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트 판니스텔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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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트 판니스텔로이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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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파일:PSV 에인트호번 로고.svg

50대




뤼트 판니스텔로이의 수상 이력


파일:World Soccer.png
Player of the Year 2003
수상
파벨 네드베드
2위
뤼트 판니스텔로이
3위
라울 곤살레스



네덜란드의 축구 감독


파일:licensed-image (41).jpg

이름
뤼트 판니스텔로이
Ruud van Nistelrooy

본명
륏헤뤼스 요하너스 마르티뉘스 판니스텔로이
Rutgerus Johannes Martinus van Nistelrooij[1]
출생
1976년 7월 1일 (47세)
노르트브라반트 주 오스
국적
[[네덜란드|

네덜란드
display: none; display: 네덜란드"
행정구
]]

신체
188cm, 99kg[2]
직업
축구 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FC 덴보스 (1993~1997)
SC 헤이렌베인 (1997~1998)
PSV 에인트호번 (1998~200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1~2006)
레알 마드리드 CF (2006~2010)
함부르크 SV (2010~2011)
말라가 CF (2011~2012)
코치
PSV 에인트호번 U-17 (2013)
네덜란드 대표팀 (2014~2016)
네덜란드 대표팀 (2019~2021 / 수석 코치)
감독
PSV 에인트호번 U-19 (2016~2021)
용 PSV (2021~2022)
PSV 에인트호번 (2022~2023)
국가대표
70경기 35골[3] (네덜란드 / 1998~2011)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통산 득점
362골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5.1.3. 출전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
6. 판니스텔로이에 대한 말, 말, 말
7. 여담
7.1. 클라위버르트와의 비교



1. 개요[편집]


네덜란드축구 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에레디비시에서 두 차례의 득점왕을 차지, 말 그대로 네덜란드를 정복하고 프리미어 리그로 넘어가 한 차례의 득점왕, 레알 마드리드로 가서도 데뷔 시즌에 득점왕을 차지했다.

풀네임은 네덜란드어로 '륏헤뤼스 요하너스 마르티뉘스 판니스텔로이(Rutgerus Johannes Martinus van Nistelrooij)'로 무지막지하게 길어서 영어식으로 줄여 쓴 'Ruud van Nistelrooy(발음도 영어식으로 루드 반니스텔루이)'로 알려져 있다. 그것도 한국어 음절이 길어서인지 귀찮은 해외 축구 팬들은 '뤼트 판니스텔로이'를 아예 '반니'로 줄여쓰는 경우가 많았다. 현지에서도 이름이 길기 때문에 줄여서 부르는데 주로 부르는 별명은 van Gol(판 골), van the man(판 더 맨)이 유명하다. 유난히 긴 두상으로 인해 한국 한정으로 말니스텔로이, 줄여서 '말니' 등도 있다.

과거에는 영어식 발음인 '루드 반 니스텔루이'로 적었으나, 2006년경에 네덜란드식 표준 표기를 적용하여 '뤼트 판니스텔로이'를 쓰기로 권고하며 언론이 바뀐 표기를 따랐기 때문에 현재는 바뀐 표기가 정착되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흔히 일컫는 2000년대 4대 스트라이커의 한 축이었고, 또 그 네임 밸류에 전혀 달리지 않는 득점력을 지녔던,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스트라이커.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레전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총 150골을 넣었으며, 이 150골은 219경기에서 뽑아낸 골로, 맨유 역사상 가장 높은 득점률이라고 한다. 참고로 맨유 통산 득점 1위는 웨인 루니다.

대한민국에는 박지성과의 친분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박지성의 맨유 입단 당시에 같은 PSV 출신이기에 둘이 친해질 거라고 예상한 팬들이 많았다. 사실 박지성의 맨유 입단 이전에도 이미 맨유 소속이었던 판니스텔로이가 PSV의 훈련에 가끔씩 참가한 적이 있기 때문에 둘은 이미 구면이었다. 판니스텔로이가 이적한 후 한동안 박지성 왕따이라는 우스꽝스런 루머가 국내에 퍼지기도 했을 정도다.


2.1.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편집]


217경기 149골 24도움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에서 전전하던 시기에도 이름을 날렸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2001년 맨유에 입단한 시기부터였다. 좌측에서 긱스, 우측에서 베컴, 중앙에서 스콜스가 수시로 정교한 롱 패스를 날리던 맨유의 스타일과 딱 맞았던 판니스텔로이는 데뷔 시즌부터 EPL 개막 후 8경기 연속 득점 기록을 세우고 23골을 작렬했고, 다음 시즌에는 PL 득점왕이 되었다. 그리고 2001/02, 2002/03, 2004/05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2001/02 시즌: 49경기(선발 44경기) 36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2
29
3
23
4
챔피언스 리그
14
14
0
10
3
FA컵
2
0
2
2
0
커뮤니티 실드
1
1
0
1
0
합계
49
44
5
36
7

