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바르본

덤프버전 :


파일:external/blogimg.goo.ne.jp/3070302d72ee0da1cb259d93cd9ed927.jpg
이름
로베르토 바르본(Roberto Barbon)
생년월일
1933년 3월 13일
사망년월일
2023년 3월 12일 (향년 89세)
국적
파일:쿠바 국기.svg 쿠바
출신지
쿠바 아바나
포지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데뷔
1954년
소속팀
한큐 브레이브스(1955~1964)
킨테츠 버팔로즈(1965)
지도자 경력
한큐 브레이브스 코치(1974~1975)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58~1960년 퍼시픽리그 최다 도루
1957년
코노 아키테루
(한큐 브레이브스)
56도루

1958~1960년
로베르토 바르본
(한큐 브레이브스)
38도루(1958~1959년)
42도루(1960년)


1961년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호크스)
42도루

1. 개요
2. 현역 시절
3. 은퇴 이후
4. 여담


1. 개요[편집]


쿠바 출신의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현역 시절 외국인 선수로써는 이례적으로 장타력이 아닌 준족으로 이름을 날렸던 선수였으며 스페인어로 꼬마, 도련님을 뜻하는 치코(Chico) 바르본 이라는 애칭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 현역 시절[편집]


11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바르본은 대부분의 쿠바 출신 선수들이 그랬듯 동네 야구에 입문하며 야구에 눈을 떴고, 1954년 브루클린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 선수로 1년 간 뛰다 한큐 브레이브스의 입단 제의를 받고 연봉 5천 달러에 계약을 맺으며 1955년 일본에서의 선수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바르본은 막 휴전했던 한국전쟁일본에서 벌어진 걸로 착각해서 처음엔 일본행을 꺼렸고, "일본은 기후가 따뜻해서 쿠바랑 별 차이가 없다"라고 꼬드기던 대리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등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데다 통역조차 없었던 탓에[1] 초창기 땐 머나먼 타지인 일본에 적응하느라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하며 식사도 입에 안 맞는 통에 한동안 치킨 라이스[2]만 주구장창 먹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3]

이러한 고생에도 바르본은 입단 첫 해부터 주전 2루수 및 1번 타자를 꿰차고 장타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주특기인 빠른 발을 앞세워 타율 0.280에 49도루라는 준수한 성적에 163안타, 3루타 13개로 시즌 최다 안타 및 3루타 기록을 달성[4]했고, 수비에서도 견실한 활약을 보이며 코칭스태프와 팬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당초 바르본은 일본에서 1년만 뛰고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출장기회가 늘어가는 즐거움에 계속 일본에서 뛰기로 결심했다. 이후 타격에선 2할대 초중반에 10홈런을 단 1번도 못 넘길 만큼 빈약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대신 빠른 발과 준수한 수비로 빈약한 타격을 보완하며 3시즌 연속(1958~1960년) 도루왕을 수상하고 1964년엔 통산 1000안타를 기록하는 등 한큐에서 딱 10시즌을 채우면서 일본프로야구의 롱런 용병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1964년 시즌 출장기회가 현저히 줄어든 바르본은 1965년 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하여 4년 만에 규정타석을 채우는 성과를 올렸지만, 타율 .231/OPS .543, 1홈런 15타점 11도루의 저조한 성적에 그치며 노쇠화가 완연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11시즌 동안의 통산 성적은 1353경기 출장, 1123안타, 타율 0.241, 33홈런, 260타점, 308도루[5]로, 외국인 선수 하면 파워라는 이미지를 빠른 발로 깨버린 스피드 타입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으며 2루수로서 경쾌한 풋워크를 앞세운 화려한 수비도 주목 받으면서 쿠바산 우시와카마루[6]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3. 은퇴 이후[편집]


1959년 시즌 후 바르본은 쿠바로 돌아가려 했지만 하필 그 해 피델 카스트로쿠바 혁명 으로 정권을 잡고 사회주의 정부를 출범시키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바르본은 교제하던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아예 일본에 정착해 버렸다.[7]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3e3b0d9f.jpg
생전 야구장에서 오릭스 버팔로즈의 경기를 지켜보던 바르본

