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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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lla | 루킬라
파일:external/resources.oncourse.iu.edu/lucilla1.jpg
루킬라의 두상
Annia Aurelia Galeria Lucilla
안니아 아우렐리아 갈레리아 루킬라
로마의 아우구스타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Nerva–Antonine dynasty)
전임
소 파우스티나
후임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신상 정보

LVCILLA
루킬라
출생
148–150년 3월 7일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
182년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카프레이아 섬(오늘날의 카프리 섬) (향년 34세)
재위 기간
164년 ~ 169년
배우자
루키우스 베루스 (164년 결혼 / 169년 사별)
폼페이아누스 (169년 ~ 182년)
자녀
소(小) 루키우스 베루스, 아우렐리아 루킬라, 루킬라 플라우티아 (첫남편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사이에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두번째 남편 폼페이아누스와의 사이에서)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
형제자매
언니(요절), 쌍둥이 오빠(요절), 콤모두스 외 10명

1. 소개
2. 생애
2.1. 출신 가문
2.2. 첫 번째 남편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
2.3. 폼페이아누스와의 재혼
2.4. 후계자 콤모두스의 등장
2.6. 몰락과 최후
3. 평가
4. 여담
5. 대중매체



1. 소개[편집]


고대 로마 제국을 통치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족이자 아우구스타였다. 아버지는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였고, 어머니는 오현제 중 한 명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막내딸이자 아우구스타였던 소 파우스티나 황후였으며, 첫 번째 남편이자 삼촌은 루키우스 베루스였고, 동생은 로마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불리는 콤모두스였다. 콤모두스가 비뚤어진 것도 이 여인의 암살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소 파우스티나 부부의 14남매 중 두 번째 출산으로 태어난 쌍둥이 남매이자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하지만 일찍이 언니와 오빠가 유아기를 못 넘기고 요절해 서기 150년부터 사실상 첫째였다. 영화 <글래디에디터>를 통해 익히 잘 알려진 로마 공주이며, 로마 제국 최초로 남편을 황제로 둔 공주이자 공주 중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고, 박탈된 최초의 로마인이기도 했다.

영화 내용과 달리 부황과 모후의 병세가 악화될 무렵부터 로마 안팎에서 은밀히 권력을 행사하고, 내정에 간섭한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후, 부황과 모후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타 직위에 대한 야망과 남동생 콤모두스 부부에 대한 분노 등을 이유로 182년 콜로세움에서 동생 콤모두스를 암살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해 182년 반역죄로 딸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카프레이아(카프리) 섬에서 처형되었다.


2. 생애[편집]



2.1. 출신 가문[편집]


서기 148년[1] 3월 7일, 로마에서 당시 제위 계승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막내딸이었던 소 파우스티나 사이에서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쌍둥이 남매 중 둘째였는데, 쌍둥이 오빠였던 게멜루스 루킬라에는 2살 무렵에 요절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누나인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외손녀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황후 사비나의 자매였던 루필리아 파우스티나가 증조할머니이자 외증조할머니였다. 따라서 루킬라는 태어날 당시부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네 명의 황제[2] 모두의 친족이었고, 부모 모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또는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부터 내려온 세습귀족 혈통이라서 당시 로마 내에서의 혈통적, 사회적 지위는 최고 수준이었다.


2.2. 첫 번째 남편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편집]


외할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던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생전부터 팔라티누스 황궁 안에서 성장했고, 양숙부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비롯한 황실 식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러다가 161년 아버지 마르쿠스와 삼촌 루키우스가 공동황제로 임페라토르에 취임했다.

동시대 사람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총독, 원로원 의원을 거친 아버지를 둔 역사가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아버지 마르쿠스 황제의 주선으로 161년 삼촌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약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결정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에 암묵적으로 가문 회의 등을 통해 결정된 듯 하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 루킬라의 남편이 될 루키우스 베루스와는 무려 18살 차이가 났는데, 두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였고, 루키우스 베루스의 혼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에 의해 변경된 이후 이상하리만큼 서둘러 진행되지 않았다.