2002/03 시즌 프리미어 리그 우승 이후의 세 시즌은 흔히 말하는 맨유의 암흑기였다. 아스날은 2003/04 시즌 무패 우승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했으며, 주제 무리뉴 감독이 이끄는 첼시는 2004/05, 2005/06 시즌 리그를 재패했다. 허나 맨유는 로이 킨, 데이비드 베컴 등 주축 선수들과 퍼거슨 감독 간의 불화가 심화되는 등 갈등이 심각했다. 맨유에게 있어선 최악의 시즌이 계속되고 있었으니 판니스텔로이의 이러한 득점력은 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게다가 이 시기는 퍼거슨 경이 대륙 축구를 수용하던 시기라 중원 강화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판니스텔로이가 있었기 때문에 공격수는 한 명만 두고 중원을 강화한다는 복안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킹 루드' 체제로 빗대기도 했다. 이 시기 챔스에서 판니스텔로이의 득점력은 매우 뛰어났다. 특히 그 절정이던 2002/03 시즌은 단순한 득점왕 정도가 아니었다. 9경기, 681분 출장, 12골을 기록했다.

이 시즌 챔스에서 필리포 인자기, 로이 마카이, 에르난 크레스포, 라울 곤살레스, 얀 콜레르 등이 각기 1,000분 전후로 뛰며 10골에서 8골을 기록했다. 이후 선수로 바꾸면 10/11 시즌 득점왕인 리오넬 메시가 13경기 1050분 출전해서 12골을 넣었다. 아무리 반니에게도 독보적인 '커리어 하이'라지만 이 정도면 거의 탈인간적 수준이었다. 또한 04/05 시즌 조별 라운드 4차전에서는 스파르타 프라하를 상대로 혼자 4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참고로 한 경기에서 4골을 넣은 다른 선수는 다도 프르쇼, 마르코 반 바스텐, 필리포 인자기, 안드리 셰브첸코,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가 있다. 5명이 공동 1등이었으나 2012년 리오넬 메시에 의해서 공동 콩등이 되었다. 판니스텔로이 이후 EPL에서 두각을 나타낸 에레디비시 득점왕 출신 스트라이커가 없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이었지만,[4] 루이스 수아레스가 13-14 시즌 EPL 득점왕을 차지하며 오랜만에 네덜란드 리그 출신 EPL 득점왕이 탄생했다.

2002/03 시즌: 52경기(선발 50경기) 44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4
33
1
25
4
챔피언스 리그
9
8
1
12
3
FA컵
3
3
0
4
1
EFL컵
4
4
0
1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2
0
합계
52
50
2
44
8

2003/04 시즌: 44경기(선발 42경기) 30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2
31
1
20
2
챔피언스 리그
7
7
0
4
2
FA컵
4
3
1
6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44
42
2
30
4

2004/05 시즌: 27경기(선발 25경기) 16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7
16
1
6
1
챔피언스 리그
7
6
1
8
1
FA컵
3
3
0
2
4
합계
27
25
2
16
6

비록 2005/06 시즌에는 나이가 들어 폼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득점력은 죽지 않아 21골이나 집어넣어 클래스는 영원함을 보여주었다. 허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폼이 떨어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리 없었고, 결국 벤치를 달구는 일이 잦자 자연스레 불화 역시 생겨났다.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도 당시 감독인 마르코 판바스턴과 자신의 주전 기용 문제로 불화를 겪었다. 결국 2005/06 시즌과 2006 독일 월드컵이 끝난 후 레알 마드리드 CF로 훌쩍 이적했는데, 리그컵 결승에서 자신 대신 루이 사하를 퍼거슨이 기용하자[5] 퍼거슨에게 쌍욕을 하며 달려들려고 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찍혀버려 결국 팀을 떠나게 된다.[6]

여기서 한 가지 일화가 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훈련 도중 충돌이 있었는데, 이때 판니스텔로이는 호날두에게 "너네 아버지한테 가서 고자질해라."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판니스텔로이가 지칭한 아버지는 수석 코치였던 카를로스 케이로스였다. 같은 포르투갈 국적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유독 친했고, 호날두가 케이로스를 잘 따랐기 때문에 비꼰 것이다. 그런데 호날두는 그 아버지를 진짜 자신의 아버지라 알아 듣고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셨어."라고 하며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7][8] 이 대화가 언론을 통해 공개된 후 판니스텔로이는 엄청 까여야만 했다.[9]

호날두와는 불화가 꽤 심했었던 모양이다. 판니스텔로이는 호날두가 자신에게 패스와 크로스를 안 한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호날두와 도저히 같이 못 뛰겠다고 늘 투덜댔는데, 리오 퍼디난드의 증언에 따르면은 트레이닝 도중에 판니스텔로이와 호날두가 싸우는 건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여느 날처럼 호날두와 말 다툼을 하던 판니스텔로이가 호날두를 발로 찼는데, 퍼디난드는 어린 호날두를 보호하기 위해 판니스텔로이를 살짝 발로 찼고, 그러자 판니스텔로이는 퍼디난드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판니스텔로이는 다음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레알 마드리드로 쫓겨나듯 이적한다.

