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탐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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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루스탐 이바디.png

1. 개요
2. 창건
3. 전성기
4. 쇠퇴와 멸망


1. 개요[편집]


الرستميون
영어 Rustumids

777~909년간 알제리 주요부를 다스린 이란계 이바디파 무슬림 왕조.

2. 창건[편집]


파일:이바디 아프리카.png
760년경 제1차 이바디 이맘국의 세력도

719년 이라크 남부 바스라카와리즈파 공동체에서 북아프리카 튀니지 동부의 카이로완으로 선교사 살마 빈 사드가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카와리즈파베르베르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로 인해 740년에는 하와라, 제나타 부족 등이 카와리즈파로 개종했다. 이어진 베르베르 대항거 이후 마그레브 서부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튀니지에 기반하여 마그레브 동부를 다스리던 피흐리 왕조는 755년, 내전에 돌입했다. 이 혼란을 틈타 757년 리비아의 카와리즈파 세력이 이맘 아불 카탑 압둘알라 이븐 앗-삼흐의 지휘하에 제1차 이바디 이맘국을 세웠으나, 761년 아바스 왕조가 파견한 무함마드 이븐 앗-아쉬아트 알-쿠자이의 토벌군에 패배하여 이맘이 전사하자 멸망하고 말았다.

그 후 마그레브 서부에는 무할라브 왕조가 세워졌는데, 산지에 웅거하던 이바디파 세력은 768년에 재차 거병하여 아미르 우마르 빈 하프스를 전사시켰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인 야지드 빈 하팀이 772년 이바디 이맘 아부 하팀 야쿱 알-말주지를 전사시키면서 제2차 이바디 이맘국이 멸망했다. 반란 실패 이후, 이바디파의 잔존 세력은 사실상 방치되었던 알제리 지역으로 이동하여, 제1차 이바디 이맘국 설립 당시 (마그레브 태생 개종자로서) 바스라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4명의 선교사 중 한 명이었던 압둘라흐만 빈 루스탐을 이맘으로 선출했다.(777년) 압둘라흐만은 타헤르트를 건설하고, 제3차 이바디 이맘국을 세웠다.

3. 전성기[편집]


본래 이바디파의 이맘은 세습이 아닌 선출제였지만, 이란 혈통이었던 압둘라흐만은 어떠한 현지 부족에도 속하지 않아 파벌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다는 이유로 루스탐 가문의 이맘직 세습이 정당화되었다. 건국 이후 타헤르트에는 마그레브 동부에서 축출된 이바디파 부족들이 몰려들었고, 이라크와 오만의 이바디파 공동체에서도 후원금을 보내주었다. 거기에 사하라 횡단 교역의 거점으로 부상하면서 타헤르트는 번영했다.

루스탐 왕조는 788년 압둘라흐만을 계승한 아들 압둘와합(재위 788 ~ 824)의 길고 안정적인 치세때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치세 초엽, 이웃한 모로코에 세워진 쉬아파 국가인 이드리스 왕조에 대해 평화적인 공존을 취하여 틀렘센 일대를 내주었다. 루스탐 왕조의 이바디파 이맘들은 경건한 생활을 유지했고, 대중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했으며 자신의 집을 스스로 고치는 등 솔선수범했다. 얼마 안되는 루스탐 왕조의 대외 전쟁은 812년 동쪽의 수니파 아글라브 왕조에 대한 것이었다.

824년 압둘와합을 계승한 아들 아플라는 종교 율법 뿐만 아니라 아랍 문학, 수학, 천문학 등을 섭렵한 학자였고, 872년까지 안정적으로 통치했다.(비록 이바디파 이맘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아들 아불 아크잔 역시 40권의 저서를 남긴 학자였다. 마그레브의 이라크/ 발흐, 작은 이라크 / 바스라 등의 별명이 붙은 타헤르트에는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이란에서 수집한 서적들이 모인 알-마슈마 도서관이 세워졌고, 나푸사 산지에도 카지나 나푸사가 세워졌다.

4. 쇠퇴와 멸망[편집]


압둘와합 사후 루스탐 왕조는 군사적으로 약해졌고, 909년 쉬아파 파티마 왕조의 침공에 손쉽게 무너졌다. 다만 100년 이상 사하라 무역을 주도한 루스탐 왕조의 이바디파 상인들은 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와 가나 왕국 등지에 이슬람을 전파하며 서아프리카 이슬람화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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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꼭 아리우스파가 게르만족의 기독교화에 있어 마중물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