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블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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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블린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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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 Fidelitatem et Constantinam(신의와 안정)

1. 개요
2. 특징
3. 언어별 표기
4. 인구 추이
5. 역사
6. 관광
7. 여담


1. 개요[편집]


루블린은 폴란드 동남부 루부스키에 주의 주도.


2. 특징[편집]


2017년 기준 인구 33만 9850명으로 폴란드에서 9번째로 큰 도시이다. 폴란드에선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로 1569년 동군연합 상태이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연방으로 통합되는 루블린 조약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그런 한편, 제2차 세계 대전기엔 나치 독일 총독부의 SS경찰 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200만명의 폴란드 총독부 유대인을 학살하는 라인하르트 작전이 이곳에서 지휘되었다. 현재는 폴란드 내에서 비즈니스 하기 좋은 도시로 평가받아서 많은 외국자본들이 유입되고 있다고 한다. 구시가지는 규모가 크진 않지만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관광객을 불러모은다.

루블린이 위치한 루부스키에 주는 폴란드에서 제일 비옥한 곳이다. 왜냐하면 초르노젬의 서쪽 끄트머리가 폴란드 동남부까지 뻗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부스키에 주는 폴란드에서 생산량이 가장 많고, 보리도 2번째로 많이 생산한다.

3. 언어별 표기[편집]


폴란드어
Lublin
러시아어
Люблин(류블린)


4. 인구 추이[편집]


파일:Lublin coa.jpg
루블린 인구추이
[2000-2019年]
2000년
358,933명}}}
2005년
354,967명}}}
2010년
348,450명}}}
2015년
340,727명}}}
2019년
339,784명}}}


5. 역사[편집]


루블린은 폴란드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약 6세기경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슬라브족이 폴란드 지역에 자리잡으면서 이 지역은 서슬라브부족 중 하나인 렝지아니(Lędzianie) 부족의 중심지가 되었다.960년 폴란드 국가가 형성되었을 때 이 지역도 가장 빠르게 폴란드에 편입된 지역 중 하나였는데, 아직까진 도시라 부를 순 없는 수준이었다. 이 마을이 처음으로 루블린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서에 기록된 건 1198년의 일로, 이전부터 이 마을은 루블린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블린은 폴란드 왕국의 동쪽 국경에 위치하고 있어 동쪽에서의 침략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는데 13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3차례나 이어진 몽골의 침입 당시 루블린은 항상 함락되었고 루테니아인리투아니아인의 침략도 받아서 14세기가 될 무렵 마을은 심하게 황폐해져 있었다. 1289년부터 1302년까지는 아예 폴란드에서 떨어져 나가 루테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이후 폴란드 군소 공국들을 통합한 브와디스와프 1세14세기 초 이 마을을 발전시켜 도시로 만들었고 후임 왕 카지미에시 3세가 이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해 돌 성벽을 도시에 둘러 요새화했다.

크레바 법령으로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동군연합으로 묶이자 루블린은 두 나라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로서 많은 경제적 혜택을 받았다. 1392년 야기에우워 왕조브와디스와프 2세도시에 무역 특권을 주었고 이에 따라 루블린은 중요한 무역 도시로 거듭났다. 덕분에 루블린은 중요한 정치 중심지로도 성장했는데 15~16세기 동안 이 도시에선 셰임도 여러 차례 열렸으며 1569년엔 100년 넘게 동군연합 상태를 지속해오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실질적인 합병이 이곳 루블린에서 일어났다.(루블린 연합) 연방이 결성된 이후에도 루블린은 연방의 중요한 경제, 정치 문화도시로 기능했는데, 16세기 중반부터 폴란드에 르네상스가 퍼질 때 루블린도 영향을 받아 작곡가 세바스티안 클로노비츠(Sebastian Klonowic), 시인 얀 코하노프스키(Jan Kochanowski)를 비롯한 많은 폴란드 예술가들이 이곳에 터전을 두고 활동했다. 한편 다른 폴란드 대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루블린에도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연방 아래에서 루블린이 번영을 누릴 때 유대인 공동체도 크게 성장했다. 특히 루블린의 예시바[1]는 '유대인의 옥스포드'라 할 정도로 권위가 높았다고 한다.

