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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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obert_Fico_2017.jpg

출생
1964년 9월 15일 (59세)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토폴차니
재임기간
제5대 총리
2006년 7월 4일 ~ 2010년 7월 8일
제7대 총리
2012년 4월 4일 ~ 2018년 3월 22일
제12대 총리
2023년 10월 25일 ~ 현직
국적
[[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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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고고학 / 학사)
코메니우스 대학교 (형법학 / 박사)
가족
배우자 스베틀라나 스보보도바 (결혼: 1986년)
슬하 자녀 1명
정당
약력
국민의회 의원 (1992~2006, 2010~2012, 2018~현직)
방향-사회민주주의 대표 (1999~현직)
제5대 총리 (2006~2010)
국민의회 부의장 (2010~2012)
제7대 총리 (2012~2018)
제12대 총리 (2023~현직)
서명
파일:Robert_Fico_signature.svg

1. 개요
2. 생애
3. 정치 활동
3.1. 3기 집권
4. 비판
4.1. 기자 암살 논란



1. 개요[편집]


슬로바키아의 총리이자, 사회민주당의 당수. 세 차례 총리를 역임한 적이 있다.

모국어인 슬로바키아어를 포함해서 체코어, 영어,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1]

2. 생애[편집]


토폴차니에서 태어났으며, 브라티슬라바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젊은 시절 정치인과 고고학자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후술하듯이 정치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3. 정치 활동[편집]


1987년 당시 유일 합법 여당이던 공산당에 입당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후에 개편된 민주좌파당(이하 민좌당)에 합류했다. 1992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처음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나, 너무 어린 나이 탓에 당 내부에서도 배척받는 분위기였고, 결국 1999년 민좌당을 탈당하고 방향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좌파의 분열로 방향당은 2002년 총선에서 부진하게 되었고, 이에 쇄신 차원으로 "방향당 (제3의 길)"이라고 당명도 바꿔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민좌당을 포함한 군소 좌파 정당들을 죄다 흡수해 지금의 사민당으로 재창당하기에 이르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2006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처음으로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2010년 사민당은 원내 1당 지위를 유지하고도 피초 총리와 연정할 정당이 없게되어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물론 2년 만에 도로 재집권했으며, 이후 2018년까지 총리직을 다시 지냈다. 하지만 후술할 기자 암살 논란이 반정부 시위까지 확대되자 2018년 3월 4일, 총리직 사퇴를 선언했다.

다만 후임 총리직을 지명할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자신과 정치적 라이벌이 된 안드레이 키스카였기 때문에 사퇴 전에 미리 협상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현재 사민당 주도 여당 연합을 인정하고 후임 총리 후보도 사민당 소속 정치인으로 지명할 것을 요구한 뒤 키스카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기 전에 독단적으로 페테르 펠레그리니 부총리를 차기 총리로 언론에 발표해버렸다.#

키스카 대통령이 피초를 총리직에서 물러나게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해 이를 수용하면서 펠레그리니가 후임 총리가 된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021년에 코로나19 정책에 대한 항의 시위를 요구하다가 체포었다.# 다만 체포된 다음날 즉시 석방되었다. 변호인인 로베르트 칼리냐크 전 내무장관은 피초 전 총리가 의원 신분이기 때문에 의회 동의 없이 체포한 것은 심각한 법 위반이라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이번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이어지는 부패사건 수사에 이어 당내 갈등으로 페테르 펠레그리니 전 총리가 분당한 목소리에게 지지율 1위 자리를 내주고 자신이 이끄는 사민당은 한자리수 지지율(8%)까지 떨어지는 등 한때 최장기간 재임 총리 명성이 무색하게 정계 은퇴를 고려해야 되는 처지까지 몰렸다.

하지만 2022년 들어 코로나19가 엔데믹 상태로 들어간 뒤 이어진 인플레이션, 러시아에게 침공당한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 등으로 에두아르드 헤게르 총리가 인기를 잃으면서 그 반사이익으로 다시 사민당의 지지율이 오르며 극적으로 회생했다.

거기다 내분으로 스스로 헤게르 내각이 무너지면서 조기 총선 국면이 되자 사민당이 다시 펠레그리니의 목소리까지 누르고 지지율 1위 자리를 탈환했다. 이때문에 서방 진영의 우려가 있는데, 총선 과정에서 피초 전 총리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기 때문. 피초 전 총리가 이탈할 경우 동유럽의 우크라이나 지원 연대에 구멍이 뚫릴 가능성이 있다.

