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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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루이 14세는 영웅 같은 자태에 위엄이 배어있어서, 그의 작은 몸짓조차도 오만함이 아닌 장중함으로 보였다. 그 완벽한 표정과 위엄서린 분위기는 조각가가 모델로 삼고 싶을 정도이고,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우아함과 매력을 지녔다.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제3대 왕. 할아버지 앙리 4세와 함께 프랑스 국왕들 중에서 유이하게 대왕(大王) 칭호를 받았다. 별명으로 태양왕(Le Roi Soleil)이 있다.이 나라의 백성들은 그들의 왕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존경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시인이자 외교관 Matthew Prior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과 프롱드의 난[편집]
부모인 루이 13세와 스페인 출신의 아나(Ana de Austria)[2] 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극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탄생은 국가적 축복을 받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 그 자체였다. 특히 자식들에 대한 기대가 지나쳤던 루이 13세는 자식들한테 애정도 주지 않으면서 세 살배기에 불과한 아들 루이 14세가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정없이 매질하는 모진 아버지였다. 그러던 루이 13세가 1643년에 급서하면서 5살이 채 되기 전에 즉위했고, 어머니 안이 섭정을 했으나 대부분의 국사는 추기경이자 재상인 쥘 마자랭[3] 이 1661년까지 맡았다. 즉, 23살에 친정을 시작한 것이다.[4]
1648년, 마자랭은 오만하게도 스페인에게 카탈루냐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교환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프랑스의 동맹국 네덜란드에게 충격을 주었고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단독강화를 맺었다. 결국 프랑스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11년간 전쟁을 더 이어갔다. 전쟁 지속을 위해 마자랭은 세금을 늘리려 했으나 이는 큰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1차 프롱드의 난이 터졌으나 마자랭은 대 콩데(Grand Condé)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대 콩데와 마자랭 모두 굉장히 오만한 사람들이었고, 마자랭에게 반발하여 대 콩데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2차 프롱드의 난이라고 한다. 대 콩데는 뛰어난 군사적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한때 프랑스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으나 오만한 성격으로 민심을 잃고 또 다른 명장인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와의 전투에서 일진일퇴를 거두다가 민심이 멀어져 병력이 계속 줄어들자 튀렌에게 패하고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프롱드 중에 2차 프롱드의 난은 프랑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파리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고, 영향을 받은 지역민의 25%가 죽었다.[6] 하필 소빙기가 가장 심할 때 터진 반란으로 인해 프랑스는 대타격을 입었고 1652년부터 스페인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잉글랜드의 도움으로 프랑스는 간신히 플랑드르에서 우세를 점했으나 이탈리아 반도에서 스페인에게 밀리자 프랑스나 스페인이나 전쟁에 너무 지쳐 있는 상태였고 결국 피레네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과 1659년 피레네 조약은 과거에는 "프랑스의 패권이 시작되고, 스페인의 몰락을 보여준다."고 여겨졌지만 현재 학자들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프랑스는 프롱드로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고 국가가 초토화되었다. 이것은 루이 14세의 친정 이전까지 왕의 권위를 비참할 정도로 추락시켰다.
2.2. 친정 초반, 여러 개혁을 실시하다.[편집]
루이 14세는 프롱드로 초토화된 프랑스를 물려받았다. 리슐리외와 마자랭이 만들어 놓은 절대왕정을 물려받기는커녕 그들의 오만한 성격으로 인해 프롱드를 유발시켰고, 왕권을 약화시켰다.[7] 결국 루이 14세는 처음부터 다시 왕권을 세우고 프랑스를 복구해야 했다. 워커홀릭이었던 루이 14세는 하루에 6시간 이상 일했는데 우선 국무회의를 자신의 뜻에 따라 개최하면서 권력을 집중시켰고 여러 재정, 행정 개혁[8] 을 단행하였다. 그 중에 루이 14세는 군제 개혁을 가장 중요시했다. 르텔리에 부자(父子)[9] 는 루이 14세의 뜻에 따라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흔히 "프랑스군이 30년 전쟁 시기에 강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오로지 기병에만 해당되었다. 프랑스 보병은 유럽에서 최악의 병사로 유명했다.[10] 루부아 후작은 프랑스의 보병을 유럽 최고로 만들었고, 기병은 30년 전쟁 시기의 명성 이상으로 강해지게 하였으며 프랑스군을 40만까지 증가시켜 유럽 최강의 군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개혁을 바탕으로 왕권은 엄청나게 강해졌고 프랑스는 프롱드의 상처를 회복했다.
2.3. 자연국경설과 그에 잇따른 전쟁[편집]
흔히 루이 14세가 고대 갈리아의 영토와 같은 자연국경을 프랑스의 국경으로 삼고자 공격적인 팽창을 했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이 이론은 19세기에 알베르 소렐이 주장한 이론이고, 이 주장은 이후 연구자들에 의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소렐의 연구 이후 학자들은 루이 14세의 국경 정책이 국경을 따라 방어하며 오갈 수 있는 지역을 확보하는 것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즉, 루이 14세 시절의 자연국경이라는 용어는 필립스부르크와 스트라스부르가 있는 라인강이나 포 강의 카살레처럼 강 건너편에 대한 영토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구를 암시하는 것으로 봐야 하며 오히려 라인강을 통째로 프랑스 국경으로 삼자는 자연국경설은 오히려 부르봉 왕조를 무너트린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존 린(John Lynn)은 루이 14세가 주도한 다섯 번의 전쟁을 비롯한 프랑스의 대외정책 전반이 당시 국제 정치 체제의 틀 내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즉, 갈리아 국경 복원이라는 원대한 목표는 루이 14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참조]
1667년 ~ 1668년 귀속 전쟁: 루이 14세가 군제개혁으로 강해진 프랑스군을 이끌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진격하여 플랑드르 대부분을 석권하는 성과를 보여주었으나 프랑스의 성과에 놀란 네덜란드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잉글랜드-스웨덴과 함께 삼중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압박했고 카를로스 2세의 섭정이었던 카를로스의 어머니 마리아나가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프랑스를 고립시키자[11] 루이는 플랑드르의 12개 도시만 차지한다는 엑스라샤펠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배신에 격노한 루이 14세는 네덜란드를 응징하고자 했다.
1672년 ~ 1678년 네덜란드 전쟁과 1683년 ~ 1684년의 재결합 전쟁: 1670년에 프랑스는 로렌 공국을 점령했고 잉글랜드와 스웨덴을 네덜란드와의 동맹에서 이탈시키고 오히려 프랑스의 동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튀렌 원수의 작전에 따라 루부아의 개혁으로 증가한 13만 병사를 이끌고 루이는 네덜란드를 기습해서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수문이 열리고 프랑스 해군이 패배하면서 암스테르담으로의 진격은 막혔다. 이때 네덜란드는 프랑스에게 브라반트와 마스트리히트를 양도하겠다고 했으나 루이 14세는 오만하게도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했고 분노한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결국 오라녜 공 빌럼 3세가 정권을 잡고 스페인-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보급선을 끊어버리자 프랑스는 네덜란드 본토에서 철수했고 프랑스는 네덜란드 정복을 포기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프랑슈콩테, 알자스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1674년부터 프랑스는 많은 플랑드르 영토와 프랑슈콩테 전역을 확보했고 1677년에는 카셀에서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대승을 거두어 프랑스는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해서 보방이 필요하다고 한 많은 영토를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오랬동안 프랑스가 눈독들이던 프랑슈콩테 합병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루이는 1678년의 네이메헨 조약이 프랑스가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다고 판단하여 재결합 회의소를 점령지에 설치하여 강제로 주변지역을 합병하기 시작했고 제국도시 스트라스부르를 강제로 합병하자 신성 로마 제국 전역이 프랑스를 적대했고 여기에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의 빈 포위를 오히려 부추긴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심각하게 고립되었다.1684년 레겐스부르크 휴전으로 프랑스는 "재결합" 영토와 스트라스부르, 룩셈부르크 점령을 인정받았으나 이제 프랑스의 동맹국은 사실상 오스만 제국만 남았다.
