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피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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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77년 월드 시리즈 로고.svg파일:1978년 월드 시리즈 로고.png파일:1990년 월드 시리즈 로고.svg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77
1978
1990

파일:1972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2000 MLB 올스타전 로고.svg파일:2001 MLB 올스타전 로고.sv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72
2000
2001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6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스탠 반센
(뉴욕 양키스)

루 피넬라
(캔자스시티 로열스)


서먼 먼슨
(뉴욕 양키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9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 상
벅 쇼월터
(뉴욕 양키스)

루 피넬라
(시애틀 매리너스)


자니 오츠
(텍사스 레인저스)
조 토레
(뉴욕 양키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2001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 상
제리 마누엘
(시카고 화이트삭스)

루 피넬라
(시애틀 매리너스)


마이크 소시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200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올해의 감독 상
밥 멜빈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루 피넬라
(시카고 컵스)


짐 트레이시
(콜로라도 로키스)
















파일:1_qafPWHse44puE9AN7TfVqQ.jpg

루이스 빅터 피넬라
Louis Victor Piniella

생년월일
1943년 8월 28일 (80세)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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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지
플로리다 주 탬파[1]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볼티모어 오리올스 (196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68)
캔자스시티 로열스 (1969~1973)
뉴욕 양키스 (1974~1984)
지도자
뉴욕 양키스 타격 코치 (1984~1985)
뉴욕 양키스 감독 (1986–1987, 1988)
신시내티 레즈 감독 (1990~1992)
시애틀 매리너스 감독 (1993~2002)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감독 (2003~2005)
시카고 컵스 감독 (2007~2010)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수상 내역
5. 감독 성적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의 야구인.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돋보이는 성적을 남겼다.

특히 감독으로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시애틀 매리너스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이보다 앞선 1990년 월드 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 최후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다.

2. 선수 경력[편집]


1969년 캔자스시티 로열스 유니폼을 입으면서 타율 .282 11홈런 68타점을 기록하며 그해 리그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2년차에 흔히 겪는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생애 첫 타율 3할을 기록했고 1972년에는 생애 첫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얻었다. 5년간 캔자스시티에서 뛰고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됐으며 스타급 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월드시리즈 우승 2회, 통산 타율 0.291, 통산 1705안타, 102홈런, 766타점을 기록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3.1. 뉴욕 양키스[편집]


은퇴 후 곧바로 양키스의 타격코치로 1984~85 두 시즌을 보냈으며 1985년 조지 스타인브레너 단주가 빌리 마틴을 해임시키고 루 피넬라를 뉴욕 양키스의 제28대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1986년 90승 72패, 1987년 89승 73패를 기록해 준수한 성적을 냈으나 성질머리가 개차반이던 스타인브레너에게 해고통보를 받는다. 1988년 재임명-재해임당한 빌리 마틴의 뒤를 이어 다시 감독대행으로 취임했으나 팀을 반등시키는 데 실패하고 다시 야인이 됐다. 양키스 암흑기

3.2. 신시내티 레즈[편집]


양키스를 떠난 이후 피넬라의 선수 장악력과 팀 운영능력을 눈여겨보던 신시내티 레즈에서 감독직을 제의했고 1990년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빅 레드 머신의 퇴조 이후 부진했던 레즈는[2] 그 해 와이어 투 와이어(시즌 초부터 시즌 종료까지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고 우승)에 성공하며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우승에 성공했다. 팀 리더 배리 라킨이 덕아웃의 중심을 잡고 폴 오닐에릭 데이비스, 크리스 세이보가 중심타자로 활약했으며 투수진은 에이스 톰 브라우닝, 호세 리호를 필두로 강완의 불펜 3대장 롭 디블-놈 찰튼-랜디 마이어스의 '내스티 보이스'가 뒷문을 책임졌다.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배리 본즈-앤디 반 슬라이크 듀오가 이끈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4승 2패로 승리, 1990년 월드 시리즈에서 명장 토니 라 루사 감독이 이끌고 HoFer 리키 헨더슨데니스 에커슬리, 약물 거포 듀오 '배시 브라더스' 호세 칸세코-마크 맥과이어의 중심타선, 에이스 데이브 스튜어트 등이 포진한 강자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를 상대로 4전 전승 스윕에 성공하며 월드시리즈 우승감독이 됐다. 이는 레즈의 1976년 월드 시리즈 우승 이후 14년 만의 우승이었다.

그러나 1991년에는 승률 5할에도 못미쳤으며 1992년에도 지구 2위에 그쳐 팀과 갈등을 빚었다. 이 와중에 팀의 주력 투수였던 롭 디블이 항명사건을 일으켰고, 피넬라는 결국 신시내티를 떠나게 되었다.


