오로지 신에게 인간의 윤리도덕을 주관하는 역할을 맡겼느냐 맡기지 않았느냐에 갈린다고 주장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신교는 다신교적인 풍습을 많이 용납하였다고 반기독교적인 견해를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다.[20] 뒷날의 '그리스도의 승리'와 같은 부분에서도 반복되지만, 다신교라고 해서 인간의 윤리도덕을 규정하지 않은 것은 전혀 아니다. [21][22]

  • 십이표법의 제정을 두고 벌어진 귀족과 평민 간의 공방을 소개하면서, 당시 귀족의 강경파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만행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는데, 묘사 자체는 큰 문제가 없으나 그 뒤에 이루어진 십이표법의 제정을 다루면서 '사소한 반동이 단숨에 급진으로 치달은 한 가지 사례'라고 평가한다. 문제는 이 때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한 일이, 좋아하는 자유민 여성을 강탈하기 위해 그 여성의 자유민 신분을[23] 중상모략과 음해를 통해 임의로 박탈했다는 점에서, 귀족 계급이 평민의 신분을 임의로 박탈 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는 점이다. 심지어, 12표법의 제정 자체가 상류층이 사법권을 독점하는 불문법 시대의 부당함을 타파하기 위해 평민이 요구한 것이며, 그것을 두고 쟁점이 된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군역에 종사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평민들의 신체적 자유를 보장할 것이었다는 점에서, 아피우스의 행위는 당시의 로마 평민들이 요구하는 흐름에 정면으로 엿을 먹이는 행위였다는 점이다.[24] 그것도 모자라서 아피우스의 최후를 두고 강경한 보수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불명예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좋아하는 여자를 노예로 삼겠다고 불법을 저지르는 불명예는 참을 수 있었나 보다 시오노 나나미 본인이 '강경한 보수주의자'여서 이렇게 표현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유민의 신분을 멋대로 불법적으로 강탈하는 행위에 대한 반발을 사소한 반동으로 평한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평소 정치적으로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을만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겠다.[25]


3.2. 2권[편집]


  • 제1차 포에니 전쟁의 발단이 된 시칠리아 메시나에서의 라틴 용병 마메르티니[26]의 만행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그냥 가만히 잘 있던 메시나를 시라쿠사가 공격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로마의 도덕성에 흠결이 나는 게 싫었으면 국가적 이익을 우선했다는 식의 옹호도 가능했을텐데, 옹호하는 대상의 불미스러운 부분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 2차 포에니 전쟁의 발단이 된 사군툼 공방전에 대해 사군툼은 러일전쟁때의 노기 마레스키같은 사람도 쉽게 함락시킬 만한 곳인데도 함락에 8개월이나 걸린 것은 한니발이 동맹에 대한 신의를 중시하는 로마를 도발하려고 일부러 질질 끈 것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사군툼은 산위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로 19세기에 나폴레옹 군대도 함락에 애를 먹었던 곳이었다.

  • 칸나이 전투에 대한 서술에서 한니발이 사용한 전술을 완전히 잘못 소개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한니발의 선두부대를 로마 보병이 뚫자 뒤에 있던 정예 보병이 가로막았고 패주한 선두부대가 양익으로 협공했다고 서술하였는데 실제론 한니발은 전체 부대를 초승달 대형으로 짰고 뚫리지 않은채 포위한 것이며, 로마군의 옆구리를 친 것은 별도로 편성된 정예 부대다. 실제로 로마 보병은 한니발의 보병의 2배가 넘었는데 이중으로 전선을 짰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이런 전술은 어느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심각한 오류는 칸나이 전투 뿐만 아니라 로마인 이야기 2권 전반에서 심심치 않게 보인다.

  • 실제 사실과 전혀 반대되는 내용의 서술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예를 들어 칸나이 전투 이후 카르타고 본국의 사르데냐 섬 공격이나 전쟁 말기 마고의 리구리아 상륙 등에서 지역 원주민들이 로마군과 함께 카르타고군을 공격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거 죄다 틀린 얘기다. 사르데냐의 누라기 부족은 자기네들이 먼저 봉기한 후 카르타고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고 리구리아인이나 갈리아인들은 마고의 카르타고군과 연합하거나 용병, 물자 등을 지원하며 같이 로마군에 맞섰다.

  • 자마 전투 이후 강화를 논의하는 카르타고 원로원에서 역사대로라면 원래 이 시점에는 죽은 지 오래인 시스코네(하스드루발 기스코)가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닌다.

  •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이 패한 것을 두고 팔랑크스의 정면 이외에서 충돌할 가능성을 염두에도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리스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팔랑크스가 측후면 공격에 약한 것은 알고 있었고,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군은 단순히 측면을 공격해 승리한 것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지형 때문에 틈이 생긴 팔랑크스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다.

3.3. 3권[편집]


  • 가이우스 마리우스술라가 각각 로마에서 자신의 반대파에 대해 정치적 테러를 가한 것에 관해, "마리우스는 단순한 복수를 했지만, 술라는 원로원 체계를 세우기 위해 반대파를 철저하게 숙청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대조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 승리자가 술라이고 마리우스와는 달리 승리 후에 오래 살아 있어서 체계를 다시 세울 시간이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두 행동의 의도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 술라의 1차 로마 진군 당시 고위 장교들 중 재무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종군을 거부했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한 명만 종군을 거부했다고 적어놓았다. 명백한 오류이자 왜곡이다.

  • 술라가 폰투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카이로네이아 전투와 루쿨루스가 아르메니아군을 대파한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플루타르코스 한 사람의 말만 곧이듣고 글을 쓴 결과, '저쪽은 10만 명이 죽었는데 이쪽은 열 명 정도밖에 안 죽었다' 하는 식이 되어버렸다. 이는 상식적으로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소리이며, 실제로 후대 연구자들은 플루타르코스의 기술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연구 성과들은 전혀 반영하지 않고 플루타르코스의 기록만 믿다 보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한니발의 전과를 웃도는 신기록이었다', '스승인 술라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은 훌륭한 전과였다' 라는 식의 황당한 서술이 나올 수밖에.[27] 사실 3권 전체가 플루타르코스에게만 지나치게 매달린 감이 있다.

  • 칸나에 전투에 맞먹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인 아라우시오 전투(기원전 105년)를 비롯하여[28] 로마군이 테우토네스와 킴브리족 같은 게르만족들과 벌인 킴브리 전쟁 내내 수시로 패배했던 전투들에 대해서는 "싸우는 족족 패배했다."라고 너무나 간단하게 서술하고 넘어갔다. 간혹 시오노 나나미의 옹호자들은 "로마군 8만 명과 보조군 4만 명이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게르만족에게 전멸당했다."라는 로마의 역사기록이 너무 과장되어서 시오노 나나미가 믿지 않아 일부러 3권에 넣지 않았다고 변명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아라우시오 전투 이전에 벌어졌던 노레이아 전투(기원전 113년)나 론 강 전투(기원전 109년과 107년) 및 마살리아 전투(기원전 105년)에서 로마군 1만 명이 전사하거나 로마군 4만 2천 명이 몰살당하고 지휘관인 전임 집정관 스카우루스가 붙잡혀 고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던 일들 중 단 하나도 3권에 넣지 않은 이유를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29] 이러다보니 로마인 이야기 4권에서 로마군 병사들이 게르만족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 겁에 질려 두려워하는 모습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다.[30]


3.4. 4~5권[편집]


  •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데키우스 브루투스로 잘못 표기하였다. 번역 오류인줄 알았는데 일본어 원문에도 데키우스 브루투스라고 되어 있어서 빼도박도 못하게 오기 확정. 또한 마르쿠스 브루투스 부분에서도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에 대한 미움이 지나친 나머지 되도 않는 왜곡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이는 해당 항목 참조.


  • 로마의 사제직에 대해 일반 시민 생활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고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서술했지만, 실제 사료를 보면 로마의 사제직은 2종류가 있는데, 폰티펙스(신관)는 시오노의 표현처럼 로마 시민이 취임하는 일종의 '종교직 공무원'이어서 일반 생활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지만, 신전에서 신에게 예식을 올리는 사제인 플라멘(사제)으로 선출되면 말(馬)을 만지거나 로마 밖에 하루 이상 나가는 일 혹은 자기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이상 자거나 군대 업무를 보는 게 법으로 금지되어 버린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소년시절 선출된 사제직은 폰티펙스가 아니라 플라멘이었고, 그래서 카이사르도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31] 플라멘 직을 자진 사퇴하는데 이 부분을 완전히 빼먹고 사제로 선출된 것만 서술했다. 아마도 카이사르가 정계의 거물이 되면서 취임한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신관)와 혼동한 것이 아닌가 싶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시절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에 배급할 토지 분배를 놓고 언쟁을 벌일 때 원로원들과 카이사르의 세력이 민중 집회에서 차례대로 연설을 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아피아노스의 '내전기'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배제한 채 평민집회를 열었으며 이를 안 원로원 의원들이 달려가자 민중들을 동원해 이들을 구타하였으며, 이때 동료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주위의 폭도들에게 잡해 '죽일 테면 죽여라'라며 외치다 카이사르에 의해 끌려나갔다. 카토는 연단에 몰래 올라가서 민중들 상대로 자신의 견해를 말하려고 하였으나 폭도들은 카토를 잡고 무리 밖으로 끌어내려버렸다. 이 밖에 플루타르코스가 쓴 소(小) 카토 전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카이사르의 지휘 아래 원로원 의원들이 참석하였으며 이들 앞에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차례대로 연설을 하였고 비불루스가 거부권을 행사하려 들자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카이사르와 그 일당들이 원로원 의원들의 참석자체를 물리적으로 저지하였기 때문에 이런 연설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 카이사르의 업적에 대해 설명하면서 로마를 재창조하였고 이로써 400년간 로마의 수명을 연장시켰다고 말하는데 굉장히 주관적인 판단이다. 공화정을 전복시키고 동양 그리고 아프리카 부족들도 할 수 있는 왕정으로 대처한 것이 어째서 재창조인지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다만 당시 로마 공화정이 로마인 및 원로원 위주의 엘리트로 변해갔던 것은 사실이라 이 점에서 개선되었다고 평가한다면 의외로 설명이 정확할 수도 있다. 이를 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600명에게는 평가가 좋지 않았고 6천만 명에는 호평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 또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제패가 전무후무한 군사적 업적인 것으로 칭송하는데, 당시 갈리아는 게르만족에게 복속되기 일보 직전에 놓였으며 따라서 게르만족 대신 불러들인 게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이런 갈리아의 정세를 이용하여 게르만족을 격파한 뒤 이에 불만을 품은 친게르만파 갈리아족을 패주시키고 관용을 베푸는 것만으로도 갈리아족을 쉽게 제패할 수 있었다.[32] 따라서 로마인에게 적대적인 민족 위주로 살고 있는데 로마가 쳐들어온 게르마니아나 혹은 브리타니아 제패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33]

  • 카이사르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극에 달한 나머지 카이사르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를 무조건 카이사르 위주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카이사르의 물주였던 크라수스와의 관계의 경우, 당대나 근현대나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크라수스가 카이사르를 막후에서 조종하는 관계로 보고 있으나, 시오노 나나미는 이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카이사르가 막대한 빚을 무기로 크라수스를 역으로 조종했다는 신기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로마 제일의 부호였던 크라수스에게 카이사르에게 준 돈이 과연 그정도 가치가 있었을까? 각종 사료를 참고해 볼때 크라수스는 시오노 나나미가 묘사하듯이 돈만 많고 정치력은 조금도 없는, 카이사르에게 질질 끌려갈만한 얼간이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후원을 받으며 정치권에 나선 후 단 한 번도 크라수스의 이익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유능하고 정열적인 카이사르의 맹활약 덕분에 크라수스는 유력 정치인의 한 명에서 공화정 로마 최고의 실권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즉 크라수스 입장에서는 그만큼 본인에게 이익이 되었기에 카이사르에게 돈을 퍼 준 것이다. 물론 물주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면서도 은근슬쩍 자신의 입지를 다져놓고 나중에 단숨에 로마 최고의 실권자로 올라설 준비를 착실히 한 카이사르의 역량은 충분히 칭찬할 만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걸 카이사르가 크라수스를 쥐고 흔들었다는 식으로 묘사해서 문제지.

  • 사실 당시 로마에서 유력 정치인이 자금 지원을 무기로 유능한 신진 정치인을 후원하는,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앞잡이로 쓰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는데, 또 다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같은 책에 묘사된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관계다. 카이사르는 쿠리오의 막대한 빚(6천만 세르테르티우스)을 대신 갚아주면서 그를 포섭했고, 쿠리오는 호민관으로서 카이사르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원로원에서 맹활약한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는 크라수스(채권자)-카이사르(채무자) 관계는 빚을 무기로 채무자에게 주도권이 있었다고 묘사하더니, 카이사르(채권자)-쿠리오(채무자) 관계는 "원대한 포부를 제시하고 그것을 공유하고자 설득[34]", "충실하고 정열적인 카이사르의 젊은 동지"라는 식으로 온갖 수식어를 갖다붙이며 채무자가 채권자의 의지를 충실히 따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내로남불.