루킬라는 164년 로마를 떠나 동방의 대도시 안티오키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촌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결혼했다. 이때 루킬라는 현직 황제의 정실부인 지위에 따라, '아우구스타' 직위를 공식으로 수여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불과 16살의 나이에 모후 소 파우스티나와 공동 아우구스타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루킬라는 로마 내에서 영향력을 키우면서 존경받고 영향력이 상당한 아우구스타로 평가받게 되었다.

남편이 된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와의 사이에서, 소(小) 루키우스 베루스를 비롯하여 아우렐리아 루킬라와 루킬라 플라우티아를 출산했다. 이중 막내딸인 루킬라 플라우티아 외에는 169년 이전에 모두 요절했고, 남편인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마저 169년 게르만족과의 전쟁 이후 로마로 귀환하다가 쓰러져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2.3. 폼페이아누스와의 재혼[편집]


삼촌이자 남편인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사별은 루킬라의 인생을 크게 바꾸는 사건이 되었다. 왜냐하면 남편과 사별하고 얼마 뒤,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믿음직한 충신이었던, 장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와 루킬라를 강제로 재혼시켰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남편이었던 폼페이아누스는 외모도 괜찮고 성격이 겸손했으며 교양이 풍부했던 사람으로 오늘날의 튀르키예 안티오키아 출신이었다. 그는 과거 125년생이라는 가정으로 보면, 44세 정도였다고 하나, 이는 추정 나이일 뿐이고 실제는 132년생으로 결혼 당시인 169년에는 37세였다. 그는 미혼의 최상류층 기사계급(에퀴테스) 출신의 신참자(노부스 호모)이자 로마 제국 최고의 엘리트로, 31세의 나이에 원로원에 들어온 뒤 1년 만에 보결 집정관에 추천되어 역임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인재였다.

파일: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jpg
두 번째 남편인,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 폼페이아누스

폼페이아누스는 타고난 미남이었던 루키우스 베루스와 비교해 미남은 아니었지만 외모, 능력, 성격 모두 아주 휼륭했다. 정신력이 대단했고 겸손한데다가 성실하고 평균 이상의 키를 갖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루킬라는 어린 시절부터 공주라는 지위와 휼륭한 자신의 조상들, 부모 양쪽의 혈통, 그리고 수백년째 이어진 귀족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특히 그녀는 새 남편이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때 로마 시민권을 얻은 기사계급(에퀴테스) 출신이었고, 본인 대에야 비로소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임을 혐오스러워 했다.

아울러 이 결혼은 황후(아우구스타)라는 신분까지 박탈되는 결정이라서, 평범한 귀부인의 삶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던 루킬라는 아버지에게 격렬하게 반항했다고 전해진다. 루킬라가 이런 이유 등으로 새 남편과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할 당시, 모후 파우스티나 역시 여러 사정으로 반대하는 루킬라 편을 들며 재혼 직전까지 폼페이아누스는 우리와 격이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충돌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황제는 아내와 당사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실과 제국의 안녕 등을 고려해 무시했고, 폼페이아누스는 나이, 실력, 인품 등을 생각하면 재혼할 루킬라에게는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그래서 마르쿠스 황제는 명령을 내려 결혼을 강행시켰다. 따라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169년에 올렸다. 그래서 부부 사이는 자연스레 굉장히 나빴는데, 두 번째 결혼에서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170~217)를 낳았다.


2.4. 후계자 콤모두스의 등장[편집]


175년 이전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는데, 이 시기부터 루킬라의 영향력은 사실상 유일무이한 아우구스타나 다름없어 로마 사회 곳곳에 미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 시기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편치 못한 몸으로 병사들과 함께 다뉴브(도나우, 다누비우스) 강 전선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루킬라는 마르코만니 전쟁 기간 동안, 재판과 행정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인사 이동 역시 루킬라의 의중이 반영되었다.

