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아노 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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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노 모지(Luciano Moggi)
1937년 7월 10일~

1. 개요
2. 생애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
2.2. 유벤투스와 로마의 컨설턴트
2.3. 라치오의 단장
2.4. 토리노와 나폴리의 경영진
2.5. 유벤투스의 천재 단장
2.6. 칼초폴리와 그 이후
3. 평가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이탈리아 출신의 前 유벤투스 단장이다.


2. 생애[편집]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편집]


1937년 7월 10일 시에나의 도시 몬티시아노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미쳤고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했다. 그는 지역의 아마추어 팀에 소속되어 1963-64시즌 동안 경기에 출장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축구 선수가 되기에 부족했기에, 그는 1970년대 초까지 기차역의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동시에 여유가 될 때마다 아마추어 선수로서 활동했다. 그렇게 일과 축구를 병행했지만, 그는 곧 직장에 흥미를 잃고 축구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축구 선수로선 자질이 없지만 하부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린 선수들의 재능을 알아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스카우터가 되기로 결심했다.


2.2. 유벤투스와 로마의 컨설턴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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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유벤투스의 축구 디렉터였던 Italo Allodi는 모지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유벤투스의 스카우터로 발탁했다. 모지는 스카우터로서 여러 어린 선수들을 추천했고 그 중 많은 선수들이 유벤투스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며 모지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대표적으로 1972년에는 파올로 로시, 1973년에는 클라우디오 젠틸레, 그리고 1974년에는 가에타노 시레아를 발굴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젠틸레와 시레야는 유벤투스의 레전드가 되었고 로시는 유벤투스에선 잠재력을 폭발시키지 못했지만 비첸자로 이적한 후에는 이탈리아 최고의 포워드로 등극했다. 모지는 곧 천재 스카우터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몇년 후 Italo Allodi가 팀을 떠나자, 모지는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단지 유벤투스에서만 근무하지 않고 다른 팀들과 접촉하여 선수 이적 협상을 맡았다. 이후 그는 로마의 보드진에 의해 발탁되어 컨설턴트의 자격으로서 선수 영입을 도맡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로마에서 영입을 전담하면서 여러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며 자신의 탁월한 수완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사항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에 이미 심판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고 로마에게 유리한 판정이 내려지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2.3. 라치오의 단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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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그는 라치오의 단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그는 라치오를 리빌딩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당시 라치오는 재정 악화의 역파로 세리에B로 강등되어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했다. 모지는 고액 주급을 받는 선수들을 대거 정리하고 팀을 다시 세리에A로 승격시키려 했다. 그러나 2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리에A 승격에 실패하자, 모지는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2.4. 토리노와 나폴리의 경영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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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와 함께 운동하고 있는 모지

1982년, 모지는 토리노의 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토리노에서 5년간 근무하며 팬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종종 형편없는 선수들을 영입하고 잠재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들을 놓쳤기 때문이다. 결국 모지는 토리노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87년, 그는 토리노를 떠나 마라도나가 대활약하고 있던 나폴리의 경영진으로 부임했다. 그는 나폴리에서 여러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고 나폴리는 이에 힘입어 1989년 UEFA 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에는 리그와 이탈리아 슈퍼컵 우승을 차지했다. 1991년, 그는 다시 토리노로 돌아왔다. 모지는 이번에는 팀의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해냈고 팀이 유로파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유로파 대회에서 심판들이 토리노의 홈 경기에서 유리한 판정을 내리도록 유도했다는 의혹이 있다.