  • 갈리아 전쟁 이야기를 할 때 만화 아스테릭스를 언급하면서 그나마 카이사르가 안 나온 게 다행이라고 평하는데, 멀쩡하게 등장한다.[35][36]

  •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를 따라가지 않고 이탈리아에 남은 키케로를 카이사르가 설득하러 갔으나 실패한 적이 있는데, 이것도 "키케로에게 로마행을 요청한 것은 사실 그것을 막기 위한 훼이크였다. 모든 건 카이사르의 계획대로..."라는 정신승리를 구사하고 있다. 당시 카이사르가 이탈리아를 장악한 상황에서 키케로가 대다수 원로원 의원과는 달리 폼페이우스와 동행하지 않고 이탈리아에 남은 것은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기를 지지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으며, 그렇기에 로마 제일의 연설가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키케로에게 로마에 가서 공개적으로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키케로는 그것을 거부하였고, 카이사르는 큰 실망을 안고 로마로 돌아간다. 사실 이렇게 묘사하는 게 좌절도 하고 그걸 극복도 하는 카이사르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 잘 드러낼 수도 있었을 텐데, 시오노 나나미에게 카이사르는 좌절 따윈 하지 않는 완전체인지라...로마판 창천항로의 조조인 것이다!

  • 키케로와 카이사르의 관계에서 카이사르가 키케로를 여러 번 도와 준 것만 언급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카탈리나 반역 사건 당시 카이사르가 이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참소가 끝도 없이 들어왔으나[37] 당시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끝까지 자신은 무관하다는 카이사르의 손을 들어 주었고, 카탈리나 일파 처리에 대한 원로원 재판 후 그들에 대한 관대한 처벌을 주장한 카이사르가 성난 민중들한테 곤욕을 치뤘을 때 그를 보호해 준 것도 키케로였다. 이런 걸 다 빼먹고 카이사르가 키케로를 도와준 것만 강조하다 보니 졸지에 키케로만 은혜도 모르는 찌질이로 만들어 버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는지도.

  • 그러다 보니 카이사르에게 불리한 일화는 은근슬쩍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카이사르는 첫 번째 법무관 재임 당시 폭력 시위를 주동하고 원로원의 권위를 무시하는 등 분별 없는 행동으로 직위를 시작하고 몇 주만에 법무관에서 해임당했는데, 곧바로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 다시 복직된 적이 있다.[38] 아직 정치적 풋내기였던 카이사르가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 못해서 벌어진 일종의 '사고'인 셈인데, 카이사르가 원로원 앞에 고개 숙인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는지 이런 이야기는 로마인 이야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 보나 데아 제전 당시 명문 귀족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여장하고 카이사르의 집에 숨어 들어왔다가 들켰고 결국 카이사르가 아내와 이혼한 사건이 있었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남의 여자 뺏기의 대가 카이사르가 아내를 뺏긴 남자로 보이는게 싫었던지 클로디우스와 카이사르의 아내 폼페이아가 불륜 관계였던 것은 쏙 빼먹고 클로디우스가 폼페이아를 짝사랑해서 침입했다고 쓰고 있다.

  • 카이사르가 어머니와 동침하는 꿈을 꾼 후 점술가에게 그가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는 해몽을 들었다는 에피소드에서, 사실은 그냥 동침이 아니라 강간이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꿈 속의 일이며 카이사르 본인도 꿈 내용에 크게 당황했다고 하니 그의 도덕성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나, 그래도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의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더렵혀질까 걱정했는지 깨알 같은 배려심을 발휘해 강간 대신 동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듯 하다.

  • 카이사르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극에 달한 이 책에서 거의 유일하게 카이사르의 변호사 시절은 실패의 연속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키케로를 비롯한 당대의 기록에는 카이사르의 변론은 매우 우아하고 설득력이 높았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카이사르 본인도 자신의 변론기록을 출판했을 정도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재판의 결과 자체는 패배로 끝난 건 사실이지만, 당시 속주 총독의 직권남용에 대한 재판에서 승소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점에서[39][40], 카이사르의 변호사 경력은 대중과 원로원에게 자신의 뛰어난 언변을 보여주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면에서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으로 보아야 한다. 작가가 유독 카이사르의 변호사 경력만 실패로 묘사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작가의 저술에서 일관적으로 보이는 지식인에 대한 혐오에서 비추어볼 때, 카이사르에게 지식인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변호사 이미지를 씌우기 싫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 역시 카이사르 신격화 문제인데, 키케로가 소 카토의 자결을 칭송하는 ‘카토’라는 글을 발표하여 로마에 카토 동정론이 형성되자 카이사르가 이에 대항하여 직접 안티 카토라는 제목으로 카토를 디스하는 글을 써서 발표했는데, 원문은 현존하지 않는다. 시오노는 이 글에 대해 카이사르가 카토를 논리적으로 비판한 글이었을 거라고 미화하지만 다른 사료에 전하기로는 카토의 음주벽과 아내와 이혼하고 친구와 결혼시켰다가 그 친구가 죽자 아내와 재결합한 일 등을 들춰내 ‘아내 팔아먹은 알콜중독자 샛퀴’로 매도하는 등 아주 직설적인 비방글이었다고 한다.# 역시 ‘나의 카이사르가 그럴리 없어!’ 심리의 발로로 보인다.

  • 탑수스 전투를 왜곡해서 묘사하고 있다. 탑수스 전투는 먼저 보병은 우측에 제 9,10군단, 좌측에 제 14,13군단 그리고 중앙에 3개 군단을 기본적으로 배치 후, 제 5군단을 좌우측에 나누어 종심을 두텁게 하였고, 기병은 양익에 배치한 정석적인 회전이었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무슨 생각인지 중앙에 기병을 배치해서 중앙 돌파 후 포위 섬멸했다고 창작해서 서술해 놓았다.

  • 악티움 해전 당시 아그리파가 군함에 '한팍스라는 화기(火機)를 장착해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라고 기술했으나, 이는 포에니 전쟁 시기 로마 군선에 장착되었던 등선육박전용 사다리인 코르부스를 대체한 갈고리밧줄인 '하르팍스'를 잘못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화기라고 기술한 것을 보면 후대의 그리스의 불과 혼동한 듯.#

3.5. 6권[편집]


  • 아르미니우스베르킨게토릭스를 비교하면서 전자에 대해 부정적, 후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술. 로마인 이야기 6권에서 이들을 비교하면서 갈리아인들을 단결시킨 베르킨게토릭스와 게르만족과도 내전을 벌인 아르미니우스의 차이점을 들어 비교했다.
하지만 타키투스와 같은 당시대 로마인들조차 자신의 민족을 위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아르미니우스를 적이지만 훌륭하다며 높이 평가한 것을 보면 조금 지나칠 정도.[41] 사실 베르킨게토릭스도 근본적으로 부족 체계인 갈리아 인들을 단결시키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그의 실패에는 갈리아 부족들의 대립 관계 역시 큰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비슷한 문제로 패배한 아르미니우스에 비해 특별히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아르미니우스는 동족에게 죽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의 손에 죽었다는 정도인데, 베르킨게토릭스가 죽은 원인도 결국 갈리아인들이 투쟁을 포기하고 그를 로마인들에게 넘겼기 때문임을 생각해 보면 결국 다를 건 없다고 볼 수 있겠다.

  • 보조병 복무 기간을 25년으로 정한 황제가 누군지 자료 부족으로 알 수 없다. 시민권 수여 역시 마찬가지지만 전역 증서의 발견을 근거로 학자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부터 보조병이 만기 제대시 로마 시민권을 부여 받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는 기본적으로 로마 시민권 수여에 짠 인물이었고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관대한 인물이었다.

  • 로마 군단병의 복무 기간은 처음에 16년+4년(예비군)이었다가 재위 후기에는 20년+5년(예비군)으로 변화하였다. 아마도 클리우디우스 황제, 적어도 플라비우스 왕조 시기에 25년 복무로 확립되어서 보조병과 같아졌다.

  • 로마군에게 '전우 여러분'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지휘관들이 자신 휘하의 군사와 친밀하게 여겨지는 걸 방지해서가 맞다. 또한 일반 지휘관은 못쓰게 했지만 본인과 황족(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등)은 '전우 여러분'을 잘만 썼다.

3.6. 7권[편집]


  • 티베리우스 시기 판노니아 방면 군단의 반란을 선동한 군단병 페르켄니우스가 동료 병사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처지를 토로하면서 한 연설을 비판하면서, "이 돈으로 옷이며 무기며 천막을 사야 하고"라는 부분을 놓고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군복이나 무기나 천막은 식량과 함께 나라에서 지급해주었으니까, 모든 것을 자비로 마련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현대 연구에 따르면 페르켄니우스의 연설 쪽이 참말이며,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은 신뢰할 만한 출처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반론이고 독자를 뻔뻔하게 속이는 거짓말이다.

현재 연구에 따르면 당시 로마군은 식량, 장비(무기, 텐트, 의복, 신발, 건초 등)을 봉급으로 구매했음이 밝혀져 있고, 페르켄니우스의 발언은 주요 사료로 취급받고 있다. 물론 이 발언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자료에서 교차 검증이 충분히 된다. 실제로 2021년에도 기원후 1세기 마사다 요새 공략전에 참가했던 로마 기병의 월급 명세서가 발견되었는데, 월급에서 식량, 말 사료값, 군장 값 등이 공제되어 실수령액이 사실상 0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군 유적지나 관련 유물들 중에는 로마군 병사들이 고향의 가족들한테 "생활비가 모자라니 돈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들을 보냈던 사실들이 흔하게 발견된다. 다만 사적으로 써야 하는 돈의 규모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어느 정도 합리적인 선을 그었을 가능성이 높은데[42]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이 점은 보조병도 마찬가지.

해당 연구는 제껴놓고서라도, 그냥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자. 페르켄니우스는 로마군의 병사이고 그 연설을 듣는 동료들도 같은 로마군 병사이며, 로마군 병사의 생활에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로마군 병사인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앞에서 연설하면서 말도 안되는 거짓부렁을 늘어놓으면 "저새끼 헛소리하네."라고 생각하지 도대체 누가 "그 말이 옳소!"라고 동조하겠는가? 이런 선동적 연설을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아무 근거도 없는 그냥 자기 망상으로만 부정할 수도 없다.

당장 페르켄니우스의 말이 거짓이라면 게르마니아 방면에서 일어난 군단 반란 당시 장병들이 게르마니쿠스 앞에서 대놓고 항의한 말이 똑같은 이유가 설명이 안 된다. 노역을 빠지기 위해 백인대장에게 준 뇌물규모, 개인생활과 저축에 부담이 될 만큼 과도할 정도의 장비값[43], 월급 체불, 분명 20년 복무를 약속해놓고 만기전역자를 묶어놓는 식으로 지키지 않는 점, 군기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이뤄진 가혹한 체벌 등이 똑같이 거론되었다. 게다가 반란에 대한 처벌이 혹독하기로 유명했던 로마군에서 게르마니쿠스는 유혈사태까지 벌어진 반란을 진압한 뒤 주동자급 몇몇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봐줬으며 게다가 병사들의 처우개선 요구를 일정부분이나마 로마에 가서 반영해달라고 요구해야 했다.[44]

도대체 시오노 나나미가 왜 이런 반론을 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데, 현대적인 군사 시스템 관념을 그대로 대입해서 군대라면 당연히 무기나 군복 등의 물자를 지급해주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45] 사실 이는 현대 작가들이 흔히 하는 실수이며, 영지물만 봐도 이런 고증 오류를 상당히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근대 시기까지만 해도 군인이 무기나 갑옷을 스스로 장인에게 주문하거나 해서 마련하는 문화권은 흔히 있었다. 오히려 무기나 갑옷까지 모조리 제조해서 지급하는 경우는 상당히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 전근대의 경제 규모로 표준화된 장비를 생산하고, 이를 병사 수만 명에게 일괄적으로 보급하다가는 영주부터가 파산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주문제작 방식이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중세의 갑옷 유물이 제각기 다른 모양인 것이기도 하다.

