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독립 운동

덤프버전 :

琉球独立運動[신자체]
Ryukyu independence movement

1. 개요
2. 역사
2.3. 일본 반환 이후
3. 독립 구상
3.1. 독립국
3.2. 자치 운동
4. 일본 정부의 반응
5. 독립운동의 난점
5.1. 국제정치적 관점
5.2. 경제적 문제
5.3. 오키나와 내부의 의사 불일치
6. 중국의 간섭
7.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파일:류큐 왕국 국기.svg
파일:삼성천양기.svg
파일:오키나와 기.svg
류큐 왕국 국기
삼성천양기[1]
오키나와 기[2][3]
류큐 독립 운동은 옛 류큐 왕국이었던 류큐 열도를 독립국으로 만들자는 운동이다.

운동의 주요 명분으로는 일본에게 강점되기 이전에는 독립국이었으며, 일본 정부의 대우도 영 좋지 않고, 관광업 외의 산업이 미숙하다는 점이 있다.


2. 역사[편집]



2.1. 일본 제국 치하[편집]


19세기에 메이지 시기 류큐가 1872년 일본이 강제로 실시한 제1차 류큐 처분에 의해 일본 국내의 일개 번으로 전락하고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은 '류큐 번왕'(琉球藩王)이 돼 그 지역의 영주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1879년 제2차 류큐 처분에 의해 일본에 편입되면서 류큐 왕국은 완전히 끝이 나고 마지막 왕인 쇼 타이(尚泰)는 일본 본토로 보내져서 일개 후작이 되었다.[4] 이 시기 즈음해서 류큐의 지배층 중에 청나라로 탈출하여 류큐의 독립을 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을 탈청인(脫清人)[5]이라고 한다. 물론 그들은 기대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류큐 열도에서는 류큐 왕국의 부활을 추구하는 소위 '완고당(頑固黨)'과 류큐 왕국의 소멸을 인정하고 일본화를 추진하는 '개화당(開化黨)'이 대립했다. 이들은 청일전쟁 때 각각 청나라와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기도 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완고당의 세력은 쇠퇴하고 말았다. 대신 일본의 오키나와 현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오키나와 현에 자치권을 두어 류큐 왕족인 쇼 씨(尚氏) 가문이 통치자로 복귀하게 해달라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 운동을 공동회 운동(公同會運動) 또는 복번 운동(復藩運動)이라고 하며,[6] 주도자는 쇼 타이의 차남 쇼 인(尚寅) 남작과 사남 쇼 준(尚順) 남작 형제였다. 일본은 당연하게도 이들의 청원을 거부해서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로 조직적인 류큐 독립 운동은 사그라들었다.


2.2. 미국 통치기[편집]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키고 승리한 미국은 류큐를 일본의 압제를 받아 합병된 지역으로 간주하여 북위 30도 이남의 류큐 열도와 다이토 제도를 미국이 통치하는 '류큐' 지역으로 편성시켰다. 신탁통치 기간을 거쳐 류큐를 점진적으로 독립국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아마미 군도는 류큐 왕국의 영토였으나 1609년 일본의 사츠마 번에 빼앗겼다. 그 후로 류큐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형식상으로는 류큐 왕국의 영토이되 실제로는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래서 현재 이곳은 오키나와 현이 아닌 가고시마 현 소속이다. 토카라 열도는 아마미 군도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가면 있는 도서군(島嶼群)이다. 역사적으로 류큐 왕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데 미국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류큐 지역의 일부로 삼았다.

오랫동안 류큐 왕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아마미 군도와, 애초에 류큐 왕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토카라 열도는 일본 복귀 운동을 전개했다. 아마미 군도의 공산 세력은 처음에 독립국인 아마미 인민 공화국의 건국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본 복귀 여론이 거센 것을 확인한 뒤 목표를 바꿔 그들도 일본 복귀 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미국은 '여기에 대단한 미군 시설을 둔 것도 아닌데 주민들 반발에 시달리면서까지 억지로 통치할 필요가 있겠나' 판단하게 됐다. 그래서 토카라 열도는 1952년에, 아마미 군도는 1953년에 각각 일본에 반환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마미 군도 문서를 참고할 것.

