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아라고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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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아라고네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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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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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드리드
90대


루이스 아라고네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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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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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前 축구인


파일:external/www.insidespanishfootball.com/Aragones.jpg

이름
루이스 아라고네스
Luis Aragonés
본명
호세 루이스 아라고네스 수아레스
José Luis Aragonés Suárez
출생
1938년 7월 28일
스페인국 마드리드도시권 마드리드시 오르탈레사구
사망
2014년 2월 1일 (향년 75세)
스페인 마드리드도시권 마드리드시 푸엥카랄엘파르도구
국적
[[스페인|

스페인
display: none; display: 스페인"
행정구
]]

신체
178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선수
헤타페 CF (1957~1958)
레알 마드리드 CF (1958~1960)
RC 레크레아티보 데 우엘바 (1958~1959 / 임대)
에르쿨레스 CF (1959~1960 / 임대)
우베다 CF (1960 / 임대)
플러스 울트라 (1960 / 임대)
레알 오비에도 (1960~1961)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1961~196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64~1974)
감독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74~1978)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78)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79~1980)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1981)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82~1986)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87)
FC 바르셀로나 (1987~1988)
RCD 에스파뇰 (1990~1991)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1~1993)
세비야 FC (1993~1995)
발렌시아 CF (1995~1997)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1997~1998)
레알 오비에도 (1998~1999)
RCD 마요르카 (2000~2001)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01~2003)
RCD 마요르카 (2003)
스페인 대표팀 (2004~2008)
페네르바흐체 SK (2008~2009)
국가대표
11경기 3골 (스페인 / 1964~1972)





1. 개요[편집]


스페인의 前 축구인.

선수 시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10년 간 활약하며 라리가 3회 우승, 코파 델 레이 2회 우승을 이끌었고, 현역 은퇴 후에는 여러 차례 아틀레티코의 감독을 맡았다. 또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스페인 대표팀 감독을 역임해 카스티야, 카탈루냐, 바스크 등 각 지역 출신 선수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모래알 같았던 선수단을 잘 융화시켜 44년 만의 유로 우승을 달성하였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헤타페 CF[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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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헤타페에 입단하면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헤타페 유스팀에서 한 시즌 동안 뛰었는데 워낙 화려한 개인기를 구사했기 때문에 동료들은 그를 '엘프'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소속팀에선 정규 시즌에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고 1958년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2.2. 레알 마드리드 CF[편집]


레알 마드리드로 입단한 그는 경기에 나가기를 희망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레알에서도 단 한경기도 뛰지 못했다. 아라고네스는 레알에서의 생활 내내 임대를 전전해야 했다. 에르쿨레스 CF에서는 24경기 17골을 넣으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레알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레알 B팀인 카스티야로 또다시 보내버렸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라고네스는 1960년 레알 오비에도로 이적했다.


2.3. 레알 오비에도[편집]


레알 오비에도에서 한 시즌을 뛰며 13경기 4골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뒤, 오비에도 보드진은 그를 전력외로 구분하고 1961년 여름에 레알 베티스로 이적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실패한 선수로 여겨졌다.


2.4.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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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고네스가 본격적으로 포텐을 터트린 것은 바로 레알 베티스 시기였다. 그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3년간 86경기에 출장하여 33골을 기록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활약을 주목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1964년 여름에 아라고네스를 영입했다.


2.5. 아틀레티코 마드리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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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 아라고네스는 그곳에서 자파토네스(Zapatones, 큰 축구화)라는 별명을 얻었고 얼마 후 프리킥 스페셜리스트란 명성을 얻게 된다. 아라고네스는 첫 시즌에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고 코파 델 레이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그는 1965-66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69-70 시즌에 또다시 리그 우승을 이루었다. 그는 1969-70 시즌에 스페인 선수 중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에게 주어지는 피치치 상을 받았다.

1973년, 아라고네스는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다시 한 번 이루었고 1973-74 시즌에 3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 그는 유러피언컵에서 대활약하여 팀을 결승전까지 진출시켰다. 결승전 상대는 독일의 명문 구단 바이에른 뮌헨이었다. 이 경기에서, 아라고네스는 114분에 선제골을 넣어 팀의 1:0 리드를 이끌었다. 그러나 경기가 다 끝날 무렵이던 119분,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에게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하여 1:1 무승부로 끝났고, 결국 재경기에서 0:4로 참패하며 준우승에 머무른다. 유러피언컵 결승전이 끝난 뒤, 아라고네스는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10년 간 265경기 123골을 기록했고 아틀레티코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로 기록되었다.