  • 암살자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그를 따르는 20여명의 근위대 병사들은 칼리굴라와 부인, 딸을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클라우디우스를 비롯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족 자체를 싸그리 다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당시 집정관은 미리 짜인 각본처럼 황제 개인 금고와 국고를 모두 장악해, 모든 자금을 원로원이 관할하며 카피톨리우스 언덕 내 유피테르와 유노 신전에서 공화정 복귀를 선언할 준비를 마쳤다. 따라서 아버지의 입장에서 칼리굴라를 죽였고 일부로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옹립했다는 작가의 창작은 말이 안된다. 당장 클라우디우스를 근위대 병영 안에서 새 황제로 옹립한 세력은 칼리굴라를 죽인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클레멘스 등의 지휘관들과 다른 근위대원들이었고, 모든 근위대 장병들 역시 칼리굴라 암살에 가담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타키투스, 디오의 기록을 보면 근위대 9개 대대와 황제 개인경호를 맡은 게르만 호위대의 경우, 그 자리에서 황제와 황실 노예를 싸그리 살해한 암살자 일부와 원로원 의원 몇명을 그 자리에서 죽인 상태였고 율리우스 가문을 지지한 민중들은 세력을 모아 암살범 처벌을 외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진 상태였다. 따라서 시오노 저서 내용처럼, 카이레아 일당이 칼리굴라가 답이 없어서 죽였다거나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고 황제를 죽인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를 증명하듯 제위 등극 과정 전후로 클라우디우스는 재빨리 근위대와 황실 네크워크 등을 통해 공화정 복귀 움직임 차단에 주력하면서, 신원을 확보한 암살자들을 체포해 카이레아만 따로 반역죄와 가족법 위반 혐의로 처형했던 것이다. 실제 카이레아의 죄명은 '칼리굴라 황제를 죽이고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죽이려고 한 죄'였다.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를 처음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발탁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해놓고 이후에는 사실상 티베리우스의 문하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헌데 코르불로는 티베리우스에게 기용된 사람이 아니며, 가계와 클리엔텔라 관계 역시 대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 쪽 인맥인 원로원 귀족이다. 코르불로는 이탈리아가 고향인 도미티우스 가문 사람으로, 태생부터 원로원 의원 아버지와 원로원 가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코르불로 외삼촌과 어머니가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의 친구들이었는데, 외삼촌은 게르마니아 전쟁 전부터 칼리굴라의 조부 드루수스 참모 출신으로 드루수스가 요절한 이후 티베리우스를 따른 사람이다. 이는 어머니도 비슷해, 어머니 역시 드루수스의 옛 측근, 게르마니쿠스 쪽 인사들과 친구였다. 이는 부친 역시 비슷해, 그 역시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아들 쪽 인사였을 뿐 티베리우스 문하생과는 거리가 먼 인사였다.

더욱이 코르불로 외삼촌은 티베리우스 시대 후기에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가 음탕하게 산다는 풍자시를 지어 자살해, 일찌감치 티베리우스 쪽과는 끈이 떨어진 인사였다. 따라서 시오노 나나미 주장처럼 코르불로가 티베리우스에게 발탁되다시피한 문하생이라는 설명은 가계, 성장배경부터 맞지 않는다. 실제 기록을 보면 코르불로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티베리우스가 죽고, 칼리굴라가 권력강화에 매진할 무렵부터였다. 그는 이부 여동생 밀로니아 카이소니아가 칼리굴라의 부인이 되면서 요직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마크로 제거 이후 칼리굴라가 삼촌 클라우디우스와 그 친구 갈바, 신참자들인 베스파시아누스 형제 등을 기용할 때 보결집정관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한 대표적인 칼리굴라 쪽 인사였다. 아울러 그는 칼리굴라 가족이 몰살당하면서 그 기회를 잃는 듯 했지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존속하고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칼리굴라 암살 정국이 수습된 이후 보다 전면에 나선 인사였다.

  • 바울로의 아테네 설교에 대해 시오노는 아테네 시민들이 그의 설교에 격분하여 아테네에서 추방했다고 말하지만 사도행전을 비롯한 실제 문헌에는 바울로가 추방당하지 않고 스스로 아테네를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아테네 시민들의 반응도 격분이라는 일률적인 것이 아니라 조롱, 소극적인 동의("당신의 의견은 다음에 다시 듣겠다."), 적극적인 동의 등 다양했다.

3.7. 8권[편집]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가 집정관 자리도 요구하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났다고 시오노 나나미는 설명한다. 그가 다른 정치인과 다르게 은퇴한 후 집필에 몰두한 건 사실이나 73년도 집정관을 역임한 뒤 은퇴하였다. 다만 황제 자리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베스파시아누스를 밀어준 것은 사실이며, 내전을 보고 황제 부적격자들의 즉위가 얼마나 골 때리는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고 적극적으로 막으려 노력한 소신은 분명 있었다.

  • 베스파시아누스가 네로~오토의 근위대와 비텔리우스의 근위대를 조금씩 각 군단에 배치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더 관대하게 처리했다. 한번에 처리하지 않고 온건하게 근위대에서 내보낸 건 맞는데, 새 황제에게 충성하는 조건으로 잔류하는 게 가능하였고 그렇지 않더라도 무키아누스가 보낸 도미티아누스의 조건(명예로운 전역과 토지 수여)을 수락하고 조금씩 퇴직했다.[46] 3배의 연봉을 받는 근위대원들을 1/3 연봉을 받고 혹독한 전방에 보낸다는 건 비텔리우스가 잘하던 그 정치적 보복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말만 지방 발령이지 사실상 정치 보복성 해고 통보이기 때문이다.

  • 비텔리우스 형제와 아들을 빼고 관용을 베풀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물론 마구잡이로 정치 보복을 해서 수만명씩 처형한 것은 아니지만, 네로 시대의 음모와 갈바의 양아들이 된 걸로 유명한 명문 피소 가문의 남성들이 대거 처형되는 등 보복 자체는 있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 여러 음모에 휘말리고 내전으로 인해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명문 귀족들이 많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 중 또 많은 이들이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에게 대거 숙청되었다. 본국 지방의 기사계급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 것이 그 숙청을 하게 된 큰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국가 재정을 재건하는 데 세율을 올리지 않았고 무슨 건전한 상식으로 극복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네로가 빵구 낸 재정 피해를 400억 세스테르티우스로 설정해, 재정이 나아질 때까지 속주세를 최대 2배나 인상하였고 면세 혜택이 있는 도시에 세금을 부과하였다. 다만 네로의 방만한 재정 운영과 내전기 군비 소모, 그리고 속주 반란 진압비를 전부 계산해 보면 세금 인상을 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400억 세스테르티우스까지 측정한 것은 뻥튀기했다고 해도 이는 불가피한 처사였다 봐야 한다.

  • 비텔리우스 황제가 근위대를 9개에서 16개 대대로 늘렸다고 서술해 놓았다. 16개 대대로 늘린 건 맞지만 네로 황제 시기에 이미 9개 대대에서 12개 대대로 늘어난 상태였기에 12개 대대에서 16개 대대로 4개 대대가 더 추가된 것이다.

  • 베스파시아누스가 소변세를 매긴 대상을 공중변소 이용자가 아니라 소변을 수거해 사용하는 양털 표백업자들이라고 서술했는데,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공중변소 이용자들에게도 이용요금 형태로 소변세를 매겼다고 보고 있다.

  • 베스파시아누스가 정실 부인을 사별한 후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해방노예 여성 카이니스는 본래 소 안토니아가 신임하던 해방노예 비서관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소 안토니아의 아들인 클라우디우스에게 천거하는 등 정치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많이 도운 은인이자, 정치적 동맹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앉은 후로 사실상 황후처럼 대접받았다는 기록이 분명히 있는데도 시오노는 그냥 해방노예 출신 여자를 정부로 삼았다 정도로 서술하여 카이니스의 역할을 무시하고, 베스파시아누스가 마치 아내와 사별 후 해방노예를 정부로만 부린 듯 서술하고 있다.

  • 도미티아누스가 조카딸 율리아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것을 황후 도미티아가 알게 되어 암살을 묵인했다는 학설을 따라 서술했다. 하지만 도미티아가 이후 재혼하지 않고 남은 평생을 '나는 도미티아누스의 아내'라고 말하며 수절하는 등 부부 사이가 좋았다는 증거도 많다. 때문에 도미티아 묵인설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이 부분은 서술하지 않고 마치 도미티아가 남편에게 한을 품었다는 식으로만 서술했다.


3.8. 9권[편집]



  • 트라야누스 모계도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로마 시민권자였고 잘나가는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의 어머니의 이름(marcia)과 모계 친척들도 알려져있다. 트라야누스의 이모는 티투스 황제의 두 번째 아내였다. 아마 첫 번째 속주 출신 황제라는 것을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왜곡했거나 집필 당시에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 다키아 전쟁을 다루는 과정에서 로마군에 소속된 누미디아 기병들이 마치 사람과 말이 모두 갑옷을 입고 중무장을 한 사르마티아 중기병들을 상대로 정면돌격을 하여 그들을 패주시킨 것으로 묘사했으나, 이는 군사 병과에 대한 그녀의 무지가 반영된 터무니없는 상상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가벼운 무게를 가진 물체가 그보다 무거운 무게를 가진 물체를 상대로 정면돌격을 해서 물리친다는 서술 자체가 말이 안되는 소리다. 애초에 누미디아 기병 자체가 정찰, 추격, 교란 같은 임무를 띈 경기병이며 그런 경기병이 중무장을 한 기병을 상대로 정면돌격을 한다는 묘사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중무장 기병들이 만들어진 원래의 목적은 바로 그런 경기병들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47]

  • 트라야누스의 아버지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 하드리아누스 아페르를 전형적인 신참자로 소개하면서 이들이 베스파시아누스 덕에 원로원에 입성한 것처럼 소개한다. 하지만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때 이미 베스파시아누스와 같은 원로원 의원이 됐고, 유대전쟁을 코르불로가 진두지휘할 때부터 군단장으로 있다가, 지휘계통상 베스파시아누스가 책임지면서 그와 함께 한 사람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본가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직속 휘하 백인대장을 시작으로 했고, 이미 아우구스투스가 옥타비아누스로 불리던 때부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수립전의 공화정 말 내전부터 로마 중앙 정계에 신참자로 등장한 이탈리아계 히스파니아 이주가문이었다. 당장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 아페르는 고향이 로마였고, 조부 대부터 원로원 의석을 세습 중인 원로원 귀족으로 법무관까지 수월하게 올라간 귀족이었다.

  • 하드리아누스의 1차 순행 중에서 "게르마니아 방벽의 절반이 동쪽으로 30킬로미터쯤 확장된 것도 이때의 시찰이 낳은 성과였다."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동쪽으로 더 확장한 것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의 결정이었다.

  • 하드리아누스의 즉위에 의문점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이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4가지 이유뿐만 아니라 다양한 에피소드와 의혹이 더 있다. 정확한 건 하드리아누스 항목을 참조 할 것.

  •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신전 건축을 비판한 대 건축가 아폴로도루스를 해임했다고만 서술했지만 대부분의 기록에는 하드리아누스가 아폴로도루스를 처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업적을 인정하는 원로원에서조차 처음에는 신격화 거부를 의결했던 이유 중 하나가 업적으로도 도저히 덮기 힘들었던 그의 인간성 때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못했다'라고 말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순행 및 지방 재정비를 하는 과정은 다 돈이었다.(시황제의 순행이나 강희제/건륭제의 순행을 보자) 물론 생각없이 빚내서 한 건 아니고, 트라야누스 황제가 마련해 놓은 엄청난 자금을 토대로 여러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고 하고 싶은대로 베풀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내부 재정비를 하기 위해 파르티아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정복 사업을 극도로 자제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봉기로 인해 부득이하게 실행해야 했던 반란 진압을 빼면 애초에 하드리아누스 시절에 벌인 대규모 군사 작전 자체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효율적인 지출에도 불구하고 너무 돈을 많이 써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즉위 때 이미 재정적자가 심각했고, 결국 국고를 다시 채우기 위해 은 함류량을 낮추는 화폐개혁까지 강행했다.[48]

  •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정상 이유로 2개 군단을 감축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 9 히스파니아 군단과 제 22 데이오타리아나 군단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 적어도 22 데이오타리아나 군단은 하드리아누스 시대까지 기록이 남아 있으며 유대 반란기 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파르티아 전쟁에서 파르티아군에게 궤멸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제국의 안전보장을 맡고 있는 로마군 안에서 수적으로나마 속주민이 로마 시민을 능가해서는 안된다.’라고 적혀 있지만 이미 플라비우스 왕조부터 보조병의 수가 군단병을 넘어 선 것으로 파악되고 오현제 시대에 그 흐름이 그대로 유지된다.

