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로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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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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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칸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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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종려상


제1회
(1946년)


제2회
(1947년)



프리드릭 에블러
(결정적 전환점)
프란티셰크 카프
(날개 없는 사나이들)
레오폴트 린트베르크
(마지막 기회)
알프 셰베리
(아이리스와 중위)
로베르토 로셀리니
(무방비도시)

체단 아난도
(아랫마을)
데이비드 린
(밀회)
장 들라노이
(전원 교향곡)
에밀리오 페르난데스
(마리아 칸델라리아)
빌리 와일더
(잃어버린 주말)
보딜 입센, 라우 라우리첸
(붉은 초원)

빈센트 미넬리
(지그펠드 폴리스[1])
자크 베케르
(앙트완과 앙트와네트[2])
벤 샤프스틴
(덤보[3])
에드워드 드미트릭
(십자포화[4])
르네 클레망
(패배자의 최후[5])

역대 베네치아 영화제
파일:베니스 국제 영화제 로고.svg
황금사자상
제19회
(1958년)


제20회
(1959년)


제21회
(1960년)

이나가키 히로시
(무호마츠의 일생)

로베르토 로셀리니 / 마리오 모니첼리
(로베레 장군) / (그레이트 워)

앙드레 카야트
(라인강을 넘어)



로베르토 로셀리니
Roberto Rossell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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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로베르토 가스토네 제피로 로셀리니
Roberto Gastone Zeffiro Rossellini
출생
1906년 5월 8일
이탈리아 왕국 라치오 로마
사망
1977년 6월 3일 (향년 71세)
이탈리아 라치오 로마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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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장
178cm
직업
영화감독
활동
1936년 –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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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아시아 노리스 (1934 결혼 – 1936 이혼)
마르셀라 드 마치스 (1936 결혼 – 1950 이혼)
잉그리드 버그먼 (1950 결혼 – 1957 이혼)
소날리 센로이 다스굽타 (1957 결혼 – 1973 별거)
자녀
아들: 마르코 로마노 로셀리니(1937~ 1946)
아들렌조 로셀리니(1941 ~ )
아들: 레나토 로베르토 라날도 주스토 주세페 로셀리니(1950 ~ )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1952 ~ )
딸: 이소타 잉그리드 로셀리니[1] (1952 ~ )
아들: 길 로셀리니(1956 ~ 2008)
딸: 라파엘라 로셀리니(1958 ~ )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작품 목록
5. 수상내역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네오리얼리즘의 창시자이자 모던 시네마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2. 생애[편집]


1906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건설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자주 접하면서 성장했고, 이후 음향 작업 등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그가 데뷔했던 시점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이 이탈리아를 장악했던 무렵이었으며, 이 당시 로셀리니는 활동을 위해 당원증을 발급받았으며, 파시즘 선전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1] 로셀리니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된 것은 무솔리니와 그의 파시즘 정권이 몰락한 이후였다. 파시즘 치하의 이탈리아에서 틈틈이 도둑촬영을 하며 제작한 <무방비도시>[2]로 명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무방비도시>는 비전문 배우의 기용[3], 핸드헬드 등 네오리얼리즘의 특징을 대다수 담고 있던 작품으로, 루키노 비스콘티의 <강박관념>과 더불어 최초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들로 손꼽힌다. 로셀리니는 이 작품과 함께 그는 세계적인 유명 감독으로 떠올랐다.

이후 <전화의 저편>과 <독일 영년>으로 대표적인 유럽 영화감독으로 떠오른 후, 로셀리니는 국제적인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당대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배우였던 잉그리드 버그만이 <전화의 저편>을 보고 매혹되어 로셀리니에게로 달려간 것. 당시 버그만과 로셀리니 모두 이미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후 버그만은 로셀리니와 결혼하고 그의 페르소나가 된다. 로셀리니는 이 시기 <스트롬볼리>, <유로파 51> 등 네오리얼리즘에선 살짝 멀어졌지만 대신 모던 시네마의 시대를 개막하게 된다. 특히나 <이탈리아 여행>은 에릭 로메르장 뤽 고다르 같은 카예 뒤 시네마누벨바그 영화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를 언급하라 하면 항상 언급되는 편이다.

1957년 로셀리니는 여러 트러블로 인해 잉그리드 버그만과 이혼한다. 그는 동해 자와할랄 네루의 초청을 받아 다큐멘터리 <인디아>[4]를 만들고, 1959년엔 <로베레 장군>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다.

로셀리니는 말년에 들어 TV라는 새로운 매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텔레비전을 위해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나 <블레즈 파스칼>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로셀리니의 이전 영화와는 다르게 미니멀하고 실험적인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로셀리니의 국제적 명성은 전성기에 비해 많이 사그라들게 된다.[5][6]

로셀리니는 1977년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3. 기타[편집]


로셀리니와 버그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배우로 유명하다. 또한 로셀리니의 형제인 렌초 로셀리니는 작곡가로서 로셀리니의 여러 영화에 음악을 제공하기도 했다.