1676년 ~ 1688년 보방의 요새화 정책: 프랑스는 오랫동안 수도 파리가 국경 가까이에 있어 전쟁에서 위험성이 높았기 때문에 새로운 영토를 확보한 상태에서 루이는 보방에게 프랑스 국경을 철저하게 요새화시킬 것을 명령했다. 보방은 기대에 부응하여 프랑스 국경을 철의 국경으로 만들었다.
1688년 ~ 1697년의 9년 전쟁과 스페인 분할 협상: 1688년부터 오스만 제국이 본격적으로 신성동맹에 밀리기 시작하고 가을이 되자 벨그라드까지 상실하자 루이 14세와 장바티스트 콜베르의 죽음 이후 권력을 장악한 루부아 후작은 매우 불안해졌고 이에 레겐스부르크 "휴전"을 "조약"으로 바꿀 것을 레오폴트 1세에게 요청했으나 거부당하고 오스만 주재 프랑스 대사 피에르 지라르댕이 오스만 제국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알리자 다급해진 루이 14세는 팔츠 선제후국을 침공하여 오스만 제국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전 유럽이 프랑스를 적대시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행동은 전 유럽이 프랑스를 대적하게 만들었고 결국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함께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했다. 프랑스군은 군제개혁으로 강해진 상태였고 국경을 요새화시켜두었기 때문에 전 유럽과의 전쟁에서 야전에서는 승리했으나 경제가 버티질 못했고 대기근으로 프랑스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자 루이는 결국 로렌, 룩셈부르크와 재결합 영토 대부분을 반환한다는 레이스베이크 조약에 서명했다. 프랑스는 오스만의 붕괴를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경제가 초토화되어 더 이상 전쟁을 벌일 여력이 부족했고 이 사실을 잘 알던 루이 14세는 카를로스 2세의 죽음이 임박하자 1698년 헤이그 조약에서 그랑 도팽 루이에게 기푸스코아,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을 떼주고 나머지 지역은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차지한다는데 동의했고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급사하자 1700년 런던 조약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에게 그랑 도팽 루이에게 할당된 기푸스코아,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제공한다는 조약에 서명했다. 그런데 카를로스 2세는 분할 조약 소식에 불쾌해했고 카스티야 귀족들이 강력하게 부르봉 왕조의 왕위 계승을 지지한데다가 스페인 분할을 막기 위해 전 유럽을 상대로 버틴 프랑스라면 스페인을 지켜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겨주고 만일 스페인 영토를 분할할 시 왕위가 취소된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사망했다.
1700년 ~ 1714년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카를로스 2세의 유언장 내용을 들은 루이 14세는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만일 유언장을 받아들이면 당연히 전쟁이 터질 것이 자명했고 이미 경제가 약해진 프랑스로서는 버티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처음에는 유언장을 거부하기로 했으나 평소에는 무기력하던 그랑 도팽 루이가 자기 아들을 위해 유언장 수락을 강력하게 요청하자 루이 14세는 결국 유언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루이 14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저 부르봉 왕조와 아들, 손자를 위한 것일 뿐 프랑스의 영토확장 야심은 전혀 없다고 전 유럽에 알렸으나 문제는 루이 14세가 미쳤는지 스페인을 프랑스의 속국처럼 부리자 당연히 루이 14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잉글랜드-네덜란드는 이미 전쟁을 선포한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고 결국 프랑스는 또 전쟁에 휘말렸다. 루이 14세는 프랑스가 9년 전쟁 시기 전 유럽을 상대로 버텼고 이번에는 스페인-바이에른도 동맹인데다가 방어전이어서 프랑스가 도박을 벌일 만 하다고 생각했으나 문제는 프랑스군이 너무 허약해진 상태였다. 튀렌, 대 콩데, 뤽상부르는 이미 죽었고 빌라르, 베릭, 방돔이라는 뛰어난 원수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전임자들의 능력에 훨씬 못 미쳤다. 결정적으로 이전에 강력했던 프랑스 보병은 이미 잉글랜드 보병에 밀리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의 핵심인 기병은 경제난으로 약해져서 잉글랜드 기병에게 밀렸다. 결국 프랑스의 카드는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이었지만 전선이 너무 많아서 숫적우위를 활용하기도 힘들어졌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초반에는 바이에른군과 함께 빈을 위협했으나 1704년 블레넘에서 말버러 공작의 기병돌격에 털렸고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에 정복당했다. 그래도 빌라르, 방돔 원수의 활약으로 1706년 초반까지는 다시 동맹군을 밀어붙이다가 라미예 전투에서 루이 14세의 빌레루아 원수 신임으로 인해 또 말버러 공작의 기병에 털린 프랑스군은 플랑드르를 내주고 본토가 위협당했다. 자신을 배신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12] 를 참교육하고 알프스 산맥 통로를 통제하는 사보이아 공국을 제압하여 프랑스와 스페인령 이탈리아를 연결하기 위해 침공한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라 푀이야드 원수의 삽질로 토리노 함락은커녕 토리노 공방전에서 털리면서 이탈리아 전역에서 부르봉 동맹군의 영향력이 일소당했다. 그래도 베릭 원수의 활약으로 이베리아 전선에서는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1708년 프랑스는 공세로 나섰으나 프티 도팽 루이(부르고뉴 공작)의 삽질로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말버러 공작의 기병에게 또 털렸고 때마침 찾아온 1708~1709년 겨울의 대한파[13] 로 인해 대기근이 돌면서 프랑스 전역에서 60만 명 넘게 사망하는 등 전국이 초토화되자 더 이상 전쟁 수행이 불가능해진 루이 14세는 사실상 항복의사를 동맹군에게 전달했다. 루이 14세는 지금까지 자신이 정복한 모든 영토와 스페인 왕위를 포기할테니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앙주 공작 필리프를 앉혀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동맹군은 루이 14세에게 둘째 손자를 강제로 쫒아내라는 모욕적인 요구와 함께 프랑스를 사실상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추가요구를 했고 루이 14세는 이 요구만은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프랑스인 백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동시에 손자를 쫒아내라는 요구 말고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했으나 동맹군은 거절하고 파리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동맹군에 분노한 프랑스인들이 모금 운동과 함께 자진입대를 하고 프랑스군이 말플라케 전투에서 에서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동맹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전쟁에 염증이 난 영국인들은 전쟁을 지속하자는 휘그당을 버렸고 여기에 요제프 1세가 죽고 카를 대공이 카를 6세로 즉위하자 오스트리아의 세력이 너무 강해질 것과 프랑스가 계속 버티는데 성공하자 부담을 느낀 영국은 전쟁에서 이탈하기로 결정했다. 영국은 이퍼르, 니우포르트, 투르네 등을 할양하고 프랑스가 스페인을 합병할 수 없다는 조항을 넣는 대신에 이전에 프랑스에 요구했던 정복지 완전반환과 스페인 왕위를 카를 6세가 물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취소했다. 남은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은 다시 파리를 향해 진군했으나 빌라르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드냉 전투에서 패배하자 네덜란드는 전쟁에서 이탈했고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라슈타트에서 단독강화를 맺으며 전쟁은 드디어 종결되었다. 전쟁에서 프랑스는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고 특히 재정이 심하게 망가져 이후 수십년동안 이를 회복해야 했고 프랑스군이 더 이상 유럽에서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플랑드르 일부를 제외한 정복지를 지켜냈고 오랑주 공국과 같은 일부 영토를 오히려 추가한데다가 합스부르크 포위망을 드디어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2.4. 위그노 탄압과 낭트 칙령 철회[편집]
루이 14세의 위그노 탄압이 프랑스 경제를 망쳤다는 분석이 과거의 통설이었지만 현재 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14] 1685년 이후 많은 위그노들이 탈출했고 이들이 프로테스탄트 국가에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프랑스도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서 탈출한 가톨릭교도들을 받아들였다. 특히 아일랜드 출신 가톨릭교도들은 프랑스에 많은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제공했다.[15] 즉, 당시 프로테스탄트나 가톨릭은 국가적 이동이 활발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봐야지 어느 한 국가가 맹목적인 탄압으로 일방적인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는 주장은 현재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낭트칙령 이후에도 위그노들도 공존은 커녕 구교들을 몰아내고 신교국가를 건설하고자 폭동과 반란을 자주 일으키면서 사회질서를 혼란스럽다보니 루이14세도 극단처방을 한 것이다.