유대교 뿐만 아니라 폴란드 기독교 역사에서도 루블린은 나름 독특한 자취를 남겼다. 예나 지금이나 폴란드인들은 가톨릭이 절대 다수고, 현대 폴란드나, 전근대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나 개신교, 정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서프로이센이나 슐레지엔, 작센 선제후국 등 독일계 국가들과 경계 지방에 사는 독일계 주민들, 반대 방향에서 현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에서 사는 동슬라브 소수 민족들이 다수였던 반면 루블린은 폴란드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체적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 16-17세기 한동안 자생적인 폴란드인 개신교인 커뮤니티가 번성했던 곳이다. 정확히는 폴란드 형제회라 불린 파우스토 소치누스 계열 반삼위일체론 신학을 따르는 종파라 처음엔 행보를 같이하던 칼뱅주의자들과도 딴 살림 차리게 된 교파인데, 근세에서 루블린 일대는 유일하게 독일인 같은 다른 민족들의 영향력이 아니라 폴란드인들 자체 개종만으로 개신교가 주류인 지방이었다.

하지만 루블린은 연방이 대홍수로 신음하던 시기부터 몰락하기 시작해서 1655년 루스차르국군에 함락되었고 대북방전쟁 당시에도 스웨덴 제국에 함락되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폴란드가 주변 3국에 의해 분할됨에 따라 루블린도 1795년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나폴레옹에 의해 세워진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의 폴란드 영토를 일부 되찾으면서 루블린도 1809년 수복되었지만 나폴레옹이 패한 뒤 1815년 빈 회의에 따라 러시아 제국동군연합으로 묶인 폴란드 입헌왕국 소속의 도시가 되며 사실상 러시아 제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가 19세기 후반부터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루블린도 영향을 받아 주변 폴란드 도시와의 철도가 연결되었고 공장이 들어섰다. 인구도 조금 늘어 1897년 인구는 약 5만 명 정도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가 독일 제국에 크게 밀리면서 루블린도 1915년 독일제국군에 함락되었다. 하지만 1918년 가을 독일 제국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11월 항복하자 루블린에 있던 독일군은 물러나고 도시는 다시 독립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1919~1920년 폴란드-볼셰비키 전쟁 때 폴란드가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밀리면서 루블린도 잠시 붉은 군대에 점령당했으나 바르샤바 전투에서 전세를 바꾼 폴란드군이 도시를 되찾았다. 전쟁이 끝나고 루블린은 폴란드의 중요한 산업도시로 기능했고 가톨릭 신학대학도 세워졌다.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뒤 루블린은 폴란드 총독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점령 초기 총독부는 도시의 게르만화를 강행해 많은 독일인이 도시로 이주한 결과 전쟁 말기 도시 인구의 약 4분의 1이 독일인이었다. 또한 나치가 아직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절멸로 결정하지 않았을 때, 나치는 루블린 근방에 '보호구역'을 만들어 폴란드 유대인들을 격리시키는 '루블린 계획'을 실행했다.[2] 유대인들은 공사에 차출되어 자신들이 격리되어 살아갈 터전을 만들었고 약 9만 명이 이곳으로 강제 이주당했지만 1942년 1월 나치가 유대인 절멸을 결정하면서 루블린 계획도 버려졌고 이 지역은 그대로 강제노동수용소가 되었다.

루블린은 또한 악명높은 폴란드 SS경찰의 본부가 있던 곳으로 1941년 10월부터 폴란드 유대인 절멸계획인 '라인하르트 작전'[3]이 이곳에서 지휘되었다. 도시에 남아있던 약 34,000명의 유대인들은 1941년 3월부터 루블린 게토에 수용되었고 다른 게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유대인들도 과밀과 끔찍한 기아로 고통받다 1942년 3월부터 베우제츠,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4]로 거의 모두 이송되었다. 다만 루블린 게토와 루블린 바로 외곽에 있던 마이다네크 수용소는 SS가 가장 마지막까지 폴란드 유대인의 노동력을 쥐어짜내던 곳으로 라인하르트 작전이 종료될 때까지 상당수 유대인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 작전이 종료될 당시 나치의 절멸수용소와 일부 게토에서 필사적인 봉기가 일어나 SS를 엄청난 위기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나치 점령지 최대의 유대인 노동지역중 하나였던 루블린의 유대인들도 봉기를 일으킬까봐 두려워했다. 이에 따라 루블린의 SS경찰 사령부는 그 이름도 끔찍한 '수확제 작전(Aktion Erntefest)'으로 1943년 11월 3일과 4일 단 이틀동안 루블린과 그 근교, 그리고 마이다네크 수용소에 남아있던 43,000명의 유대인을 총살했는데, 이는 홀로코스트 기간 중 나치가 저지른 단일학살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이런 비극을 겪은 끝에 루블린의 유대인들 역시 전쟁기간동안 대부분 사망하고 말았다.