결국 2023년 선거에서 사민당이 1당을 탈환하면서 5년만에 총리직으로 복귀할 기회를 잡았다.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목소리의 펠레그리니 전 총리의 선택이 중요했지만, 결국 진보 슬로바키아 주도 연정이 무산된 뒤 10월 10일 목소리에서 사민당을 지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총리직 복귀가 사실상 확정되었다. 다만 목소리가 더 많은 내각 각료직을 가져가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국민당에서 극우 성향 반환경주의자인 루돌프 훌리아크(Rudolf Huliak)를 환경부장관 후보자로 지명하자 주자나 차푸토바 대통령이 내각 승인을 거부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히며 논란이 되었다. 국민당에서는 대통령에게 월권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항의했으나, 차푸토바 대통령은 환경부장관 후보자를 바꾼 후에나 새 내각을 승인할 것이라 밝혔다.#

그러자, 결국 국민당 측에서 루돌프 훌리아크 대신 극우 정치인 토마스 타라바(Tomáš Taraba)로 환경부장관 후보자를 교체하였다.# 이튿날인 10월 25일, 차푸토바 대통령이 내각을 승인하면서 로베르트 피초는 다시 한번 총리가 되었다.#

3.1. 3기 집권[편집]


공약대로 3기 집권을 시작한 다음날인 10월 26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

같은 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에 참석해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와 손잡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친러 노선을 노골화했다.#

전임자가 제안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4,030만 유로(4,320만 달러) 규모의 군사 지원 패키지 전달을 차단했지만 유럽연합의 압박으로 민간차원과 기업차원의 우크무기거래는 허가한다고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으며 서방진영은 애초에 슬로바키아가 지원할만한 무기들은 전부 우크라이나에게 주었기에 전황에 별 상관이 없다는 입장이며 이것은 적국인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4. 비판[편집]


피초의 행보들은 숱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특히 2012년 2차 집권 이후로 은근슬쩍 공안정국을 조장하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언론과 야당 인사들을 탄압하면서 재야 세력들의 비판을 받아왔다.

사실 이러한 태도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드러난 것은 아니고, 진작부터 드러나 있었다. 민좌당 시절이던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유럽인권재판소의 변호사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그가 맡았던 소송들이 전패(...)하는 등 미리 싹수가 보이기도 했다.

구 공산권 국가의 사민당이 늘 그렇듯이 이런 각종 공세를 피하지 못하는 편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슬로바키아의 사민당은 진짜로 사민당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중도좌파 정당들과는 상당히 괴리감이 있는 정책들을 펼치고 있다.

특히 반난민, 반동성애 등의 정책들은 오히려 극우 정당들이 주장하지, 중도좌파 정당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라는 점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일부에서는 극우 정당인 국민당과의 연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지만, 그렇게 신빙성이 있는 주장은 아니다. 언급했다시피 슬로바키아는 과거 공산 국가였는데, 공산당들은 초기에는 자본주의와 보수주의에 반대하며 집권했지만, 이후 국가자본주의·극우로 변절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피초는 그 시절의 사고관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국민당과 손을 잡았던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고.[2] 다만 사회민주당은 피초 총리와는 별개로 친유럽주의를 내건지라 유럽회의주의 국민당과 아주 똑같다고 보긴 힘들다.

오락가락하는 정체성 없는 행보는 물론이고 후술하는 기자 피살 사주 및 개인 부패 의혹이 더해지면서, 세계 주류 언론과 리버럴 정치 세력은 해당 인물을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에 준할 정도로 혐오하는 상황이다.

4.1. 기자 암살 논란[편집]


2018년 2월, 탐사보도 기자 얀 쿠치악이 피초와 그 정부의 부패상을 폭로했는데, 이로부터 얼마 못 가 여자친구와 함께 총에 맞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말그대로 슬로바키아 전국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는데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시작으로 추모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이 사건에 피초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짙게 받았고, 결국 피초와 사민당에 대한 여론은 부정적으로 흘러가게 되면서 추모 시위는 반정부 시위로 확대되었다. 특히 사건 발생 다음날 슬로바키아 경찰청장인 티보르 가스파르(Tibor Gašpar)가 살인 사건의 원인이 쿠치악의 탐사 취재와 관련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 결정타였다.#

바로 그 쿠치악이 사망 전 마지막으로 탐사 취재하던 사건이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과 피초 내각 고위 관료들이 연계되어 슬로바키아 동부에서 EU 자금을 횡령하고 있다는 의혹이었기 때문인데[3] 처음에는 연루 사실을 부인하고, 오히려 야당들을 암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다그치던 피초 총리도 반정부 여론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주문하면서 3월 총리직을 사퇴하고 페테르 펠레그리니에게 자리를 넘겼다.

문제는 2019년 현재까지도 당수직은 유지하고 있는 상황. 즉 펠레그리니는 피초의 얼굴마담이고, 아직도 실질적인 총리는 피초인 셈이다. 이러한 무책임한 태도로 숱한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이 여파로 2019년 들어서 사민당의 지지율이 20%대가 붕괴되는 등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대선에서도 사민당이 밀어준 마로슈 셰프초비치 후보가 주자나 차푸토바[4]에게 큰 표차로 낙선한 것은 덤.[5]

이 사건의 영향으로 결국 2020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몰락하고 반부패 포퓰리즘 성향의 평범한 사람과 독립적인 인격이 압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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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2] 실제 이 때문에 유럽 사회당 회원 자격을 정지당한 적이 있었다.[3] 수사 결과 이들에 의한 청부 살인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4] 언급한 사건에 항의하며 정계에 진출한 진보 성향의 여성 정치인.[5] 피초 본인도 2014년 대선에 도전했다가 무소속 아웃사이더인 안드레이 키스카에 밀려 낙선했다. 이미 이 때부터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고, 이후 키스카는 피초의 정책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차푸토바를 지지하며 피초에게 제대로 빅엿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