2.6. 국가대표 경력[편집]


1965년 5월 8일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 데뷔했다. 이 경기에서 스페인은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는 1968년 10월 17일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데뷔 골을 넣어 팀의 3:1 승리를 견인했다. 그는 A매치에 11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넣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3.1.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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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자마자 친정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코치가 됐으나, 1974년 11월에 후안 카를로스 로렌소 감독의 해임으로 공석이 된 감독직에 부임했다. 1976-77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한편, 코파 델 레이에서도 1976년에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는 4년여 동안 아틀레티코를 이끌며 팀을 안정적으로 이끌다가 1978년 엑토르 누녜스 감독에게 자리를 넘기지만 1978/79 시즌 6~9경기차 때에 잠시 팀을 이끌었고, 1979/80 시즌 개막부터 25경기차까지 팀을 또 지휘했다.


3.2.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편집]


그는 1981년 베티스로 옮긴 후 한동안 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곳에서 얼마 있지 않았고 1982년에 다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돌아갔다.


3.3.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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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베티스에 있다가 도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돌아온 아라고네스는 1984-85 시즌에 코파 델 레이와 라리가 우승을 달성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 그가 이끄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소련의 디나모 키예프에게 3대 0으로 패하고 말았다. 1986년에는 비센테 미에라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겼다가 1986/87 시즌 막판인 26경기부터 복귀한 후, 시즌이 끝나고 사임했다.


3.4. FC 바르셀로나[편집]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한 시즌 동안 감독 생활을 했고 코파 델 레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 그는 1988년에 사임하고 2년 간 쉬다가 1990년에 에스파뇰로 이적했다.


3.5. RCD 에스파뇰[편집]


아라고네스는 에스파뇰에서 한 시즌 동안 감독 생활을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1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오퍼를 받은 그는 곧바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3.6.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3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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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돌아온 후 평범한 중위권 팀에 머물고 있던 팀을 빠른 시일 내에 강팀으로 육성시켰고 1992년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그는 1993년에 또다시 팀을 떠나 세비야 감독으로 부임했다.


3.7. 방랑기[편집]


세비야로 떠난 아라고네스는 그곳에서 2시즌 동안 활동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후 그는 발렌시아, 레알 베티스, 레알 오비에도, 그리고 마요르카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2001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충격의 2부 리그 강등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라고네스는 분기탱천하여(...) 곧바로 아틀레티코 감독으로 부임했다.


3.8.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4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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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강등을 당할 수가 없는 팀으로 여겨졌다. 강등당한 시즌인 1999-2000 시즌 당시 멤버 수준은 이름값만 따지면 강등이 아니라 우승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스트라이커 하셀바잉크, 스페인 대표팀의 키코, 바라하, 발레론, 그리고 카프데빌라, 아르헨티나 출신의 솔라리, 파라과이 대표팀 주전 수비수 아얄라와 가마라 콤비가 있었고 감독은 명장으로 이름났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였다.

그런 팀이 왜 강등당했냐 하면, 당시 구단주 헤수스 힐이 구단 경영을 엉망진창으로 했기 때문이다.[1] 그는 탈세로 징역을 산 적이 있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고 투자를 지나치게 방만하게 하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자 선수단의 주급을 일방적으로 체납하는 짓거리를 했다. 졸지에 돈을 받지 못하게 된 선수들은 당연히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고 모두가 이 막장팀을 떠나고 싶어했다. 결국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의 강등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2000-01 시즌에 승격에 도전했지만 4위에 그치며 실패하고 만다.

이런 팀의 꼴을 보다못한 아라고네스는 곧바로 아틀레티코에 복귀한 후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선수단을 다잡고 2001-02 시즌에 신예 페르난도 토레스 등의 활약에 힘입어 세군다 디비시온 우승을 차지하며 라리가 승격을 달성했다. 이후 그는 2002-03 시즌에 팀을 라리가에 잔류시키는 데 성공한 후 2003년에 팀을 떠났다.


