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즈 마운트배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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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왕비
루이즈 마운트배튼
Lady Louise Mountbatten


파일:louisesweden.jpg}}}
이름
루이즈 알렉산드라 마리 이레네 마운트배튼
(Louise Alexandra Marie Irene Mountbatten)
출생
1889년 7월 13일
독일국 헤센 대공국 제하임유겐하임 하일리겐베르크 성
사망
1965년 3월 7일 (향년 75세)
스웨덴 스톡홀름 세인트 요란 병원
장례식
1965년 3월 13일
스웨덴 솔나 왕실 묘지
배우자
구스타프 6세 아돌프 (1923년 결혼)
아버지
제 1대 밀포드 헤이븐 후작 루이 마운트배튼
어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형제
앨리스, 조지, 루이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시절
3.2. 루이즈의 혼담
3.3. 왕세자비
3.4. 왕비
3.5. 죽음
4. 가족관계
4.1. 조상
5. 여담



1. 개요[편집]


스웨덴 전 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두번째 아내이자 왕비.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헤센의 공녀 빅토리아의 2남 2녀 중 차녀이며, 덴마크의 현재 국왕인 마르그레테 2세의 모후인 잉리드 왕비의 새어머니이다. 영국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의 시이모이자, 필립 공의 이모이다.

본명은 루이즈 마운트배튼(Louise Mountbatten)이다. 스웨덴 왕실으로 시집가 겸손한 성격과 소탈하고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어, 스웨덴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대 유럽 왕실의 왕비 중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왕비라고 전해진다.


2. 작위[편집]


  • 바텐베르크의 루이즈 공녀 전하 Her Serene Highness[1] Princess Louise of Battenberg (1889년 7월 13일 ~ 1917년 7월 14일)
  • 미스 루이즈 마운트배튼 Miss Louise Mountbatten (1917년 7월 14일 ~ 1917년 11월 7일)
  •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 Lady Louise Mountbatten (1917년 11월 7일 ~ 1923년 11월 3일)
  • 스웨덴의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of Sweden, Duchess of Skåne (1923년 11월 3일 ~ 1950년 10월 29일)
  • 스웨덴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Sweden (1950년 10월 29일 ~ 1965년 3월 7일)

3. 생애[편집]



3.1. 어린시절[편집]


1889년 7월 13일 바튼베르크의 루트비히헤센의 공녀 빅토리아 사이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루이즈는 조산으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빅토리아는 주위 사람들에게 딸에 대해, 왜소하고 신경질적으로 울며 코가 자신을 닮았다고 이야기했다. 어머니를 닮아[2] 긴 얼굴형과 긴 코를 가진 루이즈는 아름다운 언니와는 달리 외모가 별로였으며[3] 이에서 기인한 'shrimp' 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허약한 체질은 성격에도 영향을 미쳐,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라나게 된다.

아버지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는 독일의 귀천상혼 가문의 공자였으나 영국에서 해군 제독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영국 내 반독 감정이 심해지자 조지 5세의 권유로 독일 작위를 포기하고 성씨를 마운트배튼으로 바꾸어 밀포드 헤이븐 후작 지위의 영국 귀족 가문으로 귀화하게 된다. 자연히 루이즈의 칭호도 변경되어 바텐베르크의 공녀에서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으로 불리게 된다.

파일:battenbergfamily.jpg
어머니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 루이즈, 아버지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 그리고 언니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

파일:0f1d6e9f8d702313ee5e87cdda8d6c26.jpg
루이즈와 남동생 조지, 언니 앨리스.

해군 제독이었던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루이즈는 영국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자랐다. 어린 시절 외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을 자주 찾아가기도 했다. 루이즈의 가족은 항상 화목했고 그 덕분에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1914년, 루이즈는 어머니와 함께 이모들이 있는 러시아에 방문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급히 돌아와야 했다. 루이즈의 가족은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에 스웨덴에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이 때 그들은 스웨덴의 왕세자 부부[4]를 만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루이즈는 적십자에서 간호사로 일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런던 빈민가의 어린이들을 돕는 등 여러 자선 활동을 하였다.


3.2. 루이즈의 혼담[편집]


루이즈는 몇 번의 혼담이 오갔으며 그 중 한 번은 약혼까지 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루이즈에 대한 첫 번째 혼담이 오고 간 시기는 루이즈가 스무 살 무렵이었고, 상대는 포르투갈의 마지막 국왕인 마누엘 2세 (1889~1932)이었다. 하지만 루이즈가 혼담을 거절하자 에드워드 7세는 청혼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라고 루이즈의 부모에게 압력을 넣었는데, 이때 루이즈는 "홀아비나 국왕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두 번째 혼담은 언니 앨리스의 시동생(요르요스 1세의 5남)이었던 크리스토포로스 왕자(1888~1940)와의 혼담이었다. 앨리스는 동생이 그리스로 시집오길 바랐고 시동생과 잘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앨리스의 바램이었을 뿐이었다. [5]

세 번째는 1차 대전 때 만난 한 젊은 화가와의 약혼이었다. 가족들이 "셰익스피어"라는 별명으로 부른 이 남자는 루이즈와 함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족의 반대에도 루이즈는 약혼하길 원했고 약혼은 하되 발표는 안하기로 합의가 되었으나 약혼은 파혼으로 끝난다.