2.5. 유벤투스의 천재 단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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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4년 유벤투스의 단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모지는 GEA World사의 회장이 되었고 선수 영입 및 팀 운영에 대한 전권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는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과 탁월한 재능을 갖춘 어린 선수들을 영입하고 그들이 대활약하게 해줌으로서 유벤투스의 성공신화를 창조했다. 모지가 12년간 유벤투스에서 일하는 동안, 유벤투스는 리그를 7번 우승했고 이탈리아컵을 한 차례 우승했으며 이탈리아 슈퍼컵을 4번 우승했다. 또한 국제대회에서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3번 진출하여 한 차례 우승했으며 UEFA 슈퍼컵을 한 번 우승하고 인터콘티넨털컵을 1회 우승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실로 탁월한 영입 수완과 육성 시스템 관리, 주급 관리 등을 보여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희대의 천재 단장이라며 칭송했다.


2.6. 칼초폴리와 그 이후[편집]


2006년 5월 4일, 몇몇 신문사에서 모지가 승부조작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모지가 여러 심판들에게 유벤투스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루이스 피구마시모 모라티 또한 모지가 심판진과 매우 유착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파문이 확산되었다. 2006년 5월 텔레콤 이탈리아는 모지와 피에르루이지 파이레토 UEFA 심판배정 부위원장과의 통화 등 도청 결과 다수를 검찰에 제출하였으나, 당시 토리노 검찰청의 수석검사인 마탈레나는 도청내용에 대해 "단순 친분관계를 알 수 있게 하는 것 외에 범죄의 증거로 볼 수 없다"며 기소를 하지 않고 FIGC(이탈리아 축구연맹)로 자료를 이관하였다.

당시 녹취 내용을 보면, 모지가 "누가 그딴 심판을 보낸 거야?"라고 하자 베르가모가 "그는 최고의 심판이오."라고 반박하는 등 배정에 대해 둘이 공모했다는 정황은 없었다. 그런데 나폴리 검찰청에서 도청자료를 토대로 모지가 소유한 에이전시 회사인 GEA월드의 에이전트 계약시의 불법행위 정황을 포착하였다. 이후 일련의 조사과정에서 스테파노 팔라치 검사는 4개 구단의 6명의 인사들이 "심판배정관여 및 판정이득을 얻었다"는 혐의로 기소하였다. 모지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심판진의 경기 배정에 압력을 행사하고 유벤투스에게 유리한 판정이 내려지도록 유도했음을 입증하는 정황증거가 속속 발견되자, 그는 단장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승부조작 혐의로 법원에 기소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유벤투스는 팀 차원에서 승부조작을 주도하지 않았고 모지와 안토니오 지라우도 등 보드진이 승부조작을 주도했다. 모지는 유벤투스만이 아니라 2004-05 시즌 세리에B로 강등될 위기에 몰려있던 피오렌티나의 경기에도 승부조작에 가담하여 피오렌티나를 구한 바 있었다. 즉, 그는 유벤투스 뿐만이 아니라 리그 전반에 걸쳐 승부조작을 감행한 것이다.

이에 이탈리아 축구 협회는 2006년 7월 14일 모지에 대해 5년 자격 정지 및 5년 이내 영구추방으로 연장할 수 있다고 발표했고 2011년에 영구추방으로 확정지었다. 또한 유벤투스가 "모지 등 부정한 수뇌부들의 행위를 저지하지 않고 묵인한 죄"를 저질렀으므로 세리에B로 강등하고 승점을 9점 삭감했으며 2005년과 2006년의 리그 우승을 박탈했다. 또한 GEA월드의 에이전트 계약에서 불법행위를 묵인하거나 방조한 레지나, 라치오, 피오렌티나, AC밀란에게도 중징계를 내렸다. 모지 등은 이에 대해 항소했고 2심에서는 모지의 승부조작 혐의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므로 범죄 음모 죄목을 적용, 2년 4개월 형으로 감형되었다. 하지만 모지는 다시 한번 항소를 했고 2015년 3월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2015년 9월 9일 이탈리아의 언론지 가제타에 공개된 대법원의 판결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대법원은 전 유베투스 단장 루치아노 모지가 '모든 언론사들과 방송국들이 모시는 초강대국과 같은 절대권력자'였다고 단언했다. 대법원은 모지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칼치오폴리의 '왕자'이자 리그에 불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구축된 시스템의 설계자였으며 이 시스템의 영향력은 2004-05 시즌에 국한되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대법관들은 유벤투스의 우승과 본인의 권력 강화를 위해 승부조작을 모의했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은 전 유벤투스 단장은 리그 리그 내의 모든 선수와 감독들의 평판을 좌지우지할 막강한 언론 권력을 쥐고 있었으며 축구협회 등의 공식기관들까지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쥐고 있었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전 유벤투스 단장이 복합적이고 다방면적으로 이탈리아 축구협회의 뇌관을 손에 쥐고 있었다고 말했고 과장을 일절 섞지 않고서도 모지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첨언했다.