3.9. RCD 마요르카[편집]


한동안 야인 생활을 보내던 아라고네스는 2003년 10월 시즌 초반 하위권에 머물던 RCD 마요르카의 감독에 부임하여 사무엘 에투 등의 활약에 힘입어 팀을 11위로 이끌었다.


3.10.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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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004년 7월 1일에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스페인 축구팬들은 UEFA 유로 2004에서 8강 진출에 실패한 충격으로 이냐키 사에스 감독이 경질된 가운데 국가대표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먼저 대표팀에서 부진하고 있는 미첼 살가도와 라울 곤살레스를 대표팀에서 제외했다.[2] 그의 지도 하에, 스페인은 2006 독일 월드컵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3] 본선에서도 우크라이나를 4:0, 튀니지를 3:1, 사우디아라비아를 1:0으로 꺾고 조별리그를 가볍게 통과한다. 그러나 프랑스와 만난 16강전에서 다비드 비야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리베리, 패트릭 비에이라, 지네딘 지단의 연속골로 1:3 역전패를 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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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라고네스는 UEFA 유로 2008에도 참가하여, 러시아(2번), 스웨덴, 그리스, 이탈리아를 모두 꺾고 결승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요아힘 뢰프의 독일을 맞아 페르난도 토레스의 결승골을 앞세워 1:0으로 격파하고 UEFA 유로 1964 이후 무려 44년 만에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유로 우승 이후 그는 감독직에서 명예롭게 사임했고 델 보스케가 그의 뒤를 이어 스페인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다.

스페인 대표팀의 감독으로 있는 동안, 그는 스페인 축구 선수들을 한 팀으로 뭉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그가 부임하기 전만 해도, 스페인 선수들은 자신들의 출신 지역에 따라 여러 파벌로 나눠서 서로 간의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하나로 뭉치지 못한 스페인은 국제 대회에서 부진했고 국민들은 국가대표팀에게 환멸마저 느꼈다. 아라고네스는 이런 상황을 잘 극복하고 카탈루냐, 카스티야, 바스크 등 여러 지역 출신 선수들이 "우리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선수들이다"라는 의식을 갖고 한 팀으로 뭉쳐서 뛰게 했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스페인은 2000년대 후반 황금기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일부 축구팬들은 아라고네스가 레알 마드리드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고의로 레알 출신 선수들을 홀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라울을 제외한 이후에도 레알의 카시야스와 세르히오 라모스를 중용하고 당시 신예인 루벤 데 라 레드를 기용한 것도 아라고네스다. 특히 카시야스를 대표팀의 주장으로 임명한 걸 보면 꼭 그렇게 해석할 근거는 부족하다.

물론 레알 마드리드 소속이였던 라울의 경우는 상황도 어느정도 설명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라울의 경우 2006 독일 월드컵 이후 스페인이 하락세 분위기가 계속되어가자 세대교체를 진행하게 되는데 여기서 아라고네스 감독과 라울이 이에대해서 오랜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결국 페르난도 토레스와 다비드 비야로 이어지는 세대교체가 진행되었고... 유로 2008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물론 라울도 소속팀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고 아라고네스 감독도 라울을 지켜보고 있다고 했었기에 무조건 레알에 악감정을 가진건 아니라고 본다. 다만 구티의 경우 포지션이 겹치는 선수들이 더 뛰어나게 활약해주고 있어서 뽑지 않은 것도 있겠으나, 구티와 아라고네스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것도 한 몫했을 가능성이 높다.[4]

이 시기 그의 최대 오점은 티에리 앙리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한 것이다. 2004년 스페인 감독으로 부임할 무렵, 아라고네스는 대표팀 훈련 도중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에게 그의 팀 동료인 티에리 앙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그 검둥이 자식보다 낫다고 말해라. 말 돌리지 말고 그에게 말해. 너는 너 스스로를 믿어야 해. 너는 그 검둥이 자식보다 나은 놈이야.