2.5. 장기 집권[편집]
1715년 9월 1일에 죽을 때까지 왕좌에 앉아 있었는데, 77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나흘 전이었다. 현대를 기준으로 해도 꽤나 장수한 셈. 그의 치세기간은 최종적으로 72년 3개월 18일이었는데, 유럽 대국의 군주 중 실질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재위했다. 참고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 재위한 사람은 라이벌인 영국의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2세다.[16][17]
루이 14세의 치세 말년에 들어서 프랑스에는 천연두와 홍역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 때문에 루이 14세는 자신의 자손들이 전염병으로 몰살당하는 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1711년경에는 왕태자 그랑 도팽 루이가 천연두로 죽었고[18] , 왕세손 프티 도팽 루이는 29세에 홍역으로 급사했다. 둘째 손자 필리프는 펠리페 5세로 스페인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 왕위 상속권을 영구적으로 포기했다. 셋째 손자 베리 공작 샤를은 무사히 성년으로 자랐지만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결국 맏증손자마저 천연두로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할 만한 적통은 둘째 증손자 루이 15세만이 남았다. 손자들이 계승한 장수왕이나 영조, 구스타프 6세 아돌프보다 한수 위.
참고로 이러는 동안 이웃 나라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그의 재위 동안 스튜어트 왕조의 찰스 1세, (잉글랜드 내전 후) 올리버 크롬웰과 리처드 크롬웰의 신정 공화국, (왕정복고 후) 찰스 2세, 제임스 2세, (명예 혁명 후)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공동 왕), 앤 여왕[19] , 하노버 왕조의 조지 1세가 차례로 재위했다. (왕이 일곱 명, 호국경이 두 명)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절대왕정 국가였던 영국이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의회가 확고한 승리를 거두면서 입헌군주제 국가가 된 기간이었던 것이다.
워낙 오래 집권하는 바람에 아들과 손자가 먼저 죽는 것을 보고 본인의 제위는 결국 증손자가 물려받게 되었다.
2.6. 죽음[편집]
앞서 말했듯 루이 14세의 말년은 매우 비참했기에 죽으면서, 네 살배기 증손자 루이 15세에게 다음과 같은 참회의 말을 남겼다.
“얘야, 짐만큼 무수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드시 피하도록 하거라. 그 전쟁들은 신민을 파멸시켰다. 짐은 종종 전쟁을 너무 가볍게 여겨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생각하였지.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쓰거라. 짐이 밟은 나쁜 길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구나..."
"Je m'en vais, mais l'État demeurera toujours."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21]
사후 부검된 뒤, 심장은 암모니아에 담겨져 남았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왕속 물건들을 내다팔던 이들이 100프랑으로 팔아치웠다.
이걸 영국 성공회의 윌리엄 버클랜드 주교가 1,000프랑에 사가면서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주교의 후손인 의사 프랭크 버클랜드 (1826년 ~ 1880년)가 이걸 먹어치웠다... 이 사람이 워낙에 별미를 찾던 미식가로 전 유럽에서 알아주던 기인이었다.[22]
그런 버클랜드가 루이 14세 심장을 먹어보곤 특별한 맛은 없고, 그저 세상에서 왕의 심장을 먹어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자랑거리가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루이 14세가 죽자 전쟁과 세금으로 고통받았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기뻐했다고 한다.
3. 가족 관계[편집]
가족관계가 워낙 복잡해서 아예 항목으로 분류해 서술한다.
3.1. 조상[편집]
3.2. 본부인과 자녀들[편집]
- 루이 14세(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
-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31] (1638년 ~ 1683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의 딸
- 그랑 도팽 루이(1661년 11월 1일 ~ 1711년 4월 14일) - 본래대로라면 루이 15세가 되어야 하지만 1711년 사망[30] 했다.
- 손자: 프티 도팽 루이(1682년 8월 16일 ~ 1712년 2월 18일) - 본래대로라면 루이 16세가 되어야 하지만 1712년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증손자: 루이(1704년 6월 25일 ~ 1705년 4월 13일) - 본래대로라면 루이 17세가 되어야 하지만 한 살도 되기 전에 사망했다.
- 증손자: 루이(1707년 1월 8일 ~ 1712년 3월 8일) - 1712년 겨우 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증손자: 루이 15세 - 원래대로면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
- 둘째 손자: 펠리페 5세(1683년 12월 19일 ~ 1746년 7월 9일) - 스페인의 왕.
- 셋째 손자: 베리 공작 샤를(1686년 7월 31일 ~ 1714년 5월 5일)
- 손자: 프티 도팽 루이(1682년 8월 16일 ~ 1712년 2월 18일) - 본래대로라면 루이 16세가 되어야 하지만 1712년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안 엘리자베트(1662년 11월 18일 ~ 1662년 12월 30일)
- 마리 안나(1664년 11월 16일 ~ 1664년 12월 즈음)
- 마리 테레즈(1667년 1월 2일 ~ 1672년 3월 1일)
- 필리프 샤를(1668년 8월 5일 ~ 1671년 7월 10일)
- 루이 프랑수아(1672년 6월 14일 ~ 1672년 11월 4일)
- 그랑 도팽 루이(1661년 11월 1일 ~ 1711년 4월 14일) - 본래대로라면 루이 15세가 되어야 하지만 1711년 사망[30] 했다.
성인이 된 자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5세가 되기 이전에 죽었다.
3.3. 내연녀들과 사생아들[편집]
- 라 발리에르 여공작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1644년 8월 6일 ~ 1710년 6월 6일) 소생
- 몽테스팡 후작 부인 프랑수아즈아테나이 드 로슈아르 모르트마르(1641년 10월 5일 ~ 1707년 5월 27일) 소생
- 루이즈 프랑수아즈(1669년경 ~ 1672년 2월 23일)
- 멘 공작 오귀스트(1670년 3월 31일 ~ 1736년 5월 14일)[32]
- 루이 세자르(1672년 6월 20일 ~ 1683년 1월 10일)
- 콩데 공작 부인 루이즈 프랑수아즈(1673년 6월 1일 ~ 1743년 6월 16일)[33]
- 루이즈 마리 안(1674년 11월 12일 ~ 1681년 9월 15일)
- 오를레앙 공작 부인 프랑수아즈 마리(1677년 2월 9일 ~ 1749년 2월 1일)[34]
-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산드르(1678년 6월 6일 ~ 1737년 12월 1일)[35]
- 맹트농 후작 부인 프랑수아즈 도비네(1635년 11월 27일 ~ 1719년 4월 15일)[36] 소생은 없음
- 클로드 드 빈(1637년 ~ 1687년 5월 18일) 소생
- 퐁탕주 여공작 마리 안젤리크 드 스코라이(1661년 ~ 1681년 6월 28일) 소생
- 아들: 1680년 1월에 사산했다.
- 딸: 1681년 3월에 태어나서 1681년에 죽었지만 정체가 의심스럽다.
이 밖에도 수십 명의 내연녀 사이에서 수백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정체가 확실하지 않다.
3.4. 여자 관계[편집]
-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사[37] 를 왕비로 맞이했지만 정략결혼이었던 터라 관계는 소원한 편이었다. 마리아 테레사는 경건한 분위기의 스페인 궁정에서 자란 데다가 재치가 없었던터라, 유럽 최고로 화려한 프랑스 궁정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래도 루이 14세는 마리아 테레사에게 애정이 없었던 것과는 별개로 왕비로서는 나름대로 권위를 세워주었다. 루이 14세는 마리아 테레사가 죽을 때까지 1주일에 세 번 왕비를 방문하는 관습을 철저히 지켰고, 애인들과 즐길 때 즐기더라도 잠은 대부분 아내의 방에서 잤으며 부부관계도 어느 정도는 챙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이가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이후 마리아 테레사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루이 14세는 "그대가 짐을 처음으로 슬프게 하는군."이라고 말하며 슬퍼했다. 여담으로 마리아 테레사는 성품이 선량하긴 했지만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만연한 근친혼의 후유증 때문인지 다소 우둔했다. 때문에 마리아 테레사가 굶주린 백성에게 브리오슈라도 주자고 했던 것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로 왜곡된 것 아니냐는 말도 있을 정도다.