모지는 경기가 종료되면 심판들의 라커룸에 진입하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판정들을 강경하게 비난함은 물론 공격적인 언어로 심판들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절대권력은 고삐가 풀린 채로 휘둘러졌다.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칼치오폴리에 대한 대법원의 입장은 강경했다.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절대권력자 한 명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구축된 이 지하세계는 이탈리아 축구계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커다란 경제적인 손해를 입혔음은 물론 이탈리아 축구를 더럽히고 구조적으로 뒤흔들기까지 했다.

모지의 영향력은 경기장에서만 발휘된 것이 아니었다. 언론사들 및 방송사들까지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예시가 있다. 2004년 유벤투스가 볼로냐를 1:0으로 이긴 경기가 끝난 뒤의 월요일, 전직 심판 파비오 발다스는 TV에 출연해 슬로모션 카메라로 촬영된 반칙장면을 검토하기로 되어 있었다. 해당 판정은 명백한 오심이었고 유벤투스에게 유리하게 적용된 판정이었다. 또한 이 경기를 맡은 피에리 심판은 모지가 사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인물이었다.

모지는 몇 통의 전화로 입김을 퍼뜨렸고 이에 따라 발다스는 유벤투스와 피에리 심판에게 호의적인 여론을 형성해줄 영상을 골라 틀었다. 피오렌티나의 수뇌부는 처음에는 모지 시스템에 저항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투항했다. 그들은 카노사의 굴욕과 비슷한 모양새로 모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미 내려진 불리한 판정들은 뒤엎을 수 없었지만 남은 경기들에서라도 호의적인 판정을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축협과 모지의 비위를 맞췄다.


이렇듯 강경한 판결문에도 불구하고, 모지는 감옥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승부조작과 범죄 음모 모두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이다.[1] 하지만 그는 축구계에서 영구 퇴출되었으며, '사실상 유죄'나 다름없는 판결이었기 때문에 그의 명예 또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3. 평가[편집]


그는 육성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선수진 보강 및 재정 관리 면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과시했다. 그가 유벤투스에서 1994년부터 2006년까지 12년간 단장으로서 일하는 동안, 유벤투스는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의 명실상부한 명문 구단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천재 단장은 지나친 권력욕에 사로잡혀 칼치오폴리를 저질렀고 결국 유벤투스에게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안기고 말았다. 또한 세리에A는 모지의 범죄로 인해 위상이 추락했고 현재까지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2]

모지는 단장 경력 내내 탁월한 영입감각과 팀 운영을 보여줬고 유벤투스는 그의 활약 덕분에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유럽 대회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권력욕으로 유벤투스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세리에A 또한 위상이 추락했다. 능력은 대단히 좋았지만 범죄를 거리낌없이 저지를 수 있는 자가 높은 지위에 있을 때 조직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4. 관련 문서[편집]


[1] 이탈리아에서는 재판 중에도 공소시효가 작동해서 재판 다 끝나고 나면 공소시효가 끝나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2] 루치아노 모지의 별명은 전설의 마피아 두목 찰스 루치아노의 별명에서 따온 ‘러키(Lucky) 루치아노’였다. 실제로 모지가 보여준 모습이 마피아와 비슷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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