3.3. 시애틀 매리너스[편집]


그런 피넬라에게 오퍼를 날린 팀은 바로 시애틀 매리너스. 1977년 창단 이후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매년 비밀번호를 찍어댔던 시애틀 매리너스로 가서 그는 엉망인 팀의 재건작업을 진두지휘한다. 패배의식에 젖은 팀 분위기를 일신하고 외부 영입, 마이너리거 콜업 등 선수단 개편을 통해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분위기를 형성시켰고 1993년 시즌에는 팀 창단 이후 첫 승률 5할 이상을 찍었다. 그러나 만족하지 않았던 피넬라는 계속 외부에서 선수를 영입하며 팀원들에게 경쟁의식과 긴장감을 유지하였다.

강타자 에드가 마르티네즈-알을 깨기 시작한 유망주 켄 그리피 주니어-양키스에서 데려온 제이 뷰너-1루수 티노 마르티네스[3]의 중심타선, 역시 포텐이 터진 랜디 존슨 등이 이 때 등장했다. 1995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 무려 승차 10.5게임이나 뒤졌으나 후반기 대질주를 통해 기어이 동률을 이뤘고 그 유명한 단판승부(원게임 플레이오프)에서 천사들을 꺾고 창단 첫 서부지구 1위를 일궈내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디비전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까지 꺾으며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 올라갔으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패하였다. 피넬라가 집념을 가지고 추진한 개혁은 이렇게 팬들에게 반전과 전율을 선사하였고 연고지 이전설까지 돌 정도로 동네북이었던 팀은 단숨에 메이저리그 최상급의 인기구단이 되었다.[4] 그 해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시애틀은 이후에도 유망주 알렉스 로드리게스 등이 대폭발하며 서부지구 우승과 포스트시즌 진출의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포스트시즌에서 번번히 발목을 잡혔고 스즈키 이치로브렛 분이 영입된 2001년에는 메이저리그 정규시즌 최다승 타이기록인 116승, 관중동원 350만명이란 금자탑을 세웠으나 ALCS에서 양키스에게 설욕을 당해 월드 시리즈 문턱에서 좌절하였다. 2001년에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시애틀 구단측과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그 와중에 2002 시즌에 93승을 거두고도 103승의 오클랜드와 99승의 애너하임에 밀려 포스트시즌 진출을 실패했다. 그리고 이 즈음, 피넬라의 고향인 탬파의 야구단인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서 피넬라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피넬라는 탬파베이로의 이직을 결심하게 된다.

한편 피넬라의 이적 이후 시애틀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벤치코치를 역임하던 밥 멜빈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했고, 또 한번 93승을 거두고 지구 2위에 올랐으나 이번엔 95승을 거둔 동부지구의 보스턴 레드삭스에 밀려 가을야구를 못갔다. 결국 팻 길릭 단장도 이 시즌을 끝으로 시애틀을 떠나고 시애틀은 신임 단장 체제에서 개혁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신임 단장이 다름아닌 빌 버베이시... 이후 시애틀의 10년이 넘는 눈물겨운 행보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공교롭게도 버베이시는 윗 문단에 나온 1995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역사적인 DTD 당시 에인절스 단장이기도 했다.

3.4. 탬파베이 데블레이스[편집]


당시 탬파베이에서는 시애틀에 전례없던 감독-선수간 트레이드를 제안했고 시애틀이 이를 수락하면서, 데블레이스의 올스타 외야수 랜디 윈과의 트레이드로 피넬라는 고향팀 감독을 맡게 된다.[5]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양대 산맥에 토론토와 볼티모어까지 경쟁이 박 터졌던 AL 동부지구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피넬라는 양키스-신시내티-시애틀 3개팀을 지휘했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유망주를 적극적으로 키우는 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스몰마켓의 팀 특성상 과감한 투자는 언감생심이었고 상위권으로 발돋움할 원동력을 얻지 못한채 팀은 부진했다. 팀 경영진과 마찰이 많았던 피넬라는 결국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래도 2004년 중반 갑작스러운 연승 돌풍을 만들어내 처음으로 AL 동부지구 꼴지에서 탈출하기도 했으니 아무것도 없는 팀에서 아예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3.5. 시카고 컵스[편집]


다시 야인생활로 돌아간 그에게 손을 내민 팀이 있었으니 바로 시카고 컵스였다. 1908년을 끝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했던 컵스는 현질을 시전하며 거물급 선수들을 줄줄이 영입했고 그들을 지휘할 선장으로 피넬라를 임명한 것이다. 2007년 세인들의 기대와 달리 6연패를 기록했으나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 피넬라 감독은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품고 팬들 앞에서 언쟁을 하며 4경기 출장정지 징계처분을 받는다. 감독의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본 선수들은 긴장하고 똘똘 뭉치기 시작하여 결국 시즌 말미에 디비전 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의 달콤한 열매를 얻는다. 2003년 이후 첫 가을잔치였던 2007년 포스트시즌에서 역시나 월드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컵스팬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2008년에는 1945년 이후 팀 최다승인 97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가을야구에서 조기 탈락했고, 2009년에는 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시즌 중반에 팀에서 경질당했다. 이후 별다른 감독직을 수행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은퇴하는 모양새.