정실 왕비인 마리아 테레사와의 사이에 여러 아이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적손(嫡孫)은 오로지 뒷날 루이 15세가 되는 증손자의 가계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한 차손 펠리페 5세의 가계만이 남았다.[38] 수많은 메트레상티트르(Maitresses en Titre), 즉 왕의 정부들에게서 사생아들을 보았고 자녀들에게는 상당히 자상한 아버지였다. 사생아들도 궁정에서 직접 안아 길렀으며 자란 뒤에는 작위와 재산을 아낌없이 주었다.
- 루이 14세의 첫사랑은 섭정이었던 추기경 마자랭의 조카 마리 만치니였는데, 그녀는 국왕과 결혼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고 둘의 관계를 반대한 마자랭과 모후 안 도트리슈에 의해 결국 이탈리아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 친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내, 그러니까 제수씨인 헨리에타 앤[39] 과 염문을 뿌렸고, 이후에는 헨리에타의 시녀인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와 연애하여 아이들을 낳았다.
- 라 발리에르와의 관계도 소원해진 후에는 신하인 몽테스팡 후작의 아내와 바람이 나서 꽤 오랫동안 동거하게 됐고 라 발리에르는 밀려났다. 둘 사이에는 6명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당시 교양있는 부인으로 이름나 있던 맹트농 부인에게 아이들의 양육을 부탁했다. 루이 14세는 몽테스팡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퐁탕주 부인 등을 또 정부로 삼았고 자신이 라 발리에르처럼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 한 몽테스팡은 마녀를 찾아가 흑미사를 올리며 왕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했는데, 결국 이 마녀가 잡히면서 연루되어 있던 몽테스팡은 총애를 잃었다.
-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맹트농 부인은 왕과 사랑에 빠지기 전에 그에게 "불륜을 그만두고 아내를 소중히 여기라"는 충고를 했고, 루이 14세가 그 말에 따라 몽테스팡과 결별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은 또 맹트농에게 빠졌고 얼마 뒤에 마리아 테레사 왕비가 죽자 이번에는 아예 맹트농과 결혼해 버렸다. 물론 귀천상혼이라서 공식적인 왕비가 될 수는 없었다.
4. 여담[편집]
- 루이 14세 부처(夫妻)의 베르사유 궁전 생활은 일찍부터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공개되었다. 특히 일요일의 만찬은 누구나 볼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루이 14세의 삶은 계란 까먹는 모습이 우아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구경꾼들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왕은 그런 국민들의 기대에 답하기 위해 한 번에 5개씩 까먹기도 했다.
- 루이 14세의 식탐은 대단했다고 알려졌는데 연회가 열릴 때면 폭식을 해서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40] 는 "국왕 폐하께서는 4종류의 수프를 따로, 꿩 2마리를 모두, 큰 샐러드 한 접시, 두꺼운 햄 2조각, 마늘소스로 양념된 양고기 한 접시, 페이스트리 한 접시 가득, 마지막으로 과일과 삶은 계란을 드시는 것을 자주 봤다. 폐하와 '남자 분'[41] 은 모두 삶은 계란을 지나치게 좋아하신다"라고 기록했다.[42] 평생 소화불량과 장염, 당뇨 등에 시달리면서도 식탐을 놓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폭식이 남성미라는 시선과 쇼맨십 때문도 있지만 어린 시절 프롱드의 난으로 겪었던 가난과 배고픔 때문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했다. 다만 삶은 계란의 경우 왕의 식사를 관람하던 백성들이 "정말로 우아하게 드신다"며 추켜세우는 통에 더욱 쇼맨십을 발휘했다고 한다. 위 주석에 있는 왕비의 경멸도 사실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 심할 때는 식사가 거의 끝났는데도 삶은 계란을 연속으로 5개나 더 까먹었다고 한다.
- 서양에서는 이때까지 포크나 젓가락같은 식사도구가 없어서 왕족도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었다. 루이 14세 시기에 이르러서야 포크가 막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손자가 포크를 사용하려고 해도 "나는 칼과 손가락 말고는 다른 걸 사용해 본 적이 없어"라며 못하게 했다고 한다. 포크를 사용하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비난하면서 손으로 음식들을 마구 집어 먹었다. 다만 말년에는 얌전히 포크로 음식을 먹었고, 이는 곧 전 유럽에 유행으로 퍼져 비로소 식사때 손 대신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에티켓으로 자리잡았다.
- 최후에는 몸의 반신이 썩어 들어갔는데, 그 상태에서도 귀족들을 불러 모아 작별 인사를 했을 정도로 쇼맨십이 강했던 인물이다. 왕으로서, 자신의 삶이 노출되는 것 정도는 개의치 않았던 인물. 심지어 평민이라 해도 정장을 제대로 갖추면 베르사유에 마음대로 들어올수 있어서, 베르사유 궁 앞에는 당시 정장에 필수요소인 스몰 소드를 대여해 주는 대여점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 출산을 할 때 별로 좋지 않은 자세인 쇄석위(碎石位, lithotomy position, 절석위, 切石位)를 퍼뜨린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이런 힘든 자세로 낳게 된 이유는 루이 14세가 자신의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는 것에 너무 집착하여 당시 분만법이었던, 의자에 앉아 아이를 낳는 것을 테이블에 누워서 등자로 다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명령했고, 이 시기 때 아기를 꺼내기 위한 겸자가 발명되어서 그렇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해당 자세는 프랑스의 산부인과 의사 프랑수아 모리소(François Mauriceau)가 여성이 분만할 때 등을 대고 눕는 것을 권장[44] 했다는 것이 밝혀지며 사실이 아닌 걸로 드러났다. 단, 선술한 왕비의 공개 출산은 사실이다.
- 커피를 무척 좋아해서 당시만 해도 오스만 제국이 독점하던 커피 원두를 선물로 가득 받고 오스만 제국의 빈 침공에 대해 일절 무시한 바 있다. 물론 단순히 커피만 받아서가 아니라 당시 오스트리아를 어느 정도 견제해야 했던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다만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을 적대하며 오스만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차였던 걸 감안해야 한다. 근세 유럽에서 대륙의 주도권을 쥔 최강자 지위를 두고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왕국과 격렬하게 경쟁하던 것이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대공국(+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진 신성 로마 제국 제위와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 다른 영토들)이었고, 이 경쟁 구도에서 기독교(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여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다른 기독교 국가들의 비판을 감수하며 오스만 제국과의 협력관계를 맺는 것이 프랑스의 대전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루이 14세의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이 오스트리아의 심장부인 빈을 공격하는 것은 종교적 입장 때문에 차마 돕기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이유는 더욱 없고, 그저 베르사유 궁전에 편히 앉아 낄낄거리면 적당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이 루이 14세에게 커피 원두 선물을 잔뜩 보낸 것은 직접적인 뇌물이라기 보다는 오스만 제국에게도 중요한 유럽 내 동맹국의 왕에게 보내는 친선 목적의 예물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고, 반대로 오스트리아 인들이 "커피콩에 넘어간 뚱보"라고 루이 14세를 욕한 것은 경쟁국 국왕이 적국과 선물이나 주고받으면서 자국의 심각한 군사적 위기를 구경하며 간보고 있으니 트집거리는 뭐든 찾아서 가져다붙여 욕하는 데 쓴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만 오스만이 2차 빈 공방전에서 패하고 발칸 반도까지 밀리자 오스트리아의 스트라스부르ㆍ자르ㆍ뤽상부르와 팔츠 선제후국을 공격해 오스만이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이후 신성동맹의 2/3가 프랑스 방면으로 군대를 돌리면서 잉글랜드ㆍ오스트리아ㆍ네덜란드의 침공을 받으며 프랑스가 식량난을 겪자 오스만 제국이 식량을 공급해주기도 했다. 아무리 비싼 사치품이라도 한 나라의 왕을 매수하여 국가의 향방을 좌우하기에 충분할만큼 값비쌀 수는 없고 절대로 바보가 아닌 루이 14세가 이를 모를 리 없다. 물론 이후 프랑스는 급성장한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전통적인 라이벌이던 오스트리아와 혼인 동맹까지 맺게 되고 프로이센이 성장하여 탄생한 후신인 독일과의 적대 관계는 결국 2차례의 세계대전에 이르게 되지만 그것은 이후의 이야기이며 루이 14세 시대까지 프랑스의 라이벌은 오스트리아였다.[45]
- 문학, 예술 분야에 많은 지원을 하여 몰리에르, 라신, 코르네유 등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가 있었고, 베르사유 궁전은 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따라서 지방의 영지에서 올라와 궁에 상주하며 중앙화된 귀족들과 이들 예술가들의 결합은 화려한 궁정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춤 실력도 무척 뛰어나서 루이 14세 본인이 직접 공연에 서기도 했다.[46]
- 음악만이 루이 14세의 유일한 취미라고 생시몽 공작이 공헌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으며 그중에서도 궁중 음악가인 장바티스트 륄리와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관계로, 그와 그의 음악을 특별히 아꼈다. 심지어 동성애 소문까지 퍼질 정도. 그럼에도 정작 륄리가 동성애에 관련해서 좋지 못한 추문에 휩싸이자 점차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륄리가 작곡한 발레에 맞춰 루이가 춤을 추는 공연이 잦았는데, 젊은 루이가 태양신 아폴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면 온 귀족이 우러러보며 "태양왕 만세!"를 불렀다. 이것이 태양왕이라는 별명의 유래였다.