2005/06 시즌: 47경기(선발 39경기) 24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5
28
7
21
3
챔피언스 리그
6
6
0
1
0
FA컵
2
2
0
0
1
EFL컵
2
1
1
1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1
0
합계
47
39
8
24
4


2.1.2. 레알 마드리드 CF[편집]


96경기 64골 16도움

레알 마드리드 이적 초기에는 폼이 떨어진 모습을 보이며 비판받았으나, 조금씩 폼을 끌어 올리더니 결국 이적 첫 시즌에 25골을 터트리며 데뷔 시즌 피치치(득점왕)라는 말도 안 되는 득점력을 보여줬다.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스페인 라리가까지 3개 리그 득점왕을 석권한 것. 특히 리그 31라운드부터 최종전까지 8경기 10골을 때려 박으며 최종전까지 승점이 동일했던 FC 바르셀로나와의 겅합에 결정타를 꽂은 것이 바로 판니스텔로이였다. 특히 판니스텔로이는 해당 시즌 엘 클라시코에서만 1차전 1골, 2차전 2골을 꽂아 넣으며 팀에게 승리에 이어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2006/07 시즌: 47경기(선발 46경기) 33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37
36
1
25
2
챔피언스 리그
7
7
0
6
3
코파 델 레이
3
3
0
2
0
합계
47
46
1
33
5

2007-08 시즌에도 여전한 활약상을 보여주었으며, 이에 2008년 1월에는 레알과의 계약을 2010년까지 연장했다. 비록 3월에 발목 부상을 당하면서 한동안 결장을 하게 되지만, 5월 7일 엘 클라시코에서 교체 출전하여 복귀전에서 득점을 기록하였다. 그렇게 리그에서 24경기 16골, 모든 대회 총합 33경기 20골을 기록하며 팀의 2연속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비록 후반기에 당한 발목 부상으로 인해 출전 횟수는 줄었으나, 경기력은 여전했다.

2007/08 시즌: 33경기(선발 30경기) 20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24
22
2
16
4
챔피언스 리그
7
7
0
4
4
코파 델 레이
1
0
1
0
0
수페르코파
1
1
0
0
0
합계
33
30
3
20
8

2008-09 시즌, 12경기에 출전해 10골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이어갔으나 2008년 11월, 판니스텔로이는 관절 내시경 수술을 통해 오른쪽 무릎의 반월상 연골이 부분적으로 찢어져, 이를 복구하는 두 번째 수술 후 회복까지 6달에서 9달이 소요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아 그대로 시즌 아웃되고 잔여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2008/09 시즌: 12경기(선발 12경기) 10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6
6
0
4
2
챔피언스 리그
4
4
0
3
0
수페르코파
2
2
0
3
0
합계
12
12
0
10
2

2009년 8월 24일, 2009-10 시즌 라리가 개막전 헤레스와의 경기에서 80분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교체로 들어가 시즌 첫 라리가 경기를 치렀다. 81분에 카림 벤제마의 골을 어시스트했고, 이어서 88분에는 자신도 득점했다. 그러나 득점 도중 허벅지 부상을 당했고, 이후 6주간의 결장이 확정되었다. 결국 잦은 부상으로 인해 전력 외 자원으로 분류되었고, 판니스텔로이는 겨울 이적 시장에서 분데스리가함부르크 SV로 이적하게 된다.

2009/10 시즌: 4경기(선발 1경기) 1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1
0
1
1
1
챔피언스 리그
1
0
1
0
0
코파 델 레이
2
1
1
0
0
합계
4
1
3
1
1



2.1.3. 이후[편집]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UEFA 유로 2008 이후 은퇴했으나,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하고 싶다는 이유로 2009/10 겨울 이적시장 때 주전이 보장되는 함부르크 SV 로 이적했다. 이때 손흥민과 함께 뛰기도 하지만 결국 2010년 월드컵 엔트리에 들지 못한다.

2011년 함부르크 SV와 계약이 해지되어 자유 계약 선수가 된 그를 말라가 CF가 영입했다. 말라가에서 현역 은퇴 선언을 한다. 링크[10]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클럽뿐만 아니라 대표팀에서의 활약도 상당하다. 판니스텔로이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선수들과 비교해봐도 반니가 더 우위라는 게 중론. 로이 마카이나 너무 빨리 망한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에 비하여도 꿀리지 않는다. 클라위버르트의 전성기 시절 당시 반니, 마카이를 포함해 EPL 득점왕 출신인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 등 뛰어난 스트라이커들은 클라위버르트 한 명에게 전부 묻혔다. 그 중 클라이막스는 UEFA 유로 2000의 득점왕이었다. 근데 판니스텔로이의 전성기는 클라위버르트의 전성기와는 서로 달랐기 때문에 묻혔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애매한 게 클라위버르트는 UEFA 유로 2000 이후 하향세를 겪게 되는 반면에 판니스텔로이의 전성기는 맨유에 이적한 2001-02 시즌부터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UEFA 유로 2004 본선에서는 클라위버르트를 제치고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 자리를 확보하면서 총 4골을 넣고 대회 득점 공동 2위에 오르는 활약을 선보인다.