이때부터 미국이 설정한 '류큐' 지역은 1972년까지 오키나와현 단독으로 구성되었다. 실제로 1972년 이전까지는 도쿄나 오사카 등에서 오키나와현에 갈 때 여권이 필요했다. 미국의 통치 하에서 제한된 자치가 실시되었다. 처음에 주민들 사이에서는 주일미군... 아니, 주류(駐琉)미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하는 모습도 보였고, 그런 분위기 하에서 독립 운동도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점차 주둔 미군과의 갈등이 벌어져서 주민들의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었고 '평화 헌법 하의 일본으로 복귀하자'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제 일본은 군대가 없이 자위대만 있는 나라가 되어 다시는 전쟁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미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던 모양. 그래서 독립 운동은 세력이 약해지고 일본 복귀 운동이 강해진다. 결국 미국은 당초 류큐를 독립국으로 만들려던 계획을 단념하고 1972년 일본에 반환하였다. 1972년 이후로는 오키나와는 일본 국내 취급을 받기 시작했고 다른 국내선들과 똑같이 여권도 필요 없어졌다.

그러나 막상 일본에 반환되자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주일미군의 대부분이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주민들이 본토에 비해 차별받는 등, 아직도 문제가 존재하는 상태이다.


2.3. 일본 반환 이후[편집]


지금까지도 독립 운동이 이어지고는 있으나 세력이 아주 약해졌다.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 보니 70년대에는 이곳에 있는 한 구장에 게양된 일장기를 내려 화형식을 벌이자 구장에 있던 다른 관중들이 환호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일본 본토로 들어간 류큐인들이 내지인들에게 차별을 받자 독립을 요구하는 주장과 함께 테러를 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1975년 당시 황태자 아키히토가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화염병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7] 게다가 냉전의 종식으로 미군이 주둔할 정당성이 줄었기 때문에, 70년대 이후 잠수를 탔던 구 류큐독립당이 이름을 바꾼 가리유시 클럽이 지방 선거에 등장할 정도이다. 다만 현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아니다.

2005년 설문조사를 보면 1,029명의 오키나와인 중 40.6%는 자신들이 오키나와인이며, 일본인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답했다. 21%는 그들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36%는 일본인과 오키나와인 양쪽 모두 다 해당된다고 답했다. 이는 언어나 민족의 기원으로 봤을 때 일본인과는 친척 관계에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원인인 듯 하다.

오키나와 주민의 독립 문제 설문.[8]
연도
2005
2006
2007
독립 필요
24.9%
23.9%
20.6%
독립 불필요
58.7%
65.4%
64.7%
주민들이 결정해야
2.8%
1.7%
0.8%
그 외
13.6%
9.1%
13.0%

일본사 과목에서는 류큐사를 지방사 정도로만 짧게 다루고 있다. 기타 인문사회 교육 과정에서도 본토의 교육 과정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일수록 독립 의식이 약해지고 있다.

2013년 5월 15일,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령이 된지 41년이 되는 날에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라는 일종의 독립(문제를 논의하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목표로 '류큐자치연방공화국'의 건설을 내걸었다. '복귀' 이래 4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오키나와 차별, 미군기지 강요라는 구도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의 절정인 셈이다. 물론 오키나와가 실제로 독립을 이룰 가능성은 낮으나 오키나와의 분리-독립 가능성을 공론화하여 오키나와에 강요되고 있는 무수한 미군 기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와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미군 기지 문제에 대해) 오키나와만 분발해 봤자 (일본 정부와 미국의 전향적 자세 없이는) 소용이 없다"는 식으로 확산되고 있는 패배주의 풍조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한편 단체 명칭에 민족독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한데, 공식적으로는 철폐되었다지만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 열도 전체의 주민은 모두 '일본인'이라는 기치 하에 통합된 단일민족으로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체 명칭에 '민족독립'이라고 명기한 것은 오키나와 주민이 '일본인'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으로, 자결권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라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 된다.

린 콴중(林 泉忠)는 홍콩, 대만, 오키나와는 '변방 동아시아'라고 말했다. 이것은 정체성이 복합적이고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이다. '라는 질문에 홍콩에서는 '홍콩인이면서 중국인', 대만에서는 '대만인이면서 중국인',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인이면서 일본인'이라는 복수응답을 볼 수 있고, 정치적 상황 등에 따라 비율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3. 독립 구상[편집]



3.1. 독립국[편집]


류큐 독립 지지자들은 대개 독립한 뒤 '비무장한 평화의 섬'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뒤 일본인(오키나와 주민 포함)들은 막연하게 군대=전쟁이라고 인식해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들이 있다. 일본 열도가 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오키나와현은 전쟁의 피해를 심하게 입은 지역이고[9], 주둔 주일미군 병사들의 일탈 행위 등으로 인해 군사력을 갖추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다.