- 1666년 "내 안에 있는 가장 큰 열정은 영광에 대한 사랑이다."라는 글을 썼다. 직접 전쟁터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처음엔 비단으로 만든 천막을 짓고 귀족 부인들을 참모로 데리고 참가했다고 한다. 물론 그 다음부터는 여자들은 두고 왔다. 루이 14세는 뛰어난 군수 공학자인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을 발굴한 사람이기도 하다.
- 재위 초반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 병력을 보내 지원할 정도로 오스만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1670년대부터 외교 관계가 급격히 좋아졌다. 1680년대 초 오스만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보이자 루이 14세는 이를 틈타서 스트라스부르와 카잘을 점령했다. 타 국가들은 이에 분노했으나 1683년 드디어 오스만이 빈을 포위하자 전 유럽은 오스만 방면에 쏠리게 되었고, 이 기회에 루이 14세는 뤽상부르와 자르를 점령했다. 분노한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를 비난했으나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의 점령을 20년만 묵인해주고 20년 뒤에는 회수하며 전쟁에 다시 돌입한다는 라티스본 휴전을 맺었다. 영토를 많이 확보한 루이 14세는 오스만을 멀리하고 유럽과 가까워지고자 했으나 이미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에 적대적이었고, 반 오스만 동맹에 가담해서 프랑스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중립을 지키며 대튀르크 전쟁을 관전했으나 1688년부터 오스만이 발칸 전역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루이 14세와 루부아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주재 프랑스 대사 지라르댕이 술탄이 코스탄티니예를 버리고 소아시아로 도피할 준비를 하고 있고, 제국군이 코스탄티니예를 정복할 기세라고 전하자 루이 14세와 루부아는 더욱 불안해져서 레겐스부르크 휴전을 영구적인 조약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으나 레오폴트 1세는 거절했는데 오스만과의 전쟁이 끝나면 프랑스를 응징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1688년 9월 벨그라드가 함락되자 전 유럽은 환호했고 프랑스는 공포에 질렸다. 벨그라드에서 코스탄티니예까지는 지형적 장애물이 별로 없었고, 코스탄티니예까지 제국군의 가시권에 들어왔다. 발칸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며 파디샤에 분노한 오스만인들에 의해 대대적인 반란이 터질 기세였고, 이는 오스만이 발칸 반도 전역을 빼앗기고 붕괴될 위험을 암시하는 것이었으며 오스트리아는 발칸 거의 전부를 차지할 기세였다. 오스트리아가 발칸 반도를 차지해 세력이 강해지려 하고, 오스만의 붕괴가 임박한 것으로 보이자 놀란 루이 14세와 루부아는 팔츠 선제후국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명분은 팔츠 계승 전쟁이었지만 전 유럽이 오스만을 도와주려는 루이 14세의 의도를 파악했고, 격노한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와 대적했다. 이때 오스만 방면의 신성 동맹군 중에 2/3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보내졌는데 오스만 방면의 신성 동맹군은 허약해졌다. 1690년 초까지 제국군은 계속 진격해서 플로브디프까지 진군했으나 적고 약해진 병력으로는 오스만을 대적하기 힘들었고 1690년 여름부터 오스만은 반격에 나서 벨그라드를 탈환한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맺어질 때 오스만은 여전히 신성 동맹군에게 밀렸지만 1688~1690년의 상황만큼 위태롭지는 않았고, 오스만은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내주며 버티는데 성공했다. 1709년 프랑스가 식량난으로 60만명 넘게 굶어 죽고 오스트리아, 잉글랜드, 네덜란드군이 쳐들어와서 프랑스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영국 해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은 식량을 프랑스에 팔아서 프랑스가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도와줬다.
- 여성편력 등 사생활에서는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프랑스를 모두 단 한 사람의 지배 아래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루이 14세의 사상은 곧 종교의 통합으로까지 이어졌다. 그가 훗날에 조부인 앙리 4세의《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를 탄압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원인이 크게 작용했다. 온 나라의 신민을 하나로 묶으려는 루이 14세에게 있어서, 시건방지게도 국왕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잉글랜드 왕국-영국, 프로이센 등 개신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의 가톨릭 신자들은 프랑스로 망명하기를 희망하였으며, 루이 14세 치세의 프랑스는 이들의 망명을 잘 받아주었다.
-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강조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에 드리는 미사는 결코 빼먹는 일이 없었다. 말년에 걸어서 미사를 드리러 갈 수 없게 되자 휠체어를 타고 갔을 정도. 그리고 매주 목요일마다 빈민층의 아이들 중 13명을 골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직접 그들의 발을 씻어 주는 의식도 치렀는데 이 또한 거르는 일이 없었다. 루이 14세는 국왕이 하느님으로부터 막강한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주님 부활 대축일, 성령 강림 대축일, 모든성인대축일, 주님 성탄 대축일 때마다 피부병의 일종인 연주창에 걸린 환자들을 어루만지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는 의식을 거행했다.[47]
- 프랑스의 영광을 상징하는 왕이지만, 몰락의 스타트를 끊은 왕이기도 한데, 이 때 벌인 전쟁에 대한 비용이 워낙 막대해서 그 이후 프랑스 정부는 장기간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기 때문이다[48] . 그리고 이는 신분 불평등 문제 등 다른 것과 겹쳐서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된다.
-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마녀사냥을 법으로 금지한 왕이기도 했다. 주술을 한 마녀에 대한 사형을 금지했고 그 대신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로 간소화했다. 자신의 절대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행한 조치였다.
- 평생 목욕을 딱 세 번 했다는 야사가 있을 만큼 목욕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이는 루이 14세가 특별히 청결하지 못했다기보다는 근세 유럽의 위생 관념이 그랬던 것이다.[49] 물론 진짜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냄새는 둘째치고 심각한 피부병에 시달렸을 테니. 그래서 루이 14세는 물이나 알코올을 적신 수건으로 땀과 때를 벗겨내고, 남은 냄새는 향수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청결을 유지했다고 한다.
- 위장병이 심한 나머지, 속이 좋지 않아 의자에 앉은 채로 똥을 쌌다고 한다. 귀족들의 반응은 글자 그대로 "폐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왕의 배변 순간에 함께한 사람들 중 일부는 닦아준다던가 등의 뒤처리를 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애초에 왕의 몸은 함부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닐 뿐더러, 남에게 항문을 맡긴다는 것은 굉장히 큰 빈틈을 보이는 것인 만큼[50] 암살 위험 등이 없다고 확신하는 굉장한 신뢰관계를 표시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왕의 뒤를 닦아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다 건너 헨리 8세도 시종 중에 자신의 뒤를 닦아주는 걸 전담하는 '청결관'이라는 직책을 뒀었는데, 그 중에는 후작급의 고관도 있었다고 한다.