  • 하드리아누스는 즉위 직후 다키아로 침입한 사마르타아족, 록솔라니족과 강화를 맺고 다키아 일부분을 포기한 것은 서술하지 않았다. 루머로 황제는 다키아 전체를 포기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3.9. 10권[편집]


  • 로마 도로와 역참에 대한 서술을 하면서 로마 도로에 1로마마일마다 서 있던 이정표 모양으로 만들어 표면에 주요 역참이 있는 도시들과 그 사이의 이동거리를 기록한 은컵들(Vicarello Cups)에 대해 서술하면서 '이 컵이 마치 현대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도로지도처럼 역참에서 판매하는 물건이었지 않을까? 여행자가 이 컵으로 물을 마시면서 다음 도시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 광경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라고 서술했지만, 이 은컵들은 링크에 서술되어 있듯이 일반에 판매하는 물건이 아니라 장거리 여행을 한 어느 귀족이 무사히 여행을 마치게 해준 신들께 감사하는 의미로 신전에 봉헌한 봉헌물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 컵이 판매하는 상품이었다면 비슷한 유물이 또 발견되어야 정상인데 발견된 적이 없을 뿐더러,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귀금속인 은컵을 휴게소에서 아무 여행자들에게나 팔지는 않을것 아닌가.

  • 로마의 목욕탕에 대해 서술하면서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오해인 '로마인은 목욕을 자주 해서 위생적이고 건강했고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대형 목욕탕을 폐쇄하고 목욕을 금하면서 질병이 퍼지고 비위생적 환경이 되었다.'라는 주장을 답습했는데, 로마인의 목욕탕은 그렇게 깨끗하지 않았다. 현대의 목욕탕은 기본적으로 이미 염소소독된 수돗물을 사용하며 상하수도 펌프 시스템을 통해 계속 새로운 물을 쏟아붓고 오염된 물은 배수구로 빼내고 있지만 당시의 목욕탕은 수도교를 통해 흐르는 물이 공급됐는데 물론 고인물이 아니니 비교적 깨끗한 건 맞다. 그러나 염소소독도 펌프도 없던 시대인데다 비누 대신 기름으로 때를 벗겼기 때문에 황제들이 세운 로마 시내의 호화 목욕탕도 수질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전염병이 있는 환자들에게까지 목욕을 권장하여 수인성 전염병의 온상이나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익사사고까지 자주 일어났다고.# 그리고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대형 목욕탕을 폐쇄한 것은 유지 보수가 안된 수도교들이 파괴되면서 물의 대량 공급 자체가 어려워지고, 수질 유지 문제, 또 온수를 만들기 위해 대량으로 소모되는 땔감 문제 등이 겹쳐서 생긴 것이고 중세에도 귀족층은 집에서 물을 퍼다가 목욕을 했다.

  •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0권에서 로마 시대의 문맹률은 매우 낮았고, 로마의 수업료가 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의 읽기와 쓰기를 깊이 연구했던 콜롬비아 대학의 윌리엄 해리스 교수는 고대 로마에서 전체 인구의 무려 90%가 글씨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던 문맹이라고 하였다. 로마의 문맹률이 높았다는 증거로 로마에서는 각 지역마다 돈을 받고 대신 글씨를 읽어주거나 써주는 직업까지 있었으며, 서기 2세기[49] 로마 영토인 이집트 남부의 카라니스 마을 출신인 페타우스라는 서기관은 자기가 파피루스에 12번 베껴 쓴 간단한 문장인 "지방 서기관인 나 페타우스가 이 서류를 제출합니다"조차 7번이나 마지막 단어를 빼먹었을 만큼 실제로는 글씨를 제대로 쓰거나 읽을 줄을 몰랐고, 다른 서기관인 이스키리온은 그가 담당하던 지역에 살던 주민들로부터 문맹이라서 서기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며 고소를 당했는데 이에 대해 페타우스는 이스키리온은 실제로 온갖 종류의 공식 문서에 서명을 해왔다는 이유로 문맹자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다시 말해, 페타우스 생각에 '글을 안다'는 것은 단지 자기 이름을 쓸 줄 알면 다 되는 것이었다(...)[50]고대 그리스와 로마 인구의 대다수는 문맹이었다.


3.10. 11권[편집]


  • 콤모두스에 대한 평가 자체는 악마화된 콤모두스에 대한 평가를 배제하고자 노력하면서 저술해 객관적이라는 평이다. 다만, 암살 과정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 오류가 있다. 콤모두스는 그의 애첩과 근위대장에 의해 암살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동기를 전혀 알 수 없다'고 언급했다. 콤모두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는 콤모두스의 암살 정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면서 그들이 왜 콤모두스를 살해했는지까지 기록했다. 즉 콤모두스가 검투사 막사에 들어가 살겠다고 하자 그의 애첩과 근위대장이 콤모두스를 말렸고 이에 분개한 콤모두스가 이들을 죽이려고 살생부를 작성한 뒤 목욕을 하러 갔는데 애첩이 그 문서를 보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선수를 쳐서 콤모두스를 독살하려 시도했으나 독을 먹어도 죽지 않자 레슬링 코치인 나르키소스를 보내 죽인 것이었다.

그리고 쉽게 묻힌 건 애초에 콤모두스의 무능과 폭정으로 국가가 망하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원로원과 군부 등 로마 지도층이 이미 콤모두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타이밍만 노리고 있던 판에 굳이 먼저 일을 저질러준 자들을 처형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무엇 때문인지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동기는 전혀 모른다. "그들이 콤모두스를 죽이면 손해인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서술한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가계를 설명하면서 어머니와 두 누이가 있었다고 했지만, 세베루스에게는 셉티미우스 게타라는 동복 친형이 엄연히 있었다. 심지어 세베루스의 형 게타는 동생 세베루스가 판노니아에서 처음 제위에 옹립되었을 당시부터 로마 진군에 함께한 일등공신이었고 당시 직책 역시 상당히 높았던 고위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이었다. 작가는 인용체로 세베루스 모친과 두 누이가 현지 언어인 페니키아어만 사용하고, 라틴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주장하면서, 대부분의 이주 로마인들이 현지 혼혈화로 현지어에 익숙했다는 이유로 이 주장을 일반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베루스의 외가는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풀비우스 가문이었고, 이 집안의 경우에는 현지 주민들과 계속 혼혈이 거듭되기 보다는 이탈리아 혈통을 유지된 가문이었다. 심지어 세베루스 일가는 친가, 외가 모두 푸닉 억양이 강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전형적인 속주 일대의 로마 상류층이었고 첫번째 부인 쪽 역시 부유하기로 유명한 아프리카 속주에서 이탈리아 혈통의 부유한 기사계급 출신이었다.

  • 시오노 나나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즉위 전 경력을 설명하면서, 세베루스가 단순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총애만 받은 듯 서술했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세베루스가 완전 무명이었는데 학문을 좋아했다는 철인 황제에게 눈에 띄어 추천도 받고 총애를 받았다는 주장도 거짓이다. 고향을 18살 나이에 떠난 세베루스는 일찍이 이탈리아로 건너가 재정착한 삼촌과 사촌형들이 원로원 의원으로 자리 잡은 상태에서, 친가 어른들의 도움으로 추천을 통해 원로원 의석을 받은 신참자였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주장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학문을 워낙 좋아하고 인재를 보는 눈이 뛰어나서" 뜬금없이 그를 밀어줬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작가는 세베루스의 경력을 마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엄청난 총애를 받은 듯 서술만 하고 있는데, 당장 세베루스의 사르데냐, 히스파니아, 아프리카 속주 파견은 원로원에 있던 세베루스 가의 먼 친척들이나 아프리카 총독으로 파견된 사촌형이 추천서를 넣으면서 일어난 전형적인 행정 인사조치였다.

  • 카라칼라와 근위대장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알력 다툼을 설명하면서, 플라우티아누스를 오래된 고향 친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플라우티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오래된 고향 친구이면서도 외사촌 관계였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군대 복무 조건 개선을 무척 편하게 만들고 로마 제국을 군대의 힘이 강하게 만들었다면서 말한다. 그러면서 세베루스가 마치 로마군 병영 개선과 임금 상승 등을 한 것이 3세기 군인황제 시대의 전조인 양 생각을 갖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렙티스 마그나를 비롯한 세베루스 왕조 시대와 관련된 유적, 유물, 비문이 발굴되기 전 주장이며, 세베루스가 한 조치들은 오현제 시대라고 부르는 2세기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때 누군가는 해야 될 것들이 뒤늦게 세베루스가 해준 당연한 일이었다.

  • 세베루스 황제를 무작정 냉혹하고 선군정치를 빌렸다는 식으로 서술하면서, 다섯 황제의 해와 그 이후 치세를 마치 이탈리아 출신들을 때려 잡는 식으로 왜곡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이전 황제들보다 강압적이고 전제적이었다고 해도, 세베루스는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급속히 재산 수준이 줄고 경제적 정체기를 맞은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들의 경제력 향상과 이 지역 출신 인재들의 복귀를 위해 노력한 황제였다. 또 세베루스 황제의 기본적 통치 방법은 무작정 군대의 지지만 받고 군대의 힘으로 억압 통치하겠다는 입장과는 거리가 먼 황제였다. 2000년대 이후 여러 연구들에서 통계와 유적, 비문 등 해석을 통해 밝혀졌듯이, 세베루스는 중앙집권화와 행정을 통한 관료제 구축을 위해 노력하면서 원시적 도미나투스 체제를 제시한 법률가이자 행정가였던 명석한 황제였다.

3.11. 12권[편집]


  •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속주세가 폐지되어서 세수 감소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로마 시민권을 수여한 건 맞지만 세금은 그대로 내야했다. 상속세와 노예해방세랑 인두세+토지세를 바꾸는 바보는 이 세상에 없다. 카라칼라는 폭군이긴 했지만 상당히 명석하고 법 지식이 풍부한 황제였다. 올린 상속세와 노예해방세는 마크리누스 황제가 다시 돌려놓았다.

  • 이미 6권에서 티베리우스의 동생이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를 이름 미상의 다른 귀족 초상화로 서술한 전례가 있어서 놀라운 일은 아닌데, 12권에서도 카라칼라의 동생 게타의 초상화를 엘라가발루스의 초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 안토니누스 칙령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데 그렇지 않다. 로마 사회의 유동성을 막았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놓으면서 사회 계층표를 넣었는데 호네스티오레스와 후밀리오레스 분화는 이미 오현제 시대에 나타났다.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반도로 더 나아가 속주 각지에 퍼지는 지리적인 상황과 일인독재인 원수정이 시작되면서 로마시민의 실질적 지위는 꾸준히 낮아지게 된다. 오현제 시대가 되면 로마 시민은 호네스티오레스와 후밀리오레스로 분화했고 이 둘을 처벌하는 방식을 다르게 하라고 한 황제가 현군으로 불리는 오현제들이다.

사회 유동성은 오히려 증가했다. 극소수의 원로원 계층과 소수의 기사계급 계층이 관직을 독점하던 게 원수정이지만 3세기부터 모두가 로마인이 되고 잇따른 이민족의 침입으로 실력제일주의가 나타난다. 3세기 황제들과 4세기 로마 장군들의 출신을 보면 얼마나 계층 이동이 활발했는지 알 수 있다.

  •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에도 보조병 부대는 후기 로마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고 해서 군단병의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급여가 유지되었다.

  • 방위선을 지키는 전력의 노령화는 작가 창작이다.

  • 시오노 나나미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때 율리아 마이사가 울피아누스가 기용하면서, 법률가 출신들이 내각을 책임지는 방향인 것처럼 서술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세베루스 왕조 치하에서 군사적 색채를 빼고 법률가 출신의 행정관료들을 근위대장 중 한명으로 기용한 일은 플라우티아누스가 죽은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있던 조치였다. 시오노가 서술하는 것과 달리 카라칼라 시대때의 근위대장 마크리누스만 하더라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절부터 변호사와 재정전문가로 활약한 행정관료 출신 근위대장이었다.

  • 12권에 서술된 3세기의 위기 기간의 황제들을 서술할 때, 19세기 때부터 일찍이 온갖 날조로 가득하다고 고증된 위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속 내용을 사실인양 기록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작가가 상상까지 붙여 서술하고 있다. 특히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출신 배경과 가계를 살펴보면 작가의 상상까지 더해진 현대판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해당 황제들의 가계가 죄다 잘못 서술되어 있다.