1944년 7월 24일 루블린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해방 직후 루블린은 소련이 통제하는 '폴란드 국가 해방 위원회(Polish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의 본부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소련위성국이 될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설립이 준비되었다. 1944년 10월에는 마리 퀴리 대학이 세워져서 중요한 과학 연구 도시가 되기도 했다. 전후 폴란드 인민정부의 치하에서 루블린은 고도로 산업화되며 성장했는데, 도시 근교에 당시 폴란드 최대의 자동차공장이던 FSC 루블린 자동차공장이 세워졌다. 또한 PZL-스비드니크라는 헬리콥터 공장도 만들어졌다. 인민정부가 집권한 44년 동안 루블린의 인구는 3배로 늘었다. 하지만 21세기로 들어선 뒤, 폴란드유럽연합에 가입함에 따라 폴란드 전역에서 서유럽으로의 이민이 증가하며 루블린의 인구도 조금 감소했다. 하지만 2008 세계경제위기를 거치고 폴란드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이 추세는 줄어들었다. 또한 현재 많은 외국 자본들이 루블린에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6. 관광[편집]


구시가지가 잘 보존되어 있고, 크라쿠프와 같은 폴란드 남부에 속해 건축양식이나 문화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일부 여행자들에게 '리틀 크라쿠프'라고 불린다. 여행지로서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시간이 많지 않은 한국의 배낭 여행객들이라면, 폴란드 역사에 관심이 많거나 폴란드 구석구석을 여행할 것이 아닌 한 이곳까지 찾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굳이 여행하려 한다면 바르샤바에서 당일치기를 해도 충분하다. 기차를 타면 바르샤바에서 약 두시간 반 정도 걸린다.

폴란드 국토 전체를 봐도 동쪽에 치우친 도시고, 역사적으론 지금은 우크라이나 땅인 옛 르부프 일대 갈리치아볼히니아 지방과 역사를 같이하던 도시라서 폴란드와 중동부 유럽 내부에선 루블린에서 시작해서 국경 넘어 르부프, 카미야네치포딜스키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 동방영토를 여행하는것도 인기 있는 여행 경로이다. 그러나 해당 지방들이 구 동구권 나라들 중에서도 영 경제성장이 더딘 지방들이고, 같은 폴란드,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도 바르샤바, 크라쿠프, 키이우, 흑해 해안 같이 그나마 관광 인프라가 잘된 곳들에 비교해도 미흡해서 한국에서도 갈수록 중부, 동유럽 관광이 늘고 있지만 이 일대에선 여전히 드문 모양.

가까운 도시들로는 약 70km정도 동남쪽에 위치한 자모시치, 약 150km 북서쪽에 위치한 수도 바르샤바, 그리고 약 145km 남서쪽에 위치한 키엘체가 있다.

7. 여담[편집]


대우 1톤 LCV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로 들여오러교 했던 LCV 차량인 대우 루블린의 이름의 유래가 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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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shiva. 정통파 유대교도를 위한 대학[2]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절멸이 결정되기 전까지 나치는 유대인들을 대규모로 추방하거나 특정구역에 격리시키는 '영토적 해법'을 모색했다. 루블린 계획도 이에 따른 것이었다.[3] Operation Reinhard. 1941년 10월부터 시행된 나치의 폴란드 유대인 절멸 계획이다. 이 계획에 따라 나치의 6개 절멸수용소 중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가 세워졌고 폴란드 유대인이 거진 절멸되었다고 생각되는 1943년 11월, 마지막까지 남은 게토와 절멸수용소에서의 봉기가 빈발해지자 종료되었다. 라인하르트 작전으로 살해당한 유대인은 약 200만에 달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세워진 것이 아니라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할 목적으로 1940년 세워졌으며 곧 절멸수용소로 바뀌어 규모를 크게 확장한 케이스다.[4] 1941년 10월 소련군 포로 수용을 위해 세워졌으나 라인하르트 작전 말기에 절멸수용소로 개조되었다. 작전이 끝난 뒤에도 폴란드 총독부에 남은 마지막 절멸수용소로서 학살을 지속하다 1944년 7월 원형이 거의 보존된 채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