파혼 이후에도 루이즈는 나이가 서른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3.3. 왕세자비[편집]


1923년 당시 34세의 루이즈와 스웨덴의 왕세자인 구스타프 아돌프는 9년 만에 재회하게 되고 그는 곧 루이즈에게 청혼한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루이즈의 5촌 친척인 코넛의 마거릿 공녀의 남편이었으며, 마거릿이 다섯 명의 아이들을 남기고 병사하였으므로 자신의 아내 겸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해 재혼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 루이즈는 스웨덴의 왕세자비, 나아가 왕비 지위를 갖게 될 것과, 구스타프 아돌프가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것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거절하였으나 구스타프 아돌프의 열렬한 구애로 점차 마음을 열고 청혼을 받아들였고 7월 1일 약혼은 공식 발표된다. 하지만 이 결혼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다. 스웨덴의 베르나도트 왕가는 왕가의 선조가 프랑스 군인이라는 혈통과 신분상의 약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왕위계승법에 귀천상혼 금지 조항을 엄격히 지키고 있었다. 때문에 후계자는 반드시 통치 왕가 출신의 여성과 결혼을 해야 했는데, 비록 모계로는 영국 여왕의 외증손녀이지만 부계는 일개 귀천상혼 집안의 여인인 루이즈는 스웨덴의 기준에서 보면 어정쩡한 신분의 여자였던 것이다. 혼인의 성사를 위해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조지 5세[6]가 루이즈는 모계로 영국 왕실 일원이라는 증명서를 발표하였고, 이 덕분에 루이즈는 결혼을 할 수 있었다.[7]

파일:louisegustafadolfwedding.jpg
1923년 11월 3일 루이즈와 구스타프 아돌프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소규모로 결혼식을 올린다. 발표된 결혼 사진을 보고 스웨덴 국민들은 따뜻하고 다정했던 마거릿에 비해 성마르고 정이 없어 보이는 루이즈에 대해 실망했지만, 루이즈는 바텐베르크 가문의 놀라운 언어 능력으로 스웨덴어를 단시간에 익혀 연설을 유창하게 하여 국민들의 호감을 산다. 시어머니 바덴의 빅토리아는 건강상의 사정으로 인해 스웨덴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았고, 루이즈의 시동생인 빌헬름 왕자가 1914년 전처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이혼 후 혼자 살고 있었고[8] 왕실의 어른 중 시숙모인 잉에보르 왕자비[9]가 있었는데 왕자비 역시 조용한 생활을 원했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궁정에서 다음 서열인 루이즈가 궁정을 직접 이끌었던 것도 호감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 가지 어려워했던 것은 의붓 자식들과의 관계였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재혼 사실을 청혼 이후에 말했고, 어머니의 기억이 짙게 남아 있었던 위의 아이들은 충격을 크게 받았다.[10] 특히 어머니와 정서적으로 가장 친근했던 고명딸인 잉리드가 매우 화를 내 루이즈와의 사이는 점점 냉각되었다. 잉리드는 교육을 위해 곧 외가인 영국으로 떠났기에 어색해진 사이를 풀 시간도 부족했다. 루이즈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상대적으로 어린 아이들은 루이즈를 잘 따랐고, 루이즈도 아이들에게 잘 대해주었다.

루이즈는 아이들이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 알고 있었으며[11], 아이들의 기억에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이를테면 아이들의 어머니인 마르가레타 왕세자비의 보석들을 절대로 쓰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그대로 물려줬다고 한다.

루이즈는 1925년에 딸을 가지는 기쁨을 맛보았으나, 허약했던 체질 탓에 사산을 했고, 그 이후에는 임신을 할 수 없었다. 사산의 슬픔을 잊기 위해 다음 해 세계 여행을 떠났고[12] 1927년 2월 스웨덴에 돌아온다.

1930년대에 이르러 루이즈는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는데, 언니 앨리스조현병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됨으로서 루이즈는 언니 앨리스를 대신해 조카들의 결혼식을 참석을 했고, 1947년에 조카인 필립엘리자베스 공주의 결혼 준비로 인해 어머니 빅토리아,언니 앨리스와 같이 버킹엄 궁전에 방문하여 국왕 부부와 상의하기도 했다.