재밌는 점은 클라위버르트와 판니스텔로이는 1976년 7월 1일로 둘 다 생년월일이 같다는 거다. 그런데 판니스텔로이에 비하여 젊을 때부터 천재로 불렸던 클라위버르트는 너무 빨리 몰락하고, 반대로 클라위버르트가 국대에 뽑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는 한참 멀었던 판니스텔로이가 클라위버르트보다 더 성장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다만 아쉽게도 판니스텔로이는 그 명성과 나름 긴 커리어에 비해 유독 FIFA 월드컵과는 인연이 거의 없던 비운의 선수들 중 하나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당시에는 아직 여러 유망주 중 하나일 뿐이어서 뽑히지 않아서 월드컵 직후에나 국가대표 데뷔를 했고, 클럽에서 그의 최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2002 한일 월드컵 시기에는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아일랜드를 넘지 못하고 최종 예선에서 탈락하여 아예 팀 자체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때는 판니스텔로이도 키프로스, 에스토니아안도라 등 약체 팀 상대로만 양학을 하고 가장 중요한 상대였던 포르투갈과 아일랜드 상대로는 팀과 같이 삽질을 하고 침묵했다는 점에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후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드디어 대망의 월드컵 데뷔를 하게 되어 전 경기에 선발로 나와 죽음의 조였던 조별 리그에서 코트디부아르 상대로 골을 넣는 등의 활약을 했으나, 이어진 16강에서 다시 만나게 된 포르투갈 상대로 팀이 패배하여 조기에 탈락하여 총 4경기 1골이라는 다소 아쉬운 성적으로 대회를 마무리하게 됐다. 4년 후 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에는 함부르크에서 커리어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라 최종적으로 대표팀에 뽑히지 않아 결국엔 독일 월드컵이 그의 선수 커리어 중 직접 뛴 유일한 월드컵 대회가 되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이후 PSV 에인트호번 유소년 팀(네덜란드) 어시스턴트 매니저로 일하다가 신임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명에 따라 판니스텔로이가 네덜란드 국가대표 코치로 선임되며 처음 국가대표 코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

2016년 6월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코치직을 사퇴한 후 PSV의 유소년 팀 감독으로 임명될 것임이 공식 발표되었다. 그 밖에 2군 팀의 스트라이커도 지도한다고 한다.

2021년 1월, 용 PSV(PSV 에인트호번 리저브 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21년 7월에 부임한다고 한다.


3.1. PSV 에인트호번[편집]


2022년 3월 31일, PSV 에인트호번 감독으로 선임됐다. 2025년까지 계약을 맺었으며, 2022/23 시즌부터 부임할 예정이다.

14R 기준 선두 페예노르트와 3점 차이로 3위다.

성인 무대에서 에인트호번에 부임 후 첫 시즌만에 컵대회 우승을 거머쥐면서 선수들과 춤사위를 즐기는 모습이 공개되었으나, 2023년 5월 24일자로 공식 사임했다.# 사임을 결정하게 된 배경에는 구단의 지원에 지속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었다고 한다. [11]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절묘한 위치 선정,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결정력, 군더더기 없는 퍼스트 터치, 거친 수비수들을 상대로도 되려 잡아먹을 듯이 신경전을 벌이고 이를 이겨내는 투쟁심, 장신을 활용한 제공권 장악 능력에 키에 비해 순간적인 돌파 속도가 빨라 전성기에는 일단 페널티 박스 안으로 공을 넣어주면 오른발과 왼발, 머리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골을 넣어주는, 골을 넣는 능력에 있어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선수였다. 그야말로 오직 골을 넣기 위해 태어난 득점의 화신 같았던 선수. 퍼거슨은 자서전에서 반니스텔루이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표현도 사용했지만, 골결정력 면에서는 무결점 골잡이 이라고 말했다.

에레디비시 시절 십자인대를 다친 이후로는 자제하게 된 플레이지만 필요하다면 상대 수비진을 작살내는 폭발적인 드리블도 할 줄 알았다. 맨유 시절 보여준 일명 '말달리자' 골이 유명하다. 영상 은근히 더티 플레이에도 능해 상대 선수를 끊임없이 괴롭혀 멘탈을 흔들어 놓는 능력도 상당했다. #

퍼거슨은 자서전에서 판니스텔로이를 순도 100% 포처로 평가했다. # 창조적 플레이도 가능한 완성형 포워드가 아니고 후방에서부터 볼 배급이 잘 이루어져야만 활약하는 인자기와 비슷한 유형의 선수였다. 물론 인자기보다는 신체 조건과 기술이 뛰어나 한결 힘있고 유려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둘 다 피니셔 타입의 공격수였다. 처음 영입했을 때는 활동 반경이 더 넓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입하고 나니 그런 타입이 아니었고 피지컬도 별로였다고. 이는 판니스텔로이가 데뷔 시즌부터 대활약을 해왔음에도 퍼거슨이 바로 다음 시즌 디에고 포를란을 영입한 이유이기도 하다. 포를란은 판니스텔로이와 달리 활동 폭과 연계력, 드리블이 준수하고[12] 박스 밖 중거리 슛이 위협적인 선수였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반니는 순수한 포처 스타일의 포워드로, 박스 밖에서의 중거리 슛 골은 커리어 내내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 하지만 당시 맨유의 선수 구성으로는 박스 안에서 더 파괴적인 판니스텔로이가 더 적합한 선수였으며 포를란은 부진했다. 사실 박스 밖에서의 적극적인 움직임, 수비 가담 능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데, 믿기 힘들겠지만 판니스텔로이는 어릴때 미드필더(공격형)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꾸면서 플레이 스타일부터 마인드까지 완전한 스트라이커로 개조가 되어서 그렇지 어렸을때 습득한 미드필더로서의 기본기와 이해도를 어느정도 갖고 있는 선수였다. 문제는 이것을 본인이 내킬 때만 열심히 했다고 한다. 원래 길게 드리블을 하지 않는 스타일인데 풀럼해트트릭을 기록할 때 넣은 '말달리자' 골은 한참 물이 올라 있던 시기에 경기 첫 골도 넣은 상태라 골 욕심과 포텐셜이 터져서 나온 골이었다. 그리고 설사 하고자 마음 먹었어도 스태미너가 약해서 오래 할수도 없었다. 선수 개인의 폼이 절정에 달했을 때야 배제하긴 골을 너무 잘 넣어주니 배제할 수도 없었지만, 폼이 조금 하락하는 기미가 보이자 아직도 기량이 출중한데도 퍼거슨이 바로 대체하려는 모습을 보인 것도 퍼거슨이 완벽하게 선호하는 유형이 아니었던 그런 이유가 있었다.[13][14] 이렇게 제한적인 선수였지만 데이비드 베컴과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같은 크로스, 롱패스의 달인들이 늘어서 있었기에 전성기 신체능력이 더해져 커리어 최고의 활약을 할 수 있었다.