대중적으로는 잉그리드 버그만과의 스캔들로 유명한 편이다. 그렇지만 로셀리니가 버그만이 다른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는 것을 막고,[7] 외도까지 저지른 것 때문에 결혼 생활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히치콕이나 브레송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8]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준 감독들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나 장 뤽 고다르가 그를 가장 존경했다고 하며, 마틴 스콜세지[9] 비롯한 후대 감독들 중에도 그의 지지자가 많다. 미국의 영화 평론가 태그 갤러거[10] 또한 저명한 로셀리니 지지자로 이름이 높다. 픽션 영화에서 현실의 재현이라는 문제에 대해 다룰때 자주 언급되는 감독이다.

헤이즈 오피스로 대표되던 미국 영화 검열 역사를 알게 모르게 바꿔버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로셀리니의 1948년작 '기적(The Miracle; 이탈리아 원제: Il Miracolo)'이 바로 그 신호탄이었다. '기적'은 두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 '사랑(L'Amore)'에서 두번째 에피소드에 해당하며, 두 에피소드 모두 로셀리니가 감독했다. '기적'은 1950년에 뉴욕에서 개봉했는데, 원래의 형태가 아니라 장 르누아르의 '시골에서의 하루(A Day in the Country; 프랑스어 원제: Partie de campagne, 1936년작)'와 마르셀 파뇰의[11] '조프로이(Jofroi, 1934년작)'를 하나로 엮어서 '사랑의 길(The Ways of Love)'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아무튼 '기적'이 미국 뉴욕 주에서 상영될 당시 한 가톨릭 단체(National Legion of Decency)를 위시로 한 종교인들이 신성모독이라면서 항의하면서 상영 중단을 요구하였고 뉴욕시 당국은 이에 굴복하여 상영 허가를 취소했다. 하지만 '기적'을 개봉시켰던 영화 배급업자인 조셉 버스틴은 이에 불복하여 재판이 이뤄졌다. 결국 연방대법원이 판결한 미라클 판결(Miracle Decision)은 1915년의 Mutual Film Corporation v. Industrial Commission of Ohio 판결을 뒤집고 영화가 수정헌법 1조에 따라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예술적 매체라는 사실을 인식하였으며, 영화에 대한 미국 정부의 규제 정당성 상실와 할리우드에서 헤이즈 코드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1949년 <스트롬볼리(Stromboli)>를 찍을 때 175cm인 여주인공 잉그리드 버그만을 위해 촬영 장소로 가는 길에 해변에 들러 어부들 중에 제일 키 큰 사람 둘을 골라왔다. 그리고 버그만에게 둘 중에 더 똑똑한 놈을 남편 역 배우로 시키자고 말했다. 버그만 키에 맞는 남자주인공 역 찾기가 참 힘들었다고 말하며.


4. 작품 목록[편집]


대표작만 나열했다.

  • <무방비도시> (1945)
  • <전화의 저편> (1946)
  • <독일 영년> (1948)[12]
  • <스트롬볼리> (1950)
  • <프란체스코, 신의 어릿광대> (1950)
  • <살인 기계> (1952)
  • <유로파 51> (1952)
  • <불안> (1954)
  • <이탈리아 여행> (1954) [13]
  • <화형대의 잔 다르크> (1954)
  • <인디아> (1959)
  • <로베레 장군> (1959)
  • <비바 이탈리아> (1961)
  • <바니나 바니니> (1961)
  • <검은 영혼> (1962)
  •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1966)
  • <소크라테스> (1971)
  • <블레즈 파스칼> (1972)
  • <메디치의 시대> (1973)
  • <메시아> (1975)


5. 수상내역[편집]


  • 제1회 칸 영화제 그랑프리 (1946)
  • 제23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1959)
  • 제23회 베니스영화제 OCIC-상 (1959)

[1] 로셀리니 본인은 이 시기를 흑역사라고 생각했는지 자주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훗날 <무방비도시>에서 파시즘에 대한 저항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2] 이 영화의 각본은 또다른 네오리얼리즘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작품이다.[3] <무방비도시>에 주연으로 출연한 안나 마냐니는 훗날 스타 배우로 떠오르고 아카데미상까지 받는다.[4]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이지만 조너선 로젠봄 같은 몇몇 평론가는 로셀리니의 최고작으로 이 작품을 꼽기도 한다.[5] 이 때문인지 로셀리니의 후기작은 DVD 등을 찾기가 많이 어려운 편이다. 그나마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DVD가 나와있다.[6] 이 시기의 로셀리니 영화들은 대중이나 시네필들에게도 잘 알려진 편이 아니나 태그 갤러거나 정성일 등과 같은 로셀리니 지지자들에게선 후하게 대접받는 편이다.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같은 경우 웨스 앤더슨이 좋아하는 영화기도 하다.[7] 실제로 버그만은 로셀리니와의 결혼 생활 중에는 로셀리니의 영화에만 출연했다. 예외가 있다면 장 르누아르의 <엘레나와 남자들> 정도.[8] 대중적 인지도는 무방비도시와 버그만과의 간통 이미지가 큰 편이다.[9] 흥미롭게도, 그는 로셀리니의 딸인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결혼하기도 했다.[10] 그는 로셀리니에 대한 두꺼운 전기를 쓰기도 했다.[11]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은 영화 감독이자 소설가로도 유명하다. '마농의 샘', '마르셀의 추억', '마르셀의 여름' 등의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12]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 <독일 영년>을 묶어 '전쟁 삼부작'이라 부르기도 한다.[13] 스트롬볼리, 유로파 51, 이탈리아 여행을 묶어서 버그만 삼부작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유로파 51을 빼고 불안을 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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