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필리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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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
Louis-Philippe II, Duc d'Orléans


파일:1257px-thumbnail.jpg

이름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
(Louis-Philippe Joseph d'Orléans)
출생
1747년 4월 13일
프랑스 왕국 생클루 생클루 성
사망
1793년 11월 6일 (향년 46세)
프랑스 파리
배우자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1769년 결혼)
자녀
루이필리프 1세, 앙투안 필리프, 프랑수아, 아델라이드, 루이 샤를
아버지
루이필리프 1세
어머니
루이즈 앙리에트 드 부르봉
형제
바틸드

1. 개요
2. 가계
3. 방탕한 귀족/자유 사상의 후원자
4. 프랑스 혁명
5. 최후
6. 후대
7. 미디어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ouis_Philippe_Joseph%2C_Duc_d%27Orleans_and_Duc_de_Chartres_by_Louis_Tocqu%C3%A9.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hilippe_d%27Orl%C3%A9ans_en_grand-maitre_du_GOF.jpg
아동기
성년기

Louis-Philippe II Joseph, duc d'Orléans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 조제프.[1]

프랑스왕족. 프랑스 혁명 시기에 활동하였다. 별명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 필리프 에갈리테).

프랑스 내 최대의 영지를 가진 영주이자 방계 왕족으로, 앙시앵 레짐의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인물 중 하나임에도 자신이 왕이 되고자 프랑스 혁명의 물주를 자처하며 혁명가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인물이다.


2. 가계[편집]


그의 아버지 루이필리프 1세는 루이 13세현손자이자 루이 14세의 외증손자로, 루이 15세의 8촌 동생이다.[2] 그의 할아버지 필리프 2세루이 14세의 친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들이었고, 루이 14세와 그 첩인 몽테스팡 후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즉 자신의 사촌)인 프랑수아즈 마리와 결혼했다. 필리프 2세는 루이 15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공작으로 프랑스를 통치하기도 했다.

즉, 루이필리프는 루이 16세의 먼 친척으로서, 방계 왕족 중에선 왕위 계승권 순위가 1순위였다.[3]


3. 방탕한 귀족/자유 사상의 후원자[편집]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는 프랑스 왕국의 5%를 영지로 가지고 있는 강력한 영주였으며,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어서 부유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의 아내인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는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 사이의 사생아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의 손녀였다. 그녀의 오빠가 20세에 죽으면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고 이 때문에 루이필리프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또한 툴루즈 백작 가에 포함된 멘 공작의 유산[4]도 받았다.

왕국 내에서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져서 누구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던 오를레앙 공은 마지막 남은 하나를 노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프랑스의 왕위였다.

오를레앙 공은 자택 팔레 루아얄을 평민들에게 개방하고, 많은 자유주의 사상가가 오를레앙 공의 저택에 모이도록 했다. 왕국 최대의 대귀족이 왕국에서 위험시되는 혁명가와 자유주의자들을 보호한 덕에 혁명 세력은 힘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을 지지했고, 왕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공격하였다.


4. 프랑스 혁명[편집]


왕위를 노린 오를레앙 공의 야심은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을 지원하는 굉장히 모순적인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삼부회에서는 제3신분에 가담하였고, 진보적인 귀족들을 이끌고 국민의회에 합류하여 귀족들의 반란을 주동하였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에서도 팔레 루아얄을 파리 민중들의 집결지로 활용하게 만들었다. 그 아들 루이필리프도 이 때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어서 혁명에 합류하였고 혁명군의 일원이 되기까지 했다.

혁명 결과 왕정이 폐지되자 자신을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 필리프 에갈리테)"라고 부르며 왕족의 칭호를 버렸다. 그리고 루이 16세의 처형에 한 표를 던졌다.[5] 하지만 여전히 왕위를 향한 야심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5. 최후[편집]


뒤무리에 장군이 혁명 타도와 오를레앙 왕가 옹립을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오를레앙 공, 아니 "평등한 필리프"는 지롱드파에게 고발당했고 이후 사형을 선고받아 단두대에서 허무하게 죽었다. 루이 16세가 죽은 지 10달도 안 된 시점이었다.


6. 후대[편집]


그의 장남인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 3세스위스로 망명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스위스가 프랑스에 점령되자 이리저리 타국을 전전하였다. 하지만 오를레앙 공이 혁명 중에 쌓아둔 명성 덕분에 왕정복고 이후 작위를 회복하였고, 샤를 10세가 타도된 7월 혁명 뒤에 프랑스 왕위에 올랐지만, 루이필리프도 결국 2월 혁명으로 쫓겨나고 만다.