특기할만한 사항으로는 데뷔시즌에 퍼거슨 감독 때문에 득점왕을 놓친 경험이 있다. 반니는 리그 막바지 당시 앙리에게 1골차로 득점 경쟁을 앞서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리그 우승을 아스날한테 넘겨줬고, 이에 퍼거슨은 리그 최종전때 반니에게 우리가 리그 우승을 못했기 때문에 넌 골든 부츠(득점왕)에 도전할 수 없어 하면서 반니를 벤치에 내려버렸다. 결국 최종전에서 앙리가 2골을 넣어버리는 바람에 시즌 득점왕은 앙리가 차지. 어지간한 선수라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도 안이상한 상황이었지만 반니는 이에 동기부여를 받았고 그 다음 시즌에 무려 총 44골[15]을 때려박으며 리그+챔스 득점왕과, 리그 왕좌도 아스날에게서 다시 되찾아왔다. 이 같은 승부욕 덕분인지 경기가 시작되면 본인이 어떻게든 득점을 하는 것에 집중했으며, 승패보다 자기가 득점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중요시 여겼다고 한다. # 특히 득점경쟁을 하던 티에리 앙리를 엄청나게 의식했는데, 폴 스콜스의 말에 따르면 반니스텔루이는 경기 끝나고 버스에 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앙리가 득점을 했는지 안했는지" 확인 하는 것'이었고, 만약 앙리가 득점을 했다면 몹시 화를 내며 집에 가는 내내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리오 퍼디난드에 따르면 맨유가 경기를 3대1로 이기고, 반니 역시 1골을 넣은 경기 이후 탈의실에서 반니가 매우 넋이 나간 표정이 되어 있어서 무슨 일인가 하고 봤더니 앙리가 다른 경기에서 2골을 넣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퍼디난드는 "우린 방금 3대1로 이겼고, 반니 본인은 골까지 넣었는데, 이 사람 미쳤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호날두와의 불화도 호날두가 당시 혼자우도 혹은 춤날두라고 불릴 정도로 템포를 끊는 지나친 드리블을 해서 크로스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플레이 스타일부터 본인의 마인드까지 여러모로 '스트라이커' 그 자체였던 선수.[16]

본인도 어느 정도 산전수전 겪고 비교적 성격이 유해진 말년에 손흥민에게 보여준 인자한 튜터 베테랑의 모습 때문에 국내 축구 팬들에겐 덜 와닿았지만, 저런 다소 이기적인 축구관에 걸맞게 전성기에는 멘탈, 성질머리도 만만찮았던 선수였다. 수비수를 상대로 더티 플레이로 멘탈을 흔드는 수법도 즐겨썼고, 호날두를 몹시 갈구고 퍼디난드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했으며, 트로피가 걸려 있는 리그컵 결승에 자신 대신 루이 사하를 쓴 퍼거슨을 상대로 대놓고 욕을 퍼부으며 달려들려고 했던 사건은 유명했고 결국 그 사건을 계기로 맨유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래도 나이를 먹고 어느 정도 성질머리가 죽은 뒤엔 본인도 많이 후회했으며 퍼거슨에게 나중에 전화하여 진심으로 사죄했다고 한다.

레알로 이적한 이후에 말년 무렵에는 경력과 실력이 쌓이면서, 연계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유로 08이 그 백미. 비록 화려한 면모는 많이 떨어지는 포처 타입의 공격수였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발 기술이 뛰어나며 기본기도 상당한 수준이었기에 레알의 팀 컬러에 맞게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는 데에 성공했다.