이런 가운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를 걱정해 일찌감치 여러가지 대비를 했다. 이는 모후 파우스티나 역시 비슷했는데, 그녀는 로마 안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며 어린 콤모두스의 안위에 최대한 신경을 썼다. 왜냐하면 콤모두스는 성품이 착하고 유순한데다가, 이 무렵 즈음 콤모두스의 한 살 아래의 남동생으로 형 콤모두스와 함께 카이사르 칭호를 받은 열두 번째 자녀였던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가 169년 10월, 귀에 난 악성종양 제거 수술 후 합병증으로 요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군부와 원로원에게 두루 신망을 받고 있었던 맏사위 폼페이아누스를 일찌감치 유일한 후계자 콤모두스를 도울 인물로 지목했다. 이는 루킬라와 폼페이아누스 사이의 결혼을 마르쿠스 황제가 강하게 밀어붙일 당시부터 예상된 일이었는데, 사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콤모두스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의 나이를 생각해 폼페이아누스를 예전의 아그리파 혹은 대 드루수스 생전의 티베리우스 같은 위치의 섭정 같은 자리를 부여하려고 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예 폼페이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하고, 이름까지 폼페이아누스 카이사르로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장인의 결정에 대해 폼페이아누스는 어린 콤모두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결정이라며, 이 조치를 한사코 거절했다. 따라서 카이사르 칭호 결정은 실제 결정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런 조치 외에도 황제와 황후는 자신들이 부재할 경우, 나이가 어리고 천성이 착한 콤모두스를 걱정해 폼페이아누스와 함께 진심으로 아들을 위해 헌신할 이를 선정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폼페이아누스는 카이사르 칭호도 가지고 있지 않고, 클라우디우스 1세 시절 시민권을 받은 시리아 속주 출신 그리스계이자 심지어 신참자인 탓에 단점이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부부 모두 상당히 신뢰한 장군이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콤모두스의 또 다른 조력자로 염두에 뒀다.

그런데 175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이런 믿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소 파우스티나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일의 오해를 차단할 목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해 콤모두스와 소 파우스티나를 급히 자신의 곁으로 오게 했다. 다행히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은 몇개월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때의 일은 로마를 떠나 동방 순행에 나선 황후의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따라서 175년 루킬라와 콤모두스의 모후였던 소 파우스티나는 오늘날의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의 로마군 동방기지가 있었던 할랄라에서 사망했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내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는데, 콤모두스 역시 사춘기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큰 슬픔에 빠졌다. 그래서 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누나와 매부들에게 의지했는데, 이때 폼페이아누스를 포함한 안토니누스 황족들은 여린 성격의 콤모두스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폼페이아누스는 장인의 생전부터 늘 콤모두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로 도움을 줬고, 둘째 누나 부부도 콤모두스를 위해 사저에서 황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물심양면으로 지켜줬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쿠스 황제와 콤모두스 등 황실 수행원들은 동방 순행을 마치고 176년 가을,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콤모두스를 공식 후계자로 선포했다. 이어서 그는 콤모두스가 16살이 되던 해인 178년 콤모두스의 혼처를 구해 곧바로 결혼시켰다. 신부는 황제의 신임을 받았고, 함께 도나우 강에서 벌어진 게르만족들과의 전투에 참전했던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의 딸 브루티아 크리스피나였다. 그런데 이 결혼과 후계자 선정은 공교롭게도 루킬라의 황후 지위가 사실상 박탈되는 결과를 초래해, 동생의 공동황제 등극으로 위기감을 느낀 루킬라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2.5.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편집]