3.2. 자치 운동[편집]


한편 독립보다는 오키나와 또는 류큐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자는 제안도 있긴 하다. 물론 독립론자 중에서도 독립 전 단계로서 자치를 주장하는 경우는 흔하다. 자치를 독립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삼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강력한 자치권을 보장해 줌으로써 독립 찬성 여론을 완화시키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자치권 확대를 통해 오키나와/류큐 주민들의 니즈를 잘 반영하고 피드백도 원활하게 이뤄진다면 굳이 어렵게 독립할 필요가 있느냐는 여론을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10]민주당은 '오키나와 비전'#이라고 명명한 정책안에서 일국양제까지 거론한 바 있다. 또 일본에서는 현재의 도도부현을 대대적으로 뜯어 고쳐서 고도의 지방자치권을 부여한 도주제(道州制)로 바꾸자는 논의가 수십 년 동안 있어 왔는데, 오키나와/류큐 자치와 관련하여서도 자주 거론되고 있다.

자치권 확대론자들이 제주특별자치도 사례를 참고하여 오키나와/류큐에 적용할 수 있을까 연구하는 경우도 있다. #1, #2, #3. 사실 제주도(道)를 제주특별자치도로 바꾸는 것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반대로 오키나와현을 비롯한 해외 여러 곳의 자치 확대 논의들과 실제 사례들을 참고했다.


4. 일본 정부의 반응[편집]


일본 정부는 독립 운동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반응을 보인 바는 없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일본 중앙정계에서 오키나와에 대한 큰 폭의 자치권 이양을 종종 논하는데 이를 독립 운동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응으로 볼 수도 있다.


5. 독립운동의 난점[편집]



5.1. 국제정치적 관점[편집]


현실적으로 오키나와가 독립하기 힘든 것은 아시아 북단과 남단, 그리고 대륙과 해양의 중간이라는 절묘한 위치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면 전투기나 전함 등을 통해 동아시아 어느 곳이든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는 한반도의 한국, 북한과도 유사한데 한국, 북한보다도 훨씬 인구가 작고 영토도 작은 오키나와가 독립하게 되면 동아시아 초약소국이 되어 동아시아 군사 요충지를 점하고자 하는 타국의 간섭이 엄청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오키나와는 전후 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세력권이 되었는데, 만약 류큐가 일본에서 독립한다면 중국이 역사적 공통점 운운하며 세력을 뻗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예상에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 근거도 있다. 언론의 자유가 없다시피 한 중국에서는 가끔씩 류큐 독립 운동을 옹호하는 듯한 언론 기사가 나기도 하는데, 2012년 이후 중국 언론에서는 류큐 독립을 지지한다는 말이나 류큐는 중국의 일부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11] 류큐 독립을 외치는 자들도, 자신들이 만든 나라가 중국으로부터 이리저리 간섭당하다가 결국에 중국에 흡수합병 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때 현지사 선거에 출마 선언을 했던 오오시로 히로시 전 오키나와 변호사회 회장이 "독립 후에 중국, 대만, 한국 등의 군대를 끌어들이겠다"고 말했다가 비웃음만 받은 적이 있다. 독립 여론의 핵심 중 하나가 미군기지 문제이다 보니, 자위대와 미군을 먼저 제거하고 타국 안보를 신경써줄 사정이 아닌 대만과 한국도 제외하면 주변국 중에는 중국 밖에 의지할 안보 동맹이 없는데, 오키나와 주민들도 그 중국이 일본이나 미국보다 믿을 만한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는다.

중국 내에서 일부러 류큐 독립을 부르짖자 일본의 우파 측에서는 오키나와 현 내의 류큐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의 사주를 받았다고 몰아붙이기도 한다.[12]


5.2. 경제적 문제[편집]


오키나와는 일본 중앙정부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오키나와현 전체 재정에서 중앙정부 지원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57.6%나 되어 전국 평균의 1.57배, 전국 최대 규모이다. 즉 오키나와는 재정자립도가 떨어져서 현실적으로 중앙정부에서 내려오는 돈 없이 자체적으로 예산을 꾸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주일미군기지 유지의 대가로 편성, 지원 중인 연간 한화 2~3조원 규모의 오키나와 특별진흥예산을 무시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류큐가 재독립한다 해도 인구 150만 규모의 소국이 미국에 대해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일 뿐더러, 굳이 중국이 아니더라도 대규모 군사력을 갖출 수 없는 류큐의 현실을 감안할 때 여러가지 안보 문제에 대응해 미군의 주둔은 필연적인 만큼 예산 지원이라도 받아내는 쪽이 훨씬 이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현의 GRDP는 한화 40~50조원 정도이므로, 한화 3조원의 예산은 얼마든지 국가의 존립을 좌우할 수도 있는 문제다.

