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제 울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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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아돌프 프레드리크의 왕비
루이제 울리케
Luise Ulrike von Preußen


파일:Luise_Ulrika_of_Prussia.jpg

이름
독일어
루이제 울리케
(Luise Ulrike)
스웨덴어
로비사 울리카
(Lovisa Ulrika)
출생
1720년 7월 24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782년 7월 16일 (61세)
스웨덴 스톡홀름
배우자
아돌프 프레드리크 (1744년 결혼 / 1771년 사망)
자녀
구스타브 3세, 칼 13세, 프레드리크 아돌프, 소피아 알베르티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어머니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형제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빌헬미네, 프리드리히 빌헬름, 프리드리히 2세, 샤를로테, 프리데리케 루이제, 필리피네 샤를로테, 루트비히, 조피 도로테아, 아우구스트 빌헬름[1], 안나 아말리,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종교
루터교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유년기
3.2. 왕세자비
3.3. 왕비
3.4. 왕대비
3.5.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의 열번째 아이이자 6녀. 스웨덴 국왕 아돌프 프레드리크의 왕비로, 스웨덴에서는 로비사 울리카로 불렸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칼 13세의 어머니이자 그 유명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으로,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조카이기도 하다.


2. 작위[편집]


파일:Coats_of_Arms_of_Louise-Ulrique_of_Prusse.svg.png
문장
  • 프로이센의 루이제 울리케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Louisa Ulrika of Prussia (1720년 7월 24일 ~ 1744년 7월 17일)
  • 스웨덴의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of Sweden (1744년 7월 17일 ~ 1751년 3월 25일)
  • 스웨덴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Sweden (1751년 3월 25일 ~ 1771년 2월 12일)
  • 스웨덴의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Dowager of Sweden (1771년 2월 12일 ~ 1782년 7월 16일)

3. 생애[편집]



3.1. 유년기[편집]


1720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딸로 태어났다. 울리케라는 이름은 대모인 스웨덴 여왕 울리카 엘레오노라에게서 따왔다.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영국의 웨일스 공 프레드릭 등 여러 왕자들과 혼담이 오갔다. 그러나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20살이 되는 1740년에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사망했다. 그리고 오빠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위하자마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면서 루이제의 혼사는 사람들의 안중에 없게 되어버렸다. 결혼하지 않은 공주들이 으레 그렇듯 루이제는 수녀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3.2. 왕세자비[편집]



파일:Pesne_Louisa_Ulrika_of_Prussia.jpg

프로이센의 루이제 울리케, 1744년

그런데 1744년에 스웨덴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상대는 아돌프 프레드리크로 아들이 없는 프레드리크 1세[2]의 뒤를 이을 왕위 계승자였다. 루이제 울리케와 동생 안나 아말리가 신부 후보가 되었고, 스웨덴 외교관에게 더 좋은 인상을 준 루이제 울리케가 신붓감으로 정해졌다.[3] 1744년 7월 17일에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루이제 울리케는 루터교로 개종하고 스웨덴식 이름인 로비사 울리카로 불리게 되었다. 부부는 성격이 달랐지만 금슬이 좋은 편이었다. 결혼한 다음해에 임신한 루이제 울리케는 1746년에 아들 구스타브를 낳았다. 그리고 연달아 두 아들을 낳으면서 아들이 귀한 스웨덴 왕실에서 공고한 입지를 가지게 되었다.

루이제 울리케는 정치 욕심이 굉장히 많았다. 절대군주정인 프로이센 왕국에서 자란 그녀는 의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스웨덴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4] 루이제 울리케는 이득에 따라 사람을 가까이 하고 파벌을 만들었다. 그녀는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뫼소르당이 아닌 하타르당을 가까이 했다. 아돌프 프레드리크는 적극적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진 않았지만 아내를 지지하고 아내의 충고에 귀를 귀울였다.

1751년에 프레드리크 1세의 건강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루이제 울리케는 남편을 강력한 군주로 만들기 위해 대관식에서 쿠데타를 벌여 권력을 가져올 계획을 짰다. 그러나 루이제 울리케가 가장 신뢰하는 신하였던 칼 구스타프 테신이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대신 아돌프 프레드리크와 루이제 울리케는 화려한 대관식을 치뤘다.

3.3. 왕비[편집]



파일:Lafrensen_Ulrika_Lovisa.jpg

대관식을 치르는 로비사 울리카 왕비, 1751년

1751년 3월 25일에 루이제 울리케는 왕비가 되었다. 의회는 권력욕이 강한 왕비를 견제했다.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왕이 된 후 권력을 잡게 된 하타르당과 국왕 부부의 반목은 나날이 심해졌다. 국왕 부부와 하타르당은 계속 충돌했고 온갖 중상모략이 오갔다. 루이제 울리케는 하타르당을 견제하기 위해 뫼소르당을 후원하고 국왕 지지파를 만드는 등, 세력을 키우려 했으나 몇차례의 실책을 범하곤 했다. 의회는 결재를 올렸을 때 왕이 승인을 거부해도 알아서 도장을 찍고 처리하는 등(...), 대놓고 국왕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1756년 6월에 루이제 울리케는 국왕 지지파와 함께 다시 쿠데타를 도모했다. 그러나 의회가 일찍이 알아차리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많은 국왕 세력이 사형당하거나 추방을 당했다. 국왕 부부는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자리를 보전하는 것으로 의회와 합의했다. 그런 와중에 하타르당에 의해 스웨덴이 7년 전쟁에 참전해 프로이센과 싸우게 되면서 루이제 울리케는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나 스웨덴 내에서는 반전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루이제 울리케는 평화 협정을 맺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어느정도 권력을 되찾게 되었다.