루킬라는 아버지가 외치에 전념하는 동안 로마 내정에 간섭해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여장부였고, 어머니 생전부터 실권을 행사할 정도로 자신의 혈통과 지위에 대한 자존심, 개인적인 야망이 상당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말년부터는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월권을 행사했고 그 영향력을 키웠으며, 원로원 내 여러 인사들을 통해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했다. 그러나 이런 루킬라의 행동은 노골적이지 않았고, 마르쿠스 황제 생전에는 루킬라가 눈치를 보면서 한 까닭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버지 마르쿠스 황제가 붕어하자, 루킬라는 2년 동안 웅크리고 기회를 엿보며, 자신에게 반항적으로 변할 수 있는 콤모두스와 올케인 크리스피나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사춘기 때 어머니 파우스티나를 여읜 콤모두스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들을 엄마처럼 의지하고 따랐다. 이때 그는 맏누나 루킬라와 큰 매형 폼페이아누스에게 심정적으로 많이 의지했는데, 이런 콤모두스에게 루킬라의 두 여동생과 루킬라의 남편 폼페이아누스는 진심을 다해 어린 황제를 도왔다.[3] 하지만 루킬라는 본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남편과 대면대면한데다가 바로 아래의 두 여동생과 달리 콤모두스를 진심으로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원한과 불만이 커지더니, 급기야 동생 콤모두스가 후계자가 되고, 브루티아 크리스피나가 아우구스타 직위에 오르자 동생 부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뺏어가고, 정치적 생명과 사회적 지위까지 모조리 끝장낼 것이라고 판단해 갈수록 증오심만 커졌다.

이 시기 루킬라는 자신의 자리가 되었어야 했던 황후 자리를 차지한 콤모두스의 아내 크리스피나를 유독 미워했다. 따라서 어처구니없는 악감정으로 182년 딸 루킬라 플라우티아, 두 번째 남편의 조카 중 상당한 완력을 자랑한 퀸티아누스, 루킬라와 내연관계였던 애인들, 콤모두스의 장인, 다른 여동생들의 남편들과 암살 음모를 꾸몄다. 루킬라는 이 모임의 주동자였으며, 안토니누스 황실 여성들과 친인척, 근위대장, 원로원 의원 등이 대거 참여한 루킬라의 황제 암살미수 사건은 콤모두스의 모든 것을 180도 바꿔버리면서, 콤모두스의 치세와 로마 전체를 그야말로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사실 로마 귀환 직후, 콤모두스는 180년 10월 22일 정식 개선식을 올렸는데, 자신이 총애한 시종이었던 사오테루스를 황제 전용 마차에 태우고 개선행렬이 거행될 동안 수시로 사오테루스에게 키스를 하는 애정행각을 공개적으로 보인 행동 외에는 아직 폭군으로서의 광기, 피에 굶주린 과대망상적인 폭군으로서의 언행을 크게 일으키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인들에게 콤모두스는 "행동이 참 경박하다", “나이답지 않게 철이 없고 유순해보인다”는 비난 외에는 큰 비판거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맏누나인 루킬라는 콤모두스의 아내 크리스피나가 현직 황제의 황후가 되면서 자신이 점차 허울뿐인 아우구스타 지위를 갖게 된 것에 대해 상당한 위기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루킬라는 스스로 콤모두스 암살 계획을 주도해, 182년 암살을 실행에 옮겼다.

그녀의 조카였던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가 이때 완력이 상당하고 건장했던 콤모두스 암살을 담당했고, 콜로세움에서 결행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래서 퀸티아누스는 옷에 단도를 감추고 콤모두스가 콜로세움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황제가 가까이 오자 숨어 있던 곳에서 급히 달려 나오며 단도를 휘둘렀는데, 바로 황제를 찌르지 않고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내노라!"

라는 중2병스러운 대사를 외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이 말을 하는 사이에 퀸티아누스는 즉시 호위병에게 칼을 빼앗기고 붙잡혔다. 콤모두스 황제는 비록 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암살 시도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얼마 후에 사오테루스도 암살되자[4] 황제는 한층 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두 차례의 암살 사건으로 젊은 나이에 큰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는 며칠을 끙끙 앓을 정도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 완전히 사람이 변하더니 쓸데없는 의심병이 생기고, 이것이 도져버렸다.