오키나와 지역의 주요 산업인 관광업 측면에서도 독립은 문제가 된다. 일본인들의 입국 문제부터 시작해서[13] 항공편도 국내선에서 국제선으로 변경되는 등[14] 불리해지는 사안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일본은 비자 발급에 매우 깐깐한 나라라서 류큐를 개발도상국으로 지정할지, 선진국으로 지정할지에 따라 류큐 국민의 일본 방문 자체가 엄청나게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학업이나 경제활동 등으로 일본 본토와의 연계를 끊을 수 없는 현실이 오키나와 주민들이 일본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2021년 10월, 프랑스 군사학교 전략연구소(IRSEM)는 중국이 잠재적 적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류큐 독립과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의 독립운동을 부추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에게 오키나와는 '자위대와 주일미군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했다.

5.3. 오키나와 내부의 의사 불일치[편집]


한편 독립론자들이 주장하는 류큐 자치 지역에는 현재 가고시마현 관할인, 류큐 왕국의 옛 영토인 아마미 군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마미 군도 주민들이 류큐 자치 지역에 편입되는 것에 얼마나 동의할지가 회의적이라는 문제가 있다. 아마미는 류큐 왕국 이전부터 오키나와 본도와 대립한 반독립적 피정복지로써 사츠마 침공 이후 일본 본토로 편입된 별개의 지역인데다가 2차 대전 직후 잠시 미국에 의해 류큐의 일부로 묶여서 받은 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류큐 독립이 "모든 류큐인들의 총의를 대변하는가?"라는 문제도 남아 있다. 특히 사키시마 지역은 어차피 류큐 왕국 시대에도 피정복 주변부로서 착취의 대상이었을 뿐이며 주변부로서의 처지는 이들의 국적이 류큐이든 일본이든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15] 심지어 사키시마 지역은 오키나와 본토와 언어도 안 통하기 때문에[16] 오히려 표준일본어로 의사소통 하는 게 편할 지경이며 실제로도 이들 지역의 토착어는 이미 표준일본어로 거의 대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설령 오키나와 본토의 주민들은 어찌어찌 류큐 독립에 찬성하는 여론이 형성된다 해도 사키시마 지역은 오히려 류큐에서 이탈해 일본의 월경지로라도 남고자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독립국 류큐 정부에서 새롭게 오키나와 중부언어에 기초한 '표준 류큐어'를 제정해 보급하려 든다면 이것도 사키시마 주민들 입장에서는 일본 제국 못지않은 폭거에 해당한다. 정말 독립이 실현된다면 영어와 지역 언어들을 공용어로 정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17] 힌디어와 지역언어들을 복수공용어로 정한 인도처럼, 일본어와 지역 언어들을 복수공용어로 정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6. 중국의 간섭[편집]


중국에는 류큐가 일본이 아닌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중국에는 '중화민족 류큐 특별자치구 준비위원회(中华民族琉球特别自治区筹备委员会)'라는 단체도 존재하며, 오키나와 주민은 중화민족의 동포라는 주장을 담은 의견광고를 신문 등 언론에 게재하고 있다.중국에서 류큐 독립을 지지하는 학자 당순풍(唐淳风)은 원래 류큐인은 중화민족이며 중국어로 복건성 방언을 사용했지만, 절벽에서 뛰어내리도록 강요하는 일본의 잔인한 방법으로 강제로 동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중화민족의 개념은 '중화민족이 사는 땅은 하나의 국가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는 생각 아래 영토 문제와 함께 이야기되기도 한다. 이런 사상을 대 중화주의라고 한다.

2016년 공안조사청은 중국이 오키나와의 일본으로부터의 분리운동을 지원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중국은 대학 및 연구센터를 통해 오키나와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집단과 연계되어 있다고 한다.

2020년 8월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중국은 일본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자금 조달을 통해 오키나와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고, 오키나와 신문에 영향을 미쳐 오키나와의 독립을 추진하고, 미군을 배제하는 등 숨은 경로가 있다"고 정리했다.