5. 기록[편집]



5.1. 선수[편집]



5.1.1. 대회 기록[편집]






5.1.2. 개인 수상[편집]




5.1.3. 출전 기록[편집]


시즌
소속 구단
소속 리그
리그
FA컵
대륙 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3/94
FC 덴 보스
에이르스터 디비시
2
0
0
0
-
-
1994/95
FC 덴 보스
에이르스터 디비시
15
3
2
3
-
-
1995/96
FC 덴 보스
에이르스터 디비시
21
2
0
0
-
-
1996/97
FC 덴 보스
에이르스터 디비시
31
12
0
0
-
-
1997/98
SC 헤이렌베인
에레디비시
31
13
5
3
-
-
1998/99
PSV 에인트호번
에레디비시
34
31
5
1
7
6
1999/00
PSV 에인트호번
에레디비시
23
29
2
0
8
3
2000/01
PSV 에인트호번
에레디비시
10
2
2
3
0
0
2001/0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32
23
2+0[17]
0+0
14
10
2002/0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34
25
3+4
4+1
11
14
2003/0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32
20
4+0
6+0
7
4
2004/0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17
6
3+0
2+0
7
8
2005/0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35
21
2+2
0+1
8
2
2006/07
레알 마드리드 CF
라리가
37
25
3
2
7
6
2007/08
레알 마드리드 CF
라리가
24
16
1
0
7
4
2008/09
레알 마드리드 CF
라리가
6
4
0
0
4
3
2009/10
레알 마드리드 CF
라리가
1
1
2
0
1
0
2009/10
함부르크 SV
분데스리가
11
5
0
0
7
2
2010/11
함부르크 SV
분데스리가
25
7
1
3
0
0
2011/12
말라가 CF
라리가
28
4
4
1
0
0


5.2. 감독[편집]



5.2.1. 대회 기록[편집]




6. 판니스텔로이에 대한 말, 말, 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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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다. 그는 어떤 패스든 골로 연결시킬 수 있다.

라이언 긱스


나는 항상 같은 포지션인 판니스텔로이를 동경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스타였다.

라다멜 팔카오


내가 봤던 공격수 중 가장 파괴적인 피니셔였다.

리오 퍼디난드


판니스텔로이가 유나이티드에서 이뤘던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같은 네덜란드인으로서 정말 자랑스러웠다.

데일리 블린트


판니스텔로이의 기록을 봐라, 그는 엄청난 공격수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던 역대 공격수 중 최고다.

알렉스 퍼거슨


마치 코브라같다. 볼에 닿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든 쓴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인자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언페어. 수비수를 질리게 하는 것이 인자기라면, 짜증나게 만드는 것이 판니스텔로이다. 살짝 가르쳐주자면 폭력과 구분 가지 않을 정도의 플레이도 있다. 물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교묘하지만 말이다.

크리스티안 키부


원톱 포메이션에 있어 판니스텔로이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다.

주제 무리뉴


저와 뛰었던 선수 중 가장 마무리 능력이 최고였던 선수는 뤼트 판니스텔로이입니다.

박지성


난 그가 함부르크의 현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팀을 옮기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와 같은 클래스를 가진 선수라면 이적설에 흔들리는 게 이해할만 하다.그리고 만약 그가 떠난다면 이 모든 책임은 보드진에 있다. 만약 함부르크가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면 그의 이적 가능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레알 마드리드가 그를 원하고 있고, 영원히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세르게이 바르바레즈


내가 어렸을 때 맨유에서 뛰는 것을 본 후로 줄곧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를 화장실에서 만났을 때 그가 나에게 "우리는 너를 기다리겠다"라고 말해주었고 나는 감동해서 나도 모르게 펑펑 울어버렸다.

손흥민[18]



7. 여담[편집]


  • 한국에서는 맨유에서 뛰던 시절 박지성과의 친분으로 유명했다. 둘 다 PSV 에인트호번에서 뛴 경험이 있기도 하고, 박지성이 맨유로 이적해왔을 때 판니스텔로이가 먼저 다가가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그리고 판니스텔로이는 한국 문화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하루는 박지성과 판니스텔로이, 그리고 에드빈 판데르사르가 함께 한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김치 먹기를 시도한 판니스텔로이가 매웠는지 얼굴이 빨개져 다급히 물을 들이켰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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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배 뤼트 판니스텔로이와 대화 중인 손흥민.

파일:반니스텔로이 손흥민 트위터 발언.png

  • 함부르크에 있을 때 손흥민과 친밀한 관계를 보여줘서 눈길을 끌었다. 판니스텔로이는 "마치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시절에 나를 지도해 줄 선배들이 없어서 많은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제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도움을 손흥민에게 전해주고 싶다."라면서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는 듯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손흥민이 프리미어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로 성장하였고, 득점왕까지 차지한 것을 지켜보면서 많이 흐뭇해할지도 모른다. #


  • 박지성, 손흥민과의 친분 덕분인지 한국에서는 이미지가 좋은 선수이지만, 경기장에서는 심판의 시선 밖에서 지저분한 파울을 서슴없이 하며 다이빙, 오버액션에도 능한 치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내추럴 본 치터라고 까이기도 한다. 파트리크 비에라는 자서전에서 전성기 때 앙숙인 로이 킨도 별로 까지 않았지만 판니스텔로이는 가루가 되도록 깠다.[19][20] 다만 맨유에서 함께 뛰었고 친분이 있었던 박지성은 자서전에서 판니스텔로이에 대해 경기장 안에서는 거칠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이라고 언급하였다. 사실 세르히오 라모스, 루이스 수아레스, 디에고 코스타 등 경기장 안에서는 온갖 반칙과 기행을 저지르면서도 경기장 밖에서는 의외로 평범한 성격인 선수들이 은근히 많다.