-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장의 상태는 텅 빈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51] 루이 14세의 주치의이자 외과의사인 앙투앙 다켕(Antoine d'Aquin)은 왕에게 다량의 설사약을 먹였고, 그것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늘 용변을 보고 산 원인이 되었다. 또한 평소에 식습관의 영향으로 충치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빨을 다 뺄 수밖에 없었는데, 의사가 이빨을 빼는 과정에서 입천장을 지져서 뚫어버렸기 때문에 입천장에 음식물이 올라오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루이 14세는 화장실 변기에 앉은 채 나랏일을 보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장시간 앉아 있는 문제 때문에 치질(치루)에 걸려 고통을 겪었고,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신하들이 같은 방에 있는 상태에서 마취도 없이(!) 수술을 받는 동안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신하들 앞에서 위엄을 지키기 위한 놀라운 자제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사실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이 수술 자체가 대단히 위험했기 때문에, 비슷한 증세를 가진 수많은 평민들을 가지고 시험해 본 후 수술을 받았다. 완쾌는 되어서 그 이전에는 이발사들이 겸하던 외과의사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는 영향이 있었다.
- 전술한 루이 14세의 용변 등으로 인해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원래 베르사유에는 화장실과 욕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으며, 왕실 전용 외의 화장실들도 여러 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베르사유의 증축이 한창이던 루이 14세 때 베르사유 궁전의 평면도를 보더라도 옷방과 용변실들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었는데, 루이 14세 치세 말기에는 돈을 더욱더 들여 용변실을 보다 세련된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시설도 최신식으로 개선하여 면제품을 보관하는 벽장과 2개의 욕조 및 하수관 등을 갖췄으며 대리석 바닥은 고인 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지하 배수로 쪽으로 기울어지게 설계하고 바닥 밑에는 방수를 위해 납판이 깔렸다. 벽난로는 도자기로 된 난로로 대체하였으며 용변을 위한 변소실에는 탱크로 연결된 분사장치를 갖춘 최신 영국식 변기가 설치되었고, 전문적으로 청소하는 일꾼들을 구하여 수시로 왕궁을 비우고 가까운 트리아농에 체류해 청결을 유지하기 위한 대청소를 시켰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인 18세기, 베르사유 궁전은 텅 비었고, 이후 루이 필리프 시대때 궁전을 박물관 용도로 쓰기 시작하면서 옷방과 욕실, 변소, 다용도실을 대부분 다 없애는 공간 개조작업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현존하는 베르사유 궁전에는 과시용 공간만 남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베르사유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킬힐을 만들었다"는 무지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52] 오히려 "베르사유의 불결함은 루이 14세의 개방으로 몰려든 수많은 외부 관광객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피에르 구베르를 포함한 학자들의 공통된 주류 사인이고,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이런 일부에 불과한 셈이다. 즉, 불결한 베르사유는 부르봉 왕조를 비꼬기 위한 우스갯소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참고 논문은 프랑스 사학계의 권위자 피에르 구베르의 <바로크의 환상>에서 참조.
- 중년 이후에는 중풍에 걸리고 치아질환, 소화기질환으로 인한 설사병[53] , 유동식만 섭취한 데에서 오는 영양부족 등으로 몸이 좋지 않아 늘 누워 있었는데[54] 초상화에서 보는 당당한 포즈들은 사실 상상으로 그려진 것이다.[55] 물론 루이 14세 본인은 그런 초상화에 크게 만족했다고. 다만 그 고통 속에서도 하루 7시간 넘게 앉아서 공무를 처리하고 매끼 기름지고 고칼로리 투성인 식사를 공개적으로 3~4시간 넘게 먹어대고 거기에 시간을 내어 애첩들을 만나러 다녔다.[56] 당시 기준으로 엄청 오래 산 76세까지 장수했으니 나름 관리를 하긴 한 것으로 보인다.
- 개를 좋아해 자신의 사냥개들의 초상화를 주문하고 집까지 따로 만들어줄 정도로 남다른 개 사랑을 보였다. 반면 고양이는 아주 싫어해 30년 전쟁 종전 기념을 축하할 당시 10세의 나이임에도 고양이를 집어다가 불구덩이에 떨어뜨려 태워죽이기도 했고, 이후 액땜이나 여러 행사로 고양이를 태워죽이는 일을 여럿 벌였다. 증손자인 루이 15세가 수십마리 고양이를 궁궐 안에 키우고 고양이 담당관까지 뒀던 것과는 대조적.
- 각선미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의 초상화를 보면 하나같이 다리를 강조하고 있다.[57] 젊은 시절의 루이 14세는 상당한 외모와 각선미, 춤솜씨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루이 14세는 발레를 배웠다고 하며 자신의 권위와 카리스마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을 즐겼으며 이 방법으로 제법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서른 살에 『멋진 연인들(Les Amants magnifiques, LWV 42)』을 마지막으로 발레를 그만했는데 그 이유는 몸이 안 따라줬다거나 취미가 바뀌어 흥미를 잃어서가 아니었다. 백성 사이에서 자기 별명이 "발레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58]
- 젊은 시절에 그린 초상화나 흉상 등을 보면 잘생긴 미남이었다. 흠이 있다면, 흉상에서도 표현되어 있듯이 뺨과 이마에 천연두로 인한 가벼운 마마 자국이 생겼다는 점이다.[59] 또한 젊은 나이에 심한 말라리아로 거의 죽다 살아난 후에는 그 후유증으로 탈모가 일찍 찾아와서 가발을 맞춰야 했다.
- 동시대 만주 청나라의 황제인 성조 강희제와 비록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서로 서찰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했던 적도 있다. 공통점도 많은 편이지만 하지만 정작 루이 14세 본인은 오히려 강희제의 손자인 고종 건륭제와 유사점이 많은 편이다.[60] 둘 다 재위 도중에 제국이 최대로 융성했지만, 끝을 모르는 사치로 인해 후반부에 암군을 인증해버린 흡사점 때문이다. 애초에 루이 14세가 대왕이라고 안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간혹 루이 14세를 대왕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이는 그의 절대 권력 앞에 귀족들이 왕에게 아부하기 위해 붙인 문구이다.
- 평소에는 워낙 바빠서 가족들에게 무심한 듯 보였지만, 실은 혈육들을 끔찍이 아끼던 감성의 소유자였다. 평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왕태자 그랑 도팽 루이가 자신보다 먼저 죽어버리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실신할 뻔했고, 이후로도 자손들이 연이어 전염병으로 죽어나갈 때에도 무척 비통해했다. 손자인 펠리페 5세가 1700년에 스페인 왕위 계승을 위해 떠날 때도 어린 손자를 걱정하며 서로 끌어안고 펑펑 울어서 그걸 본 아버지인 왕태자를 위시한 주변 사람들도 똑같이 울어 재끼는 바람에 성 전체가 울음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 루이 14세의 치세에 대해 비판적으로 본 당대의 사람들 중 유명한 사람은 생시몽 공작이 있다. 그가 루이 14세의 치세를 비판한 《회고록》은 당시 시대의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국내에는 현재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이라는 이름으로 일부가 번역되어 정발되어 있다.
- 반면 볼테르는 권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를 좋아했다. "그의 이름은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그리고 영원히 기억될 시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입에 올릴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아 프로이센 왕국에서 《루이 14세의 시대》(Le Siècle de Louis XIV, 1751)라는 역사서도 집필했다.
- 프랑스의 양대 명문 고등학교 중 루이 대왕 고등학교(Lycée Louis-le-Grand, 리세 루이르그랑)의 교명이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본래 클레르몽 예수회 학교로서 개교했으며 현재 명칭은 루이 14세가 친히 하사한 이름이다. 프랑스어 위키 나머지 한 곳은 앙리 4세 고등학교(Lycée Henri-IV)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곳 출신이다.
- 루이 14세가 발언한 것으로 유명한 말로 "짐이 곧 국가다" (L'État, c'est moi)가 있으나 실제로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 1848년 소설《철가면#소설 철가면》[61] 의 시대 배경이 되고, 실제 소설의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 1981년부터 연재된 《먼나라 이웃나라》의《네덜란드》편,《프랑스》편과《에스파냐》편에서 등장했다. 《에스파냐》편에서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파트에서 카를로스 2세 사후의 에스파냐 왕위 계승권이 손자 필립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계승권 주장에 대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작작해라"고 하는 컷이 있다. 164페이지에서 루이 14세의 영토 야욕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려진 날개 달린 루이 14세가 책 뒷면에도 그려져 있다.