3.4. 왕비[편집]


1950년에 시아버지인 구스타프 5세가 세상을 떠나 남편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됨으로서 루이즈도 왕비가 되었다. 루이즈는 소심하고 겸손한 성격 탓에 자신의 왕비 지위를 직접 말하는 것도 어색해 했고, 폐하라는 경칭도 어색해 했으며 남편과 경호원 없이 스톡홀름 시내를 산책하는것을 즐기는 등, 소탈한 면모를 보였다. 이런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난 일화로, 자신의 조카인 필립 공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2세대관식에 초대받았는데 자신의 자리에 "스웨덴 왕비"라고 적혀있어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시민들은 국왕 부처가 경호원 하나 없이 산책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했지만 국왕 부처는 시민들을 거리에서 만나면 인사를 건넸고, 이러한 서민적인 면모는 국민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

조카며느리였던 엘리자베스 2세스웨덴으로 방문했는데, 루이즈 부부 사이에 앉았다고 한다. 이때 구스타프 아돌프가 루이즈에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하자 루이즈는 "Please라고 하면 열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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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시내를 산책하는 국왕 부부

의붓딸이자 덴마크의 왕비가 된 잉리드 공주와도 점차 화해하게 되었다. 잉리드 공주는 덴마크에서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통해 부모인 스웨덴 국왕 부부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잉리드 공주는 새어머니인 루이즈와 화해한 이후 스웨덴에서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루이즈도 의붓손자들인 잉리드의 자식들과 가깝게 지냈다.

파일: Margrethe med familj.jpg
의붓딸 잉리드와 그 가족들과 함께.
왼쪽부터 남편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잉리드의 3녀 아네-마리, 루이즈 본인, 잉리드의 장녀 마르그레테, 의붓딸 잉리드, 잉리드의 2녀 베네딕트, 사위 프레데리크 9세.


3.5. 죽음[편집]


루이즈는 심장마비로 1965년 2월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나 차도가 없어 한 달 후인 3월 7일에 남편, 아이들 곁에서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임종을 지킨 사람 중 잉리드 공주도 있었고, 새어머니의 죽음을 스웨덴 왕실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알린 사람이 잉리드였다.

루이즈가 사망하기 전에 의붓 자식이자 후계자인 구스타프 아돌프가 사망했기에, 그의 아내인 지빌라는 루이즈 사후에도 스웨덴의 왕비가 되지 못했다. 이후 왕비 자리는 칼 16세 구스타프의 아내인 실비아 좀멀라트가 차지한다.

루이즈 왕비 사후에는 지빌라 왕세손비가 왕비 역할을 대신했지만, 그녀마저 1972년 11월에 암으로 사망한 바람에 1976년 6월 칼 16세 구스타프가 결혼할 때까지는 지빌라 왕세손비의 넷째 딸이자 칼 16세 구스타프의 넷째 누나인 크리스티나 공주가 왕비 역할을 대신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루이즈 마운트배튼
(Louise Mountbatten)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
(Prince Louis of Battenberg)
헤센 대공국의 공자 알렉산더
(Prince Alexander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바덴의 공녀 빌헬미네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
(Countess Julia Hauke)
한스 모리츠 하우케 백작
(Count John Maurice Hauke)
소피 라퐁텐
(Sophie Lafontaine)
헤센 대공국의 공녀 빅토리아
(Princess Victoria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의 공자 카를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13]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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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의 작위를 갖고 있으나 영국에 살고 있는 왕족에게 내려졌던 경칭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폐지되었다.[2] 빅토리아 공녀도 루이즈를 보고 자신과 매우 닮았다고 언급했다.[3] 빅토리아 여왕 - 앨리스 공주 - 빅토리아 공녀 3대가 아주 붕어빵이었는데 당시에도 박색인 걸로 유명했다. 루이즈도 안타깝게도 어머니를 닮아(…) 인물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초특급 미남인 덕에 어머니보다는 조금 낫긴 하다.[4]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첫번째 아내였던 코넛의 마거릿 공녀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로, 루이즈와 5촌이다.[5] 하지만 오히려 가지 않아서 다행이였다. 훗날 그리스 왕실은 상황은 불안정해져 앨리스는 망명을 해야 했다.[6] 루이즈한테는 외외당숙이다.[7] 이 결혼으로 인해 영국스웨덴의 외교 조약을 체결했다고 한다.[8] 엄밀히 말하면 이혼 후 잔느 드 트람코트(1875~1952) 라는 프랑스 출신 이혼녀와 만나고 있었지만(1932년부터 그녀가 죽은 1952년까지는 아예 동거함), 결혼할 수 없었다.[9] 잉에보르 왕자비의 세 딸이 있는데 장녀 마르가레타는 덴마크의 왕자비, 차녀 메르타노르웨이의 왕세자비, 막내딸 아스트리드벨기에의 왕비가 되었다.[10] 구스타프 아돌프는 마거릿이 사망하고 3년 만에 재혼했다.[11] 남편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자녀들은 루이즈를 보고 앤트 라고 불렀었다고 한다.[12] 세계 여행 중 1926년에 일본 및 조선을 방문하여 남편과 함께 서봉총 발굴을 참관하였다.[13]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