  • 상술하였듯 본인이 골을 넣는 게 축구에서 제일 중요했던 판니스텔로이는 호날두에게 불만이 많았다. "쟤는 절대 패스를 안 해" 하면서 늘 불평했다고 한다. 물론 호날두, 판니스텔로이 합작 골들도 은근히 많았고 초반에는 사이가 괜찮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호날두의 플레이 스타일뿐만 아니라 맨유 전략 내에서 호날두의 중요도가 올라가면서 불만이 커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말년에 레알에서 다시 만나기도 했고 호날두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라고 칭찬을 했다. 또한 다른 맨유 선수들의 증언을 보면 반니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호날두가 너무 혼자 플레이하는 거에 대해서 한마디씩 했다고 한다. 잠재력이 뛰어난 건 분명하지만 개인 위주 플레이가 팀의 승리에 도움이 안 될 때가 많았고 호날두의 잠재성을 오히려 막고 있었다고. 퍼거슨도 호날두한테 팀 플레이를 하라고 많이 혼냈다고 하는데 호날두도 그럴 때마다 많이 쫄아 있었다.

  • 1980~90년대에 오리온제과에서 나온 초콜릿 캔디 중에 반니라는 제품이 있다. 지금도 팔리고 있는 제품.[21] 박지성의 팬들이 말장난을 이용해 정말로 박지성에게 이 캔디를 보냈었다.


  • 게리 네빌에 의하면 자기한테 죽빵 때리려고 한 유일한 선수였다고 한다. 네빌이 크로스를 올리려고 하는데 반니가 적극적인 움직임을 가져가지 않자 네빌이 화가 나서 "씨발 움직이라고!"라 했는데 이에 반니가 뚜껑이 열려서 경기 끝나고 라커룸에서 네빌한테 주먹질을 하려고 들었다. 팀원들이 개입하여 반니를 뜯어 말려서 일단락 됐는데 반니가 나중에 말하길 그때 발가락이 크게 부어 오를 정도로 너무 아파서 제대로 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은 네빌은 그런지 몰랐다며 미안해했고 반니는 그 경기에서 자기 경기력이 안 좋았으니 네빌이 당연히 그런 불만을 표출할 만한 상황이었다며 쿨하게 넘어갔다.


  • 위닝일레븐에서 반니스텔루이의 라이센스를 얻지 못 해 von mistelroum[22]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는데 꽤나 많은 인기를 끌었다.[23]


7.1. 클라위버르트와의 비교[편집]



파일:반니_클루이베르트.png

위에서 언급한 대로 판니스텔로이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와 많이 비교가 되었다. 나이는 물론 생일, 체격까지 같다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 후자는 초천재의 엘리트 길을 걸어온 반면 전자는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지라 인생 여정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클라위버르트는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명문 중의 명문 AFC 아약스 유스 출신[24]으로 18살의 나이에 데뷔해 25게임 출장 18골이라는 괴물 같은 활약과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밀란을 상대로 1-0 승리를 결정짓는 골을 넣은 반면, 판니스텔로이는 그때 FC 덴보스 출신으로 18살에 2부 리그 팀을 상대로 15게임 출장 3골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참고로 덴보스는 60년 가까운 클럽 역사상 1부 리그에 올라온 게 겨우 6번이고 어쩌다 올라와도 강등당하는 팀이다. 판니스텔로이가 있던 4년간 한 번도 승격한 적 없다.

나이를 감안하면 판니스텔로이도 아주 나쁜 건 아니지만, 클라위버르트는 다음해에도 15골을 넣었고 판니스텔로이는 역시 2부 리그 상대로 21게임 출장해 고작 2골을 넣었다. 또한 클라위버르트는 이해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8경기 출장 5골[25]이라는 우수한 기록을 남겼다. 한마디로 축구 신동 클라위버르트는 만 19세에 벌써 세계 최고의 축구 스타 중 한 명이었다는 말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만 해도 클라위버르트는 22살의 나이에 벌써 네덜란드 국대의 주전 골잡이였지만, 판니스텔로이는 그냥 집에서 TV로 보아야만 했다. 이후 클라위버르트는 아약스에서 AC 밀란[26]FC 바르셀로나라는 그야말로 명문클럽들만 차근차근 밟아갔지만, 판니스텔로이는 SC 헤이렌베인PSV 에인트호번을 거치고서야 맨유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위버르트는 그 기량이 너무 빨리 시들었다. 물론 FC 바르셀로나에서 리그에서만 90골을 넣은 클라위버르트가 실패한 선수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클라위버르트도 전성기 때는 분명 월드 클래스 소리를 들을 만한 선수였다. 그러나 바르샤에서 03-04 시즌부터 골골대다 결국 04-05 시즌 사무엘 에투의 영입으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로 이적 후 빠르게 몰락한 것과 대조적으로, 판니스텔로이는 09-10 시즌까지도 세계 최고 레벨의 팀에서 좋은 폼을 유지했다.