  • 고르디아누스 3세의 장인 티메시테우스를 소개하면서, 소년황제가 일찍부터 심취할 정도로 매력적이고 완벽한 섭정이었고 상황 때문에 무너졌다는 식으로만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군사적 움직임을 가져가지 않았으면 고르디아누스 3세가 장기간 재위를 차지했을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그러나 티메시테우스는 그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권신이었고,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는 페르시아의 샤푸르 왕이 241년 침공하기 전인 240년부터 내부적인 이유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프리카 총독이 카르타고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도나우 강에서는 고트족이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터졌다. 이러한 가운데 여러 도시에서 지진이 발생해 인명피해까지 터지는데, 티메시테우스와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 등 주요 내각 인사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개인적 복수를 위해 아퀼레이아 공성전에서 활약한 장군들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기록말살형을 하거나, 연공금 협상에서 율리아 마마이아 같은 실수를 하는 등 곳곳에서 실수를 연발했다. 심지어 똑똑하다고 서술된 고르디아누스 3세 역시 지진이 터지고 동부에서 페르시아가 공격해왔다는 소식에 한 일이라곤, 신탁서를 펼치고 주술행위를 했다.[52] 그런데 시오노는 이러한 이야기는 죄다 뺐다. 아울러 그녀는 동시대 사람으로 원로원과 황제, 고르디아누스 일가 모두를 제3자 입장에서 서술한 헤로디아누스의 의견 등은 아예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등장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본 당대 로마인들의 시각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 데키우스 황제 때 고트족이 침입한 이유는 아라부스 황제 때부터 지불했던 보조금을 일방적으로 끊었기 때문이다. 또한 1년 동안 전쟁 주도권을 갖지 못한 건 아니고 여러 번 큰 승리를 거두었다. 문제는 패배한 고트족이 몸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데키우스 황제는 거절했고, 과거와 달리 결집력이 생긴 고트족은 도망가지 않고 배수진을 치고 저항했기에 대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3세기 게르만족은 카이사르 때 갑옷도 입지 않고 창을 주무기로 쓰는 때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로마군과 같은 스파타를 사용했고, 갑옷도 착용했으며 여러 부족이 동맹을 형성해서 대규모로 침입하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걸 모르니까 '로마인의 혼을 잃어서 그렇다. 과거에 카이사르는 이랬는데 왜 지금은 못함?' 이라는 틀린 소릴 하는 것이다.

  • 갈리에누스 황제의 원로원 의원의 군무직 제외에 대한 평가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미 3세기 초반부터 원로원 의원 중에서 군무 경험자가 줄고 있었다. 그렇지만 또 모든 의원이 그런 건 아니었다. 학자들은 3세기 위기 속에 전문 군인관료들이 필요했던 시대적 상황과, 잦은 내전을 일으키는 원로원 소속의 총독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보고 있다. 이후 군무와 정무를 분리하는 후기 로마 제국을 비판하는데, 21세기 선진국은 어떠한가를 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임을 알 수있다. 전문가가 자신이 전문적인 분야를 맡는 게 당연하다. 전문가들의 모임인 코미타투스나 이후 정식 관료들이 황제 주위에서 올바른 조언을 해줄 수도 있었기에 이후 장군 출신 황제가 대부분이었지만 정치를 잘만 했다.

3.12. 13권[편집]


군제, 가계도, 사두 정치의 영역 부분 및 사실 관계 등등에 있어 오류가 꽤 많다. 처음 1차 사두 정치의 경우 히스파니아 부분은 콘스탄티우스의 관할이 아니라 막시미아누스에게 속해 있었는데, 히스파니아 부분까지 콘스탄티우스가 부제로 다스린 것처럼 되어 있다. 히스파니아는 2차 사두 정치에서 콘스탄티우스가 정제로 승격하면서 받은 영역이지, 1차 때부터 담당했던 영역은 아니었다. 또한 2차 사두 정치가 전개되면서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스리던 아나톨리아를 받았는데 그 부분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또한 시오노 나나미가 찬밥 신세를 받았고 끝내 해체되었다고 자주 이상한 한탄을 하는 프라이토리아니, 즉 근위대의 경우, 실제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극소수의 기간병만 남기고 나머지 정예 병력은 죄다 빼낸 다음 자신과 막시미아누스에게 분배해서 제5요비우스 군단과 제6헤르쿨리우스 군단을 창설했었고, 나중에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가 부제가 되었을 때 각기 막시미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시 그 병력들 중 얼마를 그들에게 나눠줬었다.

막센티우스의 근위대는 계속 잔류했던 기간병을 모체로 재창설된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갈레리우스 휘하에서 탈영한 병력들에 더해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새로 병력을 징집해 거의 새로 만들다시피했던 근위대였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는 프라이토리아니가 내내 찬밥 신세로만 로마에 머물렀다고만 묘사하며 이런 중요한 사실 관계는 생략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근위대 자체를 해체한 건 맞지만, 근위대에서 기원하는 여러 정예 부대들은 여전히 황제 코미타투스들로 기능하고 있었고, 또 밀비우스 다리에서 다 죽지도 않았다.

일부는 콘스탄티누스가 그들의 분투에 매우 감동해 살려줬고, 리미타네이로 배치되어 여전히 명성을 날리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가 제대로 자료 조사를 하지 않았다든지, 아니면 알면서도 콘스탄티누스의 냉정하고 비정한, 로마적 전통을 끝낸 기독교인 황제적 이미지를 덮어씌우기 위해 생략했든지,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한편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인 발레리아와 혼인한 게 맞지만, 총각으로서가 아니라 홀아비였다. 갈레리우스에게는 그 전에 아내가 있었으나 딸 하나만 낳고 사별한 상태였다. 발레리아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몸이라 의붓딸을 자기 자식처럼 키웠고, 또한 갈레리우스가 나중에 낳은 사생아를 자기 자식으로 입양해 키웠다. 그런데 로마인 이야기에는 이 딸이 발레리아의 친딸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으며, 갈레리우스의 아들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다. 각 중요 인물에 대해선 전기의 형식을 동원해 조명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인물인 갈레리우스에 대해선 대단히 비중이 박하고 사실 관계가 틀린 것이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에 대해 냉철하고 비정한, 로마를 로마답지 않게 만든 황제란 선입견이 있어서인지 이상한 누명도 씌운다. 막센티우스가 앞서 언급한 갈레리우스의 딸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은 건 사실이지만, 큰 아들 발레리우스 로물루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침공해오기 훨씬 전에 어려서 죽었고 작은 아들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는 콘스탄티누스가 원로원에 명령을 내려 막센티우스의 어린 두 아들을 죽이라고 했다고 말한다. 이는 사실 관계와 틀린 오류다.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밑에서 뿐만 아니라 갈레리우스 밑에서도 황제 친위대인 코미타투스의 고급 장교로서 상당한 활약을 했었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늘 선두에 나서는 특유의 행동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는데, 이는 로마사 연구자들이 콘스탄티누스 또한 고전적인 로마적 비르투스를 체현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라 평하는 부분이며 기번조차도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분명히 언급하는 내용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일화들을 생략한다.


3.13. 14권[편집]


콘스탄티우스 2세를 왜곡까지 하면서 질투에 눈먼 찌질이로 묘사하였고,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테오도시우스 1세에 대한 내용 또한 오류와 왜곡이 심각하다. 암브로시우스 참조.

또한 기독교가 우세해진 3~4세기 로마에 호네스티오레스/후밀리오레스 계급 구분이 생겼고 두 계급이 거의 유동성이 없었다는 완전히 틀린 소리다. 저 법적 구분은 이미 기원후 1세기에 단초를 보이고 법제적으로 완전히 확립되는 건 기원후 2세기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때다.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 3~4세기 로마를 의도적으로 최대한 저평가하려다보니 이런 객관적 사실조차도 잘못 이해하게 된 것이 또 다시 확인된다.


3.14. 15권[편집]


아이티우스가 아닌 스틸리코를 최후의 로마인으로 설정하였다. 물론 최후의 로마인이 누구냐는 역사가의 의견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아이티우스를 필요 이상으로 까내리기 위해 스틸리코를 이용하다시피한게 문제. 스틸리코는 이이제이에 능하지만 아이티우스는 손에 든 독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겼을 뿐이라고 쓴 서술은 압권이다. 물론 아이티우스도 5세기 로마의 방어에 있어서 비판점이 없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있었기에 서로마 제국이 영토가 누더기가 되고 멸망하는게 30년 이상 늦춰질 수 있었다.

비잔티움에 대한 내용 대부분 : 동로마 측에 대해서는 시오노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주제만 다루며[53], 그나마도 아예 사실과 틀린 부분이 많다.

타기나에 전투에서 동로마군이 벨리사리우스 못지 않은 명장인 나르세스의 정교한 전술을 통해 동고트군을 분쇄했고, 당시 동로마군의 주력은 용병이 다수 있었어도 어디까지나 로마인 부대들이었고 이들이 과반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르세스가 전투 전에 용병들에게 많은 재물을 보여준 것만 부각하고, 동로마군 주력은 어디까지나 용병이었다는, 사실 관계와 다른 편견을 자꾸 부각시키려 한다. 물론 이후에 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프랑크군 또한 크게 격파한 건 당연히 생략한다. 애초에 동고트 제국이 망한 뒤에도 이탈리아에는 게르만족의 침략이 계속 이어졌고 568년 롬다르드족의 침략이 이뤄지고 나서야 이탈리아 반도의 절반이 동로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롬바르드족의 침략에 저항할 힘어 없었다고 서술했지만 실제로는 서로마 통치체제의 핵심권역만을 겨우 장악한 상태에서 애매하게 지배하던 곳들을 빼앗긴 것이며, 라벤나를 비롯해 북부에서도 확고하게 장악한 지역과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반도의 절반은 여전히 건재했다.

동로마 제국이 재정 낭비만 한 것으로 다루지만, 실제로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의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고 재정을 절약하기 위해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실제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관리였던 카파도키아의 요한네스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세금을 거둔 것과 마우리키우스가 전쟁으로 엄청난 비용이 빠져나가는 와중에 국고 소모를 줄이기 위해 긴축정책을 실시한 것만 봐도 알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동로마 제국의 재정이 어려웠던 건, 동로마의 무능함 때문이 아닌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인한 인구감소와 세입 감소, 유스티니아누스가 벌여놓은 원정들로 인한 비용,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포함한 대규모 토목건축, 사산조 페르시아, 아바르족, 롬바르드족 등 이민족과의 지속적인 전쟁 때문이라고 봐야한다. 게다가 티베리우스 2세의 긴축 정책만으로도 재국의 재정은 금새 회복될 수 있었다. 시오노가 묘사하는 것 마냥 동로마 제국 체제의 근본적 한계가 이유는 아니었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이 이후의 제국에서 활용되지 못했다는 아예 사실과 다른 소리도 대놓고 뻔뻔히 한다. 자기가 싫어서 편향된 사료에 편향된 해석을 들이대는 것도 문제가 되는 판에 이렇게 아예 틀린 정보를 집어넣는 건 역사학자는 고사하고 작가로서도 실격이다.

동로마 제국에는 라틴어를 이해할 줄 아는 식자층이 많았으며 법관들은 라틴어를 반드시 배워야 했고, 이슬람 제국의 맹진 시기에는 라틴어 가능자가 대폭 줄어들지만 이것은 국가에서 교육에 들일 예산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지 있지도 않은 로마 혼이 열등한 그리스인들 때문에 갑자기 죽어서가 아니다.

로마법 대전은 이 시기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리스어 번역본과 다이제스트판이 나오면서 활용되었다. 애초에 로마법 대전이 르네상스 때 재조명을 받은 건 동로마 제국이 로마법 대전을 보존한 게 이유인데, 그렇다면 동로마 제국은 아예 쓰지도 않는 법전을 국가 예산까지 들여 생돈 써 가며 보존하는 나라였다는 말인가? 당연히 말이 안 된다.

또한 로마 제국은 라틴어를 쓰며 로마가 수도인 제국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어를 쓰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도인 제국이라 다르다는 편견도 피력한다. 물론 이런 얘기는 시오노 나나미만 하는 소린 아니지만 후기 로마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아예 하지 않는 얘기며, 전기 로마사 전문가라도 제대로 후기 로마사를 보는 사람은 하지 않는다.

로마 제국은 공화정 때부터도 그리스어를 상용했고 제정 시절에도 원래 제국 동부는 그리스어가 공용어였으며, 특히 로마 상류층이 향유한 문학들은 그리스어로 제작되었다. 애초에 공화정 말기~제정 초기의 대표적인 서적인 <신약성경>만 하더라도 다른 민족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공용어인 그리스어로 쓰였으며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시 <명상록>을 그리스어로 썼을 정도이다. 즉 로마 제국이 그리스어를 쓰는 것은 절대로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54]

더군다나 소위 말하는 동로마 제국의 시절에도 라틴어는 아주 오랫동안 여러분야에서 사용되었으며 특히 군사용어는 헤라클리우스 황제 시대때까지 라틴어였다. 또한 수도의 경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어디까지나 애칭일 뿐이었으며, 정식 명칭은 '새로운 로마'(노바 로마)였다. 즉 동로마 제국은 명백하게 '로마시(市)를 수도로 하며, 로마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로마 제국 자체'이다. 물론 여전히 문학적 수사로 볼 때는 유효한 얘기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이걸 우월하고 열등한 것을 가르는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큰 문제다.