2.6. 몰락과 최후[편집]


퀸티아누스에 대한 심문 이후 모든 진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의 대응은 보복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무자비했다. 암살범이 본인 앞에서 원로원을 대놓고 언급했기 때문에, 범인 심문 이후 암살미수 사건 조사에 연루된 이들은 로마 제국의 핵심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의 유력한 의원들, 선제 시절의 유능한 관리들이나 주변 친척, 친지들 그리고 능력있는 군단장들까지 다양했고, 그들은 반역죄 혐의로 조사받다가 혹은 증거조사 중 약간의 의심이나 증거만 발견되어도 즉시 재판에 넘겨진 뒤 처형되었다. 로마 제국이 자랑하는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줄줄이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때 콤모두스는 누나인 루킬라와 그녀의 딸 루킬라 플라우티아가 단순 가담자가 아닌, 자신을 별 이유 없이 죽이려했던 암살 주동자인 것을 알고 큰 배신감을 받았다고 하며 이후 심한 충격에 빠졌다. 따라서 그는 맏누나와 조카를 즉시 체포하도록 한 다음, 두 사람을 과거 티베리우스 황제가 은둔했던 카프레이아(카프리) 섬으로 유배보냈다. 유배 당시 루킬라와 루킬라 플라우티아 모녀는 남편이 연루된 혐의로 강제 이혼 후 일시 추방되었다가 복귀한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5] 등 다른 공주 혹은 방계 친척들과 달리 이미 카프레이아 섬에서 처형될 것은 예고된 일이었다. 따라서 콤모두스와 원로원은 프라이토리아니 소속 백인대장을 파견해, 반역법 처벌 절차에 따라 루킬라 모녀를 처형했다.

근위대장 타루티에누스 파테르누스(Taruttienus Paternus) 역시 사오테루스의 죽음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는데, 그냥 죽이지 않고 사고로 살해당한 것처럼 위장해 살해했다. 콤모두스는 앞서 티기디우스 페렌니스를 파테르누스와 함께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했지만, 파테르누스가 처형되자 페렌니스가 근위대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통치권까지 잡았다.


3. 평가[편집]


루킬라가 벌인 182년 암살미수 사건은 본인의 몰락을 비롯해, 후계자 시절 황제로서 결점이 없고, 그 천성이나 자질이 모자라지 않았던 콤모두스의 인생과 로마 제국 전체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었기에, 실제 역사적인 평가는 좋지 못하다. 다행이라면 역대 아우구스타 중 메살리나소 아그리피나처럼 대중적인 이미지가 최악은 아닌 터라, 루킬라는 사후에도 그녀 인생 전체와 그 성격이 당대 사람들로부터 최악이라고 평가받지는 않았다. 이는 동생 콤모두스가 이름난 폭군이자 암군이 된 점도 컸는데, 그래도 내막을 모르는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덜 까인다는 것 정도일 뿐, 동생 사후에도 로마인들에게 루킬라는 신원이 복구될 정도로 재평가받지는 못했다.

다행이라면 동생 콤모두스의 흑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몰락, 나아가 로마 제국 전체 역사의 큰 분기점이 된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의 주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루킬라가 벌인 일을 모르는 하층민 일부와 현대 대중들에게는 이미지가 좋은 편이라는 점이다. 특히 영화 <글래디에이터>로 얻게 된 히로인 이미지는, 대중들에게 무척 좋아 그녀가 벌인 악행들조차 옹호받기도 했다. 따라서 종종 "콤모두스가 폭군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그랬을 것" 등의 고평가를 받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그때 암살이 성공했으면 불행은 없었을 것이라며 루킬라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급만 콤모두스보다 덜 되었을 뿐, 동시대인들에게 루킬라는 젊은 시절 공주때와 달리 존경받거나, 그녀가 벌인 일이 재평가받은 적이 정상적인 로마인들 사이에서 드물었다. 오히려 그녀의 악행 중 일부는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가 고스란히 뒤집어 쓰면서 어머니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지도 않은 로마의 아우구스타들' 명단에 항상 올리도록 했다.[6] 그래서 동생보다 나은 점이라곤 없다는 의견이 많고, 실상을 안 이들에게는 거의 소 아그리피나급이라는 악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루킬라는 아버지 생전부터 막후에서 파벌을 모은다던지, 대놓고 남편 폼페이아누스의 출신 계급을 무시하고 막말을 내뱉었다. 또 여러 명을 애인으로 둔 일, 막후 개입을 넘어 인사권 등에도 개입한 일 등은, 로마 귀족 사회 분위기와 귀천상혼의 정략혼이라는 속사정을 감안해도 존경받기 어려웠다. 여기에 더해 루킬라는 늘 좋은 이미지를 다 챙기면서, 자신이 벌인 일들을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가 벌인 듯 비열하고 얄밉게 행동을 많이 벌인 터라, 실상을 알고 있는 로마 상류층들에게 인격적으로는 대중적 존경심만큼의 평판을 일절 듣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원로원 의원으로 이 상황을 지켜봤던, 후대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수차례에 걸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께서는 훌륭하고 무결점이셨지만, 자식 농사는 완전히 실패하셨다."