결론은 같은 날 태어난 천재가 있었지만, 최후에 웃은 자는 판니스텔로이였다. 출장/골로 본 최종 커리어는, 클라위버르트는 리그 343경기 149골, 국제 대회 79경기 40골, 판니스텔로이는 리그 449경기 249골, 국제 대회 70경기 35골. 보다시피 리그 커리어에서 100골이나 차이가 나며, 출장 경기 수도 100경기 이상 차이 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05:45:55에 나무위키 뤼트 판니스텔로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Rutgerus Johannes Martinus "Ruud" van Nistelrooij ˈryt fɑn ˈnɪstəlroːi̯[2] 선수 시절 87kg[3] 대표팀 역대 득점 공동 7위.[4] 판니스텔로이 이후 네덜란드를 제패한 마테야 케즈만은 EPL에서 완벽하게 망했고, 디르크 카윗은 스타일을 바꾸고 나서야 정착할 수 있었다.[5] 정확히는 교체로라도 출전시켜줄것 것을 약속했으나 끝끝내 출전시켜주지 않은 것에 대해 폭발한것. 실제로 이때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맨유가 골을 넣을때마다 몸푸는 경기장 뒤쪽에서 계속해서 환호하는 반니를 볼 수 있다.[6] 시간이 지나 철이 좀 든 반니는 이를 후회하며 퍼거슨에게 전화해서 사죄했다고 한다.[7] 당시 호날두는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8] 이 부분은 사람마다 증언이 다르다. 대부분의 목격자들이 호날두가 그 자리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울음을 터뜨렸다고 이야기했으나, 퍼거슨 감독의 자서전에는 호날두가 판니스텔로이에게 화가 나서 덤벼들었다고 쓰여 있다.[9] 물론 후에 "호날두는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라는 드립을 쳤던 주제 무리뉴가 이 당시 판니스텔로이보다 훨씬 많이 까였다.[10] 4골에 그친 성적 탓이 있었다.[11] 특히 본인이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 들을 겨울에 모조리 팔아버렸다. 실제로 그 기점으로 팀이 부진하기 시작하기도 했다.[12] 필리포 인자기 수준으로 나쁘진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는 UEFA 유로 2008 프랑스전에서 판니-아르연 로번-로빈 반 페르시의 마무리로 이어지는 득점에서 판니는 마르세유 턴 패스로 왼쪽 측면을 하프라인에서부터 파고 드는 로번에게 아주 효과적으로 연결시켰다. 맨유 시절에도 여러 고난도 개인기를 성공시키기도 했다.[13] 반니가 나간 후 루니, 테베즈, 호날두, 긱스, 나니, 박지성 같은 선수들이 끊임없이 스위칭 하며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준 공격진이 퍼거슨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구상에 가까웠다.[14] 게리 네빌 역시 자신은 반니를 좋아했지만, 맨유에는 과거의 드와이트 콜과 요크, 이후의 루니와 테베즈 같은 역습하고 상대를 압박하는 스타일의 선수들이 필요했었다며 반니를 보낸 변화에 대해 평가했었다. 반니스텔루이는 드문드문 보는 A매치 및 박지성으로 인해 해외축구 시청자들이 크게 늘어나던 초창기 맨유에서 잠깐 모습을 보이다 레알로 이적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점에서의 임팩트만 크게 기억되어 국내에서는 이상하게 왕성한 활동량을 가진 컴플리트 공격수처럼 언급되는 경우가 있으나, 퍼거슨의 언급도 그렇고 더 다이나믹한 플레이 스타일을 위해선 변화가 필요했었다는 네빌 등의 언급도 그렇고 포쳐 스타일의 선수였다는게 옳다.[15] 맨유에서 이보다 더 높은 기록을 보유한 선수는 63-64 시즌의 데니스 로밖에 없다.[16] 지도자가 된 지금은 이때의 골 집착이 좀 과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만약에 현재 코치의 모습으로 과거로 돌아간다면 선수 시절의 판니스텔로이에게 아무리 너가 골을 못 넣었어도 팀이 이겼는데 적당히 좀 하라고 한마디 할 것이라고...[17] FA컵 + 리그컵[18] 실제로, 손흥민은 루키 시절에 판니스텔로이가 조언을 해주면서 멘토로서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판니스텔로이도 "손흥민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슈퍼스타의 재목이 있다"라고 칭찬을 해주기도 했다.[19] 대표적으로 0304시즌 반니의 퇴장 유도에 당한것[20] 이 경기는 결국 후반 추가시간에 반니가 PK를 실축하며 아스날의 리그 무패우승으로 이어졌지만 다음 시즌 루니의 헐리웃으로 인해 반니가 PK 결승골을 넣으며 결국 아스날의 리그 49경기 무패행진이 마감되었다[21] 2013년 시점에서 팔리는 반니는 초콜릿이 들어간 캐러멜이지만, 초기에는 반투명 캔디였다.[22] 본 미스텔룸[23] PES 2에서는 oranges038(...)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었고 PES 3, 4, 5, 2011, 2013에서 "본 미스텔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24] 90년대 초의 아약스는 UEFA컵 우승(90-91),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94-95)을 차지한, 유럽 최고의 명문 팀 중 하나였다. 특히 아약스 유스는 당시로서는 유럽 제일의 유스 시스템을 갖췄다고 평가받았다.[25] 이게 클라위버르트가 프로 데뷔한 지 두 번째 시즌의 기록이다.[26] AC 밀란에서는 26경기 7골을 기록한다. 결국 조지 웨아, 로베르토 바조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