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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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산토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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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ron_santo_hof.png
론 산토
헌액 연도
2012년
헌액 방식
베테랑 위원회



파일:50812320.0.0.jpg

시카고 컵스 No. 10
로날드 에드워드 "론" 산토
Ronald Edward "Ron" Santo

출생
1940년 2월 25일
사망
2010년 12월 2일 (향년 70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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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지
워싱턴시애틀
신체
183cm / 86kg
포지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59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CHC)
소속팀
시카고 컵스 (1960~1973)
시카고 화이트삭스 (1974)

1. 개요
2. 선수 생활
3. 은퇴 이후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1. 개요[편집]


5차례의 골드 글러브, 9차례 올스타에 빛나는 시카고의 레전드 3루수.

시카고 컵스의 레전드로 마이크 슈미트 이전 공수겸장을 두루 갖춘 최고의 3루수였던 선수. 무엇보다 당뇨병과 싸우며 14년을 메이저리그에서 뛴 전설적인 선수다. 영구결번이 까다로운 시카고 컵스에서 2003년 영구결번을 획득하기도 했다.

2. 선수 생활[편집]


파일:ron santo.jpg
1940년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태어난 론 산토는 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히며 1959년 자유계약으로 시카고 컵스에 입단한다.[1] 이 해 AA 리그에서 .327 .390 .473의 슬래시 라인과 11홈런 87타점을 기록한 산토는 바로 1960년 AAA 리그로 올라가 7홈런 32타점 .268 .351 .412의 괜찮은 성적을 거두고 만 20세의 어린 나이에 메이저리그 데뷔를 이루게 된다. 1960년 6월 26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의 원정 경기에서 데뷔한 만 20세의 젊은 3루수는 4타수 2안타 3타점의 훌륭한 데뷔 경기를 치루고, 이후 쭉 컵스의 주전 3루수로 뛰었다. 결국 1960년 루키 시즌을 9홈런 44타점 .251 .311 .409의 성적으로 마친 론 산토는 그 해 ROY 투표에서 4위를 획득하고, 이후 거침없는 질주를 시작했다.

1973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원하지 않는 트레이드가 되기 전까지[2] 그가 컵스에서 거둔 성적은 337홈런 1290타점 .279 .366 .472로,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나 그가 뛰던 시절이 밥 깁슨샌디 쿠팩스가 미쳐 날뛰던 투고타저의 1960년대임을 감안할 때 매우 훌륭한 성적이었다. 무엇보다 조정 OPS가 128에 달했다. 그 투고타저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3할 이상 시즌 4회, 30홈런 이상 시즌 4회, 역대 3루수 유일 8년 연속 90타점 이상의 기록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3루수로서 통산 300홈런을 돌파한 두 번째 타자가 바로 론 산토였다.

단순 공격력을 떠나 론 산토는 마이크 슈미트 이전 최고의 공수겸장 3루수로 불릴 만큼 수비력이 뛰어났다. 5년 연속 골드 글러브를 따낼 정도로 수비를 잘 했고, 훗날 마이크 슈미트가 갱신하기 이전 리그 3루수 수비 기록은 모두 그의 것이었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평생의 지병인 당뇨병을 투병한 채 이루었다는 것이다.

론 산토가 만 18세이던 1958년, 그는 제1형 당뇨병을 판정 받았다. 하지만 당뇨병을 가지고서는 절대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이를 숨겼는데, 당시만 해도 체계적인 관리법이 없었던 터라 론 산토는 철저한 자기 관리와 함께 저혈당 증세가 오면 클럽하우스에서 몰래 초콜릿이나 사탕 등을 먹으며 버텨냈다. 1971년 8월 28일, 리글리필드에서 주최한 '론 산토 데이(Ron Santo Day)' 에서 스스로 투병 사실을 고백하며 마침내 그의 당뇨 투병 사실이 알려졌는데, 당시 그의 고백에 따르면 최초 당뇨 판정을 받던 날 의사는 메이저리그는 커녕 앞으로 25년도 더 살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 최고의 3루수로 군림한 론 산토의 근성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하겠다.

1973년 시즌이 끝난 후, 론 산토는 1:4 트레이드를 통해 이웃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 된다. 퍼거슨 젠킨스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 하며 받아온 유망주 3루수인 빌 매들록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3] 그러나 1974시즌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론 산토는 3루수로 불과 28경기를 출장하게 되고,[4] 대부분의 시즌을 지명타자와 2루수로 뛰게 되는데 설상가상으로 당뇨 합병증까지 찾아오며 그 해 5홈런 41타점 .221 .293 .299의 성적을 기록하고 만 34세의 나이에 미련없이 유니폼을 벗었다.

3. 은퇴 이후[편집]


1974년 '당뇨 퇴치를 위한 론 산토의 행진(Ron Santo Walk to Cure Diabetes in Chicago)'이라는 자선 행사를 개최했다. 그의 팬들과 당뇨 환자, 가족, 친지, 그 외 많은 관계자들이 참가한 이 행사는 훗날 산토가 사망하는 2010년까지 매년 계속되었고, 행사를 통해 소아당뇨연구재단에 기부된 금액은 6천만 달러에 달한다.