- 1991년 개봉한 영화《세상의 모든 아침》에서는 루이 14세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화자인 마랭 마레[62] 에 의해 언급되고 그가 당대의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생트 콜롱브를 설득하기 위해 궁정 악사들이나 대신들을 보내어 열심히 설득하는 장면이나 생트 콜롱브와 관련된 사후 조치나 그가 한 말들이 나온다.
- 1996년 게임《문명 2》와 2005년 게임《문명 4》에서 프랑스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2편에서는 잔 다르크, 4편에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샤를 드 골과 함께 출연.
- 1998년 개봉한 영화 <아이언 마스크>에서는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했다.
- 2000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왕의 춤(Le Roi danse)》에서는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와 루이 14세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의 한 장면인데 이 장면에 묘사된 공연은 1653년에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 2013년 출시된 게임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5, 5, 6의 스탯을 지닌 군주로 나온다.
- 2014년 개봉한 영화《어 리틀 카오스(블루밍 러브)》에서는 영화 감독을 맡은 알란 릭맨이 분했다.
- 2015년 루이 14세가 절대권력과 그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해가는 여정을 그린《베르사유》라는 프랑스, 캐나다 합작 TV 시리즈에서는 배우 조지 블래그덴이 연기했다. 드라마 속 루이 14세는 작중 웬만한 여자들보다 더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고 있다.
- 2016년 개봉한 알베르 세라의《루이 14세의 죽음》에서는 배우 장피에르 레오가 연기했다. 그야말로 임종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는 영화지만 감독 취향이 악취미에 가까운지라 영화가 난해하다는 얘기가 많다.
- 게임《모두의 마블 for kakao》에서는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소년왕 루이 항목 참조. 이 게임에는 내손자며느리도 등장한다.
- 2022년 개봉한 영화《the king's daughter》에서는 배우 피어스 브로스넌이 연기했다.
[1]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이다. 참고로 두 번째로 오래 재위한 군주는 영국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이다.[2] 프랑스어: Anne d'Autriche(안 도트리슈).[3]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임자[4] 사실 명목상으로는 루이가 13세에 달하고 어머니 안이 섭정직에서 물러난 1651년부터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이후에도 마자랭이 사망한 1661년까지는 마자랭의 영향력이 컸다.[5] 루이 14세 스스로가 가장 좋아했던 그림. 왼손에 들고 있는 손이 달린 막대는 국왕의 종교적 권위 그리고 사법적 권력을 나타내는 정의의 손이며, 훗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남긴 초상화(앵그르의 작품)에도 이것이 등장한다.[6] David Parrott, 1652(2020)[7] David Parrott, 1652(2020)[8] 장바티스트 콜베르가 담당했다.[9] 아버지 르텔리에와 아들인 루부아 후작[10] David Parrott, The Business of War(2012)[참조] Cathal Nolan, Wars of the age of Louis xiv 1650-1715(2008), John Lynn, The wars of louis xiv,1667-1714(1999)[11] Silvia Mitchell, Mariana of Austria and the Government of Spain(2019) [12] 루이 14세의 조카 안 마리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결혼했고, 안 마리의 두 딸은 자신의 손자 프티 도팽 루이, 펠리페 5세와 결혼했다. 결혼으로 사보이아 공국을 단단히 묶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프랑스의 간섭을 제거하려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6촌인 사부아 공자 외젠을 믿고 루이 14세의 통수를 거하게 치며 오스트리아측으로 붙었다.[13] 지난 500년간 유럽에서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고 한다.[14] William Doyle, Louis xiv(2017)[15] Rene Chartrand,The Cavalry of Louis XIV(2020) [16] 2022년 9월 8일 사망한 엘리자베스 2세가 2024년 5월 27일까지 왕위에 있었다면 루이 14세보다 오래 재위한 왕이 되었을 것이다.[17] 구체적인 날짜를 알 수 없는 군주까지 포함하면 문헌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유럽 대국의 군주는 고트왕국의 왕 에르마나리크 1세(?~376)로, 무려 80년을 재위했다고 기록되었다. 대국의 군주 외에 소국의 군주까지 포함할 경우 이베리아 왕국의 미리안 3세가 77년, 바흐탄그 1세가 75년을 집권했다. 다만 워낙 옛날이어서 정확한 재위 기간인지 확실하지는 않다.[18] 왕비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에게 얻은 유일한 적자였으나 루이 14세의 정책에 비판적이어서 그다지 탐탁지 않아했다. 그럼에도 그랑 도팽 루이가 죽어갈 때 루이 14세는 하루종일 아들의 쾌유를 기다렸고, 결국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충격을 받아 실신 직전까지 갔다.[19] 앤 여왕부터 본격적으로 영국이 된다.[20]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아우구스트 2세다.[21] 사실 왕가가 무너지더라도 프랑스 자체가 멸망했다든가 그런 적은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따진다면 맞는 말이긴 하다. 국가란 개념 자체는 없어지진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가 이룩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국가주의적 정치 시민문화상 프랑스란 나라의 특수성은 대혁명을 겪으며 사라지긴 커녕 오히려 '자코뱅 민족주의'라는 더 강력한 형태로 재탄생했고, 나폴레옹도 루이 14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20세기에도 '드골주의'란 유산을 통해 존속하고 있다. 이러니 볼테르 같은 인물은 종교적 불관용, 비대한 중앙 왕실 권력 같은 루이 14세가 실제로 남긴 정치적 유산은 혐오하면서도 막상 그의 치세를 '위대한 시대'라 추켜세웠고, 심지어 사상적으로 왕가를 혐오할 수밖에 없는 훗날의 자코뱅 같은 좌파들마저도 루이 14세에 대해선 '위대한 프랑스'를 근세에 현실에 구현했던 낭만적 시각, 로망을 버리기 힘든 인물로 굉장히 복잡미묘한 감정을 보일 때가 많았고, 나폴레옹 1세 역시 부르봉 왕조에 저항했던 전력이 있었음에도 루이 14세를 제법 높이 평가하기도 했었다.[22] 참고로 버클랜드는 개고기나 고양이고기 따위는 진작에 먹었으며, 이후 다람쥐, 코뿔소, 타조, 돌고래, 원숭이, 온갖 새고기, 뱀, 코끼리, 기린, 해삼, 달팽이, 풍뎅이, 집게벌레, 악어 등등 지금 봐도 엽기적인 고기를 다 먹어봤다고 한다. 해삼 같은 경우엔 지금도 유럽에서 못 먹는 음식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대부분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단 두더지와 돌고래 고기는 그도 요리해서 먹다가 너무 맛이 없어서 포기했다고 한다.[23] 포세이돈의 아내인 암피트리테로 묘사되었으며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의 아내다.[24] 키빌레로 묘사[25] 아폴론으로 묘사됨[26] 헤라로 묘사됨[27] 가장 왼쪽의 여인은 방타두르 공작부인으로, 당시 왕가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다. 훗날에 루이 15세의 사혈치료를 반대하여 살려낸 장본인이기도 하다.[28] 불행하게도 저 그림에 보이는 아들 그랑 도팽 루이와 장손 프티 도팽 루이 모두 루이 14세보다 일찍 죽어버렸고, 아기인 증손자 루이 15세만이 살아남아 루이 14세의 후계자가 된다.[29] 어린 루이 15세가 여자옷을 입고 있는 것이 의아하게 보일 수 있는데, 본래 당시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은 어린 아이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여자 옷을 입히는 관습이 있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과거에는 이렇게 하면 아이가 튼튼히 자란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루이 15세 등 뒤의 끈은 '리지에르'라고 하는데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매두는 끈으로 아이가 동물처럼 기어다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던 당시의 풍조에서 비롯됐다.[30] 사망 당시 이미 나이가 49세였는지라, 당시 수명 기준으로는 아버지 루이 14세가 장수했던 것이지 왕세자가 요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참척을 당한 루이 14세 입장에서는 비통하긴 했을 것이다.