4. 전반적 문제점[편집]



4.1. 노예제도[편집]


노예제도를 터무니없이 미화하였다. 마치 노예제가 현대의 고용-피고용이나 입양-피입양 관계처럼 묘사되었다. 로마 시대의 노예들은 근세기의 아프리카 흑인노예와 달리 가족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주인이 죽을 땐 해방시켜주는 게 다반사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로마 시대때엔 도시 노예, 교외 노예 둘로 나뉘었으며 시오노 나나미가 설명한 이런 노예는 도시 노예 및 가족 노예에만 해당되었을 뿐이다. 이 도시 노예들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엘리트 노예들이나 혹은 로마인 가족과 같이 생활하면서 정든 노예들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이들의 상당수가 정치적 문제 등으로 숙청되는 주인과 운명을 함께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근데 따지고보면 19세기 미국 흑인노예도 집안에서 주인과 생활하는 노예는 그럭저럭 대우를 받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이런 경우 주인이 죽으면서 해방시켜주는 경우도 많았다. 고대 로마만이 특별한게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봐야한다.

그러나 이런 노예보다는 교외 노예가 훨씬 많았고 이들의 운명은 그냥 19세기 미국 흑인노예나 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에 넘쳐나는 현대판 노예, 또는 섬노예와 비교하는 게 오히려 더 정확하다. 특히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운명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게다가 소녀 노예들은 주인의 성욕의 해소 대상이 되기도 했다.[55] 심지어 로마 귀족들 중에서는 여자 노예들과의 성관계에서 얻은 자신의 아이들도 노예로 삼아서 노예를 사기 위해 일부러 시장에 갈 수고로움이 없어져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는 자가 나올 만큼, 노예들의 인권 상태가 형편없었다[56].[다만] 뿐만 아니라 엘리트 노예들 역시 그리스 귀족들이 해적에게 잡히거나 전쟁을 지휘하다가 져서 포로로 잡혀 팔리는 등 그야말로 재수 제대로 옴 붙은 경우가 꽤 많았는데 주인이 죽을 때 해방시켜준다는 것만 가지고 미화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해방시킨 사례란 것들도 상당수는 주인의 자녀 출신인 노예들이었다.

또한 노예가 해방되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만도 없는 게, 로마에서는 해방 노예가 옛 주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를 계속 지지하는 것을 사회적인 관행으로 여겼고 만일 이를 어기면 배은망덕한 자라고 욕을 먹었다. 그리고 해방 노예가 옛 주인한테 대놓고 반항하는 식으로 잘못을 저지르면, 옛 주인은 해방 노예의 해방을 취소하고 다시 노예로 되돌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 완벽하게 벗어나려면 로마 시민이 되어야 했는데,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속주민이 부족단위로 입대하는 보조부대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닌 가진 것 없는 해방노예가 시민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아울러 제정 초기까지는 로마의 가정에서 주인한테 노예가 반란을 일으켜 죽이면, 그 집안의 다른 노예들이 설령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모두 죽임을 당할 만큼 가혹한 처벌도 있었는데, 그나마 이것까지는 너무 가혹하다 싶었는지 실제로는 법정에서 가담자만 처형하도록 판결하는 게 보통이었고, 오현제 시기에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4.2. 라틴어[편집]


라틴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하는데 고대음과 중세음을 혼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대음인 "카이사르"와 중세 라틴어음인 "체자레"의 음가 차이를 단순히 학설의 차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건 그녀가 라틴어 발음변천사나 고전 라틴어나 속라틴어의 차이를 잘 모른다는 이야기.


4.3. 리메스[편집]


12, 13, 14권에서 계속 반복되는 문제점. 4세기 이후 로마 제국이 선방어 전략을 포기하고 종심 방어 전략을 채택한 것은, 로마 제국 자체의 내적 역량이 약화된 탓도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국경 지대 자체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이전과는 달리 갈수록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것이 파밀리아라는 개념의 쇠퇴라고 설명하지만 근거없는 해석이다.

애초에 시오노 나나미가 주장한 '리메스', '안전한 국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는 '얼마 안 되는 최전성기 동안' 로마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만 가능했던 이상적인 조건일 뿐이며, 이것을 전반적인 '로마의 대전략'이나 '제국 성립 기본 조건'으로 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틀린 얘기다.

적이 국경에 들어온 다음에야 요격하는 체제가 문제라고 거듭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3세기 때처럼 일단 방어선이 뚫리고 나면 적에게 강요하는 희생은 거의 없는 채 발칸 반도에서 뚫린 타격이 아테네까지 그대로 가는 상황은 정상적인가? 심지어 오현제 말기에조차 게르만족의 대규모 공세에 방어선이 뚫린 일이 있었을 정도다.

선방어를 하기 위해 로마군은 예방전쟁을 해서 국경을 지켰다는 근거를 들기도 하나 예방전쟁 역시 국가적으로 엄청난 물자가 투입되므로 단지 국경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이런 전쟁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오현제 시기에 로마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상황과 야만족이 전반적으로 분열되었다는 상황이 겹친 한정된 조건에서 가능했던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 군사학적으로 선방어는 존재하는 모든 방어전략 중 가장 많은 고정지출과 인력지출, 최악의 효율과 가장 낮은 효용성을 보이는 방어전략이다. 종심방어가 아닌 선방어를 강요받는 상황이 아니라면[57] 지휘관에게 선형 방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반론에서 적군을 섬멸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포위섬멸이며, 방어자가 공격자에게 포위섬멸을 강행하기 위해서는 전선 일부를 개방하여 파고들도록 유도한 후 후방을 촌단하여 싸먹는 전술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격자가 파고들었을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종심지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종심에 방어전력을 빽빽히 박아두고 적들의 기동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한꺼번에 공격하여 섬멸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방어측이 엄청난 승리를 거둔 전투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유럽이 이슬람 세력에게 거둔 최대의 승리인 2차 빈 공방전 당시에는 빈의 요새가 앞에서 버티고, 그 후방으로 윙드 후사르가 파고들어 오스만군을 포위섬멸했다. 오스트리아의 국경에서 저지한 것이 아니었다. 통일 제국 하나를 청천강에 장사 지내 버린 살수대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수나라군의 별동대가 압록강을 건너 평양까지 파고들었다가 퇴각하며 도강하는 것을 포위섬멸한 결과물이다. 결과적으로는 패했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을 가장 크게 경악시켰던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전과 역시 상륙하는 미군을 해안선에서 저지한 것이 아니라 섬 내부에 토굴을 파고 지하에서 항전한 결과다.

반면 상술한 것과 완벽히 동일한 조건에서 선방어를 고집한 집단은 모두 패망했다. 똑같이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요새에서 격돌했던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비잔티움은 어마어마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선방어를 기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오스만은 비잔티움을 패망시켰다. 고구려가 살수대첩 당시 평양까지 뚫렸던 것을 두려워하여 구축하였던 요동의 천리장성은 당태종의 공격에 요동성, 백암성, 박작성 등이 우후죽순 무너졌고, 전방 종심이 부재했던 결과 주필산 전투로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패퇴했다. 결국 당태종을 막은 것은 안시성신성이라는 2차 종심이었다.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막겠다고 유럽 해안선 전체에 대서양 방벽을 구축한 나치 독일의 방어선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단 한 번에 돌파당하고 이후 나치 독일은 패망하는 데 2년도 안 걸렸다.

상당히 잘나가던 공화정 시절조차 로마는 선방어로 저지한 적은 가뭄에 콩나듯 하였고, 적군이 방어선을 뚫고 분탕질을 친 뒤에야 비로소 수도에서 군단을 징집한 다음 집정관이 출정하여 제압한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아우구스투스와 오현제때 선방어가 성공한 것으로 보인 이유는 선방어의 위력이라기보단 게르만족의 정세와 아우구스투스때 벌인 대규모의 게르만 원정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만 원정은 워낙 유명하고, 네로의 전임인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는 코르불로의 지휘 하에 대규모로 게르만 원정을 단행한 일이 있었다. 또 오현제 시대로 넘어간 이후에는 먼 게르만족과 가까운 게르만족의 전쟁으로 이들이 로마를 넘볼 상황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오현제 시대에도 주기적인 정벌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카라칼라 황제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말기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방어선을 다시 보강하고 게르만족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갖추기 전 연이어 격파함으로써[58] 선방어 체제가 3세기 중반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그 이후에는 게르만족의 거대한 물결을 갖추는 것을 막지 못해 선방어 붕괴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시오노 나나미의 말대로 로마가 선방어 전략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선방어로는 도무지 국경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 같이 진격로가 극히 한정된 준 산악지대 같은 곳이 아니면 현대전에조차 선방어로 적을 막지 못하는데 고작 10여만(대략 20개 군단. 나머지는 동방과 후방)을 지금의 유럽 서쪽부터 동쪽 끝까지 길게 늘어뜨려 어떻게 선에서 적을 격퇴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병력을 무제한적으로 늘릴 수도 없으니 결국 로마는 선방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로마 제국 바깥의 야만족들은 지속적으로 사회 조직도와 편제가 발달하여, 장교단과 부사관단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의 숙련도 또한 상승하고 있었다. 이는 전술과 전략 숙련도가 우수해진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하며, 때문에 대규모 야전에서도 더 이상 로마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물량과 체계적인 군사학이란 분야에서는 로마보다 쳐질 수 밖에는 없었으나 이들은 카이사르 시절의 그 야만족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상대해야 했던 야만족들은 바로 이런 군사 조직들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모르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로는 카이사르 같은 천재적 무장들이 나타나지 않아, 혹은 원수정 로마의 전술을 버려서 로마가 고전했다는 이상한 결론 밖에는 내지 못하는데, 다른 사항이야 특유의 반기독교 유심론적 사관과 배치되어 납득이 안 되었다곤 치더라도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건 자료 조사의 불성실을 나타낸다.[59]


4.4. 후기 로마 제국 군제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와 무관심[편집]


가장 서두의 소위 "로마다운 로마"의 문제점이 가장 극심하게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리메스 항목에서 언급하는 문제기도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모든 이상적인 기준을 공화정 후기 ~ 원수정 전기로 맞추면서 이것과 달라지면 무조건 퇴보의 전조라고 하는 괴이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로마군의 레기오들이 전부 허접한 국경수비대로 전환되어 유명무실화되었고, 이것이 로마의 쇠락 원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인식이다. 실제로는 종전 레기오들의 정예 병력들 같은 경우 코미타텐세스 편제로 분류되어 국경선에서 물러났고, 나머지 다른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병력 자원들이 리미타네이가 되어 국경 수비를 맡았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리미네타이가 일선에서 방어에 종사하는 동안 코미타텐세스가 요격에 나서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파밀리아 개념을 포기했다는 말에서만 언급하고 넘어갈 전자의 존재는 싹 무시하고, 후자만 레기오의 후예인 양 서술하면서 후기 로마 제국의 군사적 역량이 엄청나게 퇴보한 것처럼 쓰지만 이는 아주 큰 오류다. 이게 뭐가 그리 심각하게 틀렸다는 건지 한국의 독자는 영 감이 안 올 수도 있겠으나, 예컨대 현대 한국군의 실태를 취재한다는 어떤 외국 기자가 예비군 훈련때 소집된 예비군들의 여러 꼴사나운 모습만 집중적으로 부각한 다음 그것만이 현대 한국군의 모습인양 침소봉대한다면 각처에서 어떤 반응이 나오게 될까? 이는 후기 로마군에 대한 모독이라고 해도 좋을정도로 심각한 오류다. 전면전 자체가 아니라 애초에 진로 방해나 경보 그리고 지역 방어 예비대 마련을 목적으로 설치된 부대들을 놓고, 이전 시기의 전면전 대비 부대들과 비교해서 전투력과 장비가 떨어졌다고 퇴보했다고 한다면? 이건 그냥 왜곡, 무지, 오류인 것이다.