3.4. 왕대비[편집]


1771년 2월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장남 구스타브 3세가 즉위하면서 루이제 울리케는 왕대비가 되었다. 왕대비가 되고 점점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자 루이제 울리케는 아들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루이제 울리케는 점점 자신을 정치에서 배제시키려는 아들에 실망해 프로이센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둘째인 칼 왕자의 결혼에 대한 논의가 나오자 루이제 울리케는 자신의 조카와 아들을 결혼시키려 애를 썼다. 일찍이 구스타브 3세가 약혼자를 고를 때도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조카와 아들을 이어주려 했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스타브 3세와 칼 왕자는 이에 반대했고, 칼은 스웨덴의 이익에 따라 약혼자를 골랐다. 루이제 울리케는 분개했고 아들과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1777년에 루이제 울리케와 구스타브 3세의 관계를 완전히 틀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구스타브 3세의 아내 덴마크의 소피아 마그달레나가 결혼한 지 12년만에 임신하자 루이제 울리케는 며느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루이제 울리케는 소피아 마그달레나와 한 시종의 관계를 의심하고 아이가 정말 구스타브 3세의 아이가 맞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매우 어리석은 주장이었는데, 후계자의 정통성이 의심받으면 군주의 자리 또한 위협받기 때문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스타브 3세는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보여주지 않았다. 소피아 마그달레나 역시 고된 시집살이로도 모자라 자신의 불륜과 아이의 출생까지 의심하는 로비사 울리케에게 치를 떨며 두번 다시 시어머니와 상종하지 않았다. 아들과 며느리와의 관계가 파탄난 루이제 울리케는 완전히 정치에서 물러났다.

3.5. 말년[편집]


말년을 딸 소피아 알베르티나에게 의지하며 한가롭게 지냈다. 1782년에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자 구스타브 3세는 어머니를 만나러 했지만 루이제 울리케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나 죽기 전 결국 두 사람은 만났고 화해를 했다.

1782년 7월, 숨을 거두었다. 루이제 울리케의 유해는 리다르홀름 교회의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로이센의 루이제 울리케
(Louisa Ulrika of Prussia)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Frederick William I)
프리드리히 1세
(Frederick I)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Frederick William, Elector of Brandenburg)
오라녀나사우의 루이제 헨리에테
(Louise Henriette of Orange-Nassau)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
(Sophia Charlotte of Hanover)
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Ernest Augustus, Elector of Hanover)
팔츠의 조피[5]
(Sophia of the Palatinate)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Sophia Dorothea of Hanover)
조지 1세
(George I)
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Ernest Augustus, Elector of Hanover)
팔츠의 조피[6]
(Sophia of the Palatinate)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Sophia Dorothea of Celle)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
(George William, Duke of Brunswick-Lüneburg)
엘레오노르 드미에 돌브뢰즈
(Éléonore Desmier d'Olbreuse)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구스타브 3세
(Gustav III)
1746년 1월 24일
1792년 3월 29일
덴마크의 소피 마그달레네
슬하 2남[7]
2남
칼 13세
(Charles XIII)
1748년 10월 7일
1818년 2월 5일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트비히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3남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 프레드리크 아돌프
(Frederick Adolf, Duke of Östergötland)
1750년 7월 18일
1803년 12월 12일

1녀
크베들린부르크 수녀원장 소피아 알베르티나
(Sophia Albertina, Abbess of Quedlinburg)
1753년 10월 8일
1829년 3월 17일


5. 여담[편집]


  • 며느리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차남 칼 왕자의 아내인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트비히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는 성격이 밝아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융통성 있게 시어머니를 대했지만, 얌전한 성격의 큰며느리 덴마크의 소피 마그달레네는 냉랭한 시어머니를 힘들어 했다. 급기야 임신했을 때 루이제가 아이의 혈통을 의심하자 폭발한 소피아는 일생 시어머니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했다. 루이제 울리케가 사망하기 전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핑계를 대고 만나지 않았다. 전말을 알면 다소 우스운 소문이긴 해도, 당시 소피아가 낳은 아이의 출생을 의심한 사람은 루이제 울리케만이 아니긴 했다고 한다.

  • 영어식 이름인 루이자(또는 루이사) 울리케로 알려진 경우가 많다.

  • 요한 헬미쉬 로만이 루이제 울리케와 아돌프 프레데리크의 결혼을 기념해 작곡한 Drottningholmsmusiken. 결혼식의 축하행사에서 초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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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아버지[2] 대모인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남편[3] 여담으로 안나 아말리는 미혼으로 남았다. 그리고 루이제 울리케가 들어가기로 했던 크베들린부르크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다.[4] 스웨덴도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 시대에는 절대군주정이었으나 대북방전쟁 도중 칼 12세가 전사하고 칼 12세의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조카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러시아 제국 표트르 3세의 아버지)의 왕위 계승 분쟁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의회의 표심을 얻고자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의회에 대폭 권한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즉위하면서 왕권이 많이 축소되었다.[5] 제임스 6세 & 1세의 외손녀이다.[6] 제임스 6세 & 1세의 외손녀이다.[7] 구스타브 4세 아돌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