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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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Romain 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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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명
로만 카체프
Roman Kacew
가명
에밀 아자르[1]
Émile Ajar
출생
1914년 5월 21일
러시아 제국 빌뉴스
사망
1980년 12월 2일 (향년 66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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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외교관, 작가
배우자
레슬리 블랜치(1944년~1961년)
진 시버그(1962년~1970년)
자녀
아들 알렉상드르 디에고 가리(1962년생)

1. 개요
2. 생애
3. 작품 목록



1. 개요[편집]


유대계 프랑스인 소설가.

2. 생애[편집]


태어날 때의 이름은 로만 카체프(Roman Kacew)이다. 1차 대전이 발발하고 난 뒤인 1917년에 어머니 미나 오프친스카(Mina Owczyńska)와 함께 서유럽으로 떠났고, 이후 1927년에 프랑스 니스에 정착한다.[2] 1933년에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연수를 받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여 로렌 비행 중대 대위로 참전하였다. 이 공으로 종전 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후 1941년부터 1961년까지 외교관으로 일을 하면서 여러 소설을 발표하였다.[3] 이 당시에 발표한 소설들 중 1945년에 발표한 『유럽의 교육』[4]으로 비평가상을 수상하였고, 1956년에 발표한 『하늘의 뿌리』공쿠르상[5]을 수상하였다. 이후 로맹 가리는 프랑스 문학계의 스타가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이후 발표한 작품들마다 평론가들의 극심한 비판을 받아 심적 고통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9년에 영화배우 진 시버그(Jean Seberg)와 결혼했다. 그후 점차 사이가 틀어져 1968년에는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각방을 사용하였으나,[6] 1970년 별거 중인 진 세버그가 임신하자 로맹 가리는 태어날 아이의 법률적 아버지가 되어 그녀와 화해한다. 이후 진 세버그는 여자아이를 출산하지만, 태어난 아기는 이틀 후 사망하고 만다.

이후 포스코 시니발디, 샤탕 보가트 등의 필명으로 여러 소설을 발표하다가, 1975년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 상을 또 수상하였고. 에밀 아자르는 당시 프랑스 문학계에서 엄청난 찬양을 받았다. 공쿠르는 같은 작가가 두 번 받을 수 없는 것이 원칙인데도 수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에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문학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촌 조카인 폴 파블로비치가 로맹 가리의 부탁으로 에밀 아자르를 연기했다.[7] 가리는 파블로비치를 내세워 수상을 거부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공쿠르 아카데미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여전히 수상자는 에밀 아자르라고 하였다. 이후 1977년에 로맹 가리의 이름으로 『여인의 빛』과 『영혼의 짐』을 발표하였으나,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조카 에밀 아자르를 표절하려 든다."며 혹평하였다. 아자르의 진짜 정체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

1979년에 진 시버그가 실종되었는데, 같은 해 9월 8일에 실종 10일만에 그녀의 차 뒷좌석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후 로맹 가리는 진 시버그가 흑인 인권 운동을 지지했다가 FBI에게 갖은 흑색선전을 당하고 결국 살해당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그 후 레일라 첼라비라는 40세의 이혼녀와 사랑에 빠져 아들인 디에고와 셋이서 함께 지내게 되지만, 1년 뒤인 1980년 12월 2일에 자신의 입 안에 권총을 쏘고 생을 마감한다. 죽기 전에 유서를 남겨두었는데, 이 유서는 로맹 가리 사후 6개월 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8]이란 제목의 소책자로 발간되었고, 여기서 에밀 아자르의 정체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밝히게 된다. 이 책에서 로맹은 평론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프랑스 문학계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프랑스 문학계를 뒤흔든, 한 늙은 작가의 죽음

3. 작품 목록[편집]


『유럽의 교육』
『새벽의 약속』
『하늘의 뿌리』
『그로칼랭』
자기 앞의 생
『가면의 생』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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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밀 아자르 이외에 사용한 가명도 많았다.[2] 어머니 미나의 자식 교육에 대한 관심과 의지는 대단한 수준이었는데, 프랑스에 정착하기로 한 것은 1890년대 드레퓌스 사건으로 유대인 차별 분위기가 누그러진 것 등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자전 영화 '새벽의 약속'에 묘사되듯 미나(니나)는 자식이 프랑스 대사가 될 것이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는데 교육열과 로맹 가리의 재능에 힘입어 추후 정말 현실이 되었다. 다만 가리 스스로가 그 부분에 대해 부정적으로 입장을 표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 인성에 썩 좋지는 않았던 듯하다.[3]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첫 소설은 1935년에 출간한 『폭풍우』이다. 그 이전에 뤼시앵 브륄라르(LLucien Brûlard)라는 이름으로 『죽은 자들의 포도주』라는 소설을 투고하기도 했었다.[4] 1944년에 런던에서 출간한 『분노의 숲』의 프랑스어본이다.[5]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원칙상 한 번 수상한 사람은 다시 받을 수 없다.[6] 아들인 디에고는 로맹 가리와 생활했다.[7] 이후인 1980년에 폴이 에밀 아자르를 연기하길 거부하면서 사이가 틀어진다.[8] 국내에는 『자기 앞의 생』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