후기 로마군의 발전 사항이 궁금하면 로마군,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부분 참조. 또한 후기 로마군이 게르만족의 전술도 벤치마킹해서 발전한 것을 놓고 언제는 '로마인만큼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달인은 없었다' 라는 식으로 서술하더니 이점은 "야만화"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이는 시오노 나나미만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후기 로마사 전공자들은 하지도 않는 얘기고, 또한 시오노 나나미가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한 탓에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널리 퍼진 편견이 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은 저 공화정 초기 때부터 그리스, 갈리아, 삼니움 등의 무장을 참조해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당장 로마군의 기본군장인 투구와 사슬갑옷(로리카 하마타)은 갈리아, 글라디우스는 히스파니아, 필룸은 삼니움의 무기를 대폭 참고하여 만든 것이고, 당연히 원수정 때도 사르마티아나 파르티아의 전술과 편제를 참조해서 군제와 전술에 반영했는데, 왜 꼭 후기 로마군만 그 굴레를 뒤집어 써야 할까? 게다가 후기 로마군의 무장과 편제는 게르만족 것만이 아닌, 사산조 페르시아의 그것도 대단한 영향을 미쳤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이것도 간과한다. 사각 큰 방패와 필룸, 로리카 세그먼타타, 글라디우스 이런 것들은 리인액트할 때는 인기 있고 확실히 간지나긴 해도, 로마성이란 정체성과 필요충분조건 관계는 아니다.[60]


4.5. 객관성 문제[편집]


세기말이 낳은 최고의 동인지라는 평도 있다. 작가 본인이 좋아하는 인물의 이야기가 나오면 객관성을 던져버리고 완전히 '빠순이' 모드로 돌변하는 모습 때문.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성을 잃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봐도 동인지다.[61][62]

특히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키케로에 대해서 카이사르의 적이었다는 이유로 저평가한다. 키케로를 입만 산 찌질이, 개혁자 카이사르 각하에게 대항하는 책상물림 따위로 표현하는 건 이미 18세기 영국에서도 퍼진 풍조이기도 하니 시오노 나나미만의 탓은 아니라지만, 이는 다시 말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 인식 수준이 아직도 18세기 레벨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동로마를 정도 이상으로 비판하는 성향도 역시 18세기적 인식에 가깝다. 진중권이 이문열에게 한 평가를 패러디하자면, 그녀는 훌륭한 18세기 역사작가다.

아울러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내용도 너무 짧다. 스파르타쿠스에 비하면 무명이나 다름이 없는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시시콜콜하게 써놓으면서도, 스파르타쿠스에 대해서는 대충 언급하고 넘어간다. 정작 당대 로마인들은 스파르타쿠스를 반란 노예라고 부르면서도 굉장히 높게 평가했고 이후 로마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고려하지 않은 것.

또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한국과 일본에서만 저평가받게 되는 데도 큰 원인을 제공했다. 크라수스가 부를 축적한 방식이 권력을 이용한 것이라, 이런 면만 부각하면 졸부라고 폄훼하기 쉽지만 이에 못지않게 당시 로마 귀족들의 사회에 대한 헌신과 예의를 그대로 따라 공공사업에 막대한 돈을 기부했기도 하다. 대개 시오노 나나미는 그녀가 칭송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 공공사업 기부를 통해 보다 추켜세우고는 하면서도 이에 못지않은 기부를 한 크라수스를 인기없는 졸부처럼 표현했다. 그는 결코 졸부에 비견할만한 인물이 아니며 자금력과 기부 활동을 통해 로마 정계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거물급 인사였다는 것이 현대의 연구 결과이다. 특히 시오노 나나미는 크라수스가 막대한 채권 때문에 역으로 카이사르에게 끌려다녔다는 식으로 묘사했으나, 크라수스와 카이사르는 공생관계였다. 당시 로마의 부호들은 정치인들을 금전적으로 후원하면서 그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를 카이사르가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쥔 것처럼 묘사한 것도 크라수스가 저평가 받는 큰 원인이 되었다. 실상 크라수스-카이사르의 관계는 카이사르-쿠리오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다만 파르티아 원정 과정이후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군사적으로 굉장히 무능했기에 로마사에 오점을 남겼고 이에 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가 비판한 바가 거의 사실과 일치한다.

또 6권에서의 옥타비아누스도 은근히 저평가 받는다. 분명히 옥타비아누스의 업적이 맞는데도 불구하고 카이사르가 시킨 대로 했다거나, 그의 정치적 능력이 카이사르보다 뛰어나다는 학계의 의견은 어찌되었든 간에 카이사르가 더 뛰어나다는 말을 하거나 카이사르나 개혁, 혁신적이고 옥타비아누스가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등이다. 6권 초반에 계속해서 카이사르와 비교하면서 카이사르는 천재였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평범한 인물이었다고 강조하는데, 평가하기 나름이겠지만 오히려 옥타비아누스를 한 수 위로 보는 견해도 많다.[63]

로마 제국의 피지배민족 통치에 대해 지나치게 띄워주는 것도 문제. 물론 로마 제국의 개방적인 통치방식은 높게 평가할 만 하지만, '피지배 민족을 자신들과 동화시킨 제국은 후대에는 없다' 라거나 '로마인만큼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달인은 없었다' 라는 식으로 로마만 최고라는 식으로 서술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식민 제국 시대 이전의 전근대 제국들은 으레 시행하던 정책으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경우 키루스 2세 시대 이전까지 페르시아인을 지배하던 메디아인을 지배 계층으로 포섭했으며 사파비 제국 또한 피지배 민족인 코카서스인들을 대거 등용하여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만들어 이전까지 제국의 지배 계층이었던 키질바시들을 약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64].