이 사건은 곧바로 영국 언론에 전해졌고 영국 언론은 아라고네스에게 비난의 십자포화를 쏟아 부었다. 그가 감독직을 그만두거나 중대한 징계를 내려야 한다는 주장도 일었다. UEFA는 이 사안에 대해 조사한 후 10만 스위스 프랑에 달하는 벌금을 아라고네스에게 부과하고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더한 징계를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UEFA는 국제대회에서 스페인 서포터즈들이 경기장에 들어오지 못하는 징계가 차후에 내려질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고네스는 자신이 인종차별자가 아니라고 밝혔고 자신은 흑인 친구가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브라질 출신의 흑인 미드필더 마르코스 세나 또한 "그는 자신을 좋아했고 자신을 브라질리언이라고 부르면서 친근하게 대해줬다"며 그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옹호했다.

2004년 11월 18일 영국과의 친선 경기가 있은 후, 애슐리 콜은 스페인이 아라고네스를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페인 관중들의 인종차별적인 야유는 앙리에 대한 그의 인종차별적인 발언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아라고네스는 18일 있었던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스페인은 반드시 그를 해고시켜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스페인 관중들은 18일 애슐리 콜, 숀 라이트 필립스 등 잉글랜드의 흑인 선수들이 볼을 잡을 때마다 원숭이 소리를 내는 등 조직적인 인종차별 행위로 물의를 빚었다. 또한 콜은 “사이드라인 아웃된 공을 가지러 스페인 벤치 쪽으로 향했을 뿐인데 아무 이유 없이 아라고네스가 나를 밀치길래 나도 홧김에 그를 밀쳤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증오가 가득했으며 마치 악마 같은 표정이었다”고 치를 떨었다.

이후 한동안 스페인과 영국 간의 감정이 악화되어 외교 문제까지 이어지자, UEFA는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앙리와 아라고네스 양자에게 화해를 권고했다. 영국 흑인 선수들은 이에 반발했지만 앙리는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사태는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후에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꼬리표는 아라고네스를 내내 따라다녔다.

3.11. 페네르바흐체 SK[편집]


유로 2008 우승 이후 대표팀 감독을 사임, 2008년 6월 말에 페네르바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4위에 그쳤고 2009년 6월 2일에 시즌이 끝나자마자 경질되었다. 이후 아라고네스는 30여 년의 감독 생활을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4.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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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말년을 조용히 보내던 아라고네스는 백혈병에 걸려 병원에 급히 이송되었다가 2014년 2월 1일 오전 6시 15분에 사망했다. 스페인 왕립 축구 협회는 "슬픔과 충격에 잠겼다"며 고인의 공헌으로 스페인 축구가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며 그의 넋을 기렸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인 디에고 시메오네 또한 "나는 그의 가족들에게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아틀레티코의 모든 이들은 클럽과 스페인 축구의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을 잃었다."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장례식은 2월 2일 마드리드에서 열렸다. 이 장례식에는 카를레스 푸욜,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스크 파브레가스 등 그의 제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의 시신은 장례식이 끝난 뒤 화장되었다. 2014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선수단은 아라고네스의 넋을 기리는 내용의 셔츠를 착용했다.


5. 기록[편집]



5.1. 선수[편집]



5.1.1. 대회 기록[편집]




5.1.2. 개인 수상[편집]




5.2. 감독[편집]



5.2.1. 대회 기록[편집]






5.2.2. 개인 수상[편집]


  • 라리가 최우수 감독[5]: 1976-77
  • 마르카 레전드: 2008
  • IFFHS 세계 최우수 국가대표 감독: 2008


5.3. 수훈[편집]


  • Gold Medal of the Community of Madrid: 2014


6. 둘러보기[편집]






[1] 심지어 재정때문에 유스팀을 없애는 일까지 벌어지는데 그때 유스에 있었던 선수가 라울 곤살레스이다. 결국 그는 같은 마드리드의 레알로 가고 알다시피 대박이 난다.[2] 아라고네스가 극도로 레알 마드리드를 미워해서 라울을 배제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라울 곤살레스 문서 참고.[3]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 조 1위를 내주고 플레이오프를 거쳐서 진출했다.[4] 구티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라고네스를 두고 노인네라고 칭한 적이 있으며, 아라고네스 역시 공개적인 자리에서 구티보다 자기가 뽑은 선수들이 더 나은 선택일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5] 돈 발롱 어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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