그라운드를 떠난 이후 바르본은 고베에서 스테이크 식당을 경영했고, 1974~1975년 2시즌 동안 친정팀 한큐의 코치로 활동하면서 1975년 일본시리즈 우승 멤버로 포함되기도 했다. 이후 한큐의 외국인 선수 통역담당 등 구단 직원으로 계속 근무했고 오릭스 버팔로즈의 야구교실 고문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생을 보내던 중 90세 생일을 하루 앞둔 2023년 3월 12일, 급성 폐렴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그가 숨을 거둔 지 5일 후, 현역 시절 소속팀인 한큐의 후신이자 야구교실 고문으로 재직했던 오릭스 버팔로즈 구단에서 바르본의 사망 소식을 공표했다.https://www.jiji.com/jc/article?k=2023031700878&g=spo


4. 여담[편집]


파일:external/79b32db1e2716a93a9c7fcaab6ef6c7d1462b8aed3f3c737dfd61ef201644ecf.jpg

  • 입단 초기에는 쿠바와는 달랐던 일본의 생활상에 적응하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이후 바르본은 점심 때 라멘을 즐겨먹고 일본어는 물론 칸사이벤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일본 생활에 잘 적응했다. 또한 밝고 쾌활한 성격으로 동료들과도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 현역 시절이던 1960년대 중반 영화배우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그 외 광고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도 자주 얼굴을 비췄다.

  • 일본 시절 초창기에 짓궂은 팀메이트 때문에 역도산의 분노를 샀던 에피소드가 있다. TV로 역도산의 시합을 보던 중, 동료 선수 한 명이 "이런 대단한 시합을 일본에선 야오쵸(八百長)라고 부른다"라고 뻥을 쳤는데, 야오쵸는 다름아닌 승부조작을 뜻하는 은어이다. 그런데 순진했던 바르본은 그 얘기를 그대로 믿어버리는 바람에 기자들 앞에서 역도산의 시합을 본 감상을 얘기하며 "리키(역도산), 야오쵸!"라는 폭탄발언을 해 버렸고 그 이야기를 들은 역도산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고 한다. 기겁한 바르본은 역도산을 황급히 찾아가 야오쵸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며 사죄했고, 역도산은 "어 그래? 모르고 그랬다면 봐줘야지"라며 흔쾌히 없었던 일로 하면서 다행히 잘 마무리 되었다.
[1] 심지어 바르본은 한국, 중국, 일본이 같은 언어를 쓴다고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한자를 쓰는 건 맞긴 한데..[2] 닭고기토마토 케첩을 넣은 볶음밥.[3] 후술한 것 처럼 라멘도 즐겨먹을 정도로 일본 음식에 적응하긴 했지만 생선회초밥 같은 날생선 요리는 끝내 손을 대지 못했다고.[4] 1955년의 3루타 13개는 팀 선배이기도 한 래리 레인즈(한큐)의 16개를 잇는 한큐-오릭스 구단 2위 기록이며 퍼시픽 리그를 통틀어서는 공동 4위에 해당된다. 센트럴리그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 3루타 기록은 1951년 오사카 타이거스카네다 마사야스가 세운 18개이다.[5] 바르본의 1353경기 출장은 2007년 터피 로즈가 갱신하기 전 까지 외국인 선수 최다 출장 기록이었다. 또한 바르본은 1953년 시즌 퍼시픽 리그 도루왕 래리 레인즈와 더불어 유이한 시즌 최다도루 타이틀을 가진 외국인 선수다.[6] 우시와카마루는 한신 타이거스의 명 유격수이자 한신의 현재까지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인 요시다 요시오의 현역 시절 별명이기도 하다.[7] 바르본의 말에 따르면 일본으로 간 이후 고향인 쿠바에 가본 적은 딱 1번 뿐으로, 현역 은퇴 후 20여년이 지난 1988년에 당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으로 취임한 야마모토 코지가 쿠바 야구 시찰을 위해 바르본에게 통역 요원으로 쿠바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오랜만에 쿠바에 갔던 것이 유일한 고향 방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바르본은 2023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이 때의 방문이 바르본의 생애 마지막 쿠바 방문이 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5 19:28:13에 나무위키 로베르토 바르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