[31] 부계로 보면 고모(루이 13세의 첫째 여동생)인 엘리자베트가 펠리페 4세(어머니 안 도트리슈의 남동생)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니 고종사촌이고, 모계로는 펠리페 4세는 루이 14세의 외삼촌이니 외사촌이다. 즉, 부부가 쌍방으로 고종사촌이자 외사촌.[32] 멘 공작. 2대 만에 후사가 없어져서 나중에 아래의 루이 알랙상드르의 툴루즈 백작가에 합병되었다가 이쪽도 오를레앙 공작가에 합병이 되었다.[33] 콩데 공비. 참고로 콩데 가는 분가인 콩티 가의 당주가 1814년 에스파냐에서 후사 없이 죽어 콩티의 재산을 합병하지만 1804년에 공세손인 루이 앙투안 드 콩데(앙기앵 공작-나폴레옹에게 처형된 그 사람이다.)가 죽고 앙투안의 어머니가 오를레앙 가 출신이었기에 앙기앵의 아버지 루이 앙리는 후계자로 루이 필리프의 넷째 아들을 지명한다. 이후 1830년에 Aumale 공작가와 오를레앙 가에 합병이 된다.[34] 남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는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들이자, 루이 15세의 섭정으로 프랑수아즈 마리와는 친사촌 지간이다. 참고로 고손자가 루이필리프 1세이다. 여담이지만 필리프 2세의 어머니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프랑수아즈의 어머니인 몽테스팡 후작부인을 싫어했는데, 며느리인 프랑수아즈도 정말 싫어해서 꽤나 집요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루이 14세의 강권으로 이뤄진 결혼인지라 필리프 2세도 아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35] 참고로 이 가문도 2대 만에 아들 없이 끊어지는데 이 사람의 손녀가 루이 필리프의 어머니기 때문에 오를레앙 가에 합병이 된다.[36] 본래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 사이의 소생들을 돌보는 가정교사로 있다가 루이 14세의 눈에 들어 정부가 되었고, 다른 정부들과 달리 1684년에 파리 대주교의 주재로 루이 14세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결혼식이 정식으로 공표되거나 프랑스 왕비로 인정된 적은 없어 일단 정부 항목에 둔다.[37] 참고로 마리아 테레사는 루이 14세의 고모(이자 외숙모)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와 루이 14세의 외숙부(이자 고모부)인 펠리페 4세의 딸이다. 따라서 루이 14세와는 내외종 사촌 지간이였다.[38] 루이 15세의 계통인 직계는 1883년에 남계가 끊어져서 오늘날 부르봉 왕가의 남계는 펠리페 5세의 계통인 스페인 보르본 왕조와 그 분가들, 그리고 루이 14세의 남동생 필리프의 후손인 오를레앙 가문과 그 분파만 남아있다. 다만 보르본 왕조의 분가에 해당하는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의 시조 필리포 1세(펠리페 5세의 7남)가 루이 15세의 사위이므로, 루이 15세의 자손 역시 여계로는 현재까지 이어진다.[39] 잉글랜드의 찰스 1세와 루이 14세의 고모 앙리에트 마리의 딸이다. 루이 14세와는 내외종간.[40] 루이 14세의 남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두번째 부인.[41]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의 남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를 가리킨다.[42]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는 남편이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 투덜거릴 정도로 검소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다른 기록들을 보면 자신은 파리 사람들이 자랑하는 온갖 진미나 커피, 차, 초콜릿과 같은 사치품보다는 베이컨이 든 양배추 수프나 맥주 수프를 더 좋아한다거나, 자기 생각에는 왕이라면 모름지기 자우어크라프트와 훈제 소시지로 식사하며 근검절약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 즉, 그녀가 루이 14세와 필리프의 식탐에 대해 남긴 기록은 "왜 자기 식욕을 자제하지 못하고 저렇게 먹어댈까?"와 같은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43] 원래 유럽 왕실에서 왕비의 출산은 공개적 행사였다. 혹여 사산된 태아를 남의 살아있는 아기로, 딸을 낳았다가 남의 아들로 바꿔치기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귀족 부인들만 참여하는 조용한 분위기로 치러졌다.[44] 진통이 길면 하루 이틀이 넘어가는데 그동안 앉는다면 다리와 척추에 압력이 가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혈전이 생겨 죽는 일도 있다. 그리고 해당 자세는 분만 동안 의료적 처치를 하기 좋다는 장점도 있다.[45] 당장 루이 16세와 혼인 동맹을 위해 결혼한 마리 앙투아네트만 보더라도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오스트리아년"이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불렸음을 생각해보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라이벌 구도는 그만큼 극명했던 것.[46] 이는 당시 부르봉 왕조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이미 대제국을 건설한 압스부르고 왕조와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신생 왕조였던 부르봉 왕조는 왕조의 정당성과 우월함을 직접 백성들에게 어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루이 14세의 아버지인 루이 13세도 아들만큼은 아니지만 이런 행사에서 백성들 앞에서 춤을 췄다.[47] 이를 도유식 혹은 기름 부음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제법 유명해서, 세계사 교과서 등에서도 절대주의 시대 국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일화로 소개되기도 한다.[48] 프랑스 혁명 전 프랑스 정부의 장부를 보면 그 당시 수입이 5억 프랑에 세출이 6억 2천만 프랑으로 적자율이 무려 20%였다. 현대 대한민국 정부에 대응하자면 무려 70조원 정도의 막대한 적자가 나온 것, 그리고 이 세출 중 절반을 빚의 이자를 갚는 데 썼다. 다시 말하겠지만 빚이 아니라 빚의 이자를 갚는데 세출의 반을 쓴 것이다.[49] 더러운 물로 인한 질병이나 전염병에 몇 번 데이고선, 물이 질병의 전파원이라고 여겼다. 근세 유럽에서 물로 목욕을 하는 것은 의사의 처방에 따라 가끔 이루어지는 의료 행위였고, 일상에서는 최대한 기피되었다. 이 때문에 근세 유럽의 청결 수준은 중세 유럽보다도 이전으로 퇴보했다.[50] 그 예로 독일의 제후 고트프리트 4세는 볼일을 보던 중 들이닥친 반란군의 습격으로 중요부위를 찔려 급사했다는 얘기가 있다.[51] 실제로 1800년대에도 웬만한 병은 다 관장으로 치료했다. 자연과학의 발전이 의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였다.[52] 차라리 베르사유 때문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통행로가 지저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으며, 그마저도 후대의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킬힐은 원래 기병용 군화에서 시작된 신발이었다. 발을 등자에 고정시키기 위해서 굽이 그런 모양이었을 뿐이다.[53] 나중에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나서 의사들이 부검을 해보니, 과식으로 인해 위와 장이 일반인보다 3배나 부풀어 있었다.[54] 그가 앓았던 병만 해도 당뇨, 괴저병, 말라리아와 말라리아로 인한 탈모, 임질, 중풍, 치질, 원인모를 발열과 피부염, 천연두, 충치, 류머티즘, 과식으로 인한 두통과 장염, 소화불량 등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죽기 30년 전부터 이미 윗니가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삶은 계란을 좋아했을 만하다.[55] 실제로 맨 위에 항목에 나와있는 초상화는 그의 나이 60세가 넘어간 시점에서 그려진 것이다.[56] 이러한 그의 정력적인 면은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이어졌다.[57] 이는 당시 왕을 그리는 작화법을 따랐다는 설도 있다. 당시에는 어진을 그릴 때 지혜를 상징하는 머리는 노년의 지혜를 상징할 수 있게 중후하게 그리고, 다리는 현실의 통치체계 위에 굳건하게 토대를 둠을 암시하는 청년의 다리를 그려넣었다. 이를 <왕권 이체설>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루이 14세의 그림 역시 다리가 유난히 젊게 그려져 있다.[58] 교양만두는 발레의 역사를 소개한 동영상에서 루이 14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무용수"라고 평했다.[59]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두꺼운 화장으로 커버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60] 강희제는 트라야누스와 자주 비교된다.[61] 저자 알렉상드르 뒤마[62]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유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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