며 루킬라와 콤모두스 남매 모두를 공개 저격했고, 이후 황제들 역시 루킬라가 벌인 일들을 결과론적인 논리로도 재평가해주지 않았다. 이는 원로원과 황제의 입장이 아닌 지식인이자 관료의 입장에서 이를 언급한 헤로디아누스도, 원로원 의원으로서 당시 로마의 세습귀족이었던 디오 카시우스 역시 비슷했다. 특히 디오의 경우에는 정계 은퇴 후 젊은 시절의 일을 떠올리며 콤모두스의 천성과 자질은 훌륭했지만, 주변 사람과 가족사로 인해 불행했다며 루킬라가 벌인 일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끔찍했는지를 기록하고, 루킬라를 페렌니스 및 클레안드로스와 비슷한 부류로 취급하면서 간접적으로 루킬라가 콤모두스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4. 여담[편집]


  • 자녀들이 요절하거나, 성인 이후 살아남은 딸과 아들 모두 그 끝이 좋지 못했다. 영화에서 루시우스로 나오는 장남 소(小) 루키우스 베루스는 165년 경에 일찍 요절했고, 딸 아우렐리아 루킬라 역시 169년 이전에 사망했다. 성년 이후에도 살아남은 딸 루킬라 플라우티아는 어머니 루킬라와 함께 외삼촌 콤모두스에 대한 암살 계획을 주도했다가 카프리 섬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반면 두 번째 남편이었던 폼페이아누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차남 아우렐리우스 폼페이아누스는 아버지 폼페이아누스와 함께 콤모두스 시대에도 처벌받지 않았고, 냉혹하기로 이름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생전에도 원로원 의원 등을 지내며 권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 폼페이아누스는 카라칼라에게 게타의 지지자로 의심받아 재판없이 억울하게 살해되었다.

  • 콤모두스 암살미수 사건 이전까지는, 로마 상류층 내의 평판과 명성이 좋아 존경받았다고 하며, 외모와 출신 가문 역시 훌륭해 루킬라를 미의 여신 비너스로 묘사한 조각상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5. 대중매체[편집]


  •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를 돕고, 콤모두스 황제의 불안정한 행동으로 위기에 처한 로마 제국을 구한 여성 히어로로 묘사되고 있다. 덕분에 영화를 보고 루킬라에게 호감을 느껴 실제 역사상의 그녀의 행적을 찾아봤다가 기겁했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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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0년생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148년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2]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3] 루킬라의 182년 황제 암살미수 사건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딸들 중 루킬라의 두 여동생, 즉 둘째 딸 부부와 셋째 딸은 가담하지도 않았고, 무관했다. 이는 콤모두스의 여동생, 즉 루킬라의 막내동생도 마찬가지였는데 차이가 있다면 막내 여동생 부부 중 마르쿠스 황제의 막내 사위는 루킬라의 황제 암살계획에 가담했다.[4] 별개의 싸움 중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5] 콤모두스 황제 바로 아래의 여동생[6] 소 파우스티나는 이미지와 달리 악녀도, 현모도 아닌 양처였고, 평균 수준의 아우구스타에 불과했다. 고대 기록에서 언급된 소 파우스티나의 악행들은 대개 아들 콤모두스가 워낙 막장인 터라 떠돈 소문이 실제 벌인 일이 된다거나, 혹은 딸이자 아우구스타였던 장녀 루킬라의 막후 실력행사와 불륜 등을 소 파우스티나가 온전히 뒤집어 쓴 것이 많다는 평가이다. 그래서 의심의 여지가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