그의 감독 경력을 전체적으로 되짚어보면 가진 것도 이룬 것도 하나없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팀들을 재건하는데 탁월한 수완을 보였고 우승후보급(contender)의 상위권 팀으로 키워냈다. 그러나 정규시즌의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에선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단기전에 강한 승부사의 모습보다는 리빌딩의 전문가에 더 맞다. 그래도 신시내티 레즈 시절 월드 시리즈 우승은 해봤으니 그렇게 아쉽지만은 않긴 하다.


4. 수상 내역[편집]


수상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아메리칸 리그 신인상 (1969)
파일:MLB 로고.svg 올스타 3회 (1972, 2000, 2001)
파일:MLB 로고.svg 월드 시리즈 우승 3회 (1977, 1978, 1990)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 상 2회 (1995, 2001)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내셔널 리그 올해의 감독 상 (2008)

5. 감독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1986
NYY
162
90
72
.556
지구 2위
-
1987
162
89
73
.549
지구 4위
-
1988
93
45
48
.484
지구 5위
-[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1990
CIN
162
91
71
.562
지구 1위
WS 우승
1991
162
74
88
.457
지구 5위
-
1992
162
90
72
.556
지구 2위
-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1993
SEA
162
82
80
.506
지구 4위
-
1994
112
49
63
.438
지구 3위
-
1995
145
79
66
.545
지구 1위
CS 탈락
1996
161
85
76
.420
지구 2위
-
1997
162
90
72
.556
지구 1위
DS 탈락
1998
161
76
85
.472
지구 3위
-
1999
162
79
83
.488
지구 3위
-
2000
162
91
71
.562
지구 2위
CS 탈락
2001
162
116
46
.716
지구 1위
CS 탈락
2002
162
93
69
.574
지구 3위
-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2003
TB
162
63
99
.389
지구 5위
-
2004
162
70
91
.435
지구 4위
-
2005
162
67
95
.414
지구 5위
-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2007
CHC
162
85
77
.525
지구 1위
DS 탈락
2008
161
97
64
.602
지구 1위
DS 탈락
2009
161
83
78
.516
지구 2위
-
2010
125
51
74
.408
지구 5위
중도 해임
총계
3548
1835
1713
.517
WS 1승 3CS 3DS

6. 여담[편집]


  • 한 성격할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답게 성격이 불같아 심판들로부터 셀 수도 없는 퇴장을 당했다. 베이스 뽑기는 덤. 선수들한테도 할 말은 다 하는 감독이라 2009년 각 구단 선수들 상대로 진행한 투표에서 '가장 모시고 싶지 않은 감독' 1위에 오르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 1973년 시즌이 끝나고 양키스로 트레이드 되자, 장발 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구단주 스타인브레너에게 직접 항의를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장발이었습니다, 왜 저는 안돼죠?" 어이가 없어진 스타인브레너는 인근 연못을 가르키며 이렇게 답했다: "약 7-8피트 정도 깊이야, 걸어서 건넌다면 원하는만큼 기르도록 허락해주지."라고 응수했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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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영원한 라이벌인 토니 라루사와 동향이며, 리틀야구 시절에 팀메이트였다고 한다.[2] 하지만 1980년대 레즈는 꼴지를 2번만 했을 뿐, 5할대 승률에서 왔다갔다 한 정도로 그렇게 암울하지는 않았다. 대신 1980년대 NL 서부지구 팀들이 아웅다웅했던 면은 있다.[3] 나중에 양키스를 거쳐 선수생활 말년에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서 피넬라와 재회했다. 참고로 티노 마르티네스도 탬파 출신.[4] 신구장 건설을 위한 세금인상 주민투표안이 부결되었음에도 그 해 역전 지구우승과 ALDS에서의 명승부를 통해 지역의 야구열기가 달아올랐고, 그 결과는 세이프코 필드라는 매끈한 신구장 건설로 이어졌다.[5] 다만 실제로는 피넬라와 함께 유망주 내야수 안토니오 페레스가 함께 데블레이스로 건너갔다.[6] 감독대행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