2021년 10월, 프랑스 군사학교 전략연구소(IRSEM)는 중국이 잠재적 적을 약화시키기 위해 류큐 독립과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의 독립운동을 부추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에게 오키나와는 '자위대와 주일미군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본에서는 홍콩 우산운동 때 태어난 말, '오늘 홍콩, 내일 대만'이 인용되어 '오늘 홍콩, 내일 대만, 모레 오키나와'라는 말이 태어났다.
2013년 5월 8일 조사에서 오키나와 현민은 89.0%가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보다 중국에 귀속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7. 같이 보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04:51:03에 나무위키 류큐 독립 운동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신자체] [1] 일부 류큐 독립론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류큐 공화국의 국기는 삼성천양기(三星天洋旗)다. 말 그대로 세 별, 하늘, 대양을 그린 깃발이다. 하늘색과 파란색 바탕은 각각 하늘과 대양을 그려 대자연을 상징하고, 흰 별은 도덕과 이성을, 붉은 별은 자랑과 정열을, 노란 별은 평화와 번영을 나타낸다고 한다. 1968년에 제정되었다. 구 류큐독립당→현 가리유시 클럽의 당기(黨旗)이기도 하다. 다만 ConIFA에서는 류큐 대표팀이 구 류큐 왕국 국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다른 사례들도 보이기 때문에, 류큐 독립 운동 지지자들이 모두 삼성천양기를 류큐의 국기로 삼는 것을 지지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2] 오키나와 기는 1950년 오키나와 민정부(沖縄民政府)에서 오키나와를 상징하는 깃발로 제정한 것으로 류큐 기라고도 한다. 파란색은 평화, 흰색은 자유, 빨간색은 열성, 별은 희망을 상징한다. 미군정은 류큐 통합정부가 들어선 후 결정하겠다고 했으나, 이후 류큐정부가 이 깃발을 승계하지 않으면서 흐지부지되었다.[3]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국기와 상당히 흡사하다.[4] 조선 왕실이 무려 왕공족이라는 별도 지위를 부여받는 것과 비교해 보면 류큐에 대한 일본의 취급을 알 수 있다.[5] 청나라 이탈한 사람이라는 뜻. 맥락을 무시하고 해석하면 한문의 모호한 문법 구조 때문에 청나라 이탈한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표현이지만, 이 맥락에서는 청나라 이탈한 (류큐) 사람을 의미하니 주의해야 한다.[6] 즉 제1차 류큐 처분 후의 류큐 번왕 체제로 복구시켜 달라고 요구한 운동이다. 완전 독립은 불가능해 보이니 그건 포기하고 전개한 자치 운동인 셈.[7] 당시 히메유리 학도대를 기념한 히메유리의 탑에 방문했다가 그 주변에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화염병 투척을 당했다. 이를 히메유리의 탑 사건이라고 한다.[8] 임천충(林泉忠)「오키나와 주민의 정체성 조사(2005~2007)」『정책과학・국제관계논집』제9호, 2009년3월, 105-147장. 임천충은 중국계 영국인 국제정치학자로 조사 당시 류큐대학 준교수였다.[9]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는 미군이 상륙하느라고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군과 싸워 양측이 엄청난 피해를 냈고, 일본군의 옥쇄 강요로 인해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단 학살 자살 등도 많았다.[10] 그래서 영국에서는 1999년에 스코틀랜드 자치를 도입하기 전에 자치가 독립을 조장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독립론을 효과적으로 무마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당시 토니 블레어 내각은 자치를 추진하면서 후자를 역설했는데 정말 그 말이 맞았는지는 앞으로 수십 년 간 스코틀랜드 현지 여론의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11] 한편 2차 대전 말기 미국은 전후 중화민국에 류큐를 '반환'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권했지만 장제스가 사양했다고 한다. #[12] 부론손의 만화 BEGIN(만화)이 이런 음모론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13] 독립한 류큐가 일본과 무비자 협정을 맺는다 해도 여권 제시 등 이전에 없던 입국 절차가 추가되는 순간 오키나와의 매력이 크게 감소하며 한국(특히 제주도), 중국, 대만, 홍콩 등의 동북아 역내 주요 국가들과 동일한 입장에서 정면으로 승부해야 한다. 그나마 언어 메리트가 있기야 하지만 일본 국내 관광지들에게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14] 단순히 항공편의 지위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류큐 정부가 독립국으로서 일본 정부 및 국제항공기구와 항공운항 관련 각종 합의를 처음부터 다시 체결해야 한다.[15] 이 때문에 이들 지역은 오히려 류큐처분을 반길 정도였다.[16] 슈리-나하어와 미야코어의 차이가 한국표준어-제주어의 차이보다 심할 지경이다.[17] 표준 류큐어를 사키시마에 강요한다는 것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보어인들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흑인들의 언어를 공용어로 인정하지 않고 아프리칸스어만 강요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