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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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로베르토 에우헤니오 체로
(Roberto Eugenio Cerro)[1]
생년월일
1907년 2월 23일
사망년월일
1965년 10월 11일
국적
아르헨티나
출신지
바라카스
포지션
스트라이커, 아웃사이드-레프트
신체조건
174cm / 79kg
등번호
-[2]
소속팀
스포르티보 바라카스 (1924)
페로 카릴 오에스테 (1925)
바라카스 주니어 (1926)
CA 보카 주니어스 (1926-1938)
국가대표
16경기 13골 (1926-1937)

1. 개요
2. 생애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4.3. 개인


1. 개요[편집]


El apilador(적재기)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인.


2. 생애[편집]



2.1. 클럽[편집]


체로는 17살의 나이에 스포르티보 바라카스에서 데뷔하였다. 하지만 다음 해에 페로 카릴 외스테로 팀을 옮겼고 레나토 체사리니, 페드로 수아레스 등과 호흡을 맞추었다. 그 다음에는 군대 문제 때문에 바라카스 주니어에서 뛰는 등 초기 선수 생활에는 꽤나 복잡한 커리어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커리어도 보카 주니어스에 들어오면서 안정을 찾았다. 공식 경기는 아니었지만 데뷔전에서부터 2골을 넣으며 세네이세스에 눈도장을 찍었다. 5월 2일에 공식적으로 리그에 데뷔하였으며 7일 후에 엘 포르베니르를 상대로 리그 첫 골을 신고하는데 성공하였다. 5월 말엽에 부상을 입어 2주간의 강제휴식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 체로는 대폭발을 하였다. 9경기에서 11골을 집어넣은 것. 그 이후에 잠시 득점 페이스가 주춤하였지만 도밍고 타라스코니의 뒤를 이어 팀 내 득점 2위를 차지하였다. 그 이후에는 포지션의 문제 때문에 득점 페이스를 꾸준히 이어가는데 어려움이 있기도 했으며 1929년 시즌과 1936년 시즌에는 큰 부상을 입어 거의 시즌을 날려먹기도 했다.

그렇게 보카 주니어스에서 12년을 뛴 체로는 3번의 득점왕 기록과 함께 1935년에 도밍고 타라스코니가 가지고 있던 팀 내 통산 최다 득점자의 기록까지 갈아치우는데 성공하였다. 이 기록은 마르틴 팔레르모가 돌파하기 까지 75년 동안 빛났다.


2.2. 국가대표[편집]


체로는 보카 주니어스에서의 활약만큼 대표팀에서 큰 업적을 쌓지는 못했다. 그를 계속 얽어맸던 것은 바로 무릎 부상. 그는 잘 활약했던 1928년 올림픽초대 월드컵에서 무릎 부상으로 인해 대회 중간에 하차하고 마는 아픔을 겪었다.

올림픽에서는 해트 트릭도 터뜨리며 승승장구하던 중의 낙마였고 초대 월드컵에서의 같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발작증세까지 있어 대타로 들어온 기예르모 스타빌레해트 트릭을 포함하여 8골로 대회 득점왕에 오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올림픽[3]월드컵이라는 가장 큰 메이저 대회를 놓쳤지만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는 나름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1933년의 우루과이와의 클래식 라이벌 전에서 체로는 혼자 4골을 넣으며 4대1 승리를 이끌기도 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기술적 재능과 지능을 가진 포워드. 그 기술로 상대 수비수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플레이를 즐겼다. 또한 헤딩 능력이 뛰어나 cabecita de oro(골든 헤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80kg에 가까운 체중으로 인해 대표팀의 선배 마누엘 세오아네의 플레이를 교본으로 삼았으며 그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4.2. 국가대표[편집]




4.3. 개인[편집]



[1] 원래 스펠링은 Cerro가 맞지만 조상이 이탈리아계라 발음을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Cherro라고 쓰는 편이 더 많다. 참고로 cerro는 언덕이라는 뜻이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월드컵 출범 이전의 올림픽 축구는 거의 월드컵의 명성에 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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