론 산토는 '역사상 가장 열정적인 컵스 팬'이라 자칭하며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던 와중 1990년부터 시카고 지역 라디오에서 컵스 중계의 해설자로 데뷔하게 되는데, 감정을 숨기는 일 없이 열정적인 중계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카고 컵스의 젊은 팬들은 론 산토를 열정적인 라디오 해설자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2001, 2002년에 걸쳐 론 산토는 당뇨 합병증으로 인해 양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열정을 잃지 않았다. 2004년에는 론 산토의 당뇨병 투병 일대기를 그린 전기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당뇨가 평생을 싸워야 할 적이라면, 반대로 론 산토가 평생 동안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바로 명예의 전당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당뇨병방광암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명예의 전당 헌액 1년을 앞두고 2010년 론 산토는 애리조나의 자택에서 영면하고 만다. 그의 장례식에서 론 산토가 잠든 관을 든 것은 과거 그와 함께 컵스에서 뛰며 암흑기를 보냈던 팀 동료들, 어니 뱅크스, 퍼거슨 젠킨스, 빌리 윌리엄스 등의 노장들,[5] 영면한 론 산토는 마지막으로 그가 사랑했던 리글리필드를, 그가 13년간 지배했던 3루를 시작으로 한 바퀴 돈 이후 화장되었다. 그의 유골은 유언에 따라 리글리필드에 뿌려졌다.

론 산토는 훌륭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명예의 전당과 살아 생전 인연이 없었는데 처음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로 오른 1980년 불과 5%도 되지 않는 4.4%의 득표율로 바로 후보에서 떨어지고 만다. 아직도 미스터리한 일로 남아 있는 이 저조한 득표율은 지금도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와 관련되어 종종 떡밥이 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론 산토가 그렇게 형편없는 득표율로 떨어질 만큼 못한 선수가 아니다보니 1985년 다시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로 오르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두 차례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론 산토는 결국 15년 내내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여 명예의 전당 후보에서 떨어지고 만다.

어째서 론 산토가 명예의 전당 기자단 투표에서 물을 먹게 되었는지 의견이 분분하나,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그가 뛰던 시절의 시카고 컵스는 그야말로 암흑기여서 커리어 내내 단 한 번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2. 명예의 전당 투표권을 가진 기자단이 3루수에 대단히 인색했다.[6]
3. 최악의 투고타저 시대인 1960년대가 주 활동 시기였기 때문에 성적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4. 홈에서만 강한 반쪽 타자였다. (홈 성적 216홈런 743타점 .296 .383 .522 / 원정 성적 126홈런 588타점 .257 .342 .406)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한 소리나, 사실 알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세이버매트릭스 관점으로 볼 때 론 산토는 그 정도로 저평가될 선수가 아니었다. 세이버매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는 론 산토를 MLB 통산 100대 선수에 선정하며, 그 중 3루수로는 역대 6위에 랭크시켰는데, 당장 산토의 bWAR[7]만 봐도 역대 94위인 70.5로 동시대 팀 동료이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어니 뱅크스, 빌리 윌리엄스보다 높은 수치다.

론 산토는 살아 생전 명예의 전당을 무척 고대했으나, 첫 후보 투표에서 첫해 탈락, 두 번째 후보 투표에서 15수 탈락, 베테랑 위원회에서도 연달아 탈락하며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2003년 자신의 등번호 10번이 시카고 컵스에서 영구결번될 때, 이미 당뇨 합병증으로 두 다리를 잃었음에도 환하게 웃으며 "바로 오늘이, 이 순간이 내게 명예의 전당이다." 라는 소감을 발표했다. 2011년 일리노이 주의회는 론 산토를 명예의 전당에 입성시킬 것을 촉구하는 발기안을 채택했고, 리글리필드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결국 그의 사후, 2011년 12월, 명예의 전당 베테랑 위원회는 전체 16인의 투표단 중 15인이 찬성을 하며 론 산토를 그토록 바라던 명예의 전당에 헌액한다. 시카고 컵스의 영구결번자들이 전원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론 산토
11
147
88
41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Third Base (7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론 산토
70.5
53.8
62.2
3루수 HOF 입성자 평균
68.4
43.0
55.7
[1] 당시는 아마추어 드래프트 제도가 시행하기 이전이었다.[2] 시카고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론 산토는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기도 했다.[3] 빌 매들록은 75, 76시즌 리그 타격왕을 차지하며 제몫을 해낸다.[4] 당시 화이트삭스의 감독 척 태너는 주전 3루수로 70, 71시즌 2년 연속 30홈런을 기록했던 빌 멜튼을 기용한다.[5]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런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암흑기였을 정도로 답이 없던 팀이었다.[6] 론 산토가 은퇴한 해인 1974년까지 3루수 명예의 전당 선수는 파이 트레이너, 지미 콜린스, 홈런 베이커 이렇게 3명에 불과했다.[7] 대게 한 시즌 기록은 fWAR가, 통산 기록은 bWAR가 좀 더 정확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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