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폰 팔켄하우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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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팔켄하우젠은 독일 제국군의 상급대장이다. 그는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의 삼촌이다. 무려 91세까지 장수하였다. 장수했기로 유명한 빌헬름 1세보다 1년 더 살았다. 장수왕보다는 5~6년 수명이 짧았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루트비히는 1844년 9월 13일, 프로이센 왕국에서 중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2년 군에 입대하여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과 4년뒤 벌어진 보오전쟁에 참전하였다.
2.2. 보불전쟁과 그 이후[편집]
보오전쟁이 일어난 후 5년뒤 발발한 보불전쟁에도 팔켄하우젠은 참전하였다. 그라블로트 전투에 참여하였고, 파리로의 행진에도 참여하였다. 그 공로로 팔켄하우젠은 1870년 제정 철십자 훈장 2급을 수훈받았다. 이후에도 군에 남아 참모장교가 되었다. 이후 그는 1899년에 제2 근위 보병 사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1899년 3월 25일에는 중장으로서 뷔르템베르크의 제13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3년 뒤인 1902년 3월에 전역하였다. 그렇다고 완전히 전역한 건 아니라, 군에 대한 연구는 계속하였다.
2.3.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편집]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팔켄하우젠은 보병대장의 계급으로 군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에르자츠 군단(Ersatz Corps)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로렌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었다. 첫 반년간의 공으로 1915년 8월 23일에는 푸르 르 메리트를 받았고 1916년 4월 15일에는 푸르 르 메리트에 백엽을 추가하였다. 팔켄하우젠은 연안방어상급사령부의 사령관이 되어 함부르크에서 해안선 방어에 성공하고, 루프레히트의 후임으로 제 6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비미 리지 전투에서 캐나다군에게 패배한 이후 힌덴부르크에 의해 해임당했다. 이후 1917년 5월, 팔켄하우젠은 벨기에의 총독이 되어 벨기에 학살에 한 몫을 하였다.[2]
팔켄하우젠은 전후에도 살아남아 1936년 나치 독일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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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팔켄하우젠'으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여담으로 그의 조카,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도 벨기에의 총독으로 지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그의 삼촌과는 다르게 민간인을 학살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