한나라, 당나라, 고구려, 몽골 제국 등 다양한 문화권에 걸쳐서 영향력을 행사한 국가들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이들은 로마 제국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경우에 따라 더 진보된 모습도 얼마든지 보여주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에 비견될 만한 사상적 진보를 이루었고, 로마 제국보다 200년 이상 빠르게 황제를 등장시킨 국가다. 우리는 중국을 만다린, 즉 한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이것은 진나라, 한나라를 거치면서 사천, 강남, 황하 등으로 나뉘어 있던 언어도 혈통도 다른 문명들이 통합된 결과이다. 즉, 로마 제국은 끝끝내 나나미가 그토록 열렬히 칭송했던 피지배 민족의 동화에 실패하여 아직까지도 유럽은 라틴, 게르만, 고트, 슬라브, 앵글로색슨 등으로 민족이 갈라져 있는데, 중국은 그 동화에 성공했고 그 결과 수적으로 결코 적지 않았던 사천과 강남 지역의 민족은 완벽하게 황하문명화되어 한족으로 통합당했다. 10세기 이전까지 중국과 대등한 힘을 겨룬 최초의 국가였던, 그 강대한 북방 유목민족을 속민으로 거느린 고구려 역시 중국을 문화의 종주로 받아들이고 율령제를 도입했으며, 신라와 발해, 일본 역시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고려, 조선, 베트남 응우옌 왕조 등에 이르면 사실상 중국의 예법을 스테레오타입으로 받아들이고 중화의 예법과 정치체제에 동화되었다.[65] 단순한 문화의 통합만 놓고 본다면, 중국은 결과적으로 다시 통합되지 못하고 쪼개진 로마 따위에 비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새로 정복한 지방이 이전까지 시행하던 조세 제도를 약간만 손질하고 거의 그대로 두는 등 역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임했는데, 덕분에 오스만의 세금 제도를 보면 세목만 수십 가지에 무슬림이 아니라서 걷는 세금, 각종 면제 혜택[66]까지 눈돌아가게 복잡하다. 요컨대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이 훌륭했던 것은 맞지만, 시오노의 말마따나 '로마만 이렇게 했다' 내지 '로마가 최고였다' 라는 식의 서술은 심각하게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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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명히 말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가가 아니라 엄연히 소설가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그녀를 가리켜 역사가라고 착각하는 인식이 많아서 문제가 된다.[2]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면, '한국다운 한국'이 대체 어느 시대였는지 생각해보자. 불교적인 고려시대인가? 유교적인 조선시대인가? 1960~1970년대 개발 독재 시기인가? 민주주의가 정착된 선진국의 2020년대 시기인가? 그것도 아니면 미래 2100년대 한국인가? 아니, 그 이전에 '한국답다.'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고정된 '한국답다.'라는 것은 없다. 국가는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못하면 현실과 괴리가 생겨 무너질 것이다.[3] 로마 제국의 이런 세금시스템은 고대적인 노예제 하에서만 제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적으로 역사를 공부한 바 없는 시오노는 이를 간과하고 있다. 폭넓은 사론이나 사관을 접하지 않은 역덕후가 빠져들 수 있는 함정에 제대로 빠진 것이다.[4] 유스티니아누스의 숙부인 유스티누스 1세는 일리리아 농부 출신으로 근위대장을 거쳐 황제가 되었으나, 일자무식이어서 고등 교육을 받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일찍이 후계자가 되어 통치를 도왔다. 시오노는 아마 유스티니아누스 부부를 사탄에게 영혼을 판 폭군으로 묘사한 프로코피우스의 관점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하다.[5] 80대까지 너무 오래 재위해서 국정 추진력이 상당히 떨어졌다.[6] 그래서 '명장' 리스트에 휘하의 장군인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는 (특히 벨리사리우스) 포함되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포함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최고사령관이었던 후대의 헤라클리우스, 바실리오스 2세 등과 구분된다.[7] 아울러 국내 번역된 로마인 이야기의 15권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황제가 유스티니아누스 2세로 표기되어 있는데 오타가 났다. 원문에는 유스티누스 2세로 올바르게 표기되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1세로부터 150년쯤 뒤의 임금이다.[8] 로마인 이야기 13권 288~293페이지.[9] 고대 로마는 나라 규모가 훨씬 컸던 데다가, 로마 기준 서쪽~북쪽 방면의 게르만족 세력이 고대 로마 시절에는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지 못해 부족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동로마 시절에는 구 서로마의 영역에 프랑크, 프랑스, 신성로마 등 강력한 국가를 세웠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연하지만 부족 단계의 세력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쉽고, 정식 국가를 상대하려면 군사력뿐만 아니라 상당한 외교역량까지 요구된다.[10] 서방의 라틴~게르만계 카톨릭 세력, 북방의 튀르크-슬라브계 유목 세력(아바르, 불가리아 제국, 키예프 루스, 페체네그, 쿠만 등), 동방과 남방의 중동 세력(사산 페르시아 - 아랍계 이슬람 통일제국(라쉬둔/우마이야/아바스) - 파티마튀르크 등) [11] 추가적으로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하권에서는 예니체리 군단을 빼면 오스만에게 상비군이라곤 없었다고 까는데, 이 또한 맞지 않는 소리다. 시파히라는 상비 기병대가 멀쩡히 오스만 육군의 주력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 비잔틴도 그렇고 오스만도 그렇고 엄연히 상비군을 굴렸던 나라인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시오노의 눈에는 로마만 상비군을 갖춘 나라로 보이는 모양이다. 또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는 오스만 정규군이 갑옷도 입지 않았다고 했는데, 쇄자갑으로 중무장한 오스만 정규군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데 여사님 눈에만 갑옷이 안보였던 듯(...).[12] 당시에야 근대적 민족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다고 하지만[13] 그에 비하면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이 없다. 다른 저서인 십자군 이야기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등에서는 이슬람교그리스도교보다 더 인간적이었다거나 유연했다는 평가를 곁들이기도. 뭐라고요??[14] 미트라를 태양신이라고 쓰기도 했다. 사실 미트라가 광명의 신이긴 하지만, 미트라교와 거의 맞먹는 교세를 가졌던 '솔 인빅투스'라는 다른 태양신을 믿는 집단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쓰면 오류가 된다.[15] 예를 들어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황제라는 설이 있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 필리푸스의 행적은 완전히 생략해 버려서 그저 운좋게 로마황제가 된 아랍인이 되어버린데다가, 그리스도인 황제설 또한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16] 게다가 상당 부분을 생략했다.[17] 정작 제노비아를 굴복시킨 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를 고평가했다.[18] '오리엔트에서도 계몽 군주가 나오는구나'라는 말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오리엔트 따위에서는 학문과 예술, 기술을 중시하는 계몽 군주가 나올 수 없는데 이런 인물이 있었어? 거참 희한하네.' 라는 소리다.[19] 역사적으로 사산 왕조는 로마 황제를 사로잡거나 죽일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다.[20] 심지어 이 대목에서 '그러니까 대중종교가 될 수 있었다'라는 식으로 거의 조롱에 가까운 비평을 곁들인다.[21] 그리스 로마 신화 내에서는 신이 정한 규범을 어겨서 벌을 받은 예가 굉장히 많이 존재한다. 신전에서 부적절한 연애행위를 한 히포메네스와 아탈란테, 부지 중이었다고 하더라도 존속 살해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오이디푸스, 신들에게 불경죄를 지은 아라크네와 아르테미스가 목욕 중인 여탕(...)을 무단 침입했던 악타이온 등...규범을 어겨서 저주를 받고 인생이 망한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22] 당장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잊을만 하면 튀어나오는 것이 필멸자로서의 분수를 넘는 인간의 교만을 의미하는 휴브리스라는 개념인데. 이런 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일신교의 보수적, 도덕적 특성을 자기 반일신교적 가치관을 써먹는 데 다신교의 우월성이랍시고 윤리도덕 관념과의 결부론을 주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23] 심지어 이 여성의 아버지는 호민관이었으며, 아피우스가 일을 꾸미고 있었을 때는 전쟁터에 나가있는 상태였다![24] 심지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그 당시 12표법의 제정을 위해 소집된 두 차례의 10인 위원회, 데켐비리에 두 번 다 참여하고 있었다![25] 시오노 나나미는 이 부분을 묘사하기 전에도, 로마 왕정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몰락의 직접적인 계기인 루크레티아 강간 사건에 대해서도, '이미 수명을 다한 왕정의 숨통을 끊어놨을 뿐'인 사건으로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강력한 왕권이 부당하게 행사되어 벌어진 비극이라는 사건의 본질적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26] 라틴계 용병들로 이루어진 용병단이었는데, 자신들을 환대해준 메시나 남성 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고, 여성 주민들은 모조리 노리개로 삼는 천인공노할 배신을 저질렀다.[27] 정말로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보다 한 수 위라면, 왜 술라가 이들보다 지명도가 더 낮은 걸까?[28] 심지어 아라우시오 전투라는 이름조차 3권 내내 전혀 등장하지 않아서, 3권만 읽고 있으면 도대체 로마군이 얼마나 어느 정도로 게르만족들한테 패배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지경이다(...)[29] 출처: 어메이징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50~51쪽[30] 이런 점에서는 차라리 소설 마스터스 오브 로마 1권에서 묘사한 아라우시오 전투의 모습이 더 역사적 사실에 맞는다. 이 아라우시오 전투가 로마에 가한 충격은 매우 컸으며,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 시민들은 모두 겁에 질려 로마 광장 한복판에 사람을 산 채로 파묻는 인신공양을 할 정도였다.[31] 참고로 로마군은 선출직인 집정관이나 법무관이 지휘했으므로 정계 진출에는 군 경력이 거의 필수적이었다.[32] 가령 만일 게르만족이 카이사르를 패주시킨 뒤 불만을 품은 친로마파 갈리아족을 패배시켰으면 갈리아 전역은 게르만족이 제패하게 되었을 것이다.[33]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는 7년만에 재패했는데 왜 아우구스투스는 수십년간 게르만족의 엘베강까지의 지역을 제패하지 못했고 또한 클라우디우스 때 브리타니아를 제패하는 것이 30년 정도가 걸렸느냐라며 비교하는데 이러한 직접적인 비교는 문제가 있다. 마치 폼페이우스는 군단을 이끌고 동방으로 오자마자 셀레우코스를 멸망시키고 유다를 점령하는데 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수백년간 셀레우코스와 싸웠으면서도 이것을 해내지 못했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34] 이것도 어디까지나 카이사르가 그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시오노 나나미의 추측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로 남은 건 카이사르가 쿠리오에게 막대한 자금 지원을 해 주고 쿠리오는 원로원에서 카이사르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했다는 것으로, 왕년의 채무자가 채권자가 된 것만 빼면 크라수스와 카이사르의 관계와 다를 것이 없다.[35] 이 만화에서 카이사르는 주인공 아스테릭스의 적이긴 하지만 이들과 다투기는 해도 반대로 이들의 편을 들어주기도 하고 협력도 하는 등 완전히 적대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36] 사실 이 만화에서 카이사르는 주인공 아스테릭스보다는 오히려 자기 휘하의 무능한 부하들과 유능하지만 반란을 꾀하는 부하들과 더 자주 싸우고 이는 아스테릭스 역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아스테릭스가 속한 골족의 영약을 훔쳐서 먹은 다음 카이사르에게 반란을 꾀하려는 자들이 아스테릭스와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공통의 적이기 때문. 사실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소규모에 딱히 카이사르와 로마에게 적대적이지도 않은 골족 마을을 공격하는 건 거의 자기만족에 불과하고(다른 마을들은 이미 카이사르에게 굴복한 상태다.) 골족 마을에서도 귀찮기만 할 뿐인 로마와 별로 싸울 생각 자체가 없고 상술한 대로 공통의 적도 있어서 생각보다 적대적이지는 않은 편이다.[37] 사실 대부분은 뜬소문이거나 카이사르와의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흠집내기에 가까웠다.[38]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처조카라는 신분과 안찰관 시절 활동으로 인해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해임당하자 시민들이 시위를 할 정도였고, 원로원 역시 명문 귀족 집안의 가장인(즉 원로원 위원들과 같은 부류인) 그가 공직에서 추방당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꼬리를 내리자 바로 다시 복직시켜 준다.[39] 당시 속주 총독에 대한 재판의 배심원들은 원로원 의원 내지는 부유한 기사계급이었다. 그런데 원로원 의원들은 이미 속주 총독을 하면서 크게 해먹었거나 아니면 앞으로 총독을 맡아서 해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닌게, 당시 일반적인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공공연하게 권력의 정점인 집정관이 아니라 그 후에 속주 총독으로 부임해서 한 몫 제대로 챙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또한 기사계급 역시 원로원 의원들의 속주 수탈에서 실무를 맡아 속주민들의 등골을 빼먹는 장본인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속주 총독의 부정에 대한 제대로 된 재판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40] 다만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낸 사람도 있는데, 바로 키케로. 키케로는 시칠리아 총독 가이우스 베레스에 대한 탄핵재판에서, 그것도 당시 로마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한 상대에게 완승을 거두고 단숨에 로마의 유명인사로 떠오른다. 여기에는 키케로의 탄핵이 워낙 날카로운 탓도 있었고, 베레스의 속주 수탈이 속주 총독들의 부정부패가 일상이었던 당대의 기준으로 봐도 지나치게 과했던 탓도 있었다.[41] 심지어 아르미니우스가 토이토부르거 전투에서 로마군을 패배시켰을 때는 로마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로마군을 무찌른 아르미니우스는 베르킨게토릭스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토이토부르크 전투 당시가 로마의 최전성기는 아니다.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는 이때보다 90년 정도 후에 시작된 오현제 시기이며, 무엇보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사를 통틀어서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인 카이사르가 이끄는 많은 병력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이며, 아르미니우스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지는 못한 바루스를 기습해서,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시켰다는 점을 감안하면 직접 비교는 어렵다. 또한 아르미니우스도 게르마니쿠스에게는 탈탈 털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베르킨게토릭스에 비해 뛰어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42] 병사들의 가장 큰 불만은 필룸 구입비였다. 가격은 비싼데 1회용이다 보니 봉급에서 엄청나게 빠져나갔기 때문. 하지만 로마군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는 것이 대기병 무기가 필룸 말고 딱히 없었고, 또한 각 군단별 요격 임무 수행 과정에서 대개 적의 규모는 로마군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사상자를 최소화하면서 임무를 마치려면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전투에 임해야 했는데, 필룸 말고 딱히 해결책이 없었다.[43] 물론 로마군도 이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어서 중간전역해도 위로금. 명예전역하면 퇴직금을 주도록 되어 있긴 했다.[44] 티베리우스 황제가 요구사항을 검토한 뒤 군 복지 향상과 군복무 20년을 채운 자들의 퇴직금 및 체불임금 지급. 즉각 전역은 수용했다.[45] 착각했을 수도 있으나, 로마를 열렬히 사랑하는 시오노 나나미가 자칫 로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독자들한테 줄까봐 일부러 왜곡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묘사되는 로마는 그야말로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지상낙원의 모습이다(...)[46] 3년 혹은 15년 근무 후 퇴직한 경우도 나타나는 걸 보면 대부분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잔류했을 것이다.[47]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작중 내내 중무장 기병들을 돈만 잔뜩 들이고 아무런 쓸모도 없는 병과라고 비하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의 원인은 그녀가 주로 참조한 책인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 기병들은 사람과 말이 모두 갑옷으로 감싼 동방의 중기병들을 가리켜 행동의 자유를 제약한다고 경멸했다"라는 문장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오늘날에 와서 내용의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달랐다고 지적을 받고 있는 등 문제가 많아서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그리고 에드워드 기번의 서술과는 정반대로 로마 제국 후기로 가면 로마군에도 중무장 기병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운용했다.[48] 영화 이글에서 브리타니아 방어선의 상태가 영 막장인 걸로 나오는데, 최전선 전초기지인 탓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게르마니아 방어선이나 도나우강 방어선, 파르티아와 직접 접한 동방 전선 등을 제외하고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덜한 지역은 결국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49] 이때는 오현제를 비롯하여 로마의 국력이 최전성기에 달했던 시절이었다.[50] 쉽게 설명하자면 로마의 관리들조차 글씨를 제대로 읽거나 쓸 줄을 몰랐다는 뜻이다![51] 전투를 치르기 전 닭에게 모이를 줘서 닭이 모이를 먹는 모습을 관찰해 전투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판단하기도 했다.[52] 다만 이 점은 참작의 여지가 있다. 현대인들은 "자연재해가 빗발치는데 주술행위만 했다"라며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당대 로마인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미신을 신봉하는 경향이 강했고[51], 만사가 신의 뜻대로 이뤄진다고 확신했다. 제국 각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현상 역시 신의 징벌이라고 여겨 민심이 흉흉했을 테니, 그들을 달래는 차원에서 시빌라의 예언집을 참고하여 제사를 지내는 등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대 역사가들은 이 일화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가하지 않았다.[53] 당장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지면의 대부분이 서로마에 할애되어 있고 동로마 측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첫 번째 장에서 스틸리코가 주인공 격으로 나오는 만큼 동로마 쪽에 대해서는 적게 다루어질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2장에서 스틸리코 시대의 동로마에 대해 다룬다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서로마의 멸망으로 넘어간다는 것.[54] 시오노 나나미는 이 점을 로마인 이야기 전반부에서 설명했다![55]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했던 간통죄에서 예외적으로 노예와의 성관계는 합법이었다. 고대 이래로 여성 노예는 노동력뿐만 아니라 주인의 성적 만족을 위한 도구였다.[56] 출처: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매슈 닐 저/ 박진서 역/ 마티[다만] 이런 경우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로마인들 또한 사람인만큼 자기 자식으로 태어난 노예에 대해서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게 보다 보편적인 사례였다. 노예에게서 태어난 자녀에게 어떻게든 해방 노예 신분이라도 주고 싶어 발버둥친 로마인 아버지들이 대부분이었고, 그중에는 걸핏하면 게기고 말도 안듣는 정실 자녀보다 훨씬 순종적인 노예 출신 자녀를 심하게 편애하는 사례도 적지 않아 가정 내의 새로운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57] 일례로, 현대 한국의 휴전선에 대한 선형 방어는 휴전선이 뚫리는 바로 그 순간 북한군이 종심인 서울에 진입해버린다는 전략적 열세 때문에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부산이나 광주가 한국의 수도였다면 어차피 뚫고 들어와 봐야 경기도에서 돈좌당할 북한군 상대로 지금 같은 징병제는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프랑스는 저지대가 점령당하면 파리가 코앞이라는 약점 때문에 마지노선과 에미엘 요새의 건설을 강요받았고, 그것이 얼마나 무용한 전략이었는지도 스스로 6주 만에 패망하며 똑똑히 입증해 보였다.[58] 카라칼라는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재능은 훌륭한 편이었다. 정치적 재능이 전무한 것이 문제였지만.[59] 물론 이미 12권 집필 시기부터 여사의 건강 상태가 몹시 나빠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겠지만, 기독교를 까는 부분에서는 여전히 성실한 조사를 보인다는 점을 봤을 때는 매우 의문스럽다.[60] 그런 소린 현대 한국군이 창군 당시의 카빈 소총과 민무늬 군복을 안 쓴다고 한국군 아니라는 소리와 똑같다.[61] 오죽 심하면 저 정도 영웅 판타지를 숭상하는 사람이 어떻게 평범한 이탈리아인 의사와 결혼했을까 하는 비아냥까지 있다.[62] 카이사르를 과도하게 이상화했다는 평을 받는 콜린 맥컬로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도 이정도로 미화하진 않았다.[63] 당장 로마에서 가장 큰 문제였던 퇴역병의 퇴직금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였다.[64] 사파비 제국의 이웃이었던 오스만의 데브시르메 제도를 본딴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65] 6조, 의정부 등의 행정기구는 당나라의 3성 6부제에 그 근간을 두며, 본래 고구려와 백제 등의 고유한 인사법이었던 한쪽 무릎만 꿇고 앉는 "호궤"라는 절 방식 역시 고려시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중국식 절에 완전히 밀려났다. 좀더 과감하면서도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유럽은 시대에 따라 프랑스어, 라틴어, 스페인어가 병용된 반면, 동아시아에서 국가간에 통용되는 문자는 한자뿐이었다.[66] 대표적인 것이 데브시르메 징집자를 낸 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