대원군흥선대원군의 대명사이듯 루이필리프는 오를레앙 공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고유명사로 오를레앙 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둘 다 시대적 전환기에 중대한 역할을 했었던 방계 왕족이었고, 본인들은 왕이 아니었지만 아들들은 왕이 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부분.


7. 미디어[편집]


  • 베르사이유의 장미(만화)에서는 초반부 흑막으로서 왕위를 노리고 루이 16세 황태자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여러번에 걸쳐 암살 및 사고사로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중반부에 들어가면 공기화. 후반부에 공화 세력에 가담하는 거 같았으나 로베스피에르는 동지들에게 왕위를 노리고자 우릴 이용하는 걸 다 알고있다고 비아냥거리며 그를 혐오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면 아예 사라진다. 애니에서는 왠지 왕위를 노리고 부지런히 활약하는 인상 나쁜 중년 아저씨 외모로 나왔지만, 그 무렵 실제 오를레앙 공작은 20대 초반에 패션과 놀이에 더 바쁜 돈 많은 백수였다는 것이 차이점. 원판 성우는 처음에는 이치카와 오사무였으나 이후 진나이 타츠유키로 변경. 한국판 성우는 최병상(KBS판).
  • 굽시니스트는 아들 루이필리프빌리 해링턴으로 패러디하며 아버지 루이필리프를 오를레Ang?으로 묘사했다.
  • 오를레앙 공에게는 그레이스 엘리엇이라는 영국 귀족 출신의 정부가 있었는데, 엘리엇은 프랑스 혁명이 끝나고 영국으로 귀국하고 난 뒤 Journal of My Life During the French Revolution라는 회고록을 썼다. 이 회고록을 원작으로 에릭 로메르영국 여인과 공작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여기서는 장클로드 드레퓌스가 맡았다.
  • 악역 영애로 전생했을 텐데 마리 앙투아네트였습니다에서는 흑발에 얼굴에 눈물점이 있는 미남으로 묘사된다. 방계 왕족 중에서 왕위 계승권 1위인 인물로, 역사대로 교활한 성격에 왕위를 향한 야심이 가득하다. 루이 16세를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겁쟁이로 여기고 깔보고 있다. 사실 그가 루이 16세를 말로 은근히 압박하며 루이의 우유부단함을 증폭시키는 것이라 봐야 한다. 말투와 태도를 봐선 여러 번 압박해 온 것으로 보인다. 성격과 행실도 좋지 않다.
  • 한국의 대체역사 소설 단두대에서 살아남기에서도 등장하며 작중 보수파 의원들의 구심점인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 평으로는 '스스로 왕이 될 꿍꿍이를 지닌 야심가.' 다만 작중 시점에서는 로베스피에르의 말을 듣고 '프랑스의 집정관' 역할을 하면서 라파예트와 직접 대립하게 되었다. 루이 16세가 퇴위되자 왕좌를 얻을 욕심에 부활절 선동과 뒤무리에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로베스피에르가 노트르담 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일이 꼬였고, 결국 체포, 이후 쿠데타의 모든 책임을 홀로 지고 자신만 처형되는 결말을 선택하게 된다. 어떤 면에선 '한 세력의 장'으로서 걸맞았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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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르트르 공작, 발루아 공작, 느무르 공작, 몽팡시에 공작, 그리고 주앵빌 공작을 겸직했다.[2] 루이 15세의 차녀인 앙리에트와 결혼할 뻔한 인물이기도 하다. 루이 15세는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고려하다가 오를레앙 가문의 위세가 너무 커질 것을 경계해서 반려한다. 이후 앙리에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낸다.[3] 오를레앙 가보다 프랑스 직계왕실에 가까운 가문은 스페인 부르봉 왕가였으나, 스페인 계승전쟁 이후에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오를레앙 가문이 프랑스 직계왕실이 끊어지면 살리카법에 따라 왕위계승권이 있었다. 오를레앙 가문 다음이 부르봉-콩데 가문으로 앙리 4세 시절까지만 해도 왕위 계승 1순위 가문이었지만 이 가문은 나폴레옹이 이 집안의 마지막 상속자 앙기엥 공을 죽이면서 끊어진다.[4] 루이 14세의 사생아이자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의 형이다. 후손이 없어서 툴루즈 백작가에 유산이 상속되었다.[5]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루이 16세는 왕족인 루이필리프마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