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스타우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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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전직 미식축구 선수이자 前 군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쿼터백. 소속팀은 댈러스 카우보이스.
원클럽맨으로 감독 톰 랜드리와 함께 '미국의 팀(America's Team)' 카우보이스의 첫 전성기를 열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대학 시절[편집]
뉴멕시코주 로스웰에 있는 뉴멕시코 군사 기관에서 1년을 보낸 후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1962년 10월 6일 미네소타 골든 고퍼스를 상대로 첫 경기에 나서며 출장 경기를 얻어간다. 첫 경기는 21–0 패배로 끝났다.
1963년 네이비 미드쉽맨을 9승 1패 전국 2위로 이끌며 미국 최고의 대학 선수에게 주어지는 하이즈먼 트로피를 수상하였고 10월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다. 졸업 후 임관하여 베트남 전쟁에도 보급장교로 참전했었다. 해사생도 시절 매우 뛰어난 성적을 거둬 파일럿이 될 수 있었으나, 색맹이 있어 병참으로 임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큰 키 때문에 단기복무만 하고 전역한 데이비드 로빈슨보다도 더한 군 경력의 소유자.
대학 시절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네이비 미드쉽맨 풋볼은 졸업식에서 그의 등번호 12번을 영구결번한다.[1]
2.2. 댈러스 카우보이스 시절[편집]
군 복무에 참전까지 했기에 만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프로에 데뷔하였고, 어깨 부상과 당시 카우보이스의 쿼터백이던 크레이그 모턴과 주전 경쟁을 하면서 29세가 돼서야 풀타임 주전이 되었다. 그럼에도 정확한 판단력과 롱패스 때문에 캡틴 컴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헤드코치인 톰 랜드리의 지휘 아래 숱한 승리와 역전승을 만들며 1970년대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1차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1975년 미네소타 바이킹스와의 플레이오프 때 10-14로 뒤지고 있던 경기의 종료를 2초 남기고 드류 피어슨에게 성공한 50야드 초장거리 역전 터치다운 패스는 헤일 메리 패스(Hail Mary Pass)라는 이름으로 그를 상징하는 플레이가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스타우벅은 마음을 비우고 성모송을 외우면서 던졌다고 밝혔기에 헤일 메리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처음 오른 슈퍼볼 V(5회)에서 조니 유나이타스가 이끄는 볼티모어 콜츠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으나 1971 시즌 최상의 모습을 보여주며 카우보이스를 2년 연속 슈퍼볼에 진출시킨다. 1972년 1월 열린 슈퍼볼 VI(6회)에서 패스 19개 중 12개와 119야드, 터치다운 2개를 성공시켜 마이애미 돌핀스를 24-3으로 꺾으며 팀의 창단 첫 우승과 함께 슈퍼볼 MVP에 올랐다.[2]
4년 후인 슈퍼볼 X(10회)에도 결승에 올랐으나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2년 뒤인 슈퍼볼 XII(12회), 자신의 전 동료였던 크레이그 모턴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2번째 빈스 롬바르디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다음 해인 1979년 2년 연속으로 슈퍼볼에 진출하나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다시 한 번 패배하며 슈퍼볼 2연패에는 실패한다.
1979년 시즌을 보낸 후 뇌진탕으로 인해 카우보이스의 2년 계약을 거절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후 1985년 슈퍼볼 2회 우승 주역으로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3. 여담[편집]
- 해사 생도시절 풋볼팀 코치로서 빌 벨리칙의 아버지인 스티브 벨리칙이 있었는데, 스타우벅은 아버지를 보기 위해 해사로 자주 놀러온 빌 벨리칙에게 풋볼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며 많이 놀아주었다고 한다.
- 별명으로 Roger the Dodger, Captain America, Captain Comeback이 있다.
- 은퇴 이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부동산 투자 및 개발 업체를 운영하여 막대한 돈을 벌었고, 2008년엔 회사를 613m달러에 매각하여 NFL 선수출신 중 가